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變法 運動과 戊戌政變 (1898) - 100일 유신 |
〔1〕變法論의 形成
1. 성격 : 중국이 직면한 민족적 위기
淸.日 전쟁 敗北 이후 가속화된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
망국의 위기를 자각한 康有爲 등 일부 지식인이 皇帝 權力에 의거하여,
정치 변혁을 통하여 국가와 민족을 재생시킬 길을 모색한 救國 운동.
2. 先覺者 : 林則徐(임칙서), 魏源(위원), 龔自珍(공자진), 馮桂芬(풍계분), 王韜(왕도), 薛福成(설복성) 등.
위기 인식, 내정 개혁, 변법 필요성 강조.
3. 變法論者 : 何啓(하계), 馬建忠(마건충), 鄭觀應(정관응), 陳熾(진치) 등.
제도 개혁, 의회 개설, 입헌 군주제 실시 주장.
4. 外國人의 啓蒙 活動 : 변법 사상 보급에 또 하나의 推進力이 됨.
Y. J. Allen(美), J. Fryer(英), T. Richard(英) … 선교사, 報․館(보․관)의 설립, 학교 개설,
著作 활동을 통해 중국의 각 분야 별 개혁 필요성을 강조.
〔2〕變法 운동의 출발
1. 康有爲 ( 1858~1927 )
(1) 廣東省 海南人 전형적인 士大夫 집안
(2) 實踐 重視의 公羊學派, 서양 문명 이해, 變法 필요를 절감.
(3) 變法의 이론적 기초
①《新學僞經考》 古文經典은 漢代 劉歆(유흠)의 僞作
②《孔子改制考》六經은 孔子의 창작. 孔子는 祖술자가 아닌 改制者.
孔子는 政治 改革, 社會 改革의 意志가 强했음을 강조.
<變法>의 이데올로기 구성을 위한 출발점.
③ 《大同書》 據亂(거란) → 升平(승평, 小康) → 太平(태평 : 大同의 世)
(4) 1891, 廣州 長興里에 學塾, 萬木草堂 건립 : 변법 사상에 기초한 교육 활동
(제자 ; 梁啓超(양계초) , 麥孟華(맥맹화), 陳千秋(진천추) 徐勤(서근) 등).
2. 上書 운동
(1) 1 次 上書 (1888) : 외국 침략, 반란 위기 → 變法 호소
(2) 2 次 上書 (公車 上書, 1895) :
下關條約 조인 즉시 1,200명 擧人(거인)의 講和 거부의 連名 上書(변법 운동의 출발점)
내용 : 일본과 講和 거부, 遷都 續戰, 變法 維新
※ 上書 : 舊 中國 社會의 지적 엘리트들의 집단적 행동 양식
(3) 3 次 上書 (1895. 6. 3) : 대만 할양, 2억 량 배상금은 大辱(대욕)임을 주장.
國政 改革(국정 개혁, 變法)이 긴급 과제임을 주장
(4) 4 次 上書 (1895. 6. 30) : 軍機 大臣 옹동화에 접근 (變法 詔書 기초), 공친왕에 거부 당함.
부국 강병, 인재 등용, 世論 採取, 議院 開設 등 지적.
(5) 5 次 上書 (1897. 12) : 변법의 program을 보다 구체적․적극적으로 제안.
日의 明治 維新, 露의 Peter 大帝의 개혁을 예로 들고, 일본을 모범으로 삼아 개혁 착수할 것을 설명.
(6) 6 次 上書 (1898. 1) : 「應詔統籌全局疏(응조통주전국소)」上書→ 光緖帝와 연결.
개혁의 방법, 과정 등 개혁의 전모를 잘 정리하여 제출 (변법의 총론적 위치)
내용 : ① 변법 발포, 國是를 정할 것 (明定 國是)
② 萬機 公論에 입각 상서의 자유, 우수한 자 발탁.
③ 制度局 설치 : 현재의 기구 개편, 온존, 폐기, 신설 결정 등.
※ 6 次 上書로 光緖帝는 變法결의를 확고히 함.
3. 康有爲 變法 運動의 특징
(1) 皇帝 權力 - 권위를 배경으로 하여 위로부터의 國政 刷新을 계획.
(2) 운동을 진행해 나가는데 있어서 특권 계급 관료 지식인 만을 정치 기반으로 想定
(3) 變法論의 근저에 孔子를 놓고 있는 점.
