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평사·1 외 2편
-서시
1923년 4월 25일 경상 땅 진주에서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천명한 최초의 형평운동이 일어났더라 이는 형평사를 중심으로 기층 천민들의 계급과 지위 향상을 위하여 전개한 신분 해방 운동의 효시에 다름 아니었더라.
1.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
양반 출신 지식인들과
백정 출신 지식인 장지필
재력가 이학찬
진주 중앙시장 정육점 상인들
진주 백정 350여 명이
한날한시 한자리에 모여
한마음으로 봉기한 사건이자 혁명이었더라
내 나라 사람이 괄시하니
식민 시대의 일본 놈들까지 모든 행정에서 차별을 자행하고
민적 앞에 붉은 점을 찍거나
도한屠漢으로 기재하였더라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입학 원서나 기관의 제출 서류마저
천시와 차별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니
마침내 그에 대한 의분들을 천지 만물과
만천하에 발고 되는
새날의 아침이 도래하고야 말았더라
쌍말과 쌍욕이 된 백정 놈의 칭호를 일소하고
참다운 인간의 지위를 돌려받고자
대나무밭의 죽순들처럼
오롯이 솟구쳐 오르기에 이르렀더라
진주 형평사의 참된 의의는
신분에 따른 적폐를 향하여 쏘아 올린
이 나라 최초의 인권 해방 운동의
시발이자 출발이었더라
세세생생 기록되어 남아 있게 될
인권 역사의
장엄한 한 페이지가 되고 말았더라
2.
길가의 벚꽃 잎들이
난분분 땅으로 내리는
무르익은 봄날이었다
진주 대안동 청년 회관에서 창립 대회가 막을 올렸다
전국 사회단체와 양식 있는 지성들로부터
축하의 화환들과 격려 전보들이 답지하였고
각지 백정 대표 80명이 합류하였더라
형衡
수평의 저울대처럼
평平
평등하고 공평한
사社
사회를 지향하는
형평사衡平社의 고고성이 널리 널리
울려 퍼져 오르고야 말았더라
그 발상지인 진주에
조선 형평사 본부를 두고
대표에는 강상호가 선임되었다
장지필은 위원장에 추대되었고
마침내 진주 형평사는 위원장과 사장의 이원 조직으로
운영의 기틀이 마련되었더라
선봉에 나선 장지필이 대외적인 실무를
거행하기로 정하여졌다
발기총회에서 결정된 주요 사칙은
진주 본사를 중심으로
각 도에 지사를 설립하고
그 아래 각 군을 태동시키기로 합의하였다
혁명의 바람은 들불처럼 타올라
마침내 1924년 2월
전국의 지사·분사 대표들의 회합에는
그 임원들의 숫자만 해도
300명이 넘어서게 되었더라
그렇게 12개 지사와 67개 분사를 설립하고
전국 50만 백정의 신분 차별 철폐를
천하에 천명하기에 이르렀다
한편으로 형평사 본부에서는
사원들의 친목과 품행에 따른
주지主旨와 규칙을 서류로 남기고 발표하였다
“사회의 동정으로 형평사가 창립된 것은 감사의 말씀을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운동은 애걸이요 호소이지 반항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목적은 해방되어 평등 대우만 받게 되면 그만이외다.(하략)”
이는 선구자 장지필의 위원장 수락 자리의 입장문의 일부분이다
그 속내가 애틋할뿐더러 조심스러움 또한
애틋하기 그지없어 보인다
3.
전라도 이리의 백정들은
동인회를 조직하고
시가 행진을 하며 격문을 거리에 흩뿌렸다
“열광하라 백정들아!
용감하라 백정들아!
우리는 다 같은 사람으로서
불합리한 제도에
오랫동안 희생이 되어 왔다
원통하고 억울하지 않은가
천대와 멸시로 학대받은 우리가
호소할 곳이 없어
아비와 아들이 서로 붙들고 울고
어미와 딸이 서로 부둥켜안고 얼마나 울었던가
생각해보라 우리의 피눈물을
골수 골수에 맺힌 설움을 씻고
한 많은 우리 선조들의
외로운 넋을 풀어드리고
우리의
자녀들의 새 세상을 위해
궐기하라! 분기하라!
그리고 행동하라!“
4.
