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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687년
하늘의 별빛도 흑운 속에 갇히고 사위가 깊은 정적과 어둠에 묻혀있었다. 후고구려의 태자이자 진국장군, 발해군왕 겸 고리군왕, 대당大唐 황제 무 태후의 시위장수 고조영의 집. 고려 식 팔작지붕 위에는 캄캄한 밤안개가 내려 앉아 있다.
그러나 실내는 등불들로 대낮처럼 밝다. 문 안에는 짙은 휘장이 내려져 있고, 휘장 속, 환한 불빛 사이로 청년 남녀의 얼굴들이 어른거린다.
“재상 유의지는 어떻게 되었소?”
얼굴이 넓고 이목구비가 굵게 생긴 삼십여 세의 남자, 귀성주자사 손만영이 고조영에게 물었다.
“예상했던 대로, 무 태후로부터 자살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조금이라도 비위에 거슬리면 다 잡아 죽이니, 이것이 어디 사람 사는 세상이오?”
“유의지가 외삼촌에게 뇌물을 받았다는 것은 근거 있는 얘긴가요?”
이루하가 손만영에게 물었다. 손만영은 이루하의 부친 이진영의 손아래 처남으로서, 이루하의 외삼촌이다.
“그건 말하기가 좀 곤란한 건데, 내가 여기 황궁에 붙잡혀 있으면, 우리의 숙원이 언제 이루어지겠느냐?”
총명한 이루하가 그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뇌물을 써서라도 영주로 돌아가시려는 거예요?”
“우리가 거사하기에 가장 좋은 곳은 영주가 아니겠느냐?”
“맞습니다. 일단 영주의 당나라 수비군들을 내쫓고 영주를 우리의 손아귀에 넣으면, 유주와 기주를 공략하고 발해군까지 접수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사비우가 신중한 태도로 발언했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무르익지 않은 것 같습니다. 처처에서 홍수와 가뭄으로 백성들이 참담한 간고를 겪고 있긴 하지만, 어느 곳에서 반란이 발발해 나라를 세우려한다는 소문은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고조영의 변이다.
“그렇습니다. 당 고조 이연이 천하를 얻은 것도, 실은 수양제 양광의 광기가 극에 달하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자칭 황제라 일컫는 도적들이 벌떼같이 일어난 판국 속에서였습니다. 안정된 나라에서 의거를 일으키기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삼년 전에 벌어진 서경업, 서경유 형제의 실패를 교훈 삼아야 합니다.”
“지금은 무 태후가 살인을 밥 먹듯이 하지만, 그래도 아직 정신을 놓고 있지는 않소. 주변에는 적인걸(630-700) 같은 명관들도 다수 포진하고 있고.”
이해고가 고조영의 의견에 찬동했다.
“그럼 우리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오?”
“먼저, 무 태후가 황실의 이씨들을 모조리 제거하고 확고하게 정권을 잡아야 하며, 다음으로는, 무 태후의 충직한 곁가지들이 모두 잘려나가고 그녀가 외톨이로 전락할 때가 적기인 줄 압니다.”
“하지만 무 태후 곁에는 무씨들이 진을 치고 있는데, 이씨들이 죄다 사라지면, 무씨 천하가 되지 않겠소? 그러면 오히려 나라가 굳게 안정되어 우리에게는 불리해질 텐데요?”
이해고가 물었다.
“무씨들 중에 제정신을 갖춘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무 태후의 조카들인 조정의 핵심 실세 무삼사와 무승사는 권력과 재물에 눈이 멀고, 색만 밝힐 뿐 머릿속은 텅 비어 있습니다. 무씨 가운데 가장 무서운 인물이 하나 있기는 하오.”
“그게 누굽니까?”
“무후군의 무유서 장군이오.”
“그렇다면, 그도 역시 우리가 제거해야 할 대상이오.”
그 때 갑자기 잠자코 있던 여미아가 입을 열었다.
“무유서 장군은 그리 염려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여미아는 일개 비자였으나, 뭇사람들로부터 깊은 존중을 받고 있었으므로, 아무도 그녀의 발언을 무시하지 못했다.
“아가씨는 무슨 근거라도 있어서 그런 말을 하십니까?”
사비우가 물었다.
