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80년대, 다섯 명의 여성노동 운동사
1970년 11월 13일, 23살의 전태일은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온 몸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불길에 휩싸인 그 상황에서도 전태일은 그렇게 부르짖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을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온 몸을 불사르며 그렇게 부르짖었던 전태일의 분신자살은 노동법을 오용해오던 사주들에 대한 반기를 들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노동계의 의식이 들불처럼 타오를 수 있는 참다운 동인 역할을 하게 됐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까지는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 당시 전태일과 괘를 같이 했던 수 많은 풀뿌리 노동운동가들이 많이 있었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여성 운동가들이 꽤 많았을 것인데, 최근 박수정이 펴낸 《숨겨진 한국 여성의 역사》(아름다운 사람들, 2004)란 책에는 그 당시의 대표적인 여성 운동가 다섯 사람이 소개되고 있다.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이총각, 전 YH무역 노조위원장 최순영, 전 원풍모방 노조부위원장 박순희, 전 한국여성노동자회 협의회위원장 이철순, 그리고 전 전남제사 노조위원장 정향자 등이 바로 그녀들이다.
다섯 사람 모두는 출신지를 비롯해 태어난 가정 환경이라든지 성장 배경도 각기 달랐다. 하지만 70년대의 가난한 여성들이 바라던 꿈이 모두 비슷하듯이, 이들 다섯 명의 여성들도 최초 그런 꿈을 품고 있었다. 자신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 대도시로 상경하여 공장에 취직하고, 그 공장에서 힘들게 모은 돈을 시골에 부치거나 동생들 대학 뒷바라지하는데 쓰고, 그 와중에서도 조금씩 아껴 모아 좋은 남자 만나 시집가는 것, 그것이 당시 가난한 여성들이 품고 있던 꿈이었다. 이들 다섯 명의 최초 꿈도 그러했다. 하지만 각기 다른 공장에 들어간 이들은 당시 노동 현장에서 부딪히는 착취와 부당한 대우들을 일깨워주고 투쟁할 수 있는 방안을 만들어 갔던가톨릭노동청년회라고 하는 JOC(Jennesse Ouvriere Chretienne)와의 만남을 통해 노동 운동계의 새로운 대안에 눈을 뜨게 되었고, 그리하여 그들의 운명은 당시 가난한 여성들의 일반적인 꿈에 동조할 수만은 없었고, 결국 노동 운동계의 진정한 해방과 자유 쟁취를 향한 투쟁사의 한 획을 긋는 여성 노동 운동사의 중심에 서게 된다.
이총각. 이름만 들어도 억센 남자 이름인 듯한 그녀는 1.4후퇴 때 어머니 등에 업혀 빗발치는 총알 속에서 살아 나와, 인천에서 여성노동자라는 이름으로 당당히 살아가고 있다. '아들이길 기대하고 딸 몸조리 해 주러 오신 외할머니. 원하던 아들이 아니라 딸이 태어나자 윗목에 던져 놓고 젖도 주지 말라고 했던 할머니, 집으로 돌아가시며 '총각'이라고 이름 지으라 하셨다.'(p.73) 그녀가 처음 들어간 공장은 인천 만석동에 있는 동일방직이었다. 당시 공장 현장에 들어가기 전엔 건강검진이 필수였다는데, 그 당시 상황에 대해 이총각은 씁쓰름한 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털어놓는다. '웃옷을 올리라는 의사 말에 창피해 옷을 조금 올렸다. 더 부쩍 올리라는 말에 수치심이 일었다. 어금니 사리 물고 올렸다. 일자리가 필요했다. 가난했던 시절, 여자들이 일할 곳마저 없던 그때, 1500명이 일하는 동일방직은 누구나 가고 싶어하던 곳이었다.'