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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성해방의 어머니'
스크랜턴 대부인
한국에 복음의 밝은 빛이 들어온지 어언 130년, 당시 한국의 여성들은 유교를 국교로 하는 남성들만의 사회에서 칠거지악(七去之惡)과 삼종지도(三從之道)의 사슬에 얽매여 하나님의 창조질서인「돕는 배필」의 구실을 못 하고 있었는데, 한국나이로 쉰세 살의 스크랜턴 대부인이 최초의 미국 여성선교사로 이 땅에 들어와 여성 해방의 대모(代母)가 되어 노예생활을 하는 여성들을 해방시키는 장한 일을 이루었다. 오늘 자료는 대부인의 하많은 업적 가운데서 이 부분의 자료들을 모아 꾸몄다. (오소운)
메리 스크랜턴 대부인
1. 복음의 빚진 자
스크랜턴 대부인(이하 대부인)은 52세 되던 1884년 미국 감리회 해외 여선교회로부터 한국선교사로 임명 받고, 이듬해 외아들 윌리엄 내외와 함께 한국에 들어왔다. 대부인은 함께 온 며느리 ‘스크랜턴 부인’과 구별하기 위해서「대부인」으로 불려진다.
내 고향 경기도용인군 남사면아리실 교회는 대부인의 전도를 받고 오인선(吳隣善, 1854-1912) 우리 할아버지가 1895년에 세운 교회다. 2000년 1월 일본 오사까에서 열린 관서지방평신도연합회 주최 세미나에 강사로 초청받아 간 나는 내가 예수를 믿게 된 역사를 묻는 질문에 “스크랜턴 대부인의 전도를 받은 우리 할아버지 때부터 예수를 믿었으니까 100여년이나 되었다.” 하고 대답하여 만장의 박수를 받은 일이 있다. 세미나를 마치고 귀국을 서두르는 나에게 오사까에서 사업을 하는 조씨 성의 어느 장로님이
“대부인의 아들 스크랜턴 박사 무덤이 오사까에 있는데 제가 안내해 드릴 테니 가시겠습니까?” 하는 것이었다. 맹자(孟子)에 있는대로「불감청이고소원야라」(不敢請耳固所願也), 감히 부탁을 하고 싶었는데 바라는 바입니다, 했더니 자기 차로 외국인 묘지로 안내하여, 우리 가정에 복음을 전한 은인의 아들 묘비 앞에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일본 오사까 외국인묘지에 있는 윌리엄 스크랜턴 박사 묘지에서
2. 대부인과 이화학당
어느 날 오후 대부인이 정동 근처 성벽 위를 걷고 있는데, 어떤 모녀가 길가에 가마니를 덮고 신음하고 있는 것이었다. 전염병에 걸려 길에 내버려진 모녀였다.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는 인부들을 시켜서 모녀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왔다. 버림받은 모녀를 정성껏 돌보며 치료한 결과, 약 3주일 만에 건강이 회복되었다. 그 전염병은 당시 한국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열병의 일종이었다고 한다. 모녀의 병은 다 나았다. 그러나 그 여인의 가족은 나타나지 않았다. 대부인은 할 수 없이 자기 집에서 기르면서 공부를 시켰는데 이 소녀가 이화학당 최초의 정규 학생이 되었다.
대부인이 여학교를 시작한 것은 참으로 혁신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남학교의 경우와 달리 여학교에선 학생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처음에는 양반집의 자녀를 학생으로 구하려 했으나 얻지 못하고, 가난한 집 아이와 고아를 학생으로 얻었던 것이다. 대부인은 이화학당을 처음 시작할 때의 사정을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 학교교육은 이 새로 지은 학교 터로 옮겨가기 여섯 달 전에 스크랜턴 박사 집에서 시작되었다. 처음 시작할 때는 학생이 한 사람 뿐이었다. 그 학생은 김성녀라는 어느 정부 관리의 첩이었는데, 그 남편은 자기 첩이 영어를 배워서 후일 왕비의 통역이 되길 바랬다. 그 여자는 우리와 약 석 달 동안만 같이 지냈다. 제일 처음 정식학생으로 입학한 생도는 김성녀보다 한 달 늦은 1886년 6월에 얻었다. “양귀(Yankee, 洋鬼)들이 아이들을 데려다가 피를 빨아 먹는다.”는 소문으로 조선 사람들의 불신이 컸었지만, 그런 불신은 차츰 사그라지면서 학생들의 숫자는 점차로 불어났고, 명성황후께서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셨다. 그 때 일을〈이화백년사, 1994〉62~63쪽에서 인용한다.
