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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변란의 전형 - 미륵신앙과 정감록을 내세운 변란
미륵의 후예를 자처한 조선시대의 천년왕국운동
미륵의 예언으로 서울 공략을 추진하다
우리는 후삼국시대 태봉을 건국한 궁예가 미륵불의 화신을 자처하면서 그 세력을 크게 떨쳤던 일을 잘 알고 있다. 이처럼 우리 역사에서 미륵불을 자처하거나 미륵불의 도래를 예언하면서 민심을 끌어모았던 일이 종종 일어났다. 조선시대에도 미륵불의 도래를 예언하며 민심을 모았던 사례는 적지 않게 발견된다. 조선 숙종 14년인 1688년에 경기도 양주 지역을 중심으로 미륵신도들이 서울 공격을 계획하고 추진했던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 사건의 대강의 줄거리를 알아보기로 하자. 숙종 때 경기도 양주에 미륵불을 섬기는 여환이라는 승려가 있었다. 그는 본래 강원도 통천에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하게 살다가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다. 그는 승려로서 각지를 떠돌다가 강원도 김화의 천불산에서 3개월 동안 수도한 끝에 미륵불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본격적으로 대중들 앞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제 여환이 미륵으로부터 들었다는 계시의 내용을 보기로 하자. 미륵은, 현실세계에서 승려들은 부처를 공경하지 않고 오히려 속인들이 부처를 공경한다고 했다. 이는 정의가 실현되지 않고 있는 현실사회의 모순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개혁으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총체적 모순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새로운 세계의 건설이 전제되어야만 했다. 여환은 미륵불을 새로운 세계의 건설에 대한 대안으로 내놓았다. 그리하여 여환이 말하기를, "현세는 석가모니불이 다스리고 있는데 이제 석가의 시대는 가고 미륵이 다스리는 세상이 올 것이므로, 비록 양반이라도 미륵이 세상을 바꿔놓았다고 들으면 반드시 마음을 고칠 것이다"고 했다. 이때 미륵이 다스리는 세상이야말로 단순히 신분의 차별이 없는 곳임은 물론이고 현세의 총체적 모순이 사라진 이상향의 세계라는 뜻이다.
이러한 변혁적 논리는 미륵신앙이 지니고 있는 핵심 요소이다. 이러한 논리를 전파하며 민심을 끌거나 반란을 기도했던 사례는 우리 나라의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중국의 경우 더욱 흔하다. 이를테면 중국에서는 미륵신앙이 지니고 있는 이상세계에 대한 변혁적 논리가 숱한 종교 반란, 즉 '천년왕국운동'을 종교 내지 사상적으로 뒷받침하는 주요 이념으로 작용해왔다.
여환은 미륵의 세계가 순탄하게 이루어지도록 사전이 준비를 철저히 해야 했다. 그는 천불산에서 미륵불로부터 계시를 받은 후 미륵 출현의 사전 정지작업의 일환으로 평소 마음을 터놓고 지냈던 황회와 함께 앞 날을 의논했다. 황회는 양평 출신으로 풍수와 의술로 생업을 삼고 있던 지사이다. 더욱이 그는 실질적으로 이 사건을 주도했다. 여환과 황회는 동조인물을 모아나갔다. 그 첫번째 포섭대상은 '무녀' 집단이었다. 그녀들의 민중에 대한 영향력이 컸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들은 황해도 문화로 갔다. 그리하여 무녀 계화의 소개로 황해도 일대에서 명망 높은 무녀인 원향을 만나게 되었다. 계화는 횡희에게 포섭되었으며, 정부에서 지목한 사건 핵심 5인방 중 한 명이다. 그녀는 정성인으로 불렸으며, 무녀사회 안에서도 영향력이 큰 인물인 듯하다.
