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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남면 마을유래-부여군 마을 유래(1개읍 15개면 중)[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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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인 이야기가 곳곳에 숨어 있는
달콤한 부여 여행 '이토록 달콤할 수가 –
부여 with 이선희,이금희,잔나비 최정훈’
(KBS 2022.02.03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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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백제의 숨결이 깃든 땅…부여/
(연합뉴스TV 20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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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부여/백제 관련 동영상 모음
https://blog.naver.com/jydecor/222020784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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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룡리(三龍里)
서쪽에서 흘러오는 금천을 끼고 넓은 들이 조성된 남면평야 북서쪽에 위치해서 북쪽으로는 홍산면 교원리 정동리와 그리고 서쪽으로는 북촌리 좌홍리와 동쪽으로는 남면 송학리와 접하고 남쪽으로는 남면의 넓은 들을 바라다보는 지역에 삼룡리는 위치한다.
백제 때에 이미 인류가 정착하여 농경지의 개척을 서둘렀던 지역으로 삼천(三川)과 용성(龍城)이 있는데, 이것을 보면 그 이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 냇물이 합치는 삼천과 흙을 틀어 올린 것 같은 용성은 고대 집단마을을 형성하는 좋은 조건이 놓인 입지조건으로 지적된 듯하다. 백제 멸망 후 사비성을 피해서 정착한 부여서씨, 고려초 상주황씨가 정착하여 농경지를 일구어 나갔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홍산군 상동면의 지역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으로 삼천리와 용성리를 병합하여 삼룡리라 하고 부여군 남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1.37㎢에 가구수는 141호이고 인구는 343명이다.
삼룡리는 수도작 위주의 전형적인 마을로 대부분 영농규모가 타 지역에 비하여 대규모이며, 마을입구에 부여서씨 서영의 효자문과 서진우의 효자문이 있다.
자연마을로는 세 갈래로 흘러 들어오는 냇물이 마을 앞에서 한데 합쳐 흐른다 하여 삼천, 삼천리, 처음에는 뱀리라고 부르던 마을이나 용이 꿈틀대며 틀어올린 형태의 마을 지형라 하여 용성, 용성리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
송학리(松鶴里)
북쪽으로는 야산지대로 이어지는 홍산면 조현리 무정리와 서쪽으로는 구룡면 동방리와 경계를 이루며 야산지대와 들과 그리고 주거지로 알맞은 들녘이 잘 조화된 곳에 송학리는 자리한다.
고려 때 진주강씨와 한산이씨가 정착하여 농경지 개간으로 마을형성이 되어갔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홍산현 상동면의 지역이었다. 영일정씨와 나주정씨들의 정착으로 집성촌이 형성되면서 이 지역은 부촌을 누리는 영역으로 발전해 갔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홍산군 상동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괘경리(掛鏡里), 방계리(芳溪里), 하조리(下鳥里), 송수리(松樹里), 죽리, 용성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학이 날아들고 송림이 유명하므로 송학리라 하여 부여군 남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1.76㎢에 가구수는 131호이며 인구는 336명이다.
