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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 고인돌이야기
박 신 구
1. 들어가는 말
2020년 7월 7일 오후 1시(현지시각)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209차 유네스코 집행이사회에서 연천의 한탄강이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최종 인증됐다.¹
30만~50만년 전 구석기 시대에 인류의 첨단기술로 만들어진 애슐리안 주먹도끼는 그 동안 서양(유럽,아프리카)에서 만 발굴되어 구석기 동양인들을 비하하는 학설에 대표적인 사례가 되어왔다. 그러나 1978년 연천에서 30만년 전에 사용되었던 정교한 주먹도끼가 발견되면서 서양의 구석기인들 만 똑똑했다는 기존의 학설을 뒤엎는 대사건이 있었다. 그 동안 서양 구석기인들의 우월성 주장에 기를 펴지 못하던 동양의 고고학자들은 환호했고 연천군에서는 이를 국내외에 널리 알리기 위해 구석기 축제로 연결시켜서 벌써 28회(2021년 5월 예정)를 맞고 있다.²
2. 고인돌 연구의 필요성
NEWS 여의도 신문 2019년 8월 23일자 기사에 따르면 국립중앙박물관 배기동 관장은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한국의 고인돌과 거석문화축제를 주제로 한 학술 세미나’(세계거석문화협회와 유성엽 국회의원 주최)에서 “전곡선사축제가 연천 지역경제의 중요한 자산으로 부각되고 있듯이 거석문화축제도 고인돌 문화를 전승하는 수단으로, 나아가 지역적인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역활을 하는 축제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³ 전곡선사축제가 성공한 축제의 전형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한편 같은 기사에서 동북아고고학회장 임효재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는 “중국의 한족에겐 거석문화는 있으나 고인돌 문화는 없다고 강조하면서, 고인돌 문화만 잘 보존 발존시켜도 우리 민족사의 일부를 중국에 편입시키려는 시도를 무력하게 만들 수 있으며, 나아가 한민족에게 독특한 문화 유산인 고인돌이 세계유산이 되고 한반도가 고인돌 문화의 본거지가 될 때, 우리민족의 독자성과 우월성은 국제적으로 공인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⁴ 우리나라 고인돌 문화의 연구가 중국의 동북공정을 막아내고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증명할 근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운영하는 관광지식정보시스템에 공식 집계된 연도별 연천 관광객 수는 2014년 51만 명, 2015년 56만 명, 2016년 91만 명, 2017년 81만 명, 2018년 74만 명, 2019년 124만 명 등으로 관광객 증가 추이가 확연하다.⁵
이에 연천군은 향후 3년간 1000만 관광객 유치를 목표로 2020년 1월부터 2022년 12월까지 ‘연천 방문의 해’로 정하고 기본계획을 짰다가 코로나19로 인해 2020년 10월~23년 9월로 재조정하고 그 이벤트로 2020년 10월 16일부터 5일간 하루 3회 ‘한탄강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카약 체험교실’을 운영한다.⁶
필자도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내일(10월16일) 13시에 신청했는데, 글을 쓰고 있던 조금 전 예약확정 문자를 받았다. 카약을 타고 한탄강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을 둘러 볼 생각에 벌써 마음이 설렌다.
이렇듯 연천하면 구석기 시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그 구석기인들의 후예들은 어떤 흔적을 남겼을까? 그에 대한 답이 바로 ‘고인돌’이다
마침 연천역사통일아카데미(남북역사교류협회 주최)에서 2020년 10월 8일에 ‘고조선과 연천의 고인돌 유적’이란 제목으로 충남대 황재훈 교수 강의를 진행하였다.⁷ 평소 고인돌 공원을 즐겨 찾으며 관심을 가졌던 나에게 고인돌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고 모교인 충남대의 교수님 강의라서 더욱 몰입해서 들었다. 이 강의 내용을 중심으로 고인돌에 대해 글을 정리해 볼까한다.