(p.17) 그런 그곳에서 이총각은 12년을 살았는데, 만 9년은 생산직 노동자로, 만 3년은 노동조합 상근자로 일했다고 하니, 78년 회사에서 쫓겨나기 전까지 스무 살과 서른 살의 청춘과 젊음 모두를 그곳에서 보낸 셈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같은 공장 내에서 일하는 정양숙이라는 언니로부터 어느 날 JOC에 대해 소개를 받게 되고, 그 언니로부터 노동조합과 전태일의 죽음까지 전해 듣고 된다. 그를 계기로 이총각은 자신의 앞길에 대해 진지한 고민과 결심을 하게 된다. '노동조합을 조금씩 알게 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 인간답게 사는 것은 일만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한 만큼의 대가를 받고,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그것은 노동조합 밖에 없다는 거죠.'(pp.22-23) 만 9년을 보낸 후 회사를 쫓겨나기 3년 전, 이총각은 동일방직 대의원으로 뽑히게 되었고, 75년에는 2대 여성집행부가 시작하면서는 총무가 되기도 했는데, 그 이듬해 사건에 대해 이총각은 그렇게 이야기 해 준다. '76년 7월, 푹푹 찌는 한 여름. 동일 방직 여성노동자들은 회사의 탄압에 맞서 옷을 벗었다..... 경찰이 지부장 이영숙과 총무부장 이총각을 연행해 가자 노조원들은 76년 7월 23일부터 26일까지 석방투쟁을 했다. 800여 명 농성자들을 해산시키려는 경찰과 회사측에 맞서 여성노동자들은 파란 작업복을 벗었다. ...... 조합간부 연행에 옷을 벗고 저항했던 여성노동자들은 2년 뒤, 1978년 2월 21일 새벽, 대의원 선거 투표 날, 더한 일을 만났다. 동일방직 민주노동조합을 어떻게든 부수겠다는 사람들은 여성노동자들의 몸에 똥을 뿌리고, 밤새 일을 하고 난 배고픈 그이들 입에 똥을 집어넣었다.'(pp.32-34) 78년 2월부터 시작한 동일방직의 그 싸움은 그녀의 끈질긴 투쟁으로 인해 81년 중순을 기해 정리가 됐다. 그런데 그 와중에 이총각은 동일방직 블랙리스트(요시찰인물명단)에 올라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 후, 그녀는 82년 11월에 부천노동사목에 들어가서 만 4년을 노동자들하고 살았고, 87년도부터 89년까지는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일을 맡아서 했지만, 자신의 성에 차지 않았던지 89년에는 세 군데 공장을 더 다니기까지 했다. 그러니 어찌 보면 이총각 그녀는 66년 1월 18일 동일방직에 들어간 이후 23년 동안을 그렇게 공장 노동자로 살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최순영. 그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머니를 여의고,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마저 여의었는데, 그때 한 친구의 꼬드김에 못 이겨 그녀는 그런 결심을 하며, 서울로 상경하게 된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우리를 키워 주시는데 나는 남동생 셋을 공부시켜야겠다.' ...... 강원도 산천을 넘으며 가슴에 새겼다. 1970년 설을 세고 얼마 안 지나서이다. 처음 발 딛은 곳, 마장동.'(p.84) 1970년 새해, 최순영은 새로운 서울살이를 시작하게 되는데, 그때의 모습에 대해 그렇게 술회하기도 한다. '그때 당시 YH에서 일하는 사람은 모두 4천명이었다. 국내 최대의 가발업체였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그 공장이 1966년에 만들어졌다는 것이고 처음 시작할 때 노동자가 단 열 명이었다는 사실이다. 4년 만에 열 명이 4천명으로 불어났다니 그 회사가 돈을 얼마나 벌었을까 상상을 할 수 가 없을 정도이다.'