1924년 천안에서
오성찬 등이 주동하여
형평사 혁신회 발기회를 가졌더라
백정의 권익을 넘어
민족해방 투쟁을 도모하고자
자금 확보를 위해 피혁 공장을 설립하여
경제력 확대를 꾀한 혁신파들은
잡지를 간행하여 사회의 동조를 얻고
회원의 자각을 일깨우고
철천지한이던 학교를 설립하여
백정 자녀의 교육 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하였더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민족해방운동으로 발전한 형평운동!
이때의 장지필은 혁신파였고
진주의 강상호, 신현수 등은
초기 노선을 고수한
온건 보수파로 나뉘기도 하였더라
형평사 본부가 있던 진주에서
그에 따른 탄압이 시작되었다
진주 농민 2천여 명은
형평사 해지를 결의하고
40명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불매운동을 벌이고
형평사를 습격하였다
북과 장구 꽹과리를 두들기며 시가행진이 벌어졌고
“신백정 강상호는 돈에 팔려 백정이 되었다”
깃발을 흔들며 소란과 난동이 이어졌다
반대 운동은 전국으로 퍼져 나가서
학교에서는
입학한 백정 자녀를 퇴학시켰고
몽둥이로 무장한 반대 세력들이
닥치는 대로 백정들을 두들겨 패거나
상점이나 식당에 들어온
백정을 몰아내고
유곽이거나 편의 시설에서도
이들의 출입을 제한하기에 이르렀다
5.
1925년 8월 9일 경상 땅 예천에서
형평사 예천 분사 창립 2주년
기념식이 열리는 날이었더라
이날을 기해
반대 세력들이 식장에 난입 하였다
오백여 명의 농민 주축 난입자들은 닥치는 대로
형평사 사원들을 구타하고
기물을 파손하였으며
중앙에서 온 장지필, 이이소 등을
집중적으로 폭행하였다
장지필 등은 곧바로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이이소는 기둥에 묶여 두들겨 맞기에 이르고 말았다
농민패들은 형평사 사원들에게
다시 백정이 되겠다는
항복 문서까지 받아냈음에도
나중에는
이들의 집을 부수고
목숨까지 위협을 가하여
가족들이 몸을 피해
산과 들로 도망쳐
노숙을 하게 되는
참상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장지필은 온갖 수모를 당하며
목숨이 경각에 달리는 지경을 맞기도 했지만 그는
거기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있었다
이반離反인들의 묵은 양반 의식을 타파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였다
예천 사건이 터지고 나자
전국의 형평사 사원들은 물론이고
양식 있는 사회단체에서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물심양면의 지원들이 이들에게 용기를 주었고
사원들의단결 의식 또한
높아져 가기 시작하였다
진주와 각 분사 간의 연합전선이 모색되어가자
강상호와 장지필은 다시
맹약의 손을 굳게 잡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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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평사·4
-백정도 사람이다 1
무엇이 부끄러우랴
아비의 아비들은 말 타고 활을 쏘던
용맹한 전사였더니라
양민의 白에 병정 丁이 합쳐져
백정인 것이었더라
왕가들 후손도 아니고
정승 판서 자제도 아니었어도
우리들은 하늘의 아들이었고
대지의 딸들로 태어난
백정은 본디
사람의 자손임에 틀림 없었더라
고조선의 초원을 달리던
조의선인의 씨앗들이었고
노래와 춤으로 하늘을 경외하는
팔관회 대동 한마당에 늘어선
선량 선비들의 마음 같았고
예인의 핏줄이었더라
여진, 거란, 몽골, 발해, 만주 벌판을 달리던
자유로운 영혼의 유목민들이었더라
고조선의 대륙과 정신이 사라지고
천손의 맥이 끊어지고
더 이상 우리가 우리가 아닌 세월 속에서
하늘의 자손이었던 천민天民이
어느 사이 비천한 천민賤民이 되어
천대와 멸시의 나락에 빠지게 되고 말았더라
하지만 우리는
천손의 기능과 재주를 이어 왔더라
북방의 수렵 이민족이라며
붉은 낙인을 찍었어도
북방의 핏줄이라면 누구나
산과 들에 나가 활 쏘고 말달리며 사냥하는
마침내
잡은 고기는 우리가
우리의 손으로 공평하게 분배해온
우리는 백정이었더라
우리는 우리들 끼리 모이고
어울려 살아 내려온
백정의 살림살이이었더라
백정은 기필코
사람의 자손만대 이어져 내려갈
강물과 계절과 바람의 씨앗들이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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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평사·6
-진주, 진주 사람들 3
“백정들의 생활을 개선 시키지 않고 한 인간으로 사는 것이 위선이며 식민지 상황에서 조선인들끼리 차별하고 탄압하는 것은 결국 일본의 식민 통치를 돕는 어리석은 일이다 인간은 저울처럼 평등하다”
이 말은 진주 사람 백촌 강상호의 외침이다
임술년 진주민란이나
갑오농민전쟁의 계보를 이어받은
진주 청년 지식인들은
새롭게 열린 자본사회 속에서
생업에 열중하는 선량한 백정들을
무심코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형평사 운동의
큰 물줄기였던 백촌 강상호는
나라가 망할 무렵에
스무 살의 청년이었다
그는 훗날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이력이 있었고
기미년 3.1운동에도 앞장섰으며
다양한 사회운동의 경력으로
1년 6개월의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진주 사람,
강상호!