3. 고인돌이란 명칭
고인돌은 거대한 돌을 고이는 돌, 즉 지탱하는 돌이란 뜻의 한자어 ‘지석묘’로 불리는데 1984년 한국고고학연구소가 낸 <한국고고학개정용어집>에서 '지석묘'를 '고인돌'로 하자고 해서 고여있는 돌 이란 뜻의 고인돌이라 부르고 있다. '고인돌' 이름을 논문에 맨 처음 쓴 사람은 한흥수(韓興洙, 1909∼?)다. 한흥수가 1935년 〈조선의 거석문화 연구〉 논문에서 우리나라 거석문화를 선돌, 고인돌, 칠성바위, 독무덤으로 구분하여 언급한 후부터 우리나라 고고학자들이 고인돌이란 이름을 자주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고인돌의 명칭은 나라마다 다른데 북한은 고인돌,일본은 지석묘, 중국은 돌로 된 지붕은 석붕이라하고 지하매장은 대석개묘(거대한 뚜껑돌을 가진 묘)라 하며 유럽은 켈트어로 돌(탁자)+멘(돌) 즉 'Table stone'이라 부른다.⁸
연천 통현리 고인돌과 같은 탁자식 고인돌은 발굴 초기에 북한과 중국에서 많이 발굴되었다고 해서 북방식 고인돌이라고도 불렀는데 70년대 이후 많은 발굴이 이뤄지면서 전남, 경상도 지역에서도 탁자식 고인돌이 발굴되면서 북방식 고인돌이라는 명칭은 쓰지 않게 되었다.
연천 탁자식 고인돌은 외형과 출토된 유물 뿐 아니라 세부적인 무덤구조가 대동강 유역의 고인돌과 무척 비숫하다. 이로 미루어 우리나라 고조선 시대인 청동기 시대에 대동강 지역과 임진강,한탄강 인근 사람들의 문화적 접촉과 왕래가 있었을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하다.⁹
4. 고인돌의 제작 시기와 방법
고인돌이 만들어진 시기가 유럽은 신석기였지만 우리나라는 청동기라는 걸 밝힌건 60년대 북한의 고고학자들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고인돌 연구는 다른 고고학 연구에 비해 일찍 발달되어 일제시대부터 110년 정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해방이후 60년대까지는 북한에서 고인돌에 대한 활발한 연구가 이뤄졌는데 이때의 연구로 영국이나 서유럽처럽 신석기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예상하던 우리나라의 고인돌이 청동기 시대에 축조되었음을 밝혀낸 것이다. 그러나 1967년부터 주체사상이 북한의 고고학에 영향을 끼치면서 변질되어 갔다.
반대로 남한은 70년대 들어 전국적인 국토개발 운동이 일어나면서 댐이나 도로등 대규모 지반 공사 중에 괄목할 만한 고고학적 발굴들이 이뤄졌고 고인돌의 발굴과 더불어 활발한 연구가 동시에 진행되었다.
이후 80년대에는 고인돌 연구가 유물,유구,구조등의 연구에서 벗어나 청동기 사회의 경제,문화,정치를 아우르는 데 까지 발전하였으며 근래에 이르러서는 고인돌 문화 연구가 권력자의 위계,계층,영역,힘의 작용, 행위등을 연구하여 청동기 시대 사회상을 복원하는 수준에 까지 이르고 있다.¹⁰
우리나라 청동기는 기원전 15세기에 시작된다고 볼 수 있는데 고인돌 무덤이 형성된 시기는 대체로 기원전 11세기 이후부터 철기 시대 이전의 기원전 3세기까지의 시기로 보이며, 요동 지방은 그보다 앞선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김해 구산동 지석묘는 상석의 길이가 10미터, 너비가 4.5미터, 두께는 3,5미터 무게는 약 350톤에 달하는 만큼 큰 구조물인데 여기에 청동기 시대의 사회를 엿 볼 수 있는 힌트가 있다.
실험고고학을 통해 1톤의 돌을 운반하는 데 20명의 힘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으므로 350톤의 고인돌은 7천명의 사람이 모여야 운반이 가능하다고 예측할 수 있다. 과연 청동기 시대에 김해 지역에 그 많은 사람이 어떻게, 무슨 이유로 모였을까?
아마 여러 마을이 연맹형태로 모였지 않았을까? 특히 이 고인돌은 묘역시설의 길이가 약85미터나 되고 폭이 19미터나 되는데 여기에 깬돌을 차곡차곡 쌓고 주변에는 주구 즉 물도랑을 2미터 폭으로 만들었다.
왜 여러마을이 모여 힘을 합쳐 이런 공사를 했을까?
구석기를 지나 신석기에는 이동하면서 수렵채집생활을 했는데 청동기에 들어서면서 한곳에 정착하면서 농경을 시작했는데 이때 품앗이를 하면서 서로 관계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고인돌의 거대함과 출토되는 유물들의 희귀성을 보면 족장 등의 신분계층이 있었을 거라는 주장과 평등사회 였을 거라는 주장이 같이 제기되고 있다. ¹¹
연천의 가장 큰 고인돌은 차탄리 고인돌인데 5.5미터 정도 된다.