“제가 판단하기로, 그분은 관직에 뜻을 두고 있지 않은 듯합니다. 일전에 그분의 꿈 얘기를 들었는데요, 그 후부터 사람이 아주 달라진 것 같습니다.”
“무슨 꿈입니까?”
“꿈속에, 하늘 천제께서 하얀 백마를 타고 나타나셨는데, 그 분의 입에서 날카로운 검이 나왔다고 합니다. 얼굴은 해보다 더 밝게 빛나는데, 그 광채가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지 감히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이루하가 그의 꿈을 간단히 들려주며 덧붙인다.
“그 때 하늘에서 이런 음성이 들렸대요. ‘죄 없는 고高씨들을 죽인 저 이李씨들을 심판하라! 무죄한 이李씨들을 죽인 저 무武씨들을 심판하라!’ 그 음성이 들림과 동시 백마를 탄 하늘임금의 입으로부터 날카로운 검이 무유서를 향해 쏜살같이 날아와 혼비백산해서 깨어났답니다.”
무유서의 꿈 얘기를 이루하에게 전해들은 손만영, 이해고, 사비우 등은 한 동안 어리벙벙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장내의 등잔불들과 촛불들만이 춤을 추며 실내의 정적을 휘젓고 있다.
“무유서 장군은 그 꿈에 큰 충격을 받은 게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평소에도 그는 평화의 임금이신, 우리 구주 하늘 상제의 평화에 관한 가르침에 깊은 관심을 보인 적이 많았습니다.”
“평화의 임금이라? 그럼 무유서가 그 평화의 가르침에 큰 깨우침을 받아, 전쟁과 살인을 싫어해 은거하기라도 한단 말입니까?”
“아마도 무유서 장군은 머지않아 관직을 버리고 은퇴할 것입니다.”
“아니, 그걸 어떻게 예견할 수 있소?”
“그냥 소녀의 막연한 예감일 뿐입니다.”
“무 태후가 살인을 밥 먹듯이 하는 마당이니, 제정신을 가진 자라면, 머잖아 무씨들에게 재앙이 닥칠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건 당연한 일이오.”
“무유서의 꿈처럼 이씨들이 지금 무씨들에게 심판을 받고 있다면, 그럼 무씨들은 누가 심판할까요?”
이해고의 질문에는 ‘그건 우리가 아니겠느냐?’라는 무언의 암시가 담겨 있었다.
“그것이 우리일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뜻밖에도 여미아가 그의 속뜻을 간파하고 대답했다.
“그럼 누구입니까?”
이해고가 여미아에게 물었다.
“저도 모릅니다. 하늘의 임금만이 아십니다.”
“모른다면서, 왜 우리는 아니라고 단정하십니까? 하늘의 임금이 우리를 무씨들의 심판자로 세웠는지 누가 압니까?”
여미아가 이해고를 쳐다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하나로 통일되어있는 거대한 제국 대당을, 고려 말갈 거란의 소수 연합군대로 뒤집어엎을 자신이 있습니까?”
“그럼 우리가 의거를 일으키지 말아야 된다는 거요?”
이해고가 다시 묻는다.
“지난 번 영주에서 무 태후와 저희 외조부 간에, 무 태후가 대당의 황권을 완전히 장악하면, 고려의 고토를 돌려준다는 합의가 구두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때 가서 고토를 돌려달라고 요청하고, 응하지 않을 경우 군사를 일으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좌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손만영이 여미아에게 묻는다.
“우리가 군사를 일으키면 대당을 전복시킬 수는 없다 하더라도 영주, 유주, 발해군까지는 접수가능하지 않겠소?”
“일시적으로는 가능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를 유지할 국력이 있는가가 관건이죠. 우리 환족(한민족)이 화하족(중국인)과의 투쟁 과정에서 회대지방(산동반도와 그 이남의 동부화북평야)으로부터 점차 밀려난 것도 실은 국력이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결국 의거義擧하려면, 타국의 힘을 빌어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그래요.”
“주변의 다른 나라는 돌궐과 신라, 토번뿐인데 우리가 거병할 경우 신라가 우리를 지지할 수 있을까요?”
손만영이 재차 물었다.