자연마을로는 마을지형이 거울을 건 것처럼 생겼다 해서 괘경, 옛날 긴 밭(장전)사이에 밭이 있으므로 밭새라고 불리어 오며, 마을 주변에 소나무가 무성하다하여 송수리, 송수라라고 부른다. 홍산면 새재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라 아래새재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마정리(馬井里)
남면의 동쪽에 위치해서 남쪽으로는 마을이 형성되는 야산과 들녘이 그리고 북쪽으로는 금천을 낀 광막한 들이 자리한 지대에 마정리는 위치한다. 고려 중기 전원으로 은거하는 남양홍씨의 정착과 나주나씨, 담양전씨, 남평문씨의 정착으로 안정된 생활권을 이룩한 지역이며 고려 때는 홍산현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홍산현 남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홍산군 남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마동리, 마서리와 임천군 북박면(北朴面) 역리, 지경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큰 우물이 있었으므로 말우물 또는 마정의 이름을 따서 마정리라 하고 부여군 남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4.23㎢에 가구수는 270호이고 인구는 768명이다. 한때 이름난 마정장터가 현재에는 그 흔적만이 남아 있으며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 골뜸, 큰샘이 있는 마을이라 샘골 또는 정곡이라 부르고, 마을이 서쪽에 있으므로 서편 또는 마서리, 마을 지형이 소라처럼 생겼다해서 소라말이라 부르며 송촌이라 부르기도 한다. 마을 지형이 소의 머리처럼 생겼다 해서 소머리, 시장이 있는 마을이라 장터, 또는 장대(場垈), 뒷산의 형국이 제비 형국이라 집을 높은 곳에 지어야 좋다 하여 점상(漸上), 점생이라 부르고, 무학대사가 말에 물을 먹였는데 말발자국이 생겼다 하여 말우물, 마정, 또는 샘속 바닥에 말머리처럼 생긴 바위가 있고 입과 같은 구멍에서 물이 나온다 하여 신성시하는 우물로 전해지고 있는 마을들이 있다.
●남면 마정리 우물
대한민국 부여군의 향토문화유산
종목 향토문화유산 제90호
2007년 10월 1일 부여군의 향토문화유산
제90호로 지정되었다.
시대 고려시대
소유 건설교통부, 마정7리 주민
위치 남면 마정리 우물은 충청남도
부여군 남면에 있다.
개요
이 우물의 조성연혁에 관련된 일화는 모두
두 가지가 전하고 있다.
그 하나는 무학대사와 관련된 일화이다. 조선초에
무학대사가 마을을 지나다가 말에게 먹일 물을 찾던 중
우물이 있어 말에게 물을 먹였는데 말이 밟았던 바닥에
말발굽 자국이 생겼다 하여 말 우물이라는 이름이 생겨났고
이 우물의 이름에 기원하여 마을이름이 되었다는 설이다.
이러한 설명에 따르면 이 일대는 풍수상 말의 형국이 되고
샘 속 바닥에 말머리처럼 생긴 바위가 있고 말의 입에서
물이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도 우물 옆에는 자연 원형의 편평한 돌 위에 말발굽
자국과 같은 형태가 남아 있다.
또한 무학대사와 관련된 일화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마정리에서 남면사무소로 가는 지방도로 3호선에서
연결되는 덕림병사와 관련된 일화이다.
풍양조씨 유허지가 남아 있는 이 자리를 무학대사가
터를 잡아주었다는 것이다. 이로 볼때 마정리 우물과
무학대사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이 일대의 마을이
점생마을(마을 뒷산이 제비형국이라 집을 높은
곳에 지어야 좋다는 점상마을의 유래 ; 현 마정2리)과
우평마을 (쇠머리・소머리의 형국에서 유래한 하여
우평마을이라 함 ; 마정1리)로 불려왔다는 점은
이 일대가 풍수적인 형국과 긴밀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따라서 이 우물의 기원은
무학대사가 활동하였던 고려시대 말 조선시대 초까지
거슬러 올라 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두 번째는 홍산대첩시의 최영장군과 관련된 일화이다.
고려말 우왕(禑王) 2년(1376) 연산 개태사(開泰寺)에
왜구가 침입하여 원사(元師) 박인계를 죽이는 등 행패가
심하자 최영(崔瑩)이 자청하여 출정하여 왜구를 거의
전멸시킨 전투인 홍산대첩시에 최영 장군이 이 마을을
지나다 말에게 물을 먹인 우물이라 하여 말우물(馬井)이라
하였다는 유래가 있다.