5. 고인돌의 역할
일반적으로 고인돌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은 세트를 이뤄서 출토되고 있다. 무덤방에서 적색마연(갈아만든)토기와 석검(간돌검), 간돌화살촉, 옥돌과 동검이 나타나기도 한다. 청동기 시대 이른시기의 석검은 이단병식(손잡이가 둘로 나눠있음), 청동시대 늦은 시기에는 일단병식(손잡이일체형) 이 보이고 화살촉도 이른시기에는 슴베가 안달리고 늦은 시기에는 슴베가 달린 화살촉이 무덤에 부장되어있다.
우리나라 고인돌의 기능에 대하여 여러 가지 학설들이 있었으나 1967년 충북 제천 황석리 고인돌에서 완전한 사람뼈가 발굴되면서 무덤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고인돌의 또다른 기능으로는 죽은자를 기념하며 공동체의 조직을 다지는 역할이나 기념물로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고인돌은 상석,지석,묘역시설,무덤방의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형식은 탁자식, 기반식(바둑판식), 개석식(상석아래 바로 묘옥시설이 이어지고 지하에 무덤방), 위석식(제주 용담식)이 있다. 특히 유네스코에 등재되어 있는 고창 지석묘에서는 거의 100기가 열을 지어 군집되어 있는 형태를 볼 수 있다.
동아시아 지역의 고인돌 분포를 보면 대동강지역과 임진강,한강유역에도 군집을 이루고 있으며 전남,영남지역에 아주 큰 밀집도를 보이고 있으며 바다를 건너 일본에도 건너갔다. 전남에 2만기, 영남에 4천기, 경기도 500기, 연천에 30기 이상이 발굴되고 있다. 북한의 고인돌은 대동강 유역에 4000 여기가 분포되어 있다. ¹²
6. 연천의 고인돌
연천의 고인돌 발굴 현황을 보면 유실되거나 파괴된 것을 포함하여 12 마을에서 총 31기가 분포하고 있으며 대부분 임진,한탄강,차탄천 유역에 분포한 데서 알 수 있듯이 큰강 유역의 평지와 구릉지에 분포하고 있다.
가장 많은 고인돌이 발견된 곳은 통현리로 고인돌 9기가 발견되었다.
이러한 고인돌들은 현재는 향토유적, 경기도기념물로 지정되면서 관리 보존되고 있으나 과거에는 훼손,방치되었었는데 특히 삼곶리 고인돌이나 삼거리 고인돌 등은 군부대의 기념비나 학교의 교훈비로 사용된 예가 있다. 양원리 고인돌은 최근에 도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양원리에서는 고인돌을 거북바우,할미바우라 부른다. 실제로 필자가 양원리 고인돌을 취재하러 가서 만난 이 모 어르신(89세,여)은 고인돌을 할미가 치마에 품고 왔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고 하면서 60여년 전까지 고인돌 근처에 호랑이가 살아서 공포와 신비로운 돌로 알려졌었다고 말했다.
7. 고인돌 찾아보기
이렇게 우리 주변에서 고인돌이 발견되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일반돌과 구분할 수 있을까? 연천의 산지나 주변 들판에서도 자연석이나 일반적인 거석 또는 괴석(塊石)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를 고인돌로 판별하는 방법을 알아보자.
탁자 모습을 하고 있는 탁자식(북방식) 고인돌과 받침돌을 덮개돌 밑에 바둑판 모양을 한 기반식 고인돌은 잘 살펴보면 그 모양 자체로 알아볼 수 있다. 개석식 고인돌의 경우는 알아보기가 다소 어려운데 다음의 경우를 참고하면 좋겠다.
- 주변에 석재가 없는데도 바위 같은 돌이 무리를 이루고 있거나, 열을 지어 있는 등 일정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 덮개돌이 장방형이나 타원형으로 대개 3대 2정도의 길이와 폭을 가지고 있으며, 덮개돌의 한부분이 흙 밖으로 돌출되어 있다.
- 덮개돌이 대부분 인공적으로 다듬은 돌이기 때문에 덮개돌의 가장자리를 일정한 형태로 다듬은 흔적이 보인다.
- 강가나 산 끝자락의 낮은 언덕에 위치하고 있는지 살펴본다.
이러한 고인돌을 그 옛날의 조상들은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 추측해 보면 아래의 과정을 거쳤을 것으로 예상된다.
ㄱ. 덮개돌을 구하기 쉬운 바위나 암벽이 있는 산 주위나 강가에 평지, 구릉, 산기슭 등 좋은 자리를 찾는다.
ㄴ. 암벽에서 덮개돌을 떼어내는 데는 바위틈이나 암석의 결을 이용하여 인위적인 구멍을 파고, 이 구멍에 나무쐐기를 박아 물로 불려 떼어내었을 거라고 생각된다.