이때 여환은 원향과 결혼하였다. 그런데 이 둘의 결혼은 단순히 승려와 무녀의 결합이 아니다. 미륵불의 안배에 따른 결합인 것이다. 미륵불의 계시에 따르면, 지금과 같은 혼란한 세상은 '용'이 아들을 낳아 나라를 다스리는 때라는 것이다. 이 무렵 무녀들은 흔히 용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고, 그것은 '용녀부인'의 모습으로 치장하였다. 다시 말해 이 일은, 여환이 용녀부인을 아내로 삼아 아들을 낳음으로써 나라를 주재하게 될 것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들 일행은 황해도에서 강원도를 거쳐 다시 양주로 돌아왔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용녀부인이라는 이름을 듣고 몰려들었다고 한다. 이 무렵 양주 일대에는 많은 미륵신도들이 거처하고 있었다고 생각되며, 이들은 언제든지 여환과 황회 등의 말에 의해 움직일 수 있는 세력이었다. 주동 인물들은 양주 청송면 일대에서 여러 차례의 회합을 가지면서 거사를 구체화시켜 나가기 시작했다. 이들은 "7월에 큰 비가 퍼붓듯이 내리면 산악이 무너지고 국도도 탕진될 것이니, 8월이나 10월에 군사를 일으켜 도성으로 들어가면 대궐에 앉을 수 있다"는 주장으로 서울 공격의 계획을 구체화해 나갔다. 이제 미륵의 힘에 의해 세상을 변혁할 준비는 갖추어졌고 바야흐로 실천의 때가 다가온 것이다.
끝내 비는 내리지 않고!
미륵신도들을 주축으로 하는 무리들은 7월 13일에 양주 청송면 대전리에서 무장을 하고 모인 후에, 다음날에 양주 관아를 습격하여 그 무기를 탈취하고 곧바로 상경하기로 하였다. 이 계획에는 양주 일대의 거의 모든 미륵신도들이 참여하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그 규모도 꽤 컸을 것이다. 이때의 광경을 "마을 사람들이 모두 군복으로 갈아입고 모여들어 마을이 텅 비었다"고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들 주동 인물들은 많은 지지자들을 양주에 남겨 둔 채 7월 15일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즉, 이날 여환과 황회, 정원태가 양주 사람 김시동, 최영길, 이원명과, 영평 사람 정호명, 이말립, 정만일 등과 더불어 각기 군장과 장검 등을 갖추고, 원향은 남복을 갈아입고 성안에 몰래 들어가 비오기를 기다렸다가 대궐을 침범하기로 약속하였다.
이들은 삼각산에서 큰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며 정성껏 제사를 지냈다. 이제 하늘이 자신들의 뜻을 알아 큰 비를 내려주면 궁궐로 쳐들어가는 일만이 남았다. 이들은 일의 성패가 과연 '비'가 내리느냐, 내리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도 바라던 비는 끝내 내리지 않았다. 결국 이들은 후일을 기약하며 하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계획의 수정은 고변으로 이어졌고 거사계획은 실패하였다. 궁궐을 장악하고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려는 이들의 계획이 완전히 물거품이 되었음을 뜻하는 순간이다. 이 사건은 서울 공략의 실패로 그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양주목사의 인지수사가 이어졌다. 양주 관아에서는 여환 등 14인을 체포하여 양주감옥에 구금하고 이 사실을 조정에 즉각 보고하였다. 조정에서는 금오랑을 파견하여 여환, 황희 등 40여 명의 관련 인물들을 잡아들이고 국청을 열었다. 이들을 심문한 끝에 여환과 황희 등 주동자 11인을 처형하였다.
미륵신앙-천년왕국온동의 사상적 배경
조선시대는 종교, 사상적으로 불교의 폐해를 극복하고 성리학을 지배이념으로 채택한 사회였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전 기간을 통하여 유고, 즉 성리학을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하는 숭유억불정책의 기조가 유지되었다. 이러한 정책에 따라 조선 초기에는 불교가 왕실과 사대부의 부녀자들을 중심으로 신봉되기는 하였지만 점차 쇠퇴하였으며, 중기 이후에는 불교의 국가, 사회적 성격이 약화되고 민중의 종교로 명맥을 유지하여갔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민중과 함께 했던 것이 미륵신앙이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 체제모순이 심화되고 사회변동이 촉진되면서 미륵신앙은 민중 사이에서 신봉자들이 더욱 많아졌다. 이 때 미륵신앙은 고통받는 개개인을 구원해주는 기복신앙으로서의 기능과 함께 새로운 이상사회가 도래한다는 변혁사상으로 떠올랐다.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미륵신앙이 갖는 변혁사상으로서의 기능이다. 미륵신앙이 갖는 변혁의 논리는 민중의 이상사회 구현에 대한 희망과 맞물려 나타난다.
