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으로부터의 사색』『나무야 나무야』『강의-나의 동양고전독법』
신영복 / 돌베개
새해 벽두부터 신영복 선생님의 글을 접하는 감회가 새롭다. 2017년1월 15일은 선생이 작고한지 1주기가 되는 날이다. 살아서 큰 나무였던 선생님은 '더불어 숲'이 되라던 생전의 말씀을 홀로 동여맨 듯 겨울 안거에 드셨다. 감옥으로부터 왔듯 옥중 창살 같은 겨울나무에게 자신을 내어준 것만 같다. 마음으로 참 존경하던 어른이었다. 아이들 키우면서도 젊은이라면 응당 읽어야 할 그분의 서적들에 눈 맞추었고 좋은 글귀들은 따라 적었다. 한낱 독서가의 마음에도 너무나 큰 어른을 시대의 철창 속으로 다시 보낸 것 같은 미안함이 깃드는데, 더 아끼고 따르던 분들이야 오죽할까. 민주주의를 외치던 이념의 시대가 차라리 고급스럽게 비치도록 하는 이 저열한 나라에서 진정한 시대의 스승을 그려보는 것은 삶이 모색해야 할 당면한 과제일 것이다.
선생님의 긴 그림자 끝을 따라가는 것은 책읽기의 고매한 여정이 된다. 좋은 책은 세월이 지나도 깊은 울림을 준다는 걸 선생님의 책으로부터 배우기 때문이다. 1월에 세 권의 책을 기웃거리는 것이 이렇게 행복할 줄 몰랐다. 이미 오래전에 읽었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과 '나무야 나무야'에는 그 시절에 그어 놓은 밑줄을 되짚는 여정이 있었다. 분명 읽었건만 전혀 새로운 이 감회 또한 낯선 것이 아니다. 책에서 풍겨나오는 오래된 책향이 늦은 밤공기 속에 기분좋게 번져갔다. 유려한 문체는 아니지만 진심이 느껴지는 글귀들을 닮았다. 그분의 주옥같은 글은 언제 읽어도 좋지만 이렇게 깊은 겨울밤, 잠들지 못할 때가 가장 적격일 것이다. 마치 1월의 겨울에 떠난 것이 선생의 큰 뜻인 것처럼, 세상이치 근원의 관계를 돌아본 혜안은 절절하고 아름다웠다.
외풍이 심한 방에서 손가락 호호 불며 책장을 넘길 때 문득 선생님의 겨울 쇠창살을 그려 보았다. 옥중이라곤 믿어지지 않는, 마치 고요한 칩거에 든 듯 평화로운 안부들에 몸을 여미게 하는 글의 진실성. 세상을 탓하기 이전에 자신을 돌아본 자의 살벌한 옥중 20년이 오히려 티없이 평화로운 비결일 수 있었다고 질문에 답을 한 것처럼 보였다. 학문과 산문의 사이에 핀 풀씨처럼 지성과 감성을 연결하는 아름다운 구도자 그 자체였다고 정의를 내려본다.
신영복 선생은 1941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났다. 물론 고향은 밀양이지만, 태어난 당시의 출생지는 의령인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대구사범을 졸업하고 경상북도에서 교사로 근무할 때 일본인 교장의 조선 학생 차별에 항의하다가 파면당했다. 몇 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야 겨우 복직될 수 있었는데 조건이 있었다. 같은 경상북도는 안 되고 도를 달리해 경상남도에, 그것도 정식 ‘훈도’가 아니라 ‘촉탁’으로 복직시켜주었다는 것이다. 교사 한 명뿐인 간이학교의 교장으로 의령에서 근무할 때 사택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이후 밀양으로 돌아갔으나 부산으로 고등학교 유학을 떠날 때까지 주로 교장 선생님의 사택에서 자라게 되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일화 한토막은 아버지의 교육관에 어떠한 분들이 영향을 주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당시 한글학자 이극로 등이 아버지의 사랑채에 드나들었는데, 어린 신영복에게 장래희망을 물으셨단다. 그때 신영복의 대답은 일본 총독이 되어 일본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친다는 것이었단다. 그때 그가 말한 일본 총독이란, 조선이 독립되고 일본을 식민지로 삼게 되었을 때 일본을 다스리는 조선인 총독이라는 것이라고 한다. 그 시대의 아버지와 민족주의자 친구들의 교육관을 물려받은 신영복은 이미 떡잎부터 남다른 세상과 만나고 있었다.