ㄷ. 덮개돌이나 받침돌로 이용할 돌감을 끈, 지렛대, 통나무바퀴 등을 이용하여 운반하였다고 추측되는데 실험고고학 결과 보통 한 사람이 일반적으로 100㎏ 정도를 움직일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ㄹ. 받침돌 역할을 할 돌감을, 판 구덩이 속에 밀어 넣은 다음 받침돌이 흔들리지 않게 작은 돌로 옆을 가득 채워 튼튼히 다진다.
ㅁ. 받침돌 2개를 똑같은 높이로 세운 후 받침돌이 파묻힐 만큼 흙으로 언덕을 만든다.
ㅂ. 언덕의 경사를 따라 둥근 나무를 밑에 깔고 덮개돌을 끌어 올린다.
ㅅ. 밀고 끌어서 올린 덮개돌을 받침돌 위에 놓은 다음 받침돌까지 파묻었던 흙을 치운다.
ㅇ. 주검을 받침돌 사이에 넣는다.
ㅈ. 막음돌로 받침돌의 양쪽을 막으면 고인돌이 완성된다.¹³
8. 고인돌 연구의 활용
최근 이집트 정부는 코로나19 등으로 타격을 받는 관광산업의 활성화를 위해 고대 유적지의
유물들을 잇달아 공개하고 있다. 관광유물부는 2020년 9월 사카라에서 2천500여년 전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목관 27개를 공개했다. ¹⁴
고인돌이 세워진 연대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유럽과 아프리카는 기원전 5,000년 ~ 기원전 4,000년, 동아시아는 기원전 2,500년 ~ 기원전 수백 년 전후로 추정된다. 이집트 정부가 공개한 목관과 같은 시기에 우리나라에는 고인돌 문화가 있었던 것이다.
고인돌에서 사람뼈가 출토된 것은 충북 제천 황석리, 강원 춘천 중도, 대구 달성 진천동, 경남 진양 대평리 등의 예가 알려져 있지만 중국 길림지역과 북한지역에서도 사람뼈가 출토되었다는 다수의 보고가 있다.
특히, 황석리 고인돌 사람뼈는 176센티미터 정도의 키에 장두형(長頭形)의 두개골로 완벽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9. 맺음말
이집트에서 범국가적인 차원으로 목관 등의 유물을 관광산업에 활용하듯이 우리 연천군도 이미 국내외에 널리 알려지고 있는 구석기 축제와 연관지어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 같은 유적을 홍보하면 연천군에서 목표로 하고 있는 3년간 1000만 관광객 유치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건의해 본다.
연천군청 홈페이지에 연천군 공식캐릭터인 ‘고롱이 미롱이’의 ‘고롱이’는 고대, 구석기, 고인돌 등 과거를 상징하는 ‘고’자를 의미한다고 소개되어 있다.
연천군은 2016년부터 매년 한탄강 국가지질공원을 주민에게 홍보하고 지역에 대한 관심과 애착심을 높이기 위해 연천문화원과 함께 한탄강 국가지질공원 주민탐사단 주민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주민탐사단은 연천군 국가지질공원의 지질뿐만 아니라 역사·문화·생태·고고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를 초빙해 매주 교육하고 현장학습을 통해 지역의 가치를 배우고 연천을 많은 이들에게 알리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데 이 프로그램에 고인돌을 소개하는 시간이 마련되어 있다. 필자는 이 탐사단에 참여했던 경험으로 고인돌과 연천의 역사에 관심있는 주민들에게 참여를 적극 권한다.
(유튜브에서 ‘연천 고인돌이야기’를 검색하시면 연천지역 고인돌 탐사 영상을 볼 수 있다)
참고 문헌
1) 조선일보 2020.07.10 사회면
2) 연천구석기축제 홈페이지
3),4) NEWS 여의도 신문 2019년 8월 23일
5) 관광지식정보시스템 주요관광지점 입장객 통계
6) 동두천연천 시사신문 2020.09.21. 지방자치면
7) 유튜브 [고조선과 연천의 고인돌 유적] 황재훈
8),9)이영문, 《고인돌 이야기》, 다지리, 2001
10)유튜브 [고조선과 연천의 고인돌 유적] 황재훈
11) 사이트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청동기 시대의 비밀을 간직한 고인돌]
12) 우장문,김영창 [세계유산강화고인돌]
13)이영문, 《고인돌 이야기》, 다지리, 2001
14)연합뉴스 2020.10.04. 사회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