이는 이른바 미륵불이 하생하여 이상향, 즉 용화세계를 구현할 때 이루어진다고 믿는 '미륵하생신앙'을 통해 구체화된다. 그런데 미륵하생신앙에 따르면, 미륵불은 석가모니 사후 56억 8천만 년이 지나서야 도솔천에서 인간세상으로 내려와 용화삼회를 통해 중생을 구제하고 새로운 세계를 구현한다고 한다. 물론 이 세계는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고 온갖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이상향의 세계이다. 그러나 미륵불의 출현 시기를 56역 8천만 년으로 설정한 것은 현실의 질곡에서 당장 벗어나려는 민중에게는 공염불로 들릴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말법의 시대에 희망을 가지고 올 미륵불이 현실에 도래하기를 바라고 있었으며, 사실 그렇게 믿고 있었다. 이를 통해 용화세계라는 절대 평등사회이며 이상사회에 대한 염원을 구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사건에서도 이제 미륵불이 하생할 조짐들이 나타나고 있음을 여러 군데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미륵불은 현실에 도래할 이상향의 상징인 것이다.
이러한 미륵하생은 현실을 인정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질곡의 세계인 현실을 완전히 부정하는 데서 비롯한다. 그러므로 미륵하생은 그 자체로 메시아이 출현이라는 혁명적 이념의 논리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에는 이러한 미륵신앙의 논리를 내세워 민심을 이끌었던 사례가 적지 않으며, 위의 사건은 그 전형적인 사례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눈을 돌리면 이러한 미륵신앙과 관련해 일어났던 사례들을 중국의 역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중국의 민중운동사를 고찰할 때 종교적 색채를 지닌 사건이 이외로 많음을 알고 놀라게 된다. 다시 말하면 중국의 민중운동 가운데는 종교반란인 경우가 적지 않으며, 이러한 사례들은 흔히 '천년왕국운동'으로 불리고 있다. 이 천년왕국운동을 끌어가는 종교 내지 사상은 겉으로는 다양한 이름을 내걸고 있다. 그러나 그 내용과 성격은 한결같이 '미륵신앙'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왕조의 흥망에 관계없이 끈질기게 이어졌던 '백년교의 난'이다. 백련교도들은 수나라 때부터 활동하였으며, 원나라와 청나라 때에 걸쳐 크게 활약하며 왕조의 권력기반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대두되었다. 왕조가 쇠퇴할 때는 어김없이 백련교도들이 나타나 '미륵불의 강림'을 외치며 반란을 주도했던 것이다. 조선에서 여환 등이 일으킨 미륵신앙 관련 변란도 거사에 성공하지만 못했을 뿐, 그 성격면에서는 중국의 천년왕국운동과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건을 조선시대의 천년왕국운동으로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용 신앙을 통해 본 민중신앙의 한 단면
민간신앙에서 용은 물을 지배하는 수신으로 신앙되면서 비가 내리기를 비는 대상이었다. 그리하여 용은 흔히 비구름을 일으키는 영물로 인식되어왔다. 기우제를 지낼 때 용를 그려서 제사를 지내며 제사가 끝나면 그 종이로 제물을 싸서 강물에 가라앉히는 풍속이 있었다. 또한 용은 미륵불의 도래 직전에 흉년과 재해가 넘치는 사회를 다스리며 미륵불의 강림을 예비한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용은 민중, 특히 무녀들 사이에 널리 신봉되었고, 민중운동을 뒷받침하는 논리로도 기능하였다. 이 사건은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 사건에서 용신앙은 미륵신앙과 더불어 추진 동력의 양대 축을 이루고 있다. 용신앙은 무녀들을 중심으로 일반 민중들에게까지 신앙의 대상이었다. 그리하여 무녀들을 중심으로 한 무리들은 용신앙을 주재할 우두머리를 찾고자 했다. 실제로 양주 일대의 무녀들이 용신앙을 주재할 대표자를 찾는다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였다. 이때의 대표자가 무녀사회를 장악할 수 있는 대표성을 갖게 됨은 물론이다. 여환과 그의 모사 노릇을 하던 지사 황회가 이러한 무녀 사회의 분위기를 재빨리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양주의 무녀 계화의 도움으로 황해도의 명망있는 무녀 원향을 '용녀부인'의 이름으로 영입했던 것이다. 용은 미륵불의 도래를 예비한다고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는 비바람이 고르지 못하고 모든 곡식이 제대로 결실을 맺지 못하여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게 된다고 했다. 용은 이러한 사회를 다스리면서 미륵불의 강림을 준비한다는 것이다.