(p.88) '바로 밑에 남동생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바로 서울로 데려왔다. 자취방에서 함께 지내면서 최순영은 2년 동안 학원을 보내며 대학을 보냈다. 그 동생이 강원도에 있는 대학으로 가고 나자 다시 둘째 동생을 올라오게 해서 마찬가지로 공부를 뒷바라지했다.'(p.92)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던 최순영이에게 회사는 회유책을 쓰기 시작하게 된다. 그 이유는 그녀가 JOC와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 노동법을 교육받고 있었기 때문이고, 조합원들을 팀별로 교육시키고 있던 사실을 공장 내 어용 간부들이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완강했다. '나를 해고시키고, 엄청난 회유책이 들어 왔는데도 내가 '그까짓 것' 그러니까, 회사에서 '하청공장 차려주겠다, 아니면 평생 먹고 살 것 주겠다'고 수선을 떨었지. 그때 총각 사원이 하나 있었는데 나를 꼬시면 과장을 시켜주겠다고 했나 봐 ...... 교육을 받은 최순영은 그동안 '돈만 벌겠다'던 자신에 가려진 다른 '자신'을 만날 수 있었다. 몰랐던 다른 세상, 보려고 하지 않았던 다른 '세상'을 만났다.'(pp.97-99) 최순영은 그 후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 교육받은 자신의 일년 후기인 11기 남편과 결혼하게 되고, 그녀의 남편은 천호동에 있는 태양금속에 용접공으로 위장취업해서 활동하게 된다. 그런데 남편이 정관 수술 결정을 내리기 전 두 사람 사이에 생명이 잉태되었고, 최순영이 임신하고서도 활동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낸 것이 결국은 탁아소였고, 그를 계기로 지방자치제와 두 번의 시의원까지 거치게 된다. '아이를 방에 둔 채 밖에서 문 걸어 잠그고 일을 나가야만 하는 집이 많았다. ...... 탁아소운동을 하면서 여성노동자회 일을 다시 시작했다. 부천여성노동자회 ...... 그래서 최순영은 주부 대표로, 생협대표로 지방자치제 선거에 출마했다. ...... 담배자판기 설치 반대운동을 한 뒤, 두 번째로는 학교 급식 문제를 들고 나와 풀어나갔다. 전국에서 처음으로 부천에서 시작했다. ...... 부천에서 최순영은 무소속으로 두 번 시의원을 했다.'(pp.112-119) 그녀는 지금 민주노동당 간 지 3년이고, 2000년에는 부대표까지 맡아 일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왜 그렇게 정치적 입장에 서서 일을 하는지, 그에 대해 그녀는 그렇게 답한다. '...... 그런 현장을 만나면서 정치로 해결해야 한다는 걸 절실하게 느꼈다. 하지만 노동 운동하는 사람들한테서 단위 사업장 문제에만 머무는 모습을 본다. ...... 비정규직 문제도 사업장에서만 싸워서는 풀리지 않습니다.'(p.132)
박순희. 1965년, 열 여덟 살의 그녀는 중학교 졸업 후 원하는 사범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양복지기 짜는 공장에 들어가 일하게 된다. 스스로 돈을 벌어 공부를 하겠다고 마음먹고 들어가 시작했던 공장 일이, 그때 당시의 잠깐이 아니라, 그 일을 계기로 노동자 곁에서 영원히 사는 운명이 되었다. '열여덟 살에 직포와 북실을 감는 노동자가 되었고, 스물 넘어서는 동료 노동자를 일으켜 세우는 노동자가 되어 삼 십여 년이라는 세월을 살아왔다. 유신이라는 혹독한 바람 앞에서도 꺽이지 않았다. 87년 이후 들불처럼 번진 노동자들이 투쟁이 있기까지 그 밑불을 말없이 지폈다..... 박순희. 그 이름 석자가 우리 노동운동사에서 뚜렷한 글자로 새겨져 있다.'(p.145) 그렇게 양복지기 짜는 공장에 들어갔던 그녀는 가톨릭 배경 때문에 곧장 가톨릭 노동청년회(JOC) 회원이 되어 그곳에서도 열심히 일을 하게 됐는데, 가톨릭 노동청년회 남부 연합회 서기 일을 맡아 하던 70년 어느 날, 신부님을 뵈러 온 사람들로 인해 그녀의 운명이 달라지게 됐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와 청계천 재단사 친구들이었다. 