방정식의 역사와 일화
2+x=5, 2x-5=3과 같은 식을 방정식이라고 합니다. 방정식은 중학교에서부터 배우는 내용으로 수학에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1859년에 이선란과 영국에서 온 선교사 위열아력이 Equation을 방정식이라고 번역하면서 이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지만, 방정(方程)이라는 말은 2천여 년 전인 중국 한나라 때의 수학책인 구장산술에 이미 등장하고 있으니, 동양에서든 서양에서든 방정식의 역사는 수학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방정식의 풀이방법이 어떻게 발달해 왔는지를 알아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입니다.
기원전 1650년경의 이집트 린드 파피루스에는 11개의 일차방정식 문제가 등장합니다. ‘어떤 수에 그 수의 1/7을 더하면 24가 된다’는 문제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이 문제는 ‘x+1/7∙x=24’와 같은 일차방정식이 되는데, 이러한 방정식의 풀이는 지금의 풀이방법과 다릅니다. 아메스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우선 계산하기 쉽도록 x=7이라고 가정했습니다. 그러면 ‘x+1/7∙x=8’이 됩니다. 24는 8의 3배이므로, 어떤 수는 임시로 생각했던 7의 3배, 즉 21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방법은 고대 이집트에서뿐만 아니라 그 後 유럽에서도 꽤 사용되었던 방법입니다.
중학교 3학년에서 배우는 이차방정식은 이미 고대 바빌로니아에서도 등장합니다. 240년에서 330년경까지 살았던 그리스의 수학자 디오판투스는 도형을 이용하지 않고 기호를 사용하여 이차방정식을 푸는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이차방정식은 두 개의 답을 가집니다. 그러나 디오판투스 시대에는 그런 사실을 모르거나 혹은 징정할 수 없었습니다. 디오판투스 역시 양수인 답이 두 개 나오면 큰 것만을 답으로 인정했고, 또 음수이거나 무리수인 답은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디오판투스는 지금과 같이 일반적인 이차방정식의 풀이방법을 제시하지는 못했습니다. 어쨌든, 디오판투스는 방정식을 좋아해서 디오판투스의 비석에는 아래와 같은 글이 쓰여 있습니다. 이 비석의 글은 훌륭한 일차방정식 문제가 됩니다.
아아, 위대한 사람이여! 그 생애의 1/6을 어린이로 보냈고, 1/12의 세월이 지난 후에는 뺨에 수염이 자랐고, 그 後 1/7의 세월이 지나서 결혼을 했다. 결혼한 지 5년이 되어서 아들을 낳았다. 아아, 불쌍한 자식이여! 아버지 생애의 반에 세상을 떠나다니…. 디오판투스는 그 슬픔의 4년 후에 생애를 마감했다.
1/6x+1/12x+1/7x+5+1/2x+4=x
X=84
인도인들은 음수나 무리수도 이차방정식의 답으로 인정했으며, 이차방정식은 두 개의 근을 가진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인도인들은 방정식을 풀 때 ‘거꾸로 생각하기’ 방법을 사용하곤 했습니다. 아라비아의 알콰리즈미는 이항과 동류향 정리방법을 이용하여 이차방정식을 풀었는데, 이것은 인도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알콰리즈미의 독창적인 생각인 것 같습니다.
3차 방정식의 풀이법의 발달에는 불쌍한 수학자 타르탈리아와 사기꾼 수학자 카르다노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리스 시대에 이미 아르키메데스가 3차 방정식의 풀이법에 대해서 연구한 바 있으며, 1515년경에 페로라는 수학자가 특별한 3차 방정식의 풀이법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타르탈리아가 3차 방정식의 풀이법을 발견했다고 주장했으며, 타르탈리아와 페로의 제자인 피어가 공개시합을 가졌습니다. 시합결과 타르탈리아가 완전한 승리를 거두어 그의 명성이 자자하게 되었습니다. 1500년경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타르탈리아는 원래 이름이 폰타나(Nicolo Fontana)입니다. 타르탈리아가 6살쯤 되었을 때 그가 살던 브레시아라는 마을에 프랑스군이 침입했습니다. 그 때 타르탈리아는 아버지의 품에 안겨 九死一生으로 생명을 건졌으나 머리가 깨지고 턱이 갈라지는 불행을 겪었고 그 상처로 말을 더듬게 되었습니다. 타르탈리아라는 이름은 ‘말더듬이’라는 그의 별명입니다. 타르탈리아의 어머니는 아들을 보름 동안 학교에 보냈는데 타르탈리아는 그 때 습자본 하나를 훔쳐 그것을 가지고 읽고 쓰는 법을 독학으로 공부했다고 합니다. 종이를 살 돈이 없어서 공동묘지의 묘비에 돌멩이로 글을 쓰면서 공부했다고 하니, 타르탈리아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행복하게 공부한 셈인가? 그런 피나는 노력 끝에 30살이 되기도 전에 베니스의 수학교수가 되었으니, 우리가 본받을만한 인물이라 하겠습니다.
타르탈리아가 유명해지자 카르다노(Girolamo Cardano)라는 수학자가 타르탈리아에게 와서 3차 방정식을 푸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간청했습니다. 타르탈리아는 카르다노의 간청에 못 이겨 ‘비밀을 지키겠다’는 맹세를 받고 3차 방정식을 푸는 중요한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카르다노는 1545년에 ‘위대한 술법’이라는 책을 출간하면서 타르탈리아의 3차 방정식의 풀이법을 자신의 것인 양 발표해 버렸습니다. 화가 난 타르탈리아가 항의했지만 소용없었고, 그래서 타르탈리아와 4차 방정식의 풀이법을 발견한 카르다노의 제자인 페라리와 논쟁했으나 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後 타르탈리아는 시름시름 앓다가 1557년경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카르다노는 1501년에 파비아(Pavia)에서 변호사의 사생아로 태어나 의사의 직업을 갖고 수학을 연구하고, 수학을 이용하여 주사위 도박에서 많은 돈을 벌기도 했습니다. 카르다노는 또 뛰어난 점성가가 되기도 했는데, 1576년 자살하게 됩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카르다노는 별점으로 자신의 죽음을 예언했는데, 죽음의 날에 죽지 않게 되자 자살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모두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카르다노가 뛰어나고 多才多能 했던 것은 분명하며, 확률 등 수학의 발달에 기여한 바도 큽니다.
그 후 5차 이상의 방정식의 풀이방법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었으며, 아벨과 갈루아 같은 불운한 천재 수학자들이 그러한 발전에 기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방정식은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수학자들의 노력에 의해 발전해 온 것이며, 많은 수학자들의 기쁨과 불행과 어려움이 녹아 있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