― 국왕은 우리 서양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다소 화려한 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는 이름을 외서에 명하여 한자로 쓰게 하고 이것을 보내왔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는 또한 일반 군인들보다 조금 높은 지위에 있는 근위대의 기수(旗手)를 보내왔는데 이 부대는 공사관과 유력한 외국인들을 위한 경호대로 선발된 부대입니다. 외아문(外衙門)에서 보내온 바로 그 종이에 판자를 붙이고 액자를 넣어 한국 장인(匠人)이 이를 비바람에 견딜 수 있도록 칠을 하였는데 이 현판은 지금 학교(Woman's House)의 정문에 걸려있습니다. 이 현판은 약 2~4피트이며 한자의 크기는 한 자가 사방 10인치 정도입니다. 우리 학교에 이것이 도착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우리와 비슷한 승인과 기수(旗手)가 아펜젤러씨가 경영하는 학교(배재학당, 필자 주)에도 보내졌습니다.
이화학당에서는 한동안은 한국인 남자 선생이 막을 쳐놓고 그 뒤에서 여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호기심 때문인지 학생들이 많이 참석했다고 한다. 1889년 이화학당의 학생 수는 26명으로 늘어났다. 1896년에 기포드 선교사가 쓴 글을 보면 당시 기숙사생이 47명, 통학생이 3명이고, 평균 연령은 12살, 최연소자는 8살, 최고 연장자는 17살이었다. 수업은 한글과 영어로 기초과목과 종교과목을 가르쳤다.
대부인은 학생들이 한국적인 것을 자랑스러워하기를, 그리고 나아가서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을 통해서 훌륭한 한국인이 되기를 원하였다.
3. 여성전도에 전념
1891년에 이화학당장 자리를 로드와일러 선교사에게 물려주고 미국에 안식년을 다녀온 후부터 대부인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직접 전도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당시 여성 선교사들의 숫자는 너무 적었고, 온갖 벽들에 둘러싸인 여성들에게 접근하는 일은 여성들만이 할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전도부인」이이란 제도가 탄생하였다. 곧 “한국 여성이 한국 여성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이 이를 가능케 하였다.
그래서 그가 생각해낸 것이「전도부인(Bible woman)」제도다. 이를 도입하여 여성들을 훈련시켜 앞장세웠다. 대부인이 1898년에 쓴 보고서에 보면 모두 8명의 전도부인들이 그와 동역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전도부인은 전국 곳곳을 다니면서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복음을 받아들인 여성들은 대부인으로부터 직접 복음을 듣기를 원하여서 각지에서 편지를 보내왔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1907년 74세 때 쓴 보고서를 보면 이 할머니 선교사의 사랑과 열정은 오히려 더 뜨거워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데, 만약에 열 사람의 선교사가 있었으면 몇 가지 일에만 집중했을 것이고 훨씬 일을 잘해냈을 것이라고 토로하며 안타까워하고 있다.
4. 아들 며느리 손자와 함께
대부인 메리 스크랜턴 여사는 1832년 12월 29일, 미국 매사추세츠 주 멜처타운에서 감리교 목사인 벤톤(E. Benton)의 장녀로 출생했다. 부친과 오빠 모두 감리교 목사였다. 메리는 대학 교육을 마치고, 1855년 뉴헤이븐의 제조업자 윌리엄 스크랜턴(William T. Scranton)과 결혼하여 아들 윌리엄을 낳았다. 1872년 40세에 남편을 잃었다. 소녀 시절부터 선교사업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메리는 남편과 사별한 뒤 미국감리회 해외여선교회에서 서기로 일하던 중, 조선에 여성을 위한 학교 설립이 필요하다는 선교회의 판단에 따라 아들과 함께 선교사로 지원하였다. 메리 스크랜턴 여사는 미국 감리교 여선교부 교육선교사로 임명을 받아 선교 역사상 최초의 모자(母子) 선교사 가정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때 그의 나이 53세였다.
1885년 1월 21일, 스크랜턴가(家) 일행 3대 다섯 사람은 뉴욕을 출발하여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아펜젤러 부부와 합류하였다. 이들이 한국을 향하여 역사적인 태평양 횡단 항해를 시작한 것은 1885년 2월 3일이었다. 이들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 태평양 우편선 아라빅(Arabic)호를 타고 일본에 도착한 때는 1885년 2월 27일 아침이었다.
