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이후
이성주의와 과학주의가 빚어낸 산업 자본주의가 위기를 맞았지만 유럽 사회는 여전히 과학과 산업 발달이 인류의 생활을 향상시키고 행복을 가져다 준다고 믿었다. 표면상으로는 유럽의 시민들은 카메리를 들고 기념 사진을 찍으러 다녔고, 자동차 경주나 새로 등장한 비행기를 화제로 삼았다. 파리에는 우람한 철조 에펠탑이 하늘을 향해 솟아 오르고, 땅밑에는 지하철도를 건설하였다. 시민들은 나날이 발전해가는 기계 문명을 경이롭게 바라보았고, 중산층은 부를 축적하면서 행북에 겨운 시간을 보냈다.
이와 같은 사회를 유지하고, 지속시키기 위해서 유럽의 국가들은 국가 사이에 갈등이 생겨났다. 원료를 구하고, 상품을 판매할 시장을 위하여 식민지에 시선을 돌리면서 국가 사이에 갈등이 고조되었다. 군사력을 앞세운 제국주의가 나타나면서 국수주의가 힘을 얻었다. (드레퓌스 사건) 국수주의는 국가 간의 갈등을 유발할 수 밖에 없었다.
행복과 번영만이 보이는 유럽의 겉모습과 달리 내면적으로는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19세기부터 였다. 실제적인 생활의 향상에 이바지 하였던 과학은 이제 생활에서 떨어져서 자신만의 세계로 나아갔다. 양자론이 나타나고, 상대성 원리가 나타났다.(이론 물리학으로 나아감) 프로이트 이론은 이성에 근거한 의식 세계보다 자연적인 본능에 뿌리를 둔 무의식을 더 우위에 두었다. 니체와 베르그송은 기존의 철학에 반기를 들었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는 유럽 사회가 과학적, 철학적 질서 체계가 무너지면서 내면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19세기 이래로 이어져오던 관료주의와 교회,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불신이 깊어지면서 유럽 사회의 근간은 흔들렸다. 위기 의식을 느낄수록 방어하려는 보수 세력의 반발도 강해졌다. 이들은 국가중심주의를 강화함으로 나라 사이에 갈등은 한층 고조하였다. 한편으로는 부르주아지 사회를 경멸하면서 무정부주의와 사회주의가 대두하였다. 예술가들 사이에는 무정부주의와 사회주의가 하나의 유행처럼 번졌다.
예술가들은 막상 이데올르기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였다. 국가 체제와 관습을 구속으로 생각하고 인간이 느끼는 감정과 감각에만 충실하려는 생각을 하였다. 야수파 화가인 블라맹코와 드랭은 공공연하게 자신은 무정부주의자라고 말하였다.
1900년 경운 파리가 예술의 중심지이었다. 유럽의 젊은 예술가들은 파리로 모여 들었다. 1900년에는 프랑스 정부가 파리에 세계만국박람회를 대대적으로 개최하였다. 부르주아지 사회가 유럽에서 이루어 낸 성과를 집중으로 조명하는 행사였다. 기계의 발달을 보여주는 전시가 시민에게 제일 인기가 좋았다. 마치 오늘의 전자관이나 첨단 IT산업을 보여주는 전시관 같았다.
부대 행사로 19세기 100년 동안에 미술이 성취한 성과를 보여주는 100년 전을 열었다. 최근의 10년 간의 미술을 보여주는 10년 전도 열었다. 100년 전에는 모네, 마네, 드가, 세잔느, 고갱, 피살로, 로댕 등 전위적인 작품을 다수 전시하였다. 이를 두고 드센 비난도 있었지만 실험 미술로 취급 받던 작품들이 역사적 위치로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미술계에 정식으로 편입되지 못하고 주변만 맴돌던 인상주의와 신인상주위 회화가 살론전에서 다수가 입상할 만큼 미술계의 분위기가 변하였다. 1901년에 반 고호 회고전이, 1902년에는 똘루즈 로뜨렉의 회고전이 열렸다. 1904년에는 앙데팡당전(무심사전)에서 고호와 쇠라전이 열렸다.
1903년에는 살롱 도톤느가 창립되었다. 앙데팡당전은 무심사전이었으므로 작품의 질이 들쑥날쑥한다는 비난이 있었다. 이를 보안하는 차원에서 심사위원을 두는 살롱전을 창립하여다. 살롱 도톤느는 실험적인 작품을 제작하는 화가들에게도 문호를 활짝 개방함으로 새로운 미술이 미술계에 편입하도록 하였다. 조르주 루오와 뷔야르가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파리로 몰려 든 유럽의 젊은 예술가들은 이와 같은 파리의 분위기에 영향을 받았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마티스, 피카소, 칸딘스키, 들로네 등이다.
젊은 화가들은 변혁이 일어나는 시기의 정치, 이념, 등등에 자극을 받아서 새로운 미술 운동을 전개하였다. 문명에 대한 위기 의식, 니체와 베르그송의 철학의 영향, 원시미술이 주는 자극(일본 미술도 포함됨)으로 미술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이들은 상징주의의 문학성, 세기말 미술의 비관성을 벗어나서 자연을 개인적 성향의 눈으로 바라보려 하였다. 이들은 외형보다는 본질을 파고 들었다. 특히 색채에 관심을 가지므로 추상으로 흘러가는 경향이 나타났다.
프랑스에서는 색채에 중점을 둔 야수파 회화가 파리를 중심으로 나타났다. 독일에서는 주관적 감정을 주로 표현하는 표현주의가 ‘다리파’라는 이름으로 드레스텐에서 나타났다. 이들은 모두 인상주의 - 후기 인상주의로 이어지는 색채에서 가능성을 탐색하면서 주관적 감정을 거칠게 표현하였다. 이들의 나이는 거의가 20-30대의 젊은이들이었다.
전통 회화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선(線)이다. 칸트는 ‘회화나 조각에서 중요한 것은 선이다. 드로잉을 조명해주는 색채는 매력적이고, 그 나름대로 생명감을 불어넣지만 그 자체로서는 전혀 아름답지 못 하다.’라고 하였다. 앵그르는 색채를 동물적 요소(본능적인 요소)라 폄하하였다. 블레이크는 ‘베니스인들이여(베니스는 색채 미술이 유행하였다. 틴토레트, 티치아노 등) 그대들의 색채는 마치 천한 창녀들의 화장같이 위장적이다.’라고 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색채는 지적이지 못 하고 본능적인 삶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이런 이유로 야수파와 표현주의 회화에소 강렬한 색채로 나타났다.
마티스가 중심이 된 파리의 야수파는 자유분망한 색채 사용으로 개인의 경험을 표현하려 하였다 드레스텐에서 활동한 다리파 화가들은 형태를 심하게 왜곡하고, 가칠고 충동적인 색채를 사용함으로 야수파보다 훨씬 더 과격하였다. 도시 생활의 심리적 긴장과 위기 의식을 이런 방식으로 표현하였다고 한다. 조금 늦게 나타난 청기사 파는 내면세계와 감성을 순수한 색채와 형태만으로 표현하려 하였다. 이로서 추상미술로 나아갔다.
독일에서 나타난 표현주의 미술은 자연의 재현보다는 색채를 통하여 강렬한 감정의 표현에 관심을 두었다.
--이동민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