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마지막 길위의 인문학 행사로 충남 서천의 문헌 서원과 한산의 모시 전시관을 비롯하여 소곡주 체험과 신성리 갈대밭을 둘러보았다. 가을이 끝자락 따스한 햇살이 그리운 11월 16일 처음로 찾은 곳은
목은 이색이 태어난 곳 文獻書院이다
문헌서원은 충남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에 있는 서원으로 충남 문화재자료 제 12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일찍이 고려말 충신 목은 이색과 그의 아버지 가정 이곡 선생을 기리기 위해서 세워진 서원으로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10년(광해군 2년) 枯村으로 옮겨서 다시 세웠다고 한다. 흥성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년) 훼철되었다가 1969년 지방 유림들이 다시 복원하였다고 하며, 안에는 목은 이색의 묘소가 있고, 뒤쪽에는 두 그루의 배롱나무가 서있는데 왼쪽 것은 아버지나무요, 오른 쪽 것은 아들나무로 아버지나무가 꽃을 먼저 피운다니 신기한 일이다. 이색은 조선 개국 후에도 고려 충신으로 여생을 보냈는데 그가 죽자 셋째 아들이 아버지를 이곳에 모셨다고 한다. 아들이 모두 세 명이었는데 이성계에게 두 아들은 죽음을 당하고 셋째 아들에게는 벼슬을 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훗날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다가 죽어서 아버지 옆에 묻혀있다. 다른 두 아들은 유해를 찾지 못하여 묘를 만들지 못하고 아버지 묘소 건너편에 가묘를 만들어 놓았고 부인도 건너편에 무덤이 있는데, 이는 죽어서도 시집살이를 한다는 말이 전하기도 한단다.
목은 이색의 무덤
문헌서원 안에는 연못과 정자가 있어서 운치가 있고 서원 중앙에는 사당 공간과 강학 공간이 있으며 관리동이 있고 가장 윗자리에는 이곡과 이색의 덕행을 기리기 위해서 효정사라는 사당을 세웠는데 이는 한산군수였던 이성중이 두 분의 시호를 따서 세웠다고 한다. 뒷산 봉우리는 기린봉이고 기린이 내려 앉아 물을 마시는 형국의 명당이라 하여 무학대사가 터를 잡아주어 목은 선생의 묘를 썼다고 한다. 서원 안에는 물맛이 시원하고 달콤한 샘이 있고, 예전에는 그 물로 소곡주를 빚었는데 물맛이 좋아서 술맛도 좋다고 한다.
빠져나가는 기를 막기 위한 연못
서천군 한산면 枯村里 는 목은 선생이 살았던 동네로 목은 선생이 태어나자 기가 다 빠져서 3년 동안 풀이 말랐다고 하여 마를枯 마을村을 써서 고촌이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이와 똑 같은 전설이 목은 선생의 외가인 경북 영해 괴시리 마을에도 전해 온다고 한다. 선생이 그 곳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도 전한다고 하니,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큰 인물이 태어나므로 기를 빼앗겨서 물이 마르고 풀이 시들어 죽을 정도였다니 대단한 인물이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고 해야 되겠지. 지금은 빠져나가는 그 기를 막기 위해서 서원 안에 작은 연못을 만들어 놓았다.
고촌리에는 개화기의 유명한 월남 이상재 선생이 태어난 고장이기도 하다. 한산 이씨 가문의 목은 선생의 후손으로 근대 교육 분야에서 힘을 쓴 인물이며 신간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하고, 일제시대에 나라를 위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 순사에게 잡혀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으며 일본인들이 미워하면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기도 하였다.
소곡주 체험
박목월의 ‘나그네‘라는 시에
강나루 건너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 백리.
술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라는 술과 관계된 유명한 시가 있다.
지금도 이렇게 술익는 마을이 있는데 바로 충남 서천군 한산면이 그 곳이다. 술은 백일주를 명주로 치는데 대표적인 백일주로 면천의 두견주, 경주교동의 법주, 계룡의 백일주와 더불어 한산의 소곡주를 손꼽을 수 있다. 한산면에 대표적인 산인 건지산에는 건지산성이 있고 백제의 부흥운동이 일어났던 고장이다. 건지산 아래 평야지대에서 생산한 질 좋은 쌀과 맛좋은 물로 빚은 小麴酒(소국주)는 조선시대 문헌에서도 명주로 설명하고 있다. 그 유래는 누룩을 적게 써서 만들어서라는 설과 素服입고 빚어서 라는 설, 그리고 100% 흰쌀로 빚어서 라는 설 등이 있다. 어느 것이 옳은 지는 역사만이 알 수 있을 뿐이다.
예부터 건지산 기슭인 호암리에는 술을 잘 빚는 분이 살았다. 김영신 씨로 1979년에 소곡주로 충남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고, 지금은 그 며느리 우희열 씨가 한산모시관 건너편 지현리로 나와서 양조장을 차려서 술을 빚고 있다. 이 마을은 물이 좋아 소곡주 맛이 좋다고 소문난 동네로 술빚기 체험마을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소곡주를 빚은 물맛이 좋은 우물
한산 소곡주는 쌀(멥쌀과 찹쌀)과 누룩을 사용하여 빚는데 콩과 고추도 들어간다고 한다. 우선 멥쌀을 가루를 내서 백설기를 만들고 그 백설기를 풀어서 누룩과 섞어서 밑술을 만들어 10일 정도 지난 다음에 고슬고슬한 고두밥과 밑술을 합쳐서 덧술을 해서 물은 적에 들어가는데 쌀 분량의 80% 정도 부어 독에 넣고 100일간 숙성을 시켜서 만들어 내는 술이다.
