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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의 근본은 하늘에 있고, 사람의 근본은 조상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가문이 대대로 예(禮)를 숭상하고 학문을 닦아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선조들께서 남기신 고결한 정신적 자양분 덕분입니다. 250여 년 전 성균관직강을 지내신 변성우(邊聖遇, 1721~1787)께서는 선조들의 고귀한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며 가문의 번창과 화목을 일구셨으니, 오늘날 매촌 후손들이 누리는 평안은 모두 선조의 덕택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나 또한 평생을 제주도민을 위한 공직자로서 헌신하며 치열하게 살아왔으나, 칠순에 접어들어 후손들이 조상의 삶을 거울삼아 올바른 길을 걷길 바라는 염원에서 성균관직강을 지내신 매촌 입향조 영헌공(瀛軒公)의 발자취를 기록하려 하니, 8대 후손은 그 드높은 학문의 깊이를 다 헤아리지 못해 송구한 마음이 앞섭니다. 비록 미흡한 필치(筆致)이나, 통훈대부 선조의 거룩한 생애와 발자취를 기록하여 후대에 전함으로써, 후손들이 뿌리를 잊지 않고 당당하게 미래를 열어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이 기록을 봉헌합니다.
“영조 대왕과 변성우의 만남”, 1765년 당시 제주 출신이 문과 대과에 급제하는 것은 희소(稀少)했습니다. 영조 대왕은 대과에 급제한 변성우를 편전으로 직접 불러 다음과 같이 격려하며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했습니다. 영조 대왕은 변방인 제주에서 학문에 매진하여 급제한 변성우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며 제주의 기운이 이 사람에게 모여 있구나! 하시며, 바다 건너 멀리서 온 변성우 선비를 따뜻하게 위로하시며 즉석에서 사변가주서(事變假注書)라는 관직을 제수(除授)하였습니다. 사변가주서란 승정원에서 국가의 긴급한 사무(사변)를 기록하고 관리하는 임시직 주서를 말합니다. 왕의 곁에서 기록을 담당하는 요직에 제주 출신을 임명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배려였습니다. 그래서 변성우의 급제는 단순히 개인의 성공을 넘어 제주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당시 제주 사람들은 육지 사람들로부터 '말 타고 활 쏘는 거친 사람들'이라는 편견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변성우 선비가 대과에 당당히 합격해 성균관직강과 같은 요직을 맡으면서, 제주 사람도 예(禮)를 알고 문(文)에 능하다는 것을 증명해 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제주도민들이 변성우라는 이름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조선 후기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은 유생(儒生)들의 교육을 직접 담당하던 아주 실무적이고 핵심적인 관직이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국립대학교의 정교수나 학과장 정도의 위치라고 보시면 됩니다. 성균관직강은 당대 최고의 학문적 실력을 갖춘 인물이 임명되었습니다. 이 자리를 거치는 것은 문관으로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습니다. 정5품은 당하관(堂下官)에 해당하지만, 임금의 신임을 받는 학자들이 주로 배치되어 조정에서도 그 목소리에 힘이 실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물 붓으로 반석에 서체(書體)를 익히던 제주 섬 소년이 조선 최고의 인재들을 가르치는 스승이 되신 것입니다. 이는 우리 가문의 영광이자, 제주 유생(儒生)들에게 전하는 ‘노력의 승리’ 그 자체였습니다. 변성우께서는 일찍부터 제주의 거친 바람 소리를 들으며 학문에 40여 년 정진하시어, 거친 제주 바다를 건너 한양 도성(都城)에서 그 실력을 인정받으셨습니다. 특히 조선의 국운이 융성하던 영조 시대에 국가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의 직강(정5품)으로서 유생들을 훈도하며 영조 대왕의 신망을 얻으셨으니, 이는 제주 출신 문신으로서 보기 드문 영예이자 가문의 큰 경사였습니다. 또한 조정관리로 승정원 사변가주서(事變假注書), 교서관박사(校書館博士),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 승문원교검(承文院校檢) 등을 지냈고, 외관직으로 장성의 청암찰방(靑巖察訪)과 전주 지역의 삼례찰방(參禮察訪)을 역임하였습니다.
八代 祖父 瀛軒公께서는 삼례찰방에 부임하면서 청암찰방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부임하자마자 삼례도 관할 지역 백성들의 세부담을 덜어주고 일을 공정히 처리하였으므로 관내 백성들이 모두 숭앙(崇仰)하고 칭송하였습니다. 瀛軒公이 퇴임하자 역내 백성들의 뜻을 모아 碑를 세워 그 공적을 치하하였다고 합니다. 八代祖父님은 삼례찰방 재직당시 피로 누적으로 병을 얻어 몸이 쇠약해졌으므로 관직을 사임하고 귀향하였습니다. 병상에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시던 八代 祖父 瀛軒公께서는 1787년 정조대왕 11년(정미년) 10월 24일 세상을 떠나시니 향년 67세였습니다. 八代 祖父 瀛軒公께서는 관료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고향의 가족들이 굶주리고 있지나 않은지 걱정하는 글을 남길 정도로 가족사라이 깊었고, 또 나랏일 때문에 바다건너 멀리 있는 고향의 조상묘소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토로할 정도로 조상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신 분이었으니 그야말로 훌륭하신 조선의 참된 선비였습니다. 또한 틈이 나면 후학양성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므로 문하에 佐郞 강성익(康聖翊), 參判 변경우(邊景祐), 幼學 고처성(高處盛), 김용(金墉) 등이 배출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영헌일고'에서 옮깁니다.