“그들은 친당정책을 썼지만, 당이 자기 나라까지 삼키려하자 같은 민족인 후고구려의 편을 들어 당군을 평양과 요동에서 내쫓았습니다. 그러나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을 병합한지 얼마 되지 않으므로 국내정세가 매우 불안정해, 우리에게 관여할 여력이 없을 것입니다. 신라에 대해서는 염려할 필요도 없지만, 그들에게 도움을 기대하지도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신라와 후고구려, 고려부흥군의 세력에 밀려,
당나라가 요동을 잃게 되자 안동도호부(당이 접수한 고구려 땅을 통치하던 당나라의 기구로서, 일제의 조선총독부와 유사한 개념)를 요동고성遼東故城(요하 동쪽의 요동성이 아닌 난하 동편의 요동고성. 하북성 창려)으로 옮기고
백제의 웅진도독부를 건안고성建安故城(요하 동편의 건안성이 아닌, 옛 건안성으로서 지금의 하북성 당산 경내)으로 이전한 것이,
<자치통감>에 따르면 고종 의봉 원년인 676년 2월 6일의 일로서,
우리 소설에서 손만영, 고조영 등의 이 밀회가 있기 11년 전이다.
이듬해인 677년에 안동도호부는 요동 신성(난하 동편의 창려에서 멀지 않은 성)으로 옮겨졌다.
“돌궐은 어떨까요?”
여미아가 답한다.
“돌궐은 자기 실리를 위해 관망하는 편을 택할 것입니다. 섣불리 어느 한쪽에 가담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토번은요?”
“토번은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지만, 만일 토번이 서쪽에서 당의 오른쪽 옆구리를 긁을 수만 있다면 우리로서는 큰 도움이 되는 거죠. 하지만 중국 및 돌궐이 가로막고 있어 토번과의 교류는 거의 없는 마당이니, 그게 애석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일단 하나의 힘은 돌궐이고 또 하나의 힘은 당나라, 그리고 세 번째는 우리 고려와 거란, 말갈의 연합세력이라고 보아야 하겠군요. 우리가 거병해 영주와 유주를 점령한다고 가정할 때, 돌궐이 어떤 태도로 나올 것 같습니까?”
“그들은 배가 아파 가만히 보고 있지 않을 겁니다. 우리를 자기들에게 신속臣屬시키려고, 우리 배후에서 뒤통수를 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아마 당나라가 그들과 모종의 밀약을 맺고 뒤통수를 쳐 달라 주문할 겁니다.”
“돌궐에게 뒤통수를 맞지 않을 비결이 뭘까요?”
“당나라가 그들에게 손을 뻗기 전 우리가 먼저 그들과 양해각서를 체결해, 우리가 당으로부터 다물하는 땅 가운데 일정부분을 돌궐에게 양보하거나, 돌궐에게 신속臣屬하거나, 둘 중 하나의 길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여미아는 천정을 우러러 뭔가를 깊이 숙고하다가 덧붙였다.
“의거를 일으킨다면, 지나친 욕심을 삼가고, 영주와 요서만을 되찾는 선에 만족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고구려의 제일방어선이었던 상하운장上下雲障(난하 동부 갈석산 일대)을 국경으로 삼고, 고려말갈, 거란, 해가 돌궐과 연대해 그 동북지역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이를 위해선 돌궐에게 적당히 신속臣屬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나중에 힘을 길러 독립하기까지는요.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토번으로 사자를 보내, 토번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 상책입니다.”
“아가씨는 우리의 모사가 되어야 할 것 같소.”
“대인,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소녀는 그저 상식으로 이야기했을 뿐, 이런 일에는 전혀 취미도 관심도 조예도 없습니다.”
여미아가 손사래를 치며 덧붙였다.
“스물도 되지 않은 일개 소녀를 모사로 써야 할 정도로 인물이 없다면, 그 군대는 얼마나 한심한 군대이겠습니까? 두고두고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여미아의 말이 따끔했다. 좌중은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고, 뭐라 나무라거나 반박할 수도 없었다.
한참만에야 이해고가 탄식하며 말했다.
