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답동 성바오로 성당 (이하출처- http://www.dapdong.or.kr/cathedra)
인천광역시의 사적 제287호 문화재로 인천시 중구 답동에 있는 벽돌조 고딕양식이다. 1890년대에 건축된 대한민국의 성당 중 가장 오래된 서양식 근대 건축물 중 하나이다.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의 체결로 개항장에서 토지 매입과 건축이 가능하게 되자 당시 조선교구장이었던 블랑 주교는 국제 항구 도시로 급부상하고 있던 제물포에 코스트 신부를 파견하여 성당 건립을 추진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후 페낭신학교에 있던 빌렘(홍요셉) 신부가 초대 주임신부를 맡아 인천 지역에서는 첫번째 성당인 제물포성당(답동성당의 전신으로 임시 가옥이었음)을 1889년 7월 1일에 설립했으며 일주일 뒤에 한국인 59명과 일본인 25명, 총 84명의 신자들을 데리고 첫 미사를 봉헌하였다. 홍요셉 신부는 이듬해 답동 언덕에 3212평의 대지를 매입했는데 홍요셉 신부는 1890년 용산에 있는 예수성심신학교로 가게 되었다. 전임한 홍요셉 초대 신부의 뒤를 이어 르 비엘 신부(신바오로)가 2대 신부로 부임해 와서 성당 건립 기금을 마련하고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수녀를 요청하였으나 병으로 인해 요양을 가게 되면서 사업을 완수하지 못하고 1893년에 부임해 온 3대 마라발 신부가 이 성스러운 임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1894년 서양식 3층 벽돌 건물인 수녀원이 먼저 완공되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수녀 2명이 파견되어 보육사업과 무료 진료사업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교회 사회복지 사업의 시초인 해성보육원과 해성병원의 출발이었다.
최초의 성전, 1896. 11 축성, 제3대 서 요셉 신부(1893.4~1904.3)
1894년 청일전쟁으로 잠시 중단되었던 성전 건립은 1895년 정초식을 갖고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간다. 이듬해 종탑이 완공되고 마침내 1897년 7월 4일 조선교구장 뮈텔(1890∼1933년 재임)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역사적인 축성식이 거행됐다. 300평 규모로 전면에 3개의 종탑을 갖춘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전이었다. 뮈텔 주교는 이날의 일기를 이렇게 적고 있다. “7시경 신부들이 두 대의 미사를 드리고 난 후 성당의 강복식이 거행되었고, 다시 미사와 81명의 교우들의 견진이 있었다. 성당은 매우 아름답고 성공적인데, 스테인드 글라스와 같은 효과를 내는 유리면과 교우들의 반은 앉을 수 있는 의자들도 갖추었다…본당의 야산과 밭들은 다 조선 사람들에게 세를 주었는데,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마을을 이루어 요술처럼 훌륭했다.”
두 번째 답동성전, 1937. 6. 30 축성, 제5대 임종국(바오로)신부
1933년 신자수가 1500여명에 육박하게 되자 제 4대 드뇌(1904∼1937년 재임) 신부는 증축계획을 세우고 35년부터 성전의 외곽을 벽돌로 쌓아올리는 개축작업을 시작, 1937년 원 라리보(1933∼1940년 재임) 주교 주례로 축성식을 가졌다. 웅장하고 화려한 자태로 인천 시민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온 답동성당은 문화 예술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1981년 사적 287호로 지정됐다. 답동성당이 명실상부한 선교의 거점으로, 그리고 인천 지역의 명물로 떠오른 것은 1904년부터 1937년까지 무려 33년간이나 주임신부로 활동했던 제4대 드뇌 신부 때부터다. 1899년부터 본당에 거주하면서 제3대 주임 마라발 신부를 도와 사목을 함께 했던 터라 본당과 인천지역 사정에 누구보다 밝았던 드뇌 신부는 그야말로 ‘준비된’ 주임 신부였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일본인들의 교회부지 침입으로 인해 야기된 문제를 해결하고 전교에 힘썼다. 그 결과 1910년까지 새말(현 시흥시 소래읍)·고잔(김포시 검단면)·구월리·부평 등에 공소를 신설하는 한편 같은 해에 영종도 공소 경당을 축성했다. 드뇌 신부는 또 1909년에는 신자들과 가난한 이들의 자녀 교육을 위해 마라발 신부가 1900년에 설립한 박문학교의 교장을 맡아 학교 운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박문학교는 1910년 여자부 신설, 1914년 교사 신축, 1917년 남·녀부 통합 및 ‘인천박문학교’로 개칭 등의 과정을 거쳐 인천의 명문 사립학교로 자리잡는다. 그는 이밖에도 1915년에 바오로 성인을 본당 주보 성인으로 정하고 1933년에는 지금의 모습으로 갖추게 되는 성당 증축 공사에 나서는 등 답동성당의 토대를 쌓으며 많은 업적을 남겼다. 300평 규모로 전면에 3곳의 종탑을 갖춘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전이었다. 1933년, 신자 수가 1500명을 육박하게 되자 4대 주임신부였던 드뇌는 성당의 증축 계획을 세워 1935~37년까지 성전의 외곽을 벽돌로 쌓아 올리는 개축 작업을 했고 공사 종료 후 증축 기념식을 원라리보 주교의 주도하에 성대하게 치른 후 오늘에 이르렀다. 앞면에 설계된 3개의 종탑은 건물의 수직 상승감을 더해주며, 8개의 작은 돌로 된 기둥이 8각의 종머리 돔을 떠받들고 있다. 앞면의 출입구는 화강석을 사용하여 벽감 모양의 아치로 하였다.