이제 용녀부인은 여환 못지않게 추앙받게 되었다. 이를테면 황회는 사람들에게 용녀부인과 함께 일을 추진하면 무슨 일이든 다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하며 다녔다. 이에 사람들은 그녀가 사해용왕의 딸로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게 하는 신통력을 지녔다고 믿게 되었다. 그러므로 용녀부인은 이들 주동자 그룹 내에서도 매우 신성시되는 인물이었다. 이들이 상경할 때의 행동에서 용녀부인에 대한 신앙과도 같은 믿음이 잘 드러나 있다. 이들은 하나같이 용녀부인이 함께 상경해야 일이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하여 용녀부인도 남자복장을 하고 말을 타서 일행과 함께 서울까지 가게 되었다. 그만큼 이 사건에서 용신앙이 지니는 비중이 크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이처럼 용신앙의 이 사건의 주요 추진 동력이다. 그렇다고 하여 여기에서 용신앙의 제 1의 추진 동력이라고는 할 수 없다. 미륵신앙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미륵신앙과 용신앙의 관계를 살펴보면 그 윤곽을 어느 정도 살필 수 있다.
이 사건의 최고 지도자는 여환이지만, 그와 더불어 양주 일대의 많은 민중들을 미륵신도로 끌어들이는 등 실제 일을 추진했던 인물은 황회이다. 그의 본래 신분은 지사로 알려졌다. 그러나 황회는 매우 열성적인 미륵신도로서 미륵신앙의 전파에 적극적이었다. 그리고 그는 주로 의술로 생활문제를 해결한 것으로 보인다. 미륵신앙의 전파에 몰두하던 황회는 양주의 무녀 계화를 포섭하였다. 계화는 정성인으로 불리며 양주 지역의 무녀사회를 대표하고 있던 인물로 보인다. 미륵신도의 대변인 황회과 용신앙의 대변인 계화를 끌어들였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는 미륵신앙이 용신앙을 흡수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잠깐 살펴보자. 계화의 말에 따르면, 황회가 자신의 신당에서 귀신들을 몰아내고 영신(미륵불)을 모시라 하므로 그의 말을 따랐다고 하였다. 이는 미륵신앙이 재래의 용신앙보다 우위에 서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여환과 황회가 원향을 용녀부인으로 맞이하는 것도 미륵신앙이 용신앙을 흡수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 사건에서 용신앙과 무녀들의 역할이 약화되는 것은 아니다. 앞의 용녀부인의 역할이 막중했음을 보았듯이, 양주 무녀의 대표인 계화도 주동자 그룹 안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주동자들의 모임이 주로 계화의 신당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더욱이 계화는 군복과 장검을 갖출 것을 촉구하는 등, 실질적으로 주동자들만이 아니라 동조세력까지 서둘러 무장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 이 사건에서 용신앙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앞에서도 말한 대로 미륵이 순탄하게 인간세상에 내려올 수 있도록 사진 정지작업을 하는 역할이었다. 미륵의 세계는 이상향을 의미한다. 그런데 미륵의 세상이 되려면 반드시 혼란한 세상을 거쳐야만 한다. 여기에서 용이 혼란한 세상을 아우를 유일한 존재이며, 지금이 바로 그 때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륵 세계의 구현은 용의 도움을 필수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여환이나 황회와 같은 미륵신도들은 원향이나 계화와 같이 용을 신봉하는 부녀들이나 그녀들을 추종하고 있던 자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정조 때 서울 공격을 기도한 사건 - '정감록'을 변혁의 도구로 이용하다
송덕상을 둘러싼 사건의 정치적 배경
조선 후기에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가장 안정된 사회였다고 평가되는 정조 때에도 체제저항 내지 변혁운동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가운데서도 이경래와 문인방 등이 서울 공격을 기도했던 저항운동이 관심을 끈다. 정조 집권 초기에는 홍국영이 전권을 장악하고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이른바 세도정치를 하였다. 그러나 홍국영의 세도정치는 오래 가지 못하였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펴기도 전이 1780년(정조 4)에 축출되었고, 이에 따라 그와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던 자들도 제거 대상이었다. 그 대표적 인물이 송시열의 후손인 송덕상이다. 