“황제 이단의 처소에서 어젯밤에 여미아 아가씨에게 들은, 요세보堯世寶 왕의 이야기가 지금도 생생하오. 요세보가 서른 살의 청년으로서 애급의 내로라하는 문무백관을 제압하고 당당히 나라의 총리재상이 된 것은, 그의 신 같은 지혜 때문이라고 하지 않았소? 아가씨야말로 신 같은 지혜를 가지고 있는 것 같소.”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건 결코 신 같은 지혜가 아니라, 장군님들께서도 잘 아시는 범상한 이야기입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 때였다. 밖에서 가벼운 헛기침 소리가 나며 뒷문이 살며시 열렸다.
“나리, 바깥에 수상한 자들이 얼쩡거리다 돌아갔다 하옵니다.”
고조영의 하인이었다. 그의 말 한 마디에 좌중의 분위기가 갑자기 냉각되었다.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전에도 이런 일이 가끔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저를 감시하는 것 같습니다.”
조영이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혹시 우리의 모임에 대해 무슨 냄새를 맡은 것은 아닐까요?”
사비우가 신중한 얼굴로 묻는다.
“그건 아닐 거예요. 어젯밤 갑자기 결정해서 오늘 연락해 극비로 모인 것이므로, 아무도 우리의 모임을 예측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미시아가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우리의 회합이 탄로 나면 우린 모두 죽은 목숨이오.”
뭇 사람들은 약간의 충격을 받았는지 방안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초롱불만 가물거리며 기름을 태우고 있다. 시각은 아마도 자정이 넘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갑자기 군사들이라도 이곳에 들이닥친다면, 우리가 지금 피할 길은 있습니까?”
사비우가 물었다.
“피할 길은 없어요. 하지만 그런 것까지 대비해야 한다면, 우리는 단 한 차례, 어디서도 밀회를 열 수 없을 거예요. 멀리 바깥으로 나갈 수도 없으니까요.”
미시아가 가물거리는 촛불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군사가 들이닥친다면 다 죽은 목숨이라는 거군요?”
“그래요. 그래서 기밀유지가 생명입니다.”
미시아가 천정을 쳐다보다가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꿈속에서 보았던 그 ‘살생부록殺生符籙’이 마음에 걸립니다.”
“살생부록이라니 무슨 얘기요?”
손만영이 물었다.
“아, 외삼촌이나 이해고 장군, 사비우 장군은 잘 모르시겠어요.”
이루하의 말이다.
“미시아 아가씨가 생시처럼 아주 생생하게, 꿈속에서 살생부록을 보았는데, 그 안에 여기 있는 분들의 이름이 다 들어가 있었답니다.”
“실은 그 명단 때문에 제가 엊그제 만국준에게 얼마나 호된 고초를 겪었는지 모릅니다. 하마터면···.”
그녀는 차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녀도 험난한 강호에서 산전수전 다 겪었지만, 그런 치욕을 당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미시아가 한숨을 길게 내쉰 후 말을 돌렸다.
“다시는 그 명단을 종이에 적어두지 않기로 했습니다. 머릿속에 깊이 저장해 두는 수 밖에요.”
“우리를 위해 다시 한 번 살생부록의 명단을 들려줄 수 있겠소?”
“네.”
미시아가 먼저 중외인들의 이름을 외우고 이어서 중화인들의 명단을 열거한 후 말했다.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누구든 그 이름들을 하나도 빼놓지 말고 암기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좋소. 다시 한 번만 더 들려주시오.”
미시아가 재차 암송하자 여러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뇌리에 완전하게 새겼소. 잊지 않겠소. 그런데 단순히 생사부록이라 했으니, 누가 살고 누가 죽는다는 겁니까?”
“그걸 몰라서 답답한 게 아닙니까?”
“그것이 설사 하늘의 상제께서 언니에게 열어주신 계시라 하더라도, 그건 극도로 몸을 조심하라는 경고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 우리들의 생사가 필연적으로, 꿈속에서 그 살생부록을 만든 무 태후에 의해 결정된다는 뜻은 아닐 거예요. 저는 인간이 자기 운명을 바꿀 수 없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경교의 가르침도 그렇습니다.”
여미아가 고개를 숙이고 잠시 묵상하다가 말을 잇는다.
“만약 살생부록의 꿈이 우리 구주 천제님의 계시임에 틀림없다면, 조심하지 않을 경우, 살생부록에 기록된 사람들이 모두 죽음을 당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상제께서 운명적으로 살 사람에 대해서까지 경고하시지는 않으실 터이니까요. 죄다 자칫 무 태후에 의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 이름들이 모두 살생부록에 오른 게 아니겠어요?”