해방을 맞고 전쟁을 겪던 시절을 지나 아버지가 돌연 국회의원에 출마하겠다고 하고 낙선하는 시기에 집안의 가세가 기울었다. 선생은 자형이 근무하는 부산상고에 진학하게 되는데, 이는 훗날 '사람사는 세상'을 노래했던 노무현 대통령과의 인연으로 이어지고, 아주 작은 비석에는 선생이 써준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는 글귀로 남게 된다. 그리고 당시 고등학교 국어선생님의 조언으로 서울대 상대에 진학하게 되고 1년 후 4.19라는 역사적 시류를 경험한다. 부정선거에 의한 이승만 정권 교체는 세상을 바꿔놓을 것이라는 전망을 주었지만, 그들이 맛본 푸른 하늘은 무늬만 바뀐 5.16으로 교체된다. 신영복 선생이 본격적으로 학생운동에 뛰어든 것은 4.19가 틔운 싹을 5.16이 짓밟을 때부터였다. 독서동아리를 만들어 마오쩌뚱의 저서나 고리끼의 <어머니> 등을 베껴내는 활동 등을 하는데, 훗날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당할 때 중앙정보부의 빌미로 압수당한다.
대학원을 마치고 숙명여대 강사로 나가던 시절에 <청맥>필자로 활동하게 되는데 이때 청맥은 당의 합법적 기관지였고, 다만 서울대 사회학과 김질락을 만나게 된 것이 후일 통혁당사건에 연좌되는 불운으로 이어진 것이다. 정권에 의해 부풀려지고 조작되어지던 암흑의 시절에 그는 창창한 학문의 길을 접고 기나긴 수형을 감내해내야 했다. 감옥살이 매서운 찬바람에도 학자의 깨끗함과 인류의 평화로움을 담았던 얼굴은 그가 옥중생활에서 어떠한 정신적 깊이에 도달했는지를 가늠하게 해준다. 겨울나무의 의연함과 봄을 기다리는 숭고함이 감옥으로부터 걸어나온 세월이 20년 20일이었다. 징역은 나오는 맛에 산다고 하지만 20년을 채운 생은 차마 함구할 수밖에 없는 무게를 던진다. 그것도 87년 6월 항쟁의 산물이니, 민주화의 후예들이 피로 일군 석방이 아닌가. 이토록 깊은 혜안을 가진 학자를 감옥에서 썩게 만드는 이 나라에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음에도 '사색'이라는 이름으로 조용히 저를 낮추니, 측은함은 물러나고 존경이 마음에 자란다.
그분이 살아서 우리에게 던진 수많은 연대의 서(書)들이 새삼 묵직하다. '言約(언약)은 강물처럼 흐르고 만남은 꽃처럼 피어나리' 하셨으니, 아마도 1월이면 이 삼엄한 시대의 강으로 겨울눈꽃 되어 떨어질 것이라고 쓸 수 있을 것 같다. 얼어붙은 강을 건너는 길은 여럿이 함께 어깨동무를 한 눈꽃으로 건너는 것이라고 말할 것 같은 선생님이지 않은가. 어린 동무들과 소풍길에서 나눈 우정의 기록인 ‘청구회 추억’에서 가난한 소년을 이해하는 따뜻한 지식인의 안목과 섬세한 배려를 엿볼 수 있었던 만큼, 그 무엇보다 겨울나무 곁에 닿는 흰 눈꽃의 이미지가 어울려 보인다.
선생님의 호 ‘쇠귀’로 적혀진 수많은 글씨들은 민체, 연대체, 어깨동무체라고도 불려 가장 민주적 서체로 각광받는다. (참고로, 선생의 호 '쇠귀'는 선생이 살던 동네 우이동을 순우리말로 풀이한 것이라 한다.) 그런가하면 소주 제목으로 더 널리 알려진 ‘처음처럼’으로 대중에게도 친숙하기를 기꺼이 노력하셨다. 민주화를 논의한 대부분의 정치인, 학자들이 가장 존경하는 분으로 기록되던 선생은 나라가 다시 어떤 부끄러움을 보여주고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한 그루 의연한 겨울나무로 돌아가셨다. 성공회대학교 교정의 느티나무가 의연히 버티고 선 것도 선생의 뜻을 살피기 위함이라는 글을 어디선가 본 것 같다. 나는 선생의 책으로 선생을 기려보았다. 나무야 나무야, 감옥으로부터 걸어나와 다시 우리에게 멋진 강의를 해다오, 그렇게 부탁하고 싶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