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한(蜀漢) 성도(成都)를 찾아서
1.
주무왕(周武王)이 은(殷)나라를 공격할 때 사천(四川)의 부족들이 참가했다고 하여, 이미 오래전부터 사천(四川)지역과 이른바 중원(中原)지역과의 교류가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진시황(秦始皇)이 촉(蜀)을 평정한 후 1만호의 백성을 촉(蜀)으로 이주시킴으로써 촉(蜀)지역의 개발이 급진전되었다고 한다.
예로부터 사천(四川)은 천부(天府)라고 불릴만큼 기름진 땅이었고, 국력이 강했을 시기 양자강을 따라 내려가 초(楚)나라를 공격한 역사도 있었음을 사기(史記) 초세가(楚世家) 숙왕(肅王)4년의 기록에 보여주고 있다.
사천(四川)지역은 또한 파촉(巴蜀)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파(巴)와 촉(蜀)은 모두 고대의 부족명이었다. 촉족(蜀族)은 성도(成都)를 중심으로, 또한 파족(巴族)은 중경(重慶)을 중심으로 각각 정권을 형성해 유지했다.
허신(許愼)은 기원전 100년경에 완성한 설문(說文)에서 <파(巴)는 훼(虫) 즉 벌레다>라고 말하면서 이를 누에(蠶)라 했다. 성도(成都)는 예로부터 명주의 산지였다. 비단이 유명하고 그래서 도시를 흐르는 강을 금강(錦江)이라 칭할 정도였다.
당(唐)나라때 이백(李白,701-762)은 촉(蜀)나라로 가기가 푸른 하늘에 오르기보다 여럽다라고 하며 <蜀道難>이란 글을 지어 후세에 남기고 있는데, 이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현재의 사천지방을 보며 이백이 과장된 말을 하고 있다고 폄하하고 있으나, 이백이 보고 느낀 촉(蜀)지방이 현 운남성(雲南省)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양자강의 북쪽에 있는 고원지대를 말하고 있음을 모르는 사람들의 무지한 하소연일 뿐이다.
화양(華陽)은 파(巴), 촉(蜀), 한중(漢中)을 말하는 용어다. 동진(東晉) 영화(永和)10년(355년)에 상거(常璩)는 화양국지(華陽國志)라는 지리지를 편찬한다.
이 책에 보면,
<물은 楚나라로 통한다. 巴의 강한 군사가 있어, 큰 배를 띄워서 동쪽으로 초로 향하면 초의 땅을 얻을 수 있다. 蜀을 얻는 것은 곧 楚를 얻는 것이다. 楚가 망하면 곧 천하가 통일될 것이다.>
라는 글이 나온다.
현 운남(雲南)고원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양자강의 위쪽에 존재했던 성도(成都)의 군사가 배를 타고 현 사천성(四川省)에 위치했던 초(楚)나라를 공격하기가 용이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즉 파촉(巴蜀)의 원래지명이 현재의 사천성(四川省)으로 이동변조된 것이다.
독립투사였던 김준엽(金俊燁1920-2011)전 고려대 총장은 그의 독립운동 회고록 <長征>에서 파촉령(巴蜀嶺)의 험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말도 지나가지 못하는 巴蜀嶺의 험로는 宜昌이 일본군에게 함락되어 양자강을 이용한 수송로가 차단되자 국민정부가 궁여지책으로 타개한 통로로서 전후방으로 연결하는 傳令路 겸 수송로가 된 것이다. 宜昌으로부터의 양자강 상류는 강변 三峽의 절벽과 물속의 암석 때문에 일본군이 더 이상 침범하지 못하고 또한 이 巴蜀嶺도 기동부대를 주로 하는 일본군으로서는 진격의 엄두도 내지 못하는 지역이기 때문에 중국군이 이 산길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巴蜀嶺의 최고봉을 엿새만에 극복하였다.>
장준하(張俊河, 1915~1975)선생은 그의 독립운동 회고록 <돌베개>에서 파촉(巴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파동의 다음 기항지는 宜昌(의창)으로 日軍의 점령지였다. 중경을 중심으로 해서 수로인 양쯔강선으로는 하류로 내려오다가 의창에까지, 그리고 육로인 경우엔 노하구까지 日軍이 차지한 한계지점이었다. 巴東서 의창까지는 역시 파촉령고원의 이른바 12봉이라는 산협사이로 양쯔강이 뚫려서 마치 漢水의 적벽강처럼 강의 양쪽이 깍아 세운듯한 수백척의 암벽으로 절벽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이 양안의 암벽 위에 있는 중국군 수비군은 올라오는 日船을 수류탄 공격만으로도 능히 침몰시켜 버릴 수 있는 형편이었다. 巴東과 宜昌까지의 수백리 벼랑의 물결이 군사적인 완충지대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파동이서의 사천성은 완전히 그 비옥한 땅을 중국 蔣介石 정부가 관장하고 있었다. 重慶에서 巴東까지 물결을 따라 내려오는 경우엔 3일 걸리는 거리인데, 巴東에서 重慶으로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경우엔 8일이나 걸린다.>
위의 글은 일본군이 왜 1944년 당시 사천성(현 운남고원)을 점령하지 못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 험준함으로 인해 기동대(機動隊)가 주력인 일본군이 산악지대와 협곡을 돌파하지 못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거대한 평원인 현 사천성의 이야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2.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1831-1904)은 구한말 조선을 세 번이나 방문해 조선팔도 방방곡곡(坊坊曲曲)을 누빈 후,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 Korea and Her Neighbours )》이라는 대작을 1897년 세상에 내 놓게 된다.