서양 문명의 수입을 중요 내용으로 하면서 이론의 근거는 孔子(變革者)에서 구함.
〔3〕조직 구성과 계몽 활동 (운동의 확산)
1. 强學會 설립
(1)《中外紀聞》,《萬國公報》 발행, 1895, 양계초 등.
(2) 성격 : 학교와 정당을 겸한 성격, 계몽 운동.
(3) 회원 : 강유위, 양계초, 陳熾(진치), 文廷式, 옹동화, 楊銳(양예), 劉坤一 등.
2. 上海 强學會 分會 설립 (1895. 10)
(1) 會員 : 張之洞, 張謇(장건), 陳三立, 岑春煊(잠춘훤) 등 운동을 전국에 확산시키기 위함.
(2) 機關誌 :《强學報》발행 (발매 금지 됨) → 1896. 旬刊(순간) 《時務報》창간.
3. 기타 운동의 확산 : 지식인의 반향을 불러 일으킴.
계몽 목적의 학회, 신문, 잡지, 學堂이 각지에서 출현
《知新報》《聖學會》《時務學堂》《湘報》《南學報》등
300여개. 민권 사상을 고취, 정치 활동으로서는 停滯性을 띔 → 鉅野敎案(거야교안) 이후 고양됨.
〔4〕열강에 의한 帝國主義的 침략의 격화
1. 鉅野敎案(거야교안)
(1) 1897. 11. 1. 독일 선교사 2 명이 山東省 曹州府 鉅野縣에서 살해된 사건.
(2) 參加者는 20 ~ 30 명, 大刀會와 일반 민중의 공동 행동에 의함.
(3) 독일군은 여러 척의 군함으로 膠州灣(교주만) 점령 → 교주만 租借 실현.
2. 열강의 利權 쟁탈
(1) 독일의 노골적인 침략 이후 격화 → 세력 범위 확대, 租借(조차), 철도 부설권, 광산 채굴권 등.
(2) 열강은 세력 범위 획득과 확대에 광분
① 영국 : 절강, 강소, 안휘, 강서, 호남, 호북, 하남, 사천, 귀주성, 위해위, 구룡반도 租借
② 러시아 : 東三省(성경, 길림, 흑룡), 몽고, 신강성, 여순, 대련 租借, 東淸철도 부설권 획득
③ 프랑스 : 廣東, 廣西, 雲南省, 광주만 租借, 滇越鐵道(진월철도) 부설권.
④ 독일 : 산동성, 교주만 조차, 철도 부설권, 광산 채굴권.
⑤ 일본 : 복건성
⑥ 미국 : 「문호개방」선언 (장래 중국 진출 권리 확보), 필리핀 영유.
〔5〕운동의 再高揚과 變法 세력의 결집
1. 강유위와 광서제
(1)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 격화 → 변법 운동에 새로운 에너지 주입
(2) 5 次 上書(1897. 12) → 황제와 연결 → 6 次 上書 → 7 次 上書
(3) 1898. 강유위는 <日本 明治 變政考> <俄羅斯 大皮得 變政考>를 光緖帝에게 제출 → 황제와 연결됨
(4) 강유위는 光緖帝와 긴밀한 관계를 가짐 (恭親王 奕訢(혁흔) 사망)
2. 保國會 設立 (1898)
(1) 선행한 것 : 粵學會(월학회, 북경), 閔學會(복건), 關學會(섬서, 산서) 동향적 조직.
(2) 保國會 : 강유위, 李盛鐸 주동
① 참가자 200여명, 會試 受驗生(公車)을 모아 大會를 염.
② 목적 : “國地, 國民, 國敎를 保全한다.” ( 保國, 保種, 保敎 )
③ 특징 : 同鄕的 조직을 넘어선 거국적 변법 세력의 결집, 변법 운동 高揚의 상징,
정변의 원인이 됨.「중국혁명동맹회」와 匹敵.
④ 보수파의 반격이 맹렬해짐( 黃桂鈞, 文悌 등), 위기 의식을 느낌.