출처:위키백과,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송암리(松岩里)
남쪽으로는 덕림고개 그 북쪽으로 산악지대가 준령을 만들고 그 북쪽으로 서서히 금천쪽으로 낮은 야산지대와 들을 조성하는 지역에 송암리는 자리한다. 고려초 연안이씨가 정착을 하였고 그 후 서림이씨의 정착으로 집성촌을 이루며 마을을 형성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홍산군 남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호암리(虎岩里),송곡리, 마서리 일부와 상동면의 동촌, 죽리, 송수리(松樹里)의 각 일부와 임천군 북박면의 구리곡리(九里谷里)의 일부를 병합하여 송곡과 호암의 이름을 따서 송암리라 하여 부여군 남면에 편입되었다. 송암리의 큰 마을 송곡과 호암에 서림이씨 60여세대가 집성촌을 이루어 현재에 이른다.
리의 면적은 3.32㎢에 가구수는 148호이며 인구는 416명이다.
마을의 뒷산은 대부분 밤나무가 조림되어 있으며, 남쪽 평야지대에는 딸기, 수박 등 특용작물을 많이 재배하고 있으며, 범바위와 송곡 등 2개 자연마을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범바위는 마을 뒤에 범을 닮은 바위가 있어서 범바위 또는 호암리라 부르고 마을이 아늑한 골짜기 안에 자리하고 있어 송곡, 송골, 송곡리라 불린다. 특히 선사유적지로 고인돌 3기가 있으며 마제석검 등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회동리(檜洞里)
백제 때는 대산현에 속했으며 백제가 망한 후에는 유민들에 의해 마을이 형성되었으나 고려시대 중기에 이르러 광산김씨가 정착하면서 광산김씨 집성마을이 형성되었다.
고려 때는 홍산현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홍산현 남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홍산군 남면의 지역으로서 절이 있었으므로 줏절 또는 회사(檜寺), 회사동(檜寺洞)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송서리 일부와 상동면의 하조리, 송수리, 용성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회동리라 해서 부여군 남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3.74㎢에 가구수는 160호에 인구는 415명이다.
면 소재지이면서도 특별한 상권이 형성되지 못한 것이 특징이며, 버드나무가 많은 마을이라 유곡 또는 버드골, 회동을 회사동, 와굴 즉 기와를 굽는 마을 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내곡리(內谷里)
남쪽으로는 비교적 높은 산이 자리를 정하고 북쪽으로 이을수록 야산지대를 이루는, 그리고 그 야산지대 앞에는 멀리 흐르는 금천 가까이까지 푸른 들판이 펼쳐진 들녘을 낀 지역에 내곡리는 자리한다.
조선시대 단양이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형성하였으며, 이어 창녕성씨가 정착하여 남쪽의 들을 개간하고 마을을 형성하였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홍산군 남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진곡리(眞谷里)와 내동리, 회서리의 각 일부와 상동면의 삼천리 일부를 병합하여 내동과 진곡의 이름을 따서 내곡리라 하여 부여군 남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2.06㎢에 가구수는 91호이고 인구는 231명이다.
주요 특산물은 취나물이며 수박·참외 등의 특용작물도 생산된다. 내동, 안골, 참실의 3개의 자연마을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마을 내에는 단양이씨인 이지시(李之詩), 이지례(李之禮) 형제를 제향한 동절사(同節祠)가 있으며, 마을입구에는 참실 콩나물공장이 있어 이곳에서 생산된 콩나물이 부여, 서천, 보령, 논산지역에 공급되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마을이 내안쪽에 자리해 있으므로 내동, 마을이 골짜기 안쪽으로 자리해 있으므로 안골, 마을이 실처럼 길게 걸쳐 있으며 마을 앞에 골무처럼 생긴 바위가 있을 때 깨끗하고 청소한 뜻을 따라 참실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마을들이 있다.