송덕상은 산림으로 천거되어 이조판서에 오르는 등 홍국영과 함께 권력의 핵심부에 있었다. 송덕상은 홍영국이 죽은 후 호서지방 유생들이 일으킨 옥사와 관련하여 삼수부에 안치당했고, 이를 계기로 홍국영 일파에 대한 제거작업은 사실상 일단락된 듯이 보였다. 그러나 송덕상의 신원을 주장하는 등 직간접적으로 송덕상과 관련한 사건이 속출하면서 대부분 옥사로 연결되었다. 요컨대 송덕상 관련 사건은 이 무렵의 정치상황을 대변해주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적어도 송덕상의 유배지였던 삼수부의 토호들과 거사들이 모의했던 이른바 '삼수부 거사모의'가 일어났던 1786년(정조 10)까지는 이어지고 있다. 더욱이 주목되는 것은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단순히 권력집단 안에서의 투쟁으로 볼 수 있는 사건들도 있지만, 민중들이 주도한 사건들도 어떠한 형태로든지 송덕상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다루고자 하는 사건 또한 이러한 정치적 배경 아래서 일어난 것이다.
문인방과 이경래의 만남 속에서 거사의 꿈은 싹트고
이경래(45살)와 문인방(28살)은 사건을 끌어간 핵심 인물이다. 이경래는 강원도 양양출신으로 신분은 진사로 알려졌다. 그는 정조 초반에 역모로 죽은 이택징의 친족이며, 송덕상 밑에서 학문을 배운 적도 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이경래는 양반급에 속하는 인물이었지만, 그가 현실적인 여건상 정상적인 경로를 밟아 출세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현실적 조건은 접어두고라도 그는 이전부터 물리적 힘으로 권력을 장악하려는 야망을 지니고 있었다. 후술하겠지만 이러한 사실은 사건의 또다른 주동자인 문인방의 자백을 통해 드러난다. 한편 문인방은 황해도 곡산이 천민 출신이면서 송덕상의 제자이다. 더욱이 그는 송덕상으로부터 '옥포선생'이라는 서호를 받을 정도로 신임을 얻고 있었다. 아울러 그는 천민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훈장'을 사칭하고 다닐 정도로 학식이 만만치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인방은 결코 '천민'이라는 신분의 굴레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에게는 이러한 구각을 깨뜨릴 파격적 방법이 필요했고, 그것은 거사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그는 체제의 변혁을 원했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해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거사를 모의한 양대 주역 이경래와 문인방의 첫 만남은 사건이 발각되기 10년 전인 1772년(영조 48) 금강산의 대찰인 유점사에서 이루어졌다. 이때 의기투합하여 강원도 양양의 이경래의 집에서 4일간을 머물며 친교를 쌓았다. 그 다음해에도 이경래의 집에서 만나 함께 공부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이들은 '현실 개혁'의 문제나 '거사 모의'에 대한 문제를 꺼내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들은 정조가 즉위한 해인 1777년 8월에 다시 만나면서 일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이때 이경래는 "일차로 장수가 되려고 한다"거나, "선생(송덕상)을 위해 함경도에 가서 함께 일할 사람들을 모으라"고 말하는 등 회유와 협박으로 문인방의 내락을 얻어냈다고 한다. 이경래와 문인방의 결탁에 의해 사건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이후 사건이 발각될 때 이경래의 행적은 잘 드러나지 않는 반면에 문인방은 사건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동조인물들을 모으다
이경래와 문인방은 거사를 하기로 결탁한 후 각 지역별로 책임자를 정해 동조인물을 모집하는 데 힘을 쏟았다. 문인방은 함경도 지방과 충청도까지도 맡고, 도창국은 삼남지방을, 백천식과 김훈 등은 충청도 지역을, 김정언은 관동지방을 맡았다. 그리고 이경래는 강원도와 서울을 오가며 세를 규합하기로 했다. 가히 전국에 걸쳐 동조세력을 모으려는 담대한 계획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조선 후기의 민중운동의 역사에서 '변란'이 지닌 중요한 성격이라고 하겠다. 다시 말해 농민항쟁 즉, 민란에서는 전국에 걸쳐 동조인물을 모으는 특징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 가운데서도 문인방은 가장 활발히 움직였으며 행적 또한 가장 뚜렷하였다. 먼저 문인방은 (정감록)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모았다.