3개의 종(鐘), 1937년 축성된 새성전, 종탑에 3개종 설치
해성보육원(1895 개원), 1955. 9 완공, 제5대 임 바오로 신부
답동성당은 제5대 임종국(1937∼1958년 재임) 신부에 와서야 처음으로 한국인 주임신부를 맞게 된다. 임신부는 20여년간 재임하는 동안 8·15해방과 한국전쟁 같은 엄청난 사건들을 겪으며 본당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38년 부녀회원들로 구성된 ‘소화 데레사회’를 조직하고 회장단과 복사단을 정식으로 구성한 것은 물론 성모회의 활동을 활성화하는 등 평신도 단체 설립에 앞장서온 임 신부의 노고에 힘입어 답동성당은 1940년대초 신자수가 3천여명에 달할 정도로 눈부신 성장을 거듭했다. 답동성당은 1958년 인천과 부천 그리고 인근 도서 지역이 서울교구로부터 분리돼 ‘인천 감목 대리구’로 설정되고, 이 지역의 사목이 메리놀 외방전교회에 위임되면서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제6대 주임신부로 부임한 버크(1958∼1963년 재임, 메리놀외방전교회) 신부는 영흥·선재·풍도·이작도 공소를 설립하고 60년에 도화동·해안동본당을, 62년에 화수동본당을 분가시키며 선교에 온 힘을 기울였다. 한편 1961년 6월 교황 요한 23세가 ‘인천 감목 대리구’를 ‘인천 대목구’로 승격시키고 초대 교구장에 나길모 주교를 임명함에 따라 답동성당은 주교좌 본당으로 설정되었다. 나 주교는 이후 무려 41년간 재직한 후 올해 4월 교구장직을 최기산 주교에게 넘기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답동성당은 제7대 설리반 신부에 이어 1968년 제8대 강의선 신부가 부임하면서부터는 한국인 신부가 주임을 맡아왔다. 특히 10대 김병상(1975∼1980년 재임) 신부 때부터는 평신도 활동의 확대, 시국 기도회와 민주화 운동, 이웃 돕기 활동 등을 통해 본당의 활성화는 물론 사회와 함께 하는 본당상을 구현하는 데 많은 앞장서고 있다. 또 13대 강용운(1986∼1992년 재임) 신부 때는 본당 설립 100주년을 맞아「답동대성당 100년사」를 발간하고, 사제관과 수녀원을 신축했다.
성전 계단공사, 1974년, 제9대 박성규(분도)신부
인천 답동성당 (출처- http://blog.daum.net/hamjungdotour/7069880)
인천답동성당 (이하 사진출처- http://blog.naver.com/kc870724/70032398771)
답동성당(沓洞聖堂)
답동성당
답동성당 입구 우측 예수성심상
답동성당 입구 좌측 성모자상
답동성당 측면
답동성당 종탑
답동성당 후면
내부, 2층 정면 (이하출처- http://www.dapdong.or.kr/cathedra)
내부, 1층 정면
내부
내부 (출처- http://blog.daum.net/mooyong72/8710860 )
1979년에는 창문에 스테인드글라스를 설치하여 그 위용과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제대
내부 왼쪽
데레사 상
데레사 상
내부 오른쪽
바오로 상
바오로 상
주교좌
내부 (출처- http://blog.daum.net/mooyong72/8710860 )
십자가의 길 12처
스테인드글라스
장미창
내부 기둥 십자가
성수대
사제관 (이하출처- http://www.dapdong.or.kr/cathedra)
수녀원
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