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가가 어떤 특정 사건의 법원 판결을 비판할 때는 매우 신중할 수밖에 없다. 직관적으로 볼 때 그 판결이 부당하다고 생각해도 단순히 시중여론에 편승해 비난하는 것은 법률가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는 한 부적절하다. 그런 이유로 이재용 항소심 판결이 정의 관념에 반한다는 여론의 빗발치는 화살을 맞고 있음에도 그것을 쉽게 비판하지 못했다.
어제 오늘 판결문 원문을 입수해 정독했다. 이 판결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말이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은 작업이다. 판결문이 무려 A4 용지 164쪽이나 되니 말이다. 몇 번을 반복해서 읽고 나서야 이 판결의 문제점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법률가가 아니고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여러 쟁점이 있는 바, 앞으로 대법원에서 피고인 측과 특검 간의 진검승부가 다시 한 번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잘 아는 바처럼 대법원은 사실심이 아닌 법률심이다. 그것은 대법원이 1심이나 2심 항소심처럼 특검이 제출한 증거를 토대로 (공소범죄) 사실의 당부를 판단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법률심인 대법원은 항소심 판단에 법률적 오류가 없는지를 살피게 된다. 물론 이 사건에서 사실인정의 잘잘못도 따질 수는 있지만 그것은 법령적용의 잘잘못을 따져본 결과로서 탓할 수 있는 것이지 그 자체가 처음부터 심리대상이 될 순 없다.
그런 면에서 이 사건 최대 쟁점인 이재용으로의 경영권 승계작업의 존부와 그에 기초한 부정한 청탁 여부의 사실인정을 대법원에서 바로잡기 위해서는 항소심이 논리칙이나 경험칙에 명백히 반해 사실인정을 했다는 것(이러면 법령위반이라는 판단을 받을 수 있음)을 주장 입증해야 하는 데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그럼에도 특검은 항소심 재판을 뒤집기 위해서 여기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대법원이 쉽게 항소심 판단을 깰 수 있는 부분이 있다. 판결문상 두 개가 뚜렷하다.
그 첫 번째 대상이 안종범의 업무수첩(김영한의 업무수첩 포함)의 증거능력에 관한 문제다. 항소심은 이 업무수첩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검찰이 입증해야 할 범죄구성요건인 ‘부정한 청탁’의 존재를 인정할 주요 증거 하나를 날리고 말았다. 1심은 안종범의 수첩은 박근혜와 이재용 사이에 있었던 내용을 인정할 간접사실에 대한 증거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한 반면, 항소심은 그 수첩으론 그러한 간접사실마저 인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런 견해차는 우리 형소법의 증거법칙에 관한 상이한 해석에서 온 것이므로 대법원이 최종적으로 판단할 필요가 있다.
내가 검토한 바에 따라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대법원 판례에 비추어 볼 때 항소심의 증거능력 판단은 잘못 되었다고 본다. 항소심은 판결문에서 대법원 판례(2012도2937, 2012도16001)를 제시하고 있지만 그 취지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 이들 판례의 취지는 타인의 진술을 내용으로 하는 진술이 기재된 서류의 경우엔, 그 진술의 진실성과 관계되는 사실에 대해서는 증거능력이 없지만, 그와 같은 진술을 하였다는 것이나 진술의 진실성과 직접으로 관련 없는 간접사실에 대한 증거로는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 판례 취지에 따라 이 사건을 판단하면, 그 업무수첩으로부터 박근혜가 수첩 기재내용과 같은 발언을 안종범에게 말했다는 사실(바로 이것이 원심이 인정한 간접사실임)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이것을 인정하게 되면 다른 간접사실과 함께 박근혜가 이재용을 만나 수첩기재와 같은 내용의 말을 주고받았다는 것까지 인정할 수 있음). 항소심이 이것을 부정한 것은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줄 수 있는 결정적 스모킹 건을 휴지조각으로 만든 것으로 실체적 진실을 외면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두 번째로 대법원이 항소심의 법률적 오류로서 확실히 지적할만한 것은 뇌물공여죄 유죄인정 부분의 액수이다. 항소심은 정유라가 독일에서 승마훈련을 위해 제공한 마필 등에 대한 용역대금 36억을 뇌물공여로 인정했다. 하지만 특검이 주장한 마필 소유권의 (최순실로의) 이전은 인정하지 않고 단지 마필의 사용수익만을 뇌물로 인정하면서 그 액수는 불상의 이익이라고 판단했다.
이 부분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판단이다. 설혹 마필의 소유권이 최순실에게로 이전되지 않았다고 해도 상당기간 고가의 마필을 무상 사용했다면 그 사용대금 상당액이 뇌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항소심은 이의 액수 산정을 하기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은 것이다. 정상적인 재판이라면 재판부가 이 부분의 액수 산정을 위해 직권조사를 하거나 특검 측에 공소장을 변경해 입증토록 요구했을 것이다. 여기에서의 액수는 뇌물의 총액에 따라 적용법조와 양형이 달라지기 때문에 만연히 산정불가의 판단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대법원에서 이 부분을 어떻게 평가할까? 항소심이 중대한 심리미진의 위법을 범했다는 판단을 할 만한 부분이다.
항소심 판단이 대법원에서 유지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아무래도 이재용은 잠시 집으로 휴가를 나왔다고 생각하는 게 좋을 것이다.
- 페이스북 담벼락에서
첫댓글 참고글 감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