그는 유학에 대한 소양뿐만 아니라 도참비기에 대하여도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이 무렵에는 (정감록)이 도참비기를 대표하면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는 실제로 (승문연의)나 (경험록) 등 정감록과 비슷한 종류로 보이는 책들을 학습하기도 했다. 문인방은 이러한 소양을 바탕으로 백천식, 김훈, 김광렬 등과 함께 현실의 위기감을 조장하는 내용의 말을 퍼뜨리며 민심을 흔들었다. 더욱이 이들은 진천의 산 속에 들어가 토굴에 기거하면서 술법을 가르치고 방술을 연습하거나 또 요언을 주장하며 민심을 모았다. 그리하여 정부에서 이들을 체포하여 인심을 어지럽힌 죄를 물었을 때, 이들은 '인심은 스스로 요란해진 것'이라고 천연스럽게 대답했다.
다음으로 문인방은 신분을 속여서 동조인물을 모았다. 이를테면 이경래로부터 함경도에 가서 인물을 모집하라는 명을 받고, 문인방은 갑산의 윤운기의 집에 가서 의원을 가칭하여 1년을 머물면서 인물을 모았고, 이석삼의 집에서는 훈장으로 행세하며 인물들을 모았다. 이처럼 이경래와 문인방 등이 전국에 걸쳐 모집활동을 벌였으나 과연 그 성과가 어떠한지, 즉 얼마의 규모를 모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이경래와 문인방 등이 전국에 걸쳐 동조자들을 모집하며 거사를 준비해 가고 있던 도중에 '송덕상이 멀리 유배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송덕상과 연결 내지는 그의 세력을 이용하여 거사하려던 이경래의 계획이 차질을 빚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이경래는 상황이 급하다는 판단을 하고 거사를 앞당기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문인방에게 "그대가 그 동안 인재를 모으는 데에 충실했다면 일이 성사된 후에 장수나 재상으로 크게 쓸 것이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들은 거사시기를 논의하여 갑진년(1784) 7-9월 사이로 결정하고, 거사를 실현시키기 위한 마무리 작업에 힘을 쏟았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들이 상황이 화급하다고 하면서 거사 날짜를 3년 후로 잡은 것은 합리성을 결여한 것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드의 계획은 계속 추진되어 조직체계를 갖추고 공격로를 설정하는 단계로까지 진전되어갔다.