가난한 마을 농부들의
세금을 대납하여 주었던
진주 천석꾼의 장자였던 사람이었다
백정의 자식을 두 명이나
양자로 들여
아이의 손을 잡고 학교에 갔더라
백정의 자식이라
취학이 허락되지 않자
그 부당함에 치를 떨게 되었더라
이 아이들을 입학시켜주시오
품 안에서 호적 서류를 꺼내 보이며
아이들이 자신의 양자들임을 밝혀야 했다
명실상부한 양반 가문의 장손이
오래된 편견과 차별 앞에
두 눈을 부릅뜨게 되었더라
백정 놈들의 단체인 형평사 사장이 되어
스스로 백정의 길로 들어선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진주 사람, 강상호였더라!
형평사 발족은
진보 사회단체와
일부 여론의 호의를 입기도 하였으나
한쪽에서는 반발이 일어나고
1923년 5월 24일에는
수백 명의 진주 농민들이
형평사 해산을 요구하고 나섰다
나중에는
정육점 고기의 불매 불식 운동이 벌어졌는데
그해 8월에 이르자
1만여 명의 농민들이
형평사 폐지를 위해 거리로 몰려나왔다
그들은
형평사를 지지한 청년회와 교육회 등의
건물을 파괴하고
인명을 향한 무차별한 폭력을 자행하고 말았다
어느 날은
탁윤환이란 자가 형평사 근처에서
백정 놈들 운운하며 시비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형평사 사람들과 한바탕
드잡이가 벌어졌는데
나중에 탁윤환이는
제 패거리를 몰고 와
형평사 사장 강상호의 뺨을 때리고
옷을 찢어발기는 폭력을 자행하였다
경찰서의 경관들이 출동하여 이 사태를
간신히 진압하기에 이르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그들은
형평사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모두 다
백정으로 치부하겠노라 선언하고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 등의 이름이 적힌
신백정의 깃발을 들고
곳곳에서 시위하였으며
그들의 집까지 떼로 몰려가
갖은 행패를 부리기 시작하였다
“사람은 모두 똑같은 사람이다
백정도 사람이고 양반도 사람이다
인간은 저울처럼 평등하다“
그러나 강상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스스로 ‘신백정’의 길을 걸어 나갔다
한편으로
경찰들 역시 형평사의 세력을
적대시하는 것은 물론
식민 통치에 방해되는
불온한 사회운동이라고
방관과 경멸의 자세를 취하는 모습이었다
양반가들은 물론
문중의 외면과 따돌림들이
강상호의 슬픔과 외로움이었다
황소가 굴러도 꺼지지 않는다던
집안의 재력도
그가 추구했던 평등의 신념 앞에서
촛불처럼 사위어 가고 말았는데
해방 후 북한군 점령기에
억지로 덮어쓴 좌익 감투가
다시 또,
그를 찍어 누르는 족쇄가 되고 말았다
그가 일찌감치 좌익들과 척을 대고 지내왔지만
남은 재산까지 반공 세력들에게 빼앗기고 나니
말년의 현실 앞에서는
자식들 교육에도 허덕이고
땟거리까지 마땅치 않은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다가
1957년 쓸쓸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나갔다
진주 사람 강상호는 의인이었다
그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었는지를
그가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이었는지를
뒤늦게 알게 된 사람들이
전국에서 모여들어
50만의 인간 띠를 이루었으니
그들이 바로
이 나라의 백정들과
신백정의 무리들이었다
양반의 신분을 팽개치고
전 재산을 희사해 가면서
취학의 개방과 인권 해방 계급 타파를 위하여
선봉에 섰던
그의 장례식은
그렇게 전국 축산기업 조합장葬으로
9일장으로 치러졌다
진주 시내에서 장지까지 이어진
사람의 행렬이
남강 오백 리 물길과도 같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