신부님이 박순희를 불렀다. 함께 열사의 삶을 전해 들었다. ...... 당시 나이 스물 셋, 집에서는 혼인하라고 하는데, 어떤 삶을 살 건가 선택의 길이 박순희 앞에 놓였다.'(p.149) 그때 박순희는 노동문제에 투신하기로 다짐했고, 그 이후 숨가픈 투쟁의 나날들을 보내게 된다. '76년에 '여성해방노동자기수회'를 만들었어. ...... 80년 5월, 한국노총 어용성 반대투쟁, 해고자 복직 투쟁, 노동3권 보장 투쟁에 조합원을 이끌었다. ...... 81년 4월에 안기부에서 조사를 받았다. 창문 하나 나 있지 않은 지하실, 24시간 켜진 형광등, 문에 들린 유리창은 밖에서 들여다보는 두 눈동자 크기만 한 것이었다. ...... 3자 개입으로 1년 반 선고받아 1년 살고 83년 8.15 특사로 나왔어. ...... 감옥에서 나온 지 채 두 달이 지나지 않은 때 천주교 전주교구에서 준비하는 이리 노동사목 건설에 힘을 보태러 나섰다. 그가 가자마자 이리 경찰서에는 총비상이 걸렸다. 서울서 '왕빨갱이 왔다'고. ...... 그녀는 이리에서 6년 간 있다가 88년에 노동사목이 없는 대전으로 옮겨갔다. ...... 대전서 3년 있다가 91년에 서울로 올라와서는 가톨릭노동사목전국협의회 부회장과 전노협 지도 위원을 맡았다. ...... 99년 안식년을 받았다. ...... 그이는 6개월은 개인시간을 가졌지만 몇 달은 비전향장기수 선생들과 보냈다. ...... 그녀는 매향리에 가서 일년 싸웠다. '(pp.163-175) 그처럼 숨가픈 질곡의 노동운동을 이끌어 왔던 박순희는 청와대까지 쳐들어가려던 어느 날 순찰차에 치이게 돼 입원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몸을 그토록 망가트려 놓았던 그 경장을 그와 같은 노동 운동사의 이해 속에서 용서해 준다. '순찰차가 움직였다. 뒤로. 순간 허리가 앞으로 꺾여 등의 일부가 차량 후면 범퍼에 들어갔다. 차는 앞으로 다시 빠졌다. ...... 백병원에서 열흘, 서울대병원에서 열흘 있다가 퇴원했는데 ...... 다시 원진녹색병원에 입원해 5개월 동안 치료받았다.'(p.177) '작년에 다치고 나서 차를 몬 경장이 병원으로 차장 왔어 ...... 옆에서 사람들은 고발하라고 했지만 안 했어 ...... 우리 운동이 선을 향해 가는데 미움만 남으면 어떻게 하겠어. 의견이 틀리다고 해서 안 보고 살고. 전체를 바라보는 시각도 긍정적으로 더 사고해야 해. 삶을 살아가는 과정이 새롭게 와 닿고 바로다 보여.'(p.188)
이철순. 그녀의 부모님은 여자가 공부를 많이 하면 팔자가 사나워진다고 중학교까지만 보냈지만, 그런 것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고, 그녀는 혼자서 공부하고 혼자사 살 길을 찾아 나서게 된다. 그런 그녀가 첫 발을 내 딛은 곳이 대동화학 공장이었고, 어느 날 친구로부터 우연히 전태일의 죽음을 전해듣게 된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던 그녀는 그 상황에서 눈이 아닌 마음으로 자신의 온 몸에 불을 질렀던 전태일을 보았다며, 그리고 그 속에서 겹쳐졌던 예수까지도 보았다고 말한다. '예수와 전태일의 죽음, 그 희생의 가치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게 크리스천이즘이라면 나는 크리스천이 되겠다, 나는 예수의 제자로 살고 싶다, 그런 생각을 했죠.'(p.195) 그 이후, 1973년의 끝자락에 그녀는 신부님이 소개한 가톨릭 노동청년회(Jennesse Ouvriere Chretienne, JOC)와 만남을 갖게 되며, 노동자들과 연대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노동자들과의 삶을 밑받침으로 이철순은 계속해서 새로운 노동자들과 함께 투쟁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녀의 투쟁은 한 곳에만 머무르는 소극적 투쟁이 아니라, 지방 곳곳을 돌아다녔던 적극적인 투쟁이었다. '이철순은 상봉동, 면목동 쪽의 성당으로 옮겨갔다. 