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전국민학교 6
‘그래. 이 거다. 이 게 그렇게 어렵다니 여기에 한 번 미쳐 보자’
힘들여 찾아 낸 것이 교원대학교 석사과정 특별전형이었다.
그 게 그렇게 어렵단다. 충북 청주 인근에 있는 청원군 강내면에 한국교원대학교와 대학원이 있다. 대전시교육청에서는 교원대대학원에서 매년 신입생을 뽑을 때 대전시 교사 응시생 중에서 시험성적이 제일 우수한 사람 두 명을 뽑아 교원대학교에 2년간 파견을 보내주었다. 2년 간 월급을 똑같이 주면서 학교에 출근하지도 않고 대학원에서 마음껏 공부하라고 보내주니 정말 특혜였다.
그러니 경쟁이 치열했다. 게다가 나는 그 때 이미 나이 40이 다 되었을 때인데다, 책을 놓은지 20년이란 세월이 흘렀을 때였다. 내 경쟁자들은 대전시 교사 중 새파랗게 젊은 사람으로 공부를 더 하고 싶어하는 면학파들이었는 데도내 앞날이 얼마나 파란만장 할지를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뭘 알았어야지.
‘하면 된다’ 하나만 가지고 뛰어들었지. 죽으려면 무슨 짓은 못해
‘그래. 이 정도면 내가 잡념없이 미칠 만 하겠다. 어려울수록 좋은 거지’ 멋도 모르고 찍은 것이 10년을 좌우했다. 그 걸 미리 알았었더라면 절대로....
과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체육교육과’를 선택했다. 그런데 시험을 대비해서 무슨 공부를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하루 날을 잡아 교원대학교에 찾아갔다.
입시요강을 보니 시험과목은 영어와 전공과목 6개였다.
복사실에 가서 기출문제를 사들었을 때도 그저 그런가 했었지.
‘자 이제 내 새 인생이 시작되었다. 파이팅. 이건표’ 힘차게 뛰어들었지만 막상 무얼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는 막막하였다.
우선 영어는 학창시절에도 재미없었던 공부인데다 한 20여년을 담을 쌓고 살았으니 중학교 공부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홍명상가 영어 학원에 등록을 하고 중학교 아이들과 함께 강의를 들었다. 그 거 참. 아들 같은 아이들과 함께 쭈그려 앉아 공부하려니 나도, 그 애들도, 선생님도 서로가 민망한 일이더라. 별로 즐거운 일도 아니었지.
학원이 끝나고 제일캬바레를 피하느라 대전천으로 걸어오면서 그 검은 썩은 물에서도 물고기가 사는 것을 보고 신기해했던 기억만 남아있다. 그래도 기초영문법 한 달은 꼬박 다녔다. 신기하게도 불과 얼마 전 춤에 푹 빠져있던 기억과 춤추는 동작도 까맣게 잊어버린 것도 의아했다.
전공과목 기출문제를 들춰보니 ‘체육원리’는 그런대로 알만 했는데, ‘체육교육학’ ‘해부학’ ‘신체역학’ ‘생리학’ ‘측정과 평가’ ‘보건’ ‘체육사’ 등은 듣도 보도 못한 생소한 과목이었다. ‘이걸 어떡하나 ?’ 고민만 늘어갔지.
교원대 서점에 가서 책들을 사들었다. 책값은 왜 그리 비싸던지...
책을 들고 읽어봐야 무슨 소린지도 모르겠고, 어디서 시험에 나오는지 알 길이 있나 ? 그냥 덤벙덤벙 시간을 흘려 보냈지.
그 해에는 생전 처음으로 1학년을 담임했었다. 작년 6학년 동학년 선생님들이 단체로 1학년으로 몰려가면서 나도 멋 모르고 쫓아 갔었다.
아, 그 해 정말 죽는 줄 알았다. 해마다 5학년, 6학년 만 하다가 1학년을 하니까, 내가 아이들 앞에 서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1학년 선생님들께서 얼마나 고생을 하시는지 아주 깊이 깨달을 수 있었지. 이 놈들 왜 그리 말은 안 듣던지..., 오전, 오후 반으로 2부제 수업을 하나보니 오후 수업 시에는 오전에 내가 가있을 곳도 없고, 오후에 등교하는 아이들은 이미 다 풀어져 있었다.
그냥 이쁘다 했더니 교실로 들어오면서 “건표야”하며 들어오는 상필이. “그러면 안돼” 타일러도 소용이 없었다. 다른 애들도 따라서 하네. 그 꼬맹이들을 혼낼 수도 없고....
어찌나 속을 썩었는지 그 해에 위장병이 찾아 오더라.
한 학기를 간신히 마치고 방학 중에 공부 좀 했었지. 시험 본다고....
그런데 2학기 개학날 들어서는 아이들이 한참을 컸더라. ‘얘들 봐.’ 놀랄 정도였다. 의젓해지기도 하고.... 그 때부터는 훨씬 수월해 지더라. 나도 그동안 어린애들 다루는 법도 배웠으니까 할만 해졌지.
그 해에 둔산에 입주가 시작되었다. 우리반 아이들 중 18명이 둔산으로 이사를 가는데 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 이었다. 또 한 번 놀랬지.
이제 틈나는대로 공부에 매달렸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영어도 공부하고, 전공과목도 봐야하니 시간이 턱도 없이 부족했다.
‘하다 보면 되겠지.’ 생각만으로 그냥 버텨나가는 거였다.
그 해가 다 지나가면서 원서를 내라는 공문이 왔다. 드디어 때가 왔다.
그런데 대학교 성정증명서도 내라네. 나는 2년제 공주교대를 나오고 방송통신대학에 편입해서 학사를 취득했었다. 그러니 두 개의 성적 증명서가 필요했지.
통신대학교 성적증명서는 다 A학점인데 교대 성적증명세에는 F학점이 두 개나 되고 체육을 뺀 대부분이 D학점이니 창피하지 않은가.
교대 졸업한지가 20년이 넘었는데 그놈의 F는 끝까지 따라다니더라.
‘이 성적으로는 대학원 가기가 어렵겠는데....’ 걱정도 되었다.
드디어 시험날이 왔다. 학교에 하루 연가를 내고 떨리는 가슴으로 교원대를 향했다. 교문을 들어서면서 더 떨리는 것을 어쩔 수 없더라.
그 날 시험보러 온 수험생들이 상당히 많았다. 대전에서도 많이 왔을 테지.
내 수험번호가 붙어있는 책상에 앉았다. 한 교실 가득한 저들이 모두 경쟁자다, 시간이 흘러 영어 시험지가 배부되었다.
신문지만한 종이가 여섯쪽. ‘이 걸 언제 다 하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