요꼬하마 선교부의 해리스 목사가 이들 일행을 반갑게 영접했다. 메리 여사 일행은 이곳에서 약 1주일간 머물러 있다가 동경으로 가서 맥클레이 박사를 만났다. 맥클레이는 한국선교부 감리사였다. 메리 여사 일행은 당시 일본에 머물고 있던 박영효에게서 우리말을 배웠다고 한다. 이러는 동안 한국의 정치 정세와 서울의 분위기도 차차 안정을 되찾아, 메리 여사 일행은 6월 20일 제물포에 상륙하여 서울로 들어왔다.
5. 병원선교와 빈민선교
원대한 꿈과 한국여성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품고 이 땅에 온 대부인 메리 여사는 '배우고 깨우치는 것만이 잘사는 길' 이라며 가난하고 천대받는 여성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었다. 청결한 음식과 청소 등 위생 개선에도 앞장 선 그는 정부의 도움은 한 푼도 안 받고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한국 이름 施蘭敦)과 함께 병원을 차렸는데 그 때 일을 [이화백년사, 1994] 63쪽에서 인용한다.
― 몇 주후에 병원에도 비슷한 방식의 승인이 났습니다. 병원의 이름은 번역하기가 다소 어렵지만 시병원(施病院)을 좀 더 간결하게 표현한 유니버설 호스피탈(Universal Hospital)이라고 영어로 부르기로 했습니다." '시병원'이라는 이름은 스크랜튼의 한자식 이름이 '施蘭敦'인데 '시(施)'라는 글자가 '베푼다'는 뜻을 담고 있으니까 그의 한국 성을 넣어 지은 것이다. 시병원=베푸는 병원 얼마나 좋은 이름인가! 施病院은 가난한 사람들에겐 치료비를 싸게 받고 극빈자에겐 무료로 진료를 해주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너무 가난하여 돈 한 푼 없이 병을 치료받은 사람들은 기쁨으로 예수를 영접하였다. 그러자 대부인은
"서울 사대문 바깥으로 나가면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이 아주 많은데 이들에게 음식과 의료혜택을 주고 싶다." 생각하고 남대문 밖 상동과 서대문 밖 애오개, 동대문 밖에 진료소인 시약소(施藥所)를 세웠다. 이곳들은 나중에 항일운동 본산지인 상동교회, 아현감리교회, 동대문교회가 되었다. 이 교회들은 지금도 시약소 전통을 이어받아 '의료선교회'를 운영하고 있으며, '형편이 어려운 이웃사랑'과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을 하고 있다. 스크랜턴의 진료소에는 평민들이 많이 찾아왔다.그의 보고서에 따르면, 환자들 중에 극빈자들이 많았고 종종 버림받은 사람들도 돌봐줬다.진료소에는 1885년 말까지 2백50여명의 환자들이 다녀갔다.환자들이 많아지자 자연히 더 넓은 공간이 필요했다.스크랜턴 박사는 우선 이웃해 있는 땅과 집을 더 사들여 1886년 6월 환자대기실과 사무실, 약국, 수술실, 입원실 등을 갖춘 병원을 마련했다.여자들을 위해 별도의 집을 구입, 여자 입원실도 꾸몄다.시병원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민간의료시설이었다.
시병원은 약국을 개설하면서 본격적인 전도를 시작했고, 직원들의 예배가 발전해 지금의 상동교회가 생겨났다. 대부인은「병원은 곧 예배당」이 되어야 한다는 선교전략을 썼다. 이 때 병원전도 방법은 복음에 대한 설교와 쪽복음서 판매였다. 약과 더불어 쪽복음도 같이 팔며 전도했다. 기다리고 있던 대합실에서 환자들과 가족들을 상대로 날마다 선교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주일에는 특별집회를 가져 처음에는 10∼30명가량 모였으나, 후에는 많이 모여 상동교회는 처음부터 활기찬 출발을 하여 지금의 상동교회로 발전하였다.