〔6〕戊戌 新政과 그 좌절
1. 戊戌 新政 ( 百日 變法, 百日 維新 )
(1) 戊戌 新政 발족의 배경
① 열강 침략의 격화, 위기 의식의 高揚 → 변법 운동의 再高揚
② 정치 변혁에 대한 光緖帝의 급격한 傾斜
③공친왕 혁흔의 사망(1989. 3) : 光緖帝 감시의 서태후 耳目 역할)
(2) 내용. 1898. 6. 11~9. 21 (103일간) : 楊銳(양예), 劉光第(유광제), 林旭(임욱), 담사동 등 변법파 요직 차지.
조칙「明定國是(명정국시)」발포, 變法 新衙門(변법 신아문) 설치
① 政治 면 : 變法 國是 , 官民의 建策 및 上書의 자유, 冗官(용관) 폐지, 인재 등용
② 經濟 면 : 農.工.商.鑛業 진흥, 기술 개발 촉진, 철도 건설, 우편 제도 정비.
③ 軍事 면 : 구식 군대 철폐, 洋式 훈련 실시, 民兵 제도
④ 社會.文化 면 : 전족의 폐지, 과거제 개혁(八股文(팔고문) 폐지), 근대적 학교 제도. 유학생 파견,
외국 서적 번역 장려, 報.館(보.관)의 설립 장려.
⑤ 기타 : 헌법 제정, 국회 개설, 이금제 철폐, 조운전폐, 간선 철도 건설, 漢滿人 民族 차별 철폐,
孔敎 국교화, 변발 폐지, 新首都 건설 등.
(3) 西太后 등 保守派의 맹렬한 비판, 光緖帝 폐위 음모, 옹동화 파면
쿠데타에 대비 군사 이동 (西太后는 北洋三軍 首都 경찰권 장악)
2. 戊戌 政變
(1) 新政은 위기에 봉착 → 기사 회생의 방법으로 先制 공격(쿠데타) 기도.
(2) 1989. 9. 16. 變法派는 動員 兵力이 없으므로 袁世凱 新建軍에 의지.
袁世凱를 불러서 侍郞(시랑)에 임명, 담사동이 원조 요청 (9. 18) → 승낙.---
9. 19. 袁은 榮祿(영록)에게 밀고 → 西太后에 알림 → 실패
(3) 9. 21. 西太后는 光緖帝* 幽閉, 變法派 면직, 추방, 처형 → 실권 장악
戊戌 六君子 ; 강광인, 양심수, 양예, 유광제, 임욱, 담사동
* 광서제는 1898년 캉유웨이(康有爲) 등과 함께 변법 유신을 일으켰지만
최종적으로는 수구파와 서태후의 역공을 당했고,
죽을 때까지 서태후에 의해 영대(瀛台)에 감금됐다.
▲ 독살 사실이 100년 만에 드러난 청나라 11대 황제 광서제 (제위 1875 ~ 1908)
1871년 8월14일 태어난 광서제는 1908년 11월 14일 저녁 37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다음날 서태후(慈禧太后)도 74세를 일기로 숨졌다.
하루 사이에 두 핵심 인물이 죽자 세상에는 추측이 난무했다.
“서태후가 자신이 죽은 뒤 광서제가 권력을 잡는 것을 원치 않아 광서제를 독살했다”
“무술년 변법 때 위안스카이(袁世凱)가 광서제를 배반했는데, 서태후 사후에 광서제에게 보복 당할 것이 두려워 환관을 시켜 독살했다”
“환관 리롄잉(李蓮英)이 독을 탔는데, 광서제가 일기장에 ‘서태후가 죽고 나면 위안스카이와 리롄잉을 주살할 것이다’고 쓴 사실을 알았기 때문”
3. 戊戌 變法의 실패 원인)
(1) 부패한 淸朝 下에서의 개혁(그 자체부터가 타당치 못함)
(2) 국가 권력이 守舊派와 洋務派의 수중에 있었던 점.
개혁 (정치 변혁)의 성공에는 강력한 권력이 필수적, 황제 실권의 有限
(3) 官僚 知識人이 주동, 일반 민중은 대상에서 제외된 점 (士大夫 意識)
운동을 지지해 줄 민족적 부르주아 세력 미약, 광범위한 민중의 결집을 저지
(4) 袁世凱의 결정적 배신
(5) 중국을 둘러싼 국제 환경의 강직성. (비협조적 태도 ; 開明과 自立의 문제)
출처: http://blog.daum.net/saangsaang/77205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