소곡주의 주재료는 쌀과 누룩, 물과 온도이고 부재료로 들국화, 엿기름, 콩, 붉은 고주가 들어가는데 콩과 고추는 주술적인 재료로써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
소곡주의 색깔은 노르스름하게 보름달 색이라고 할 수 있다. 술맛은 대체로 입술이 끈적거릴 정도로 달고 묵직하며 누룩 냄새가 짙은 것도 있고 단맛과 신맛이 잘 어우러진 술도 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달콤쌈싸름하다고 하겠다. 단맛에 취해서 독한 줄을 모르고 홀짝홀짝 마시다 보면 앉았다가 일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름하여 앉은뱅이 술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하였다고 한다. 과거보러 가던 선비도, 술맛 보던 며느리도, 몰래 들어온 밤손님도 앉은뱅이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동자북마을에서 소곡주 시음을 하였는데 술을 전혀 먹지 못하는 내가 먹어보아도 달콤한 맛이 사람을 홀릴 듯하였다. 소곡주는 먼저 누룩과 고두밥을 버무려서 밑술과 함께 큰 독에 담그는 체험도 하고, 마을에서 제공하는 전형적인 시골밥상인 집 밥으로 따뜻한 인정을 느끼며 맛있는 식사를 하였다. 덩자북은 백제 때 나당연합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19명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 만든 북이라고 하는데 이 마을의 상징으로 큰 동자북을 세워놓은 모습이 이색적이었다.
고두밥과 누룩을 골고루 버무르며 식히는 과정
한산 세모시-이골이 나다
한산모시는 백제시대부터 만들어져 고려시대에는 주요 교역상품이었고 조선시대에는 임금에게까지 진상품으로 명성을 떨쳤다고 한다. 한산모시관은 바로 동자북마을 건너편 위쪽에 있는데 전시관과 체험관, 시범관과 공방 등이 있다. 모시는 우리의 고유한 천으로 여름에는 삼베와 모시가 대세였으며 서민들은 삼베를 많이 입고, 지체 높은 어른들은 모시옷을 많이 입었다. 그 중에도 한산 모시는 올이 가늘고 고와서 값도 비싸고 깨끗하고 하얀 색상이 품격이 저절로 느껴졌다. 바로 이것이 유명한 한산 세모시이다. 모시는 일년생 풀인데 다 자라면 베어서 잎을 추리내고 껍질을 벗겨서 다시 겉껍질을 분리하여 하얀 속껍질을 햇볕에 여러 번 말려서 하얗게 바래면 어머니와 할머니가 손톱으로 잘게 잘라내어 잇발로 한 쪽 끝을 두 갈래도 쪼개어서 다른 한 쪽과 연결하여 실을 만들어 풀을 먹인 후에 베틀에 얹어서 날줄과 씨줄로 엮어 짜면 멋진 모시베가 되는 것이다. 그 과정이 얼마나 손이 많이 가고 힘들었는가는 체험해보지 않고는 짐작하기도 어려울 정도다. 무릎에 대고 비벼서 연결하느라고 굳은 살이 생기고 손끝은 트고 갈라졌으며 삼과 모시를 잇발로 물어서 쪼개느라고 치아에 골이 생긴다 하여 어떤 일에 고생 끝에 능숙하게 된 것을 보고 이골이 났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지금도 한산모시를 스승 문정옥에게서 배운 방연옥 씨가 한산모시를 짜고 있으며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맥을 잇고 있다.
모시를 연결하는 모습
원래 모든 천은 굵기로 그 정도를 정하는데 삼베는 주로 5 ~ 7새, 무명은 8 ~ 10새, 모시는 9 ~ 12새가 대부분이다. 숫자가 높을 수록 손이 많이 가고 정성이 많이 들어가며 고와서 그 가치와 값이 달라지는 것이다. 한산 모시가 지금은 그 맥을 이을 사람이 없어서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정도다. 우리 것이 사라지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어머니의 베짜는 모습
신성리 갈대밭.
충청도 내포지역인 서천에는 금강가에 유명한 갈대밭이 있다. 영화 JSA(공동경비구역)이라는 영화를 촬영한 이후에 유명세를 타고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명소가 되었다. 지금은 길도 확장을 하고 있고 가게와 넓은 주차장도 생겨서 불편 없이 관광을 할 수 있는 것은 좋은데 너무 사람이 많아지고 갈대도 인공을 가하다 보니 꽃이 제대로 활짝 피지를 않는다고 하며 자연미가 사라진 것 같아서 아쉬움이 남았다. 둑에서 강과 갈대를 내려다보는 마음만은 시원하고 탁 터지는 느낌이라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2013년 마지막 길위의 인문학 여행을 무사히 마치며 다시 2014년 새롭고 의미 있는 여행을 기대하며 추운 겨울을 나려고 한다.
문헌서원에서 단체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