6. 한국 최초의 여성교회
1888년 1월 12일에는 이화학당의 학생과 여선교사들과 여성들만 모이는 주일학교를 시작하였고, 이 모임은 점점 커져갔다. 이듬 해 2월에는 이것이 여성들만의 교회로 성장하였고 이들을 대상으로 체계적인 성경교육이 시작됐다. 19명의 여성으로 시작된 주일학교는 여성들만의 주일예배로 발전되었으며 1889년 2월 12일 한국 최초로 여성 교회가 조직되기에 이르렀다. 당시만 해도 내외법이 극심하여「남녀칠세부동석」원칙 때문에 여성교회는 절대 필요했다. 이것이 발전하여 기역자 예배당에 흡수되었다. 한 일자 예배당에서는 가운데 휘장을 쳐서 남녀 반을 갈랐는데, 나도 어려서는 여반 엄마 곁에서 예배하였는데 휘장을 넘나들다가 꾸중을 듣기도 했다.
대부인은 1891년 이화학당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학당장 직책을 로드와일러에게 물려주고 1차 안식년 휴가를 얻어 미국으로 돌아갔다. 1892년 5월 다시 서울로 돌아온 대부인은 1891년 1월 4일부터 시작된 동대문 선교사업에 합류해 미감리회 여선교사들과 함께 여성들을 가르치는 일을 담당하였다.상동지역의 여성들에게 복음 전도활동을 전개하는 것 이외에 매일학교를 설립하여 여자 아이들을 가르쳤고, 1890년대부터 상동교회에서 전도부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단기성경교육을 시작하였는데, 후에 감리교 협성여자신학교로 발전하였다.
7. 지방전도와 문맹교육
대부인은 1893년 여성 선교사로서는 처음으로 지방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이를 통해 여성문맹이 퇴치되고, 여성의 생활이 변화하였다. 1900년 수원ㆍ공주구역에는 여러 교회가 설립되었지만 여성들을 교육할 만한 인력과 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아서 여성선교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그는 여성선교사업을 계획하고, 이에 대한 인력을 지원하는 역할을 감당하였다. 또한 교육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선교 지원금을 선교부에 요청하고 교사를 발탁해 교육사업을 전개해 나갔다. 1906년부터는 진명여학교에서 일주일에 이틀 아침 시간을 할애해 학생들을 가르쳤고, 1907년에는 상동교회 내에 있는 공옥여학교와 무지내여학교, 그리고 덕고개에 있는 여학교 외에 수원에 있는 여학교까지 포함해서 네 곳의 여성 매일학교를 감독하였다. 대부인은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 도움을 베푸는 대단한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8. 한국 여성의 어머니 대부인
대부인은 이런 글을 남겼다. “우리의 교육목적은 한국 소녀들이 우리 외국 사람의 생활이나 의복, 환경에 적응하도록 변화시키는 데 있지 않다. 우리는 오로지 한국인을 보다 나은 한국 사람이 되게 하는 데 만족한다. 또 우리는 한국인이 한국적인 것에 대하여 긍지를 가지게 되기를 희망한다. 나아가서는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교훈을 통하여 흠과 티가 없는 완전한 한국을 만드는 데 희망을 두고 있다.”
대부인의 관심은 조선의 여인들이었다. 남존여비의 굴레에서 교육도 치료도 못 받고, 자기 이름조차 갖지 못한 채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조선의 여인들에게 복음을 주고자 모든 불편한 삶을 감수하고 땅 끝처럼 머나먼 땅으로 훌쩍 떠나 온 그였다. 여전히 외국인을 보면 도망하고 아이들을 유괴하여 죽인 뒤 갈아서 사진을 만드는 약으로 쓴다고 믿고 있던 땅이었다.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오갈 데 없는 아이를 수양딸처럼 키웠고, 전염병에 걸려 성벽 아래 버려진 여인의 딸을 또 수양딸로 삼아 키웠다. 그렇게 시작한 사역은 고종으로부터 ‘이화학당’이라는 사액현판이 내려지고 나중에는 내로라는 가문의 딸까지 맡기고 싶어 하는 학당이 되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그의 시간은 조선 여인의 내일을 향하는 마음으로 한결같았다. 이화학당 최초의 한국인 여교사 이경숙, 첫 여의사 박에스터(김점동), 전도부인으로 일하였던 하란사와 황메례, 상록수의 주인공 최용신 등이 모두 그의 제자들이었다.