“그럼 ‘살부록殺符籙’이어야지 왜 ‘살생부록’입니까?”
“경거망동하지 않으면, 피해서 살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내가 다시 정적에 잠긴다.
“어찌하면 살 수 있겠소?”
이해고가 심각한 얼굴로 여미아에게 물었다.
“무 태후에게 밀고하면, 그 사람은 살고 우리 나머지는 다 죽을 겁니다.”
여미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아니면, 지금까지의 일을 모두 무無로 돌리고 대당의 충신으로 살아가되, 무씨들이 수난 당할 때를 잘 대비하셔야 할 겁니다.”
“참으로 어려운 얘기로군요. 어차피 우린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탔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한 가지 생로生路가 남아 있습니다.”
여미아가 진지하게 말했다.
“요세보 왕이 죽음의 위기 속에서도, 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애급의 총리재상이 되고 자기백성의 왕이 되어, 나도 살리고 남도 살릴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었을까요?”
“그야말로 그건 천운이고 행운이 아니었던가요?”
이해고가 반문했다.
“물론 거기에 하늘의 도우심이 없지 않았지만, 만사를 천운과 행운으로만 돌리는 것은, 무책임하고 지혜롭지 못한 사고방식입니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 고사古史는 그저 심심파적거리나 삼으려고 읽는 게 아닙니다.”
여미아는 연치가 어렸고 평소 종으로서의 예의를 깍듯이 갖추었으나, 중대한 순간에는 직설적인 언사를 꾸밈없이 구사하기도 했다. 그 때 듣는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이상하게도 반감을 가지지 않고 그녀의 말을 달게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각에 무 태후의 금군禁軍이 들이닥친다 하더라도 우리가 살 길이 있단 말인가요?”
이해고가 다시 질문한다.
지금까지 무 태후에 대한 반역모의는, 백이면 백 죄다 일족이 주살당하고 가산이 적몰당하는 형벌에 처해졌다.
“우리가 무얼 하기 위해 지금 여기에 모여 있죠?”
여미아의 느닷없는 물음에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그야 대당으로부터 거란을 독립시키고 고려의 고토를 회복하자는 게 아닌가요?”
이해고에 반문에, 귀성주자사 손만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네. 그 말은 틀렸네.”
“정확히 말하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는 뜻입니까?”
사비우가 손만영의 얼굴을 쳐보다며 묻는다.
“우리가 발각당하지 않으면 이해고의 답변이 맞고, 우리가 체포당할 경우에는, 우리의 이 모임은 단순한 생일축하연이네. 내 생일 축하연이라는 말일세.”
모든 사람이 그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오늘이 손 대인의 생신인 것은 맞지만, 그것으로는 좀 부족하지 않은가 합니다.”
“아가씨의 고견을 말씀해 보시오.”
손만영이 매우 정중하고 깍듯한 태도로 여미아에게 말했다.
“우린 이 회합에서 드디어 천명신검의 비의秘義를 해득했습니다.”
다시 한 차례 모든 사람이 영문을 몰라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느닷없이 웬 천명신검인가?
여미아가 활짝 웃었다. 그녀의 화려한 웃음은 구름 속에서 나온 햇살 같이, 방안에 머문 어둠과 사람들의 가슴에 깃든 불안을 일소에 쓸어버리는 듯 이상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천명신검을 얻은 자는 천하를 얻습니다.”
여미아가 가물거리는 촛불을 바라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천명신검의 비의전승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고조영이 묻는다.
“하지만 천하를 얻는 과정에서, 천명신검은 피비린내를 몰고 옵니다.”
“그건, 천명신검 밀의전승의 세 번째 항목이군요. 남은 한 가지는, 천명신검이 일남일녀를 맺어준다는 거죠.”
고조영이 제법 아는 듯이 말했다.
“우리가 여기서 특별히 주의해야 할 게 첫 번째 조목입니다. ‘천명신검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
“···?”
“소녀가 듣기로는, 무 태후가 천명신검 두 자루를 얻었다고 합니다.”
(다음회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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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5. 1. 27.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