새로운 곳의 노동자들을 만났다. 가발을 만드는 YH 노동자들이었다. ...... 한시도 쉴 틈이 없었다. 동서양행, 무궁화 메리야스, 태릉골프장, 아남 산업까지 찾아다니며 노동조합을 만드는 데 힘을 보냈다. ...... 78년 '동일방직 똥물사건' 때는 대책위원회를 만들어 함께 했다.'(p.206) '이철순은 서울을 떠나 지역을 돌았다. 경상북도 구미부터 시작해서 전라도로 죽 돌았다. 전북에 가니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농민 운동이 조금 있을 뿐이었다.... 아, 여기다 싶었습니다. 두 달만에 다시 보따리를 쌌습니다. 익산이 자유수출공단 지역이더군요.'(p.208) '익산에서 활동이 무르익으면서 이철순은 다시 떠날 준비를 했다.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조직이 만들어지면 아무 미련 없이 새로운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p.215)
그렇게 지방 곳곳을 돌아다녔던 이철순은 그 후,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를 정리하고 필리핀으로, 홍콩으로, 그리고 아일랜드로 돌아다니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영혼과 만나고, 살리는 일을 배운 후, 다시금 한국 땅에 돌아 왔다. 한국 땅에 돌아 온 후로도 그녀는 매 순간 자기를 필요로 하는 곳에 돌아 다녀야 했다. '1994년 10월, 6년 동안 몸을 움직인 아시아 여성 위원회 일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 왔다. ...... 안정된 자리에 앉아 있기보다는 자기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아무 것도 만들어지지 않은 곳으로 가기를 좋아했던 이철순은 ...... 언제든 바로 움직일 수 있는 이유는 어쩌면 그이가 '내 것'을 만들지 않고 산 때문 아닐까.'(p.231)
정향자. 좌익 운동에 가담했던 아버지 둘레에 늘 형사들이 맴돌았던 탓에 그녀의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는 경제권을 넘겨주지 말라고 했고, 손녀인 자신에게도 공부를 시키지 말라고 했으니, 어찌 보면 그녀는 시대의 불운아였다. 그런 할아버지 때문에, 그녀는 결국 전남제사에서 공장 일을 시작했다고 하는데, 그곳 공장에서 3년째로 접어들면서 비로소 그녀는 그토록 품어 왔던 제도교육을 미련 없이 버릴 수 있게 됐다고 말한다. '마치 지금 삶은 자신의 삶이 아니고 어딘가 따로 자기 삶이 있을 것 같아 그리워했던 그 마음을 접었다. 떠나려고 노력했던 그이는 '이제 이 안에서 살겠다' 마음먹었다. 바로 자기가 할 일, 할 수 있는 일 그것은 운동이었다. 온몸에 전율로 다가온 새로운 삶, 노동운동은 전율이었다.'(p.249) 그런 그녀였지만 노동자들의 주장과 권리마저도 포기해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틈나는 대로 노동법에 대해 끊임없이 공부했고, 또 가르치기를 반복했다. '십만 원이 넘는 큰돈으로 소니 카세트 라디오를 샀다. 조그만 노동법 책 글자들을 소리로 녹음테이프에 박았다. 그리고 달달 외웠다. 몇 조 몇 항은 뭐고, 몇 조 몇 항은 뭐고 ...... 기숙사에 있으면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요일모임을 만들었어요. ...... 뺑뺑 돌아가면서 교육을 했죠. ...... 지금처럼 논리정연하고 이론적인 교육이 아니라 시사적인 교육이었어요 ..... 때로는 서울서 왔다. ...... 같은 노동자인 동일방직 이총각, YH 최순영, 원풍모방 박순희, JOC의 든든한 선배인 정양숙. 