이경래를 도원수로 삼아 서울을 공략하라
먼저 거사를 위한 조직 내지는 지휘체계를 살펴보기로 한다. 이경래를 도원수로, 도창국을 선봉장으로 삼고, 박서집은 군량의 운반을 담당할 운량관으로 삼았다. 그리고 일이 성공한 후에 송덕상을 대선생으로 추대하기로 했다. 세밀하게 조직체계를 갖추지는 못했으나, 기본골격은 마련한 셈이다. 도원수 이경래는 두말할 필요 없이 사건의 총책이다. 그는 동조자들 내에서 선망을 받고 있었음은 물론이고 진중하고도 신비한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그의 위풍을 표현하여, "이경래는 눈동자가 중후하여 한번 눈을 뜨면 동네 개들이 모두 놀라 도망갔다"고 했다. 선봉장 도창국에 대해서는 심문기록이 없기 때문에 황해도 재령 출신이라는 시실 외에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주먹으로 곰을 때려잡았다"고 하고, "백 척이나 되는 절벽을 타고 올라왔다"고 하는 등 장사로서의 기질이 넘치는 그의 용맹함을 즐겨 말하곤 했다. 이밖에도 이경래나 도창국에게는 '호풍환무'하거나 '허보법'을 펼치는 재주가 있다는 등, 이들이 초인적 능력의 소유자임을 퍼뜨렸다. 이처럼 이경래 등을 초인적 능력의 소유자로 부각시킨 것은 동조인물을 원활하게 끌어들일 뿐만 아니라, 민심의 폭넓은 관심과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서였다.
한편 운량관을 맡은 박서집(52살)은 송덕상의 제자로서 유배지에서 문인방과 알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거사계획에 참여한 인물이다. 그러나 박서집이 실제로 운량관의 직책을 받아들이고 군량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했는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문인방이 운량관을 제의했을 때 나이가 많다는 이유 등으로 거절했으며, 더욱이 박서집은 이 사건의 고변자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지휘부의 면면을 볼 때 실질적으로 문인방이 빠져있다는 점이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지휘부의 명단에는 들어가 있지 않지만 실질적으로 사건을 이끌어가는 총집사의 역할을 맡았을 것이다. 조직의 기본골격을 마련한 이경래와 문인방 등은 서울을 장악하기 위한 공격로를 정했다. 이 상황을 '추안급국안'의 문인방의 진술을 통해 들어보기로 한다. '추안급국안'은 조선시대의 역모사건 등에 대한 일종의 재판기록이다. "이경래가 도원수가 되고 도창국이 선봉장의 된다. 양양에 이경래의 동당 및 노복들이 많기 때문에 불시에 공격하여 먼저 수령을 살해하고 군사와 무기를 모은 다음, 간성 고을을 토벌하고 강릉으로 돌아 들어간다. 다음에 강릉에서 원주로 직접 들어가면 원주가 아무리 큰 고을일지라도 도창국의 용력이 앉은 채로 10장을 뛰어넘으니 반드시 무적일 것이다.
말을 몰아 동대문으로 입성한 후 송덕상을 대선생으로 봉한다". 이경래와 문인방 등 지휘부는 이경래의 연고지인 양양에서 거사하여 간성-강릉-원주-동대문으로 공격한다는 루트를 정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경래의 동당' 운운하는 말 이외는 병력의 규모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들이 전국적으로 병력을 모았다고는 하지만 대규모라고 판단하기는 어려우며, 더욱이 이들이 한 곳에 모여 거사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선택한 방법, 즉 양양을 기습 점령하여 무기와 병력을 보충해가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었을 것이다. 이는 지방에서 소규모의 병력으로 거사할 때 흔히 쓰는 방법이다. 이를테면 영조 무신란 때 전국에 걸쳐 조직망을 갖추고 있었지만, 실제 거사를 시작할 때의 참여인물은 200-300명에 불과했으나, 점차 규모를 불리면서 청주성까지 점령하였다.
고변으로 거사 불발하다
지휘체계를 갖추고 공격 루트를 정하는 등 거사 준비를 착착 진행하던 중에 운량관으로 지명되었던 박서집이 고변, 즉 사건이 실상을 관아에 신고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로써 여러 해에 걸쳐 준비되었던 거사는 일순간에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아울러 이경래와 문인방 등 핵심 인물들이 속속 체포되었다. 이경래와 문인방, 백천식이 능지처사당하는 등 여러 관련 인물들이 처벌받았으며, 문인방의 출신지인 곡산부는 곡산현으로 떨어졌다. 아울러 사건의 종결 후 국왕은 신하들로부터 역적 토벌에 대한 축하를 받는 한편, 민심 위무책의 일환으로 중앙과 지방에 대사령을 반포하였다.