○ 承政院日記 英祖 40년 2월20일(壬辰)
甲申 二月二十五日 五更, 上御齊殿. 禮房承旨入侍時, 000000. 上曰, 金衡重, 聖遇
邊聖運, 竝直赴殿試
○ 承政院日記 英祖 41년 3월5일(庚辰)
鄭運維,以禮曹言啓曰,昨年濟州別遣御史,試取儒生 金衡重, 邊聖遇 邊聖運直赴殿試事
命下矣,金衡重等三人,今始上 直赴於今此式年文科殿試, 何如?傳曰, 允.
○ 1765년 3월 16일 노성탁(盧聖鐸)을 대신하여 사변가주서로 일을 시작하다.
○ 承政院日記 英祖 41年 3月 16日(辛卯)
事變假注書盧聖鐸在外, 代以邊聖遇爲事變假注書.
○1765년 3월 20일 李克生洪彬 등과 함께 부사정에 제수되다.
○ 承政院日記 英祖 41年 3月 20日(乙未)
以蔡膺一爲副護軍 安兼濟爲副司直, 金魯淳李行爲司果, 邊聖遇李克生洪彬爲
副司正, 金鼎登爲同知,
○ 1765년 3월 20일 영조대왕을 처음으로 알현하다.
진시(辰時)에 영조대왕이 사현각에서 대신과 비변사 당상들을 인견하는 자리에 영헌공은 처음으로 좌의정 윤동도, 우의정 김상복, 행지중추부사 홍계희, 행사직 홍상한, 우참찬 이익보, 이조판서 김치인 형조판서 황인검, 병조판서 심용, 훈련도정 이장오, 공조참판 정홍순, 이조참판 원인손, 행사직 홍인한, 형조참판 서명응, 좌부승지 구현겸, 집의 이기덕, 교리 서명선, 정언 홍경안, 가주서 이극생에 이어 내가 왕에게 나아가 알현하였다. 이어 기사관 임정원, 기사관 윤광례가 차례로 나아가 알현하였다.
○ 承政院日記 英祖 41年 3月 20日(乙未
乙酉三月二十日辰時, 上御思賢閣. 大臣 備局堂上引見入侍時, 左議政尹東度, 右議政金相福, 行知中樞府事洪啟禧, 行司直洪象漢, 右參贊이익보李益輔, 吏曹判書金致仁, 刑曹判書黃仁儉, 兵曹判書沈鏞, 訓練都正李章吾, 工曹參判鄭弘淳, 吏曹參判元仁孫 行司直洪麟漢, 刑曹參判 徐命膺, 左副承旨具顯謙, 執義李基德, 校理徐命善, 正言洪景顔, 假注書李克生, 事變假注書聖遇, 記事官林鼎遠, 記事官尹光禮 以次進伏.
○ 1766년 1월 16일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영조 대왕의 허락을 받고 제주로 귀향
○ 1768년 1월 16일 모친상 탈상
○ 1768년 9월 한양으로 상경
○ 1768년 11월 19일 복직, 교서관 부정자 제수,
☆詩
■ 余以笘塊餘喘 仍作西笑之行(여이점괴여천 잉작서소지행)
戊子 七月十三日 候風于禾北津(무자7월13일 후풍우화북진)
余懷萬端 不得自抑(여회만단 부득자억)
與李兄盛卿 登望洋亭 論心(여이형성경 등망양정 논심)
내가 居喪 侍墓를 마치고 京都 서울행을 결심하여 무자년 7월13일에 화북진에서 順風을 기다리며 우울한 심사를 억제치 못하여 李兄 盛卿과 더불어 望洋亭에 올라 심정을 토로하다.
◇ 거상을 마치고 서울로 떠나는 길
◎ 나는 어머님 3년 상을 마치고 슬픔을 간직한 채 이어서 꿈에 부푼 서울 여행길에 나서게 되었다. 무자년(1768년) 7월 13일 화북진에서 배 띄울 바람을 기다리는 도중 이형 성경과 함께 망양정에 올라 북쪽으로는 임금님 계신 궁궐을 연모하고 남쪽으로 조상의 영혼이 깃든 고향마을을 생각하면서 가슴 속에는 억누르기 힘든 슬픔을 품은 채 한 구절 읊는다.