1887년에는 치료 받지 못하는 가난한 여성들을 위해 여성들만을 위한 의료시설 ‘보구여관(保救女館))’ 을 세웠다. 남자 의사에게 진료를 받을 수 없는 조선 여성들의 현실을 생각하여 메리 스크랜턴 선교사는 본국에 여성 의료선교사 파송을 요청하여 많은 여의사와 간호사들이 선교사로 오게 되었다. 스크랜턴 선교사 모자는 세례를 베풀 때에도 외간(外間) 남자와 대면하지 못하는 여인네들을 위해 방 한가운데 휘장을 치고 머리 하나 내놓을 만한 구멍을 낸 후 그리로 머리만 내밀게 하여 세례를 베풀었다. 그렇게 언제나 조선 여인의 마음으로 일하고자 하였고, 그런 아름다운 배려에 조선의 슬픈 여인들은 마음을 열어 의지하였다. 1900년 2월에 아들과 함께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온 대부인은 이제 자신의 여생까지 조선의 여인들을 위해 바친다. 달성전도부인양성소를 시작하고, 무지리 여학교를 세우며, 수원에 삼일소학교를 세웠다.
9. 경기남부지역 교회 개척
1896년 스크랜턴 대부인에 의해 조직된 한국 미감리교회 여선교부에서도 세 전도부인을 경기 남부지역에 파송하여 부녀자 전도에 힘을 썼다. 그 일에 대하여 수원, 공주지역을 담당했던 스웨어러는 이렇게 보고했다. “한국인 전도부인 세 명을 이 구역에 파송하여 여성 사업을 돕도록 한 미감리교 해외 여선교회 부인들의 조처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전도부인들이 이룩한 업적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이들이 아니었더라면 이 구역의 여성들이 그리스도와 접하게 될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 여성들은 암흑 속에 앉아 있다. 그 암흑은 너무나 짙어 한 줄기 빛이나 희망을 뚫고 들어올 수 없을 정도인데 전도부인들은 그 중에서도 효과 있게 일하고 있다.”
그 밖에도 피어스, 루이스, 구타벨, 해먼드 등이 수원 및 경기 동남지역 여성 전도사업에 많은 힘을 들여 선교사업 개척에 주력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스크랜턴 대부인은 자신이 양육한 전도부인 이경숙(일명 드루실라)과 경기 남부지역을 순회하면서 전도사업을 펼쳤으며, 이 지역 선교 개척에 큰 공을 세웠다. 이경숙은 「예수는 내 생활의 보혜사」라는 글에서 그 사실을 이렇게 기록했다. "1897년 대부인이 병이 다 나아서 다시 조선으로 나왔다. (중략) 노부인은 그 해부터 학교 일을 그만 두고 남대문 안에 달성궁을 사서 수리하고 살며, 나를 데리고 다니며 지방 전도를 시작였다. 그때 내가 그와 같이 순행하여 다니던 곳은 수원, 오미1), 장지내, 아리실,2) 덕고개, 오천, 해미, 덕산, 여주, 이천 등지였다. 우리가 처음 돌아다닐 때에는 집들이 심히 누추하여 움 속 같아 위생에 대한 말을 많이 하였더니 그 후에 두 번째 갔을 때에는 처음보다 많이 깨끗하여졌고 세 번째 갔을 때에는 교회가 설립된 곳도 있었으며, 네 번째 갔을 때에는 교우 집치고 몹시 누추한 집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주 : 1) 오미는 내 안사람 외가가 대대로 사는 고향이다.
2) 대부인 모자는 우리교회를 세우고 봄가을에 교회를 찾아오셨다고 한다. 교회 당회록에도 기록되 어 있다. 어머니(윤메리, 1889-1961))는 13살에 민며느리로 시집오셔서 대부인을 해마다 여러 번 만나보셨는데 “백옥같이 하얀 피부에 참으로 미인이셨다.”고 나에게 얘기하셨다.