신홍리(新鴻里)
백제 때는 대산현, 고려 때는 홍산현, 조선시대 초기에는 홍산현 남면에 속한 지역으로 마을의 형성은 늦은 지역으로 조선 중기부터 많은 성의 마을로 조성되어 갔으나 파평윤씨들이 호동(虎洞)에 정착하면서 집성마을도 생겼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홍산군 남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내서리, 신기리, 내동리 일부와 상동면의 삼정리 일부를 병합하여 신홍리라 해서 부여군 남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1.40㎢에 가구수는 69호에 인구는 180명이다. 조선 효종7년(1656)에 건립된 삽다리 건립비가 남아 있으며 마을의 주요 소득 작목은 취나물로 작목반이 형성되어 있고 범말과 신기 2개의 자연마을 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대선리(大船里)
옛날에 늙은 선녀가 말을 타고 이곳에 와서 말을 멈추어 두고 노고산으로 올라가서 그 산에 사는 늙은 선녀와 놀았다 하며 그 말을 멈추게 하였다는 마가산(馬駕山)을 남쪽에 두고 북쪽으로는 조선시대만 하여도 큰배가 드나들었다는 금천을 북쪽에 두고 넓은 들에 대선리는 자리한다.
고려 때는 홍산현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도 홍산현 남면의 지역이었다. 금천이 자주 범람하여 개간을 생각지도 못했으나 고려 말기에 연안이씨와 한산이씨들이 넓은 들을 남쪽부터 개간하여 들녘에 마을을 형성해 갔으며 이어 경주최씨와 인동장씨의 정착으로 큰 마을로 변해갔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홍산군 남면의 지역으로서 배처럼 생긴 바위가 있으므로 배아구, 바이아위 또는 바야위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대선리라 하고 부여군 남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1.80㎢에 가구수는 99호에 인구는 253명이다.
북촌마을 일대는 선사 취락지로 추정되며 마제석검, 석촉, 무문토기 등이 발견되는 등 발굴 및 관리가 요하는 지역이다. 자연마을로 마을 서쪽 논 가운데에 배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 하여 바야위, 배아구, 바이아위라 부르고 양지바른 곳에 마을이 있으므로 양지뜸, 또한 북촌이라 부르고 음지쪽에 마을이 있으므로 음지뜸, 또한 남촌이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또한 대선리 석탑(大船里 石塔)은 수로가 지나가는 외딴집 앞에 있는데 구전에 따르면 백여년 전에 임천 옥곡에 사는 이참봉이 선영의 석물에 사용하기 위하여 높이 3자 정도의 돌 위에 비가 서있던 것을 허물어 버렸더니 바야워 마을에 괴질이 돌고 낮에 화재가 발생하는 등 피해가 커서 다시 남아있는 석재를 모아 탑을 쌓은 후 마을이 편해졌다 하는, 지금도 마을에서는 위하는 탑(塔)이다.
금천리(金川里)
서쪽에 위치한 옥산면 음양산(陰陽山)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쇠내[金川]가 점점 넓은 들을 조성하는 그 첫머리 뒤편에 자리해서 남쪽으로는 노고산으로부터 낮은 산의 준령을 조성해 주는 남면의 서남단에 금천리는 위치한다.
고려 시대에는 갈대밭이었으며 뜸부기의 서식지였다고 전해지며 고려 말 능성구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해 갔으며, 조선시대는 홍산현 남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말기는 홍산군 남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사곡리(社谷里)와 선서리, 선동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앞 내의 이름을 따서 금천리(金川里)라 하고 부여군 남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1.27㎢에 가구수는 90호이고 인구는 216명이다. 1960년대 금천초등학교 개교시 남면 인구가 1만명에 달하였으나 계속된 인구 감소로 1993년에 폐교하고 건물은 공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마을에 사당이 있으므로 사당골, 사곡, 사곡리, 마을을 동쪽에 배의 형국을 한 바위가 있었으므로 그 서쪽에 마을이 있다 해서 선서, 선서리라 부르고 기러기가 앉는 형국이라 해서 안터, 안곡이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참고문헌
최문휘. 1992. 『여기가 부여다』
출처:부여군지 제1권-부여의 지리<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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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부여군 마을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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