'정감록'이 본격적으로 이용되다
이 거사모의 사건이 정치적 의미는 정조 초기 홍국영과 송덕상의 실각한 정치상황과 관련이 깊다는 것은 앞에서 살펴본 대로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조선시대 민중운동사의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그것은 이 사건이 조선 후기에 일어난 변란의 정형으로 판단될 뿐만 아니라, 변란의 큰 특징인 '정감록 사상'을 그 이념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사건에서 비로소 '정감록'이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때는 한글판 정감록까지 나돌 정도였다. 문인방은 곡산에서 정감록을 구해 지니고 다니면서 백천식 등과 공부했다. 또 그 내용을 퍼뜨리면서 사람들을 모았다. 이때 이들이 퍼뜨린 내용을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재판기록에서도 그 내용을 기록하지 않고, 단지 '4자 흉언'이니, '6자 흉언'이라는 식으로 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건에서도 '6자 흉언'이라는 말이 나올 뿐, 구체적 내용은 기록하고 있지 않다.
이로 보아 아마도 국왕이나 국가체제를 비난하는 내용으로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정감록 사상은 책에 따라 그 내용을 달리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망정흥'의 논리, 즉 "이씨의 조선왕조가 망하고 정씨가 (계룡산에) 나라를 세울 것"이라는 역성혁명의 이념을 담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그 수단으로는 '해도기병설'의 논리, 즉 "정씨 성을 가진 진인이 바다에서 군사를 이끌고 나와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고 하였다. 이는 세련되지는 않았으나 역성혁명의 논리로 손색이 없으며, 시제로 조선 후기에 일어난 여러 변란에서는 은연중에 또는 공공연히 정감록의 역성혁명 논리를 내세웠다. 이는 거사의 명분을 확보하고 동조인물을 원활히 포섭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이제 조선후기의 정감록 사상은 강력한 민중사상으로 가능했던 것이며, 이 사건은 그러한 대표적 사례이다.
해도기병설의 이상향 '소운릉’
이 사건은 '정감록'이라는 이름을 본격적으로 내걸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해도기병설'의 논리가 구체적으로 적용되었다는 점에서도 매우 주목할 만하다. 이 사건에서의 해도는 곧 '소운릉'으로, 여기에 해도기병설의 실체가 응축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문인방과 박서집의 진술을 통해 어느 정도 실체가 드러난다. 이들의 진술내용를 종합해볼 때 이 사건에서 '소운릉'의 의미 내지 성격은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소운릉이 군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문인방은 박서집에게, "양식을 전장으로 운반해야 한다"거나, "전장은 소운릉에 있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이로 보아 소운릉은 거사 때 식량을 조달할 루트로서의 기능과 함께 군사적 비밀 거점으로서의 기능도 갖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이들에게 소운릉은 물산이 풍부하여 경제적으로도 가치가 컸다. 즉, 문인방은 소운릉의 자연조건을 가리켜, "땅이 비옥하고 곡식이 매우 풍성하다"는 말을 자주 했다. 이는 면밀히 검토하면 소운릉은 평범한 해도가 아니라 자체적으로 경제생활을 꾸릴 수 있을 만큼 자연조건이 탁월한 곳이며, 그 자체로 민중의 이상사회에 대한 열망을 수렴한 곳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소운릉과 관련된 기사를 검토해볼 때 소운릉을 실재하는 섬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그것은 소운릉이 발음이 같은 '울릉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명백히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위치를 '백두산 아래', '삼척 바다', '남방 해도' 등으로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일정하지 않다는 점이다. 또한 실제의 전장은 앞에서 본대로 양양 등의 지역으로 소운릉과는 무관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면 문인방 등은 소운릉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그 답은 정감록의 '해도기병설'의 뜻하는 진정한 의미, 즉 이상사회에 대한 민중들의 꿈을 소운릉에 투영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소운릉은 허균의 소설인 홍길동전의 '율도국'과 같은 이상사회였던 것이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민중들은 누구나 가슴 속에 이러한 이상사회에의 꿈을 간직하고 있었고, 그날이 오기를 손꼽이 기다리고 있었다.<글 고성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