당시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맡았고 지금은 이대 총장으로 있는 신인령 선생. 그들은 먼 길 마다 않고 광주 여성노동자들을 만나러 달려왔다.'(pp.249-253) 그런 그녀의 노력은 표독스럽게 찾아 온 5·18의 참상으로 인해 다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듯 노동현장에 몸담았던 사람들이 그 상황을 피해 모두들 떠나갔는데, 그런 참상과 피해를 고발한 책이 《깃발》로 나오기까지 했다고 한다. ' ...... 《깃발》의 주인공은 바로 정향자와 광주 여성노동자들이다.'(p.263) 지금도 정향자는 하는 일이 지치고 힘들 때면 망월동 묘지의 친구들을 만나 힘을 얻는다고 한다. '답답할 때면 정향자는 늦은 밤에도 망월동 묘역을 찾아간다. 친구들을 만나러. 그래야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p.323)
지금까지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이총각, 전 YH무역 노조위원장 최순영, 전 원풍모방 노조부위원장 박순희, 전 한국여성노동자회 협의회위원장 이철순, 그리고 전 전남제사 노조위원장 정향자 등의 70-80년대 다섯 명의 여성노동 운동사를 살펴보았다. 솔직히 나의 누나도 그 당시 상업계 학교를 졸업하고서, 대도시 공장에 취직하는 게 큰 꿈이었던 것으로 안다. 벽촌에서 태어난 우리 네 누나들 모두는 그런 포부가 전부였으니, 어쩌면 이 책 속에 등장하는 당시의 숱한 시골 누나들 모두도 그런 꿈을 안고 살았으리 생각된다. 하지만 이 책 속에 등장하는 다섯 명의 여성노동자들은 분명 달랐다. 당시의 보통 꿈을 꺾고서 여성 노동계의 거침없는 활약을 보여 주었으니 말이다. 물론 이들 누님들이 선두 지휘하는 동안 함께 연대 해 준 그 당시의 숱한 누님들이 없었다면 그 당시의 여성 노동계의 목소리는 결코 타오르지 못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래서 저자도 그리고 다섯 분의 누님들도 모두 그런 점을 못내 아쉬워하고 있었다. '다섯 선생님의 이야기에 그 시절을 온 몸으로 살았던 그 여성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녹여 내고 싶었습니다. 선생님들은 함께 한 그 여성노동자들의 이름을 다 싣고 싶어 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아쉬워도 책 빈 여백과 글 사이사이에 마음으로 그 이름들을 적을 수밖에 없었습니다.'(p.363) 그런 질곡의 시대를 거친 그녀들이 현재의 노동조합운동을 하고 있는 조직이나 단체를 보면, 선배로서 후배들의 운동에 대해 어떤 말을 할 것인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그녀들 모두는 오늘의 노동조합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향해 한결같이 그런 볼멘소리들을 하고 있으니, 그들의 중심 어린 질책을 귀담아 들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70년대에서 2000년대로 3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진 모습들도 많다. 때로는 그 달라짐이 긍정일 때도 있지만, 안타까움일 때도 있다. 외부단체라고는 JOC와 도시산업선교회 밖에 없던 그때는 노동조합에서, 그리고 다른 노동조합과 머리 맞대고 좀더 내실을 기할 수 있었다면, 한 지역에 비슷한 단체가 여럿인 지금은 때로는 '안'을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밖'과의 관계가 많아졌고, 한 노동조합 안에서도 서로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기도 해 힘을 모으지 못하기도 한다.'(p.65)
(2004년 2월 18일, littlechrist 올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