대부인은 이경숙과 여주, 이천에서부터 용인, 수원, 해미, 덕산 등지의 넓은 지역을 때로는 가마를 타고, 때로는 도보로, 이 마을 저 마을을 누비며 전도를 위시하여 위생, 육아에 이르기까지 가르쳐서 갈 때마다 현저히 달라지도록 농촌 부녀자의 생활을 개선시켰던 것이다. 대부인은 1893년 화성군 장지내교회3)를 설립한 후 자신이 성경을 가르친 김사라 전도부인을 파송했고 그 옆에 여학교를 설립한 후 김전도부인의 딸 메리4) 로 하여금 가르치게 했는데 이것이 서울에서 지방교회에 전도부인을 파송한 최초가 된다. 김사라 전도부인 5)의 생활비와 학교운영은 대부인이 대주었다. 대부인이 노쇠하여 활동하기 어렵게 되자 그가 부인성경학원에서 길러낸 수많은 전도부인들이 시골에 파송되어 전도사업을 하게 하였다. 이 외에도 1899년 3월 덕들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구춘경과 장춘명이 광주, 이천, 여주지역 전도에 힘썼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로 봉기한 의병활동을 했던 구춘경은 광주 일대를 누비며 전도활동에 주력하여 노곡교회를 세웠고, 장춘명은 여주, 이천, 양지, 음죽, 원주, 제천 등지로 순회하며 많은 교회를 세워 선교 초기 교회 성장에 큰 공을 남긴 일꾼이 되었다.
주 : 3) 장지내는 아리실서 20리. 아리실교회는 2년 후인 1895년에 설립했다.
4) 김메리씨는 나의 백부 오건영(1879-1937)과 사랑하여 비밀리에 하와이 이민까지 계획했었으나 비밀이 탄로 되어 못 갔다. 백부는 1896년에 할아버지 주선으로 강제 결혼했다. 어머님께 들은 이야 기다.
5) 김사라 전도부인에 대한 1919년 2월의 기록도 흥미를 끈다. 그는 1년에 16,860가정을 방문하여 12,200명을 믿게 했고 3290부의 성서를 팔았다. 이 성서는 대부분 복음서였다. 김사라 부인은 머물 고 있는 마을의 거의 모든 집을 방문하며 이 잡듯이 전도했다. 만나는 모든 사람을 기억했으며 2,3일 동안 한 마을에 지내면서 그곳의 모든 가정환경과 지나온 이야기를 거의 알고 있는 듯했다.
10. 대부인이 길러낸 여성지도자
가. 김사라 전도부인
장지내교회 6)를 방문한 스크랜톤 대부인은 1900년 선교 경험이 풍부한 김사라 전도부인을 딸과 함께 이곳에 파송하였다. 김사라 부인은 이곳에서 살면서 헌신적으로 복음을 전하여 무당을 불러 굿이나 하는 마을 아낙네 20-30명을 구원하였다. 딸 메리 역시 계집아이들을 모아다가 저녁마다 수업을 시작하였다. 교회가 들어가는 곳마다 매일학교를 세워 가르치던 감리교회 선교방식을 따른 것이다. 1902년 당시 박홍성씨가 경비의 대부분을 부담하여 지은 예배당 7) 과 여선교회 소유의 전도부인 주택과 학교 건물이 있었다. 교인수는 입교인 22명, 학습인 22명으로 총 44명이었다. 글:김진형목사(예산지방 죽림교회)
6) 장지내교회는 아리실교회와 20리 거리라 교류가 빈번했다. 내 막내외숙(윤바울)의 처가가 장지내 박씨인데, 내 큰 누님을 막내외숙이 처가 자손 중에서 중매하여 내 매형이 된 박용기(1919-2001) 목사도 장지내 출신이다.
나. 대부인 수양딸 이경숙 전도부인
‘아기 과부’ 출신으로 이화학당 최초 한국인 교사가 된 이경숙 전도부인은 자신의 글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불운이 지속되는 삶이었지만 1890년 4월 대부인과의 만남을 통해 새 삶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가 첫 만남을 통해 체감한 낯선 서양인 대부인은 그야말로 다정다감하고 후덕하며 친절하고 이해심이 많은 자애로운 분이었고, 이로 인해 대부인이 자신을 수양딸로 정하자고 했을 때 그 역시 기꺼이 수양딸이 되기로 결단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이경숙은 대부인의 주택에 함께 기거하면서 선교사업에 동참하게 되었는데, 한국교회 선교 초기 한국인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구경삼아 서양인들을 찾아오게 되자 그들에게 문호를 활짝 개방하며 선교사들의 일상생활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구경미션’이 대부인 자택에서도 이루어지게 될 때 이경숙은 일조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대부인이 설립한 이화학당에서 첫 한국인 교사로 한글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세례를 받고 ‘드루실라’라는 세례명을 얻게 되었다. 1892년 5월 다시 내한하게 되었을 때 “마치 죽은 부모님이 다시 살아오신 것 같았다”라고 그 기쁨을 표현하고 있다. 그만큼 이경숙에겐 대부인은 자애로운 ‘어머니’이자 우직한 ‘아버지’라는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부인은 비록 쾌유했지만 고령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지방 전도사업에 나서게 되었다. 바늘 가는데 따라가야 할 실은 역시 한국인 수양딸 이경숙 전도부인이었다. 각 지방을 돌아다닐 때마다 낯선 서양인을 보기 위하여 한국인들이 쉴새없이 몰려들었는데, 그 뒷바라지를 해야 하는 것은 물론 이경숙의 몫이었다. 하루 종일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시달리는 이경숙의 힘겨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대부인은 몰려든 사람들을 향하여
“경숙이가 죽게 되었으니 좀 돌아가면 좋겠다”라는 말로 하소연한 적도 있었다. 이경숙 전도부인은 대부인과 동거하고 동행하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점점 대부인을 닮아가 어느새 대부인이 아낌없이 자신이 가진 것을 자기에게 내어 주었던 것처럼 그 역시 전도 여행을 통해 가난한 사람에게 자신의 가진 소중한 것을 나누어주고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아는 장성한 모습으로 성장하였다.