이 책의 진가(眞價)를 알아본 시인 김수영(1921-1968)은 당시 책의 감동을 그의 대작 <거대한 뿌리>-1964년-를 통해 피를 토하듯 세상에 내놓으며 힘차게 조선의 맥박이 살아있음을 부르짖고 있다. 필자도 대학시절 이 시(詩)를 잃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생생하고 이 시의 창작동기를 30년이 지난 후 대륙조선이라는 웅대한 서사시(敍事詩)를 찾아가면서 비로소 알 수 있게 되었다. 시인은 거대한 대륙의 조선을 알지는 못했지만, 그 웅대하고도 거친 숨소리를 가슴 깊이 느끼고 있었으리라!!
또한 버드비숍은 조선(朝鮮)을 여행한 후 청(淸)나라 지역으로 이동해 거대한 양자강(揚子江)을 답사한 기행문 <양자강을 가로질러 중국을 보다(The Yangtz Valley and Beyond)>를 1899년 출판하는데, 이 책을 통해서야 비로소 지명이동된 한족(漢族)의 강역사(疆域史) 중 사천(四川)지방을 고증해 낼 수 있으며, 거대한 장강(長江)의 오묘한 지리적 특성을 명확히 분석해 낼 수 있게 되었다.
버드 비숍이 기록한 글들 중 몇가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⓵양자강은 東經 90도에서 122도 사이에 자리하면서 四川과 湖北,湖南,江西,江蘇 등 여러 성의 중요지역을 관통하고 浙江, 貴州, 雲南省의 상당 부분을 거치며 甘肅과 陝西, 山東省의 東南部를 지난다.
→이 부분에서 중요한 글은 산동(山東)의 동남부를 양자강이 지난다는 부분이다. 필자가 고증한대로 산동이 태행산의 동쪽으로 현 감숙성 기련산이 바로 역사의 태행산이기에 현 난주(蘭州)지역이 역사의 산동이 되어야 마땅하고, 이에 당시 양자강을 답사한 버드 비숍은 이 산동의 동남부로 양자강이 지나간다고 기록했음을 알 수 있다. 지명이동된 현 산동과 장강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고 있다.
②1년내내 반복되는 揚子江 수면의 상승폭은 12m정도이고 특히 漢口에서 重慶에 이르는 구간에서는 25m까지 올라간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기묘한 지리지형의 특징을 기록해 알려주고 있다. 물론 이 기록은 현 사천성(四川省)지역의 모습이다. 25m까지 물 수위가 올라갔다는 말은 현 의창(조선의 당진)아래 지역의 동정호(洞庭湖)인 조선의 서해쪽을 관통해 흐르는 장강의 수위 또한 그러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8월이 되면 조선의 남해(南海)지역은 강을 중심으로 위아래 10km씩 물이 범람해 물바다가 되었던 것이다.
③揚子江의 수면상승은 보통 3월말에 시작되며 8월 초에 最高點에 이르렀다가 12월부터 1월까지 서서히 낮아진다.
→이글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4월에 공격을 감행한 이유를 알게 해주고 또 청일전쟁이 왜 8월에 일어났는지 설명해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또한 풍신수길(豐臣秀吉)이 조선에 직접 오겠다고 했을 때 부장들이 명년 4월을 기약하자고 한 이유 또한 자연스럽게 설명이 되는 중요한 내용이다.
④리히트 호펜(1833~1905)이 붉은 分地라고 묘사한 사천지역의 붉은 강물은 중국의 지식인에게 수면의 침강을 암시하면서 과학의 흥미를 일깨워주었다. 여름에 四川 전역에 홍수가 밀어닥친 모습을 탑자산(塔子山)에서 내려다보면 황토색으로 소용돌이치는 內地의 바다가 山間에 자리한 여러 마을과 나무 그리고 오래된 건축물까지 삼켜버린 참혹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현 사천성은 거대한 평원이다. 또한 붉은 분지도 아니다. 하지만 필자가 고증한 운남고원의 중경(重慶)이었던 판츠화시 북쪽 100km 지점에는 폭이 35km에 이르는 붉은 분지가 명확히 존재하고 있다. 이곳이 바로 역사속 촉(蜀)의 성도(成都)가 되겠다. 아래의 글과 연계된다.
⑤성도에서 북쪽으로 약19km떨어진 지점에 新都縣이 있고,근 방 여방마을에서 한 관리가 찾아와 지름길을 알려주어 그길로 며칠을 여행한 끝에 北京에서 成都로 통하는 위대한 皇帝의 길인 大道로 들어설수 있었고, 이 길을 따라 서쪽으로 綿州까지 갈 수 있었다. 이 길은 판석이 깔려 있었고, 길을 잇는 다리는 하나같이 돌로 견고하게 지어졌고, 오르막과 내리막구간은 돌계단이었다. 1천년전 중국 皇帝는 이 도로변에 일정한 간격으로 붉은 가지가 축축 늘어진 이 지방 특유의 아름다운 삼나무를 심게 했다.
→성도에서 북쪽으로 북경까지 이어진 대도(大道)가 고원지대에 만들어져 있었다는 글이며, 이 길을 통해 당현종(唐玄宗)은 양귀비를 대동하고 안록산(安祿山)의 난을 피해 현 운남고원의 사천지방으로 내려오게 된다.
또한 위장(魏將) 등애(197-264)가 남정(南征)을 통해 촉(蜀)을 멸할 때 내려온 길이기도 하다.
3.
이를 지도를 통해 고찰해 보면 다음과 같다.
2023.03.23.송계(松溪)
첫댓글 고맙고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지명 이동된 현재 지도로 백날 맞춰봐야 허탕칠 일이겠네요.
"조선의 남해(南海)지역은 강을 중심으로 위아래 10km씩 물이 범람해 물바다가 되었던 것이다."
정말 바다로군요. 여기서 남해는 어디를 말씀하신 건가요?
남해는 당연히 조선의 장강(양자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