◇ 十三日 登望洋亭 北戀宸極 南望壟楸 余懷難抑 仍吟拙句
(십삼일 등망양정 북연신극 남망롱추 여회난억 잉음졸구)
십삼일 망양정에 올라 북쪽으로 신극을 연모하며 남으로 롱추를 바라보며 착잡한 심경을 억제치 못하여 졸구를 읊다.
笘塊餘喘(점괴여천):막 居喪을 끝낸 사람이 죄스럽고 경황없음을 남에게 대하여 일컫는 말.
居喪(거상): 부모상(父母喪)을 당하여 소상(小祥) 대상(大祥) 기간에 근신함.
西笑之行(서소지행): 희망을 가지고 임금님 계시는 서울로 가는 길
餘喘(여천): 끝난 다음.
萬端(만단): 오만가지 잡념.
候風(후풍): 배가 떠나기 위해 순풍을 기다림
禾北津(화북진): 제주시 북동쪽 화북나루
望洋亭(망양정): 화북진 바닷가에 세운 정자.
北戀宸極(북연신극): 북쪽으로 임금의 계신 곳을 연모함.
壟揪(농추): 조상의 무덤이 잇는 고향마을
難抑(난억): 억누르기 어려운 슬픔.
拙句(졸구): 잘 짓지 못한 詩, 자기의 시를 겸손하게 일컫는 말.
■ 北戀宸極 북연신극
超遞蓬萊幾日程 초체봉래기일정
津頭風急暮潮生 진두풍급모조생
心隨流水潮東折 심수유수조동절
夢逐曉星拱北行 몽축효성공북행
戀(연):그리워할 연, 그리움 연.
宸極(신극): 임금의 居所(거소) 君位(군위), 帝位(제위)
超遞(초체): 먼 모양, 높은 모양
蓬萊(봉래): 1. 삼신산의 하나- 발해에 있어 신선이 산다는 산. 2. 금강산. 이 시에서는 작자 가 서울을 지칭한 것으로 생각 됨.
三神山(삼신산): 蓬萊(봉래) 方丈(방장) 瀛州(영주), 瀛州(영주)는 제주의 별칭,
暮潮(모조): 저녁의 밀물
曉星(효성): 샛별
朝(조): 아침 조, 조정 조, 마을 조, 뵐 조, 조회 받을 조, 부를 조, 모일 조, 흐를 조.
北宸(북신): 서울 왕실- 제주에서 서울은 북방에 위치함으로 북신이라 함.
◇ 한양을 생각하며
멀고 먼 한양은 며칠 길이 될 것인가?
나루 머리에 바람이 급히 불어 저녁 밀물 일렁이니
마음은 흐르는 물 따라 동으로 향하고
꿈은 샛별 따라 다소곳이 북으로 가는구나.
역자주(譯者註 = 글을 번역한 사람.) 瀛軒公이 살던 매촌 마을(현재 제주시 삼양동에 속함)은 화북진 망양정(현재 화북포구)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고향과 가족에 대한 걱정을 떨치지 못한 채 마음은 고향마을을 향하지만 벼슬살이 꿈을 안고 북쪽 한양 궁궐로 떠나야 하는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고 생각된다.
250년이라는 아득한 세월을 넘어 영헌공(瀛軒公) 선조의 파란만장한 삶을 기록으로 엮어 올렸습니다. 비록 얕은 지식과 문장으로 성균관직강이라는 직함에 다 담아낼 수는 없었으나, 후손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다하고자 정성을 다했습니다. 선조께서 남기신 고귀한 자취는 세월의 이끼를 벗고 이제 우리 매촌 문중의 소중한 정신적 자산이 되었습니다. 성균관직강 영헌공(瀛軒公) 선조의 덕망 위에서 우리 후손들이 살아가고 있으며, 오늘의 나의 참된 행실이 미래 후손의 앞길을 밝혀줄 것입니다. 선조의 공덕은 강물과 같아 끊임없이 흘러 후손들을 적셔주리라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매촌 후손들이 누리는 모든 복락은 선조의 헌신과 덕행에서 시작되었음을 깊이 깨닫습니다.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종이와 먹이 없어, 물과 반석을 도구로 바꾸는 고난 극복의 창의적인 정신, 대과 급제를 위해 끝까지 도전을 멈추지 않았던 그 기개(氣槪)는 우리 매촌 후손들에게 가장 큰 유산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매촌 문중 후손들은 그 마음을 이어받아, 배움에 대한 열정은 풍족한 환경에서 꽃피는 것이 아니라, 결핍을 이겨내려는 의지 속에서 가장 단단해지므로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도 목표와 꿈을 향해 꿋꿋이 전진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이 기록이 훗날의 후손들에게도 자부심이 되고, 매촌 입향조 영헌공(瀛軒公) 후손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구심점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 ❤️ ❤️ 서기 2026년 봄날 8代 孫 宗 運 삼가 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