다. 하란사 교수
이화학당에 입학하게 된 것은 1896년 무렵이었는데, 처음에는 기혼자란 이유로 입학 허가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마침내 허락 받았다. 그는 세례를 받고 이름을 "란사"(蘭史)라 부르게 되었는데 이것은 영어 이름 "낸시"(Nansy)의 한자음역이다. 그리고 남편의 성을 따라 이때부터 "하란사"로 불리게 되었다. 1900년에 일본유학 1년 후 귀국 다시 1902년 미국 오하이오 주에 있는 웨슬리안 대학에 입학하여 1906년 한국여성 최초로 미국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대부인이 세운 영어학교 교사가 되었다. 이 학교는 불우한 형편의 여성들,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했던 기혼여성들을 위한 학교였다. 대부인을 도와 영어ㆍ성경 등을 가르치며 불운한 환경의 여인들을 깨우쳐 나가기 시작했다. 하란사는 이 학교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이 학교는 후에 감리교 협성여자신학교가 되었다가 오늘의 감리교신학대학으로 발전하였다.
그 밖에도 초창기 한국 감리교의 여성 지도자인 양우로더, 신알베르트, 손메리 등이 모두 하란사에게서 영어와 성경을 배웠다. 또한 그들은 단순히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실의 교사가 아니라 학생들과 함께 거리와 시골로 나가 전도하는 전도인이 되었다.
1910년 9월 이화학당 안에 대학과가 신설되면서 여성을 위한 고등교육이 실시되자 그는 이 대학과의 유일한 한국인 교수로 참여하게 되었다. 또한 오늘의 교감에 비유할 수 있는 총교사가 되었고, 이화학당 기숙사도 책임을 맡았다. 1911년부터는 터틀과 함께 이화의 지교(枝校)로 있던 서울의 서대문여학교, 애오개(아현)여학교, 종로여학교, 동대문여학교, 동막여학교, 서강여학교, 왕십리여학교, 용머리(용두리)여학교, 한강여학교 등을 지도하는 책임까지 맡았다.
11. 대부인의 마지막
한국 여성교육에 전념하여 오늘날의 여성한국을 만든 대부인은, 1909년 10월 8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수천 명의 가난한 백성들과 여자들이 그가 가는 마지막 길을 뒤따랐다. 그를 떠나보낼 때 이 땅의 사람들은 ‘국모(國母)’와 견주어 이 땅의 이별을 슬퍼하였다. [대한매일신보]는 사설을 통해 그를 추모하였다.
“슬프다. 부인의 열성과 인내하는 마음이며 그 짝이 실로 드물도다. 이런 열성과 이런 인내의 마음으로 인하여 한국 여자의 학문계에 밝은 빛이 비로소 드러나서 안방 깊은 구석에서 술과 밥이나 짓는 법을 의논하던 여자들의 지식이 자라며 구습을 버리고 진리를 득신하며 장래 여자의 모범이 되었으니 이는 부인의 사업이러라. 어찌 다만 여자 뿐이리요. 남자라도 무릇 한국인 된 자는 부인을 향하여 절을 하고 치하하지 않을 이 없으리로다.”
한국 여성교육의 개척자로, 열정적인 복음 전도자로 활동한 대부인은 자신의 후반 생애를 바쳐 일구어낸 땅, 한국에서 별세하여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묻혔다. 주여, 감사합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