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양원 목사는 경남 함안에서 부친 손종일 장로와 모친 김은주 집사의 장남으로
1902년 6월 3일 출생하였다.
1919년 서울 중동학교에 입학하고 1923년 일본 동경 소압중학교를 졸업한다.
1924년 1월 17일 정양순 여사와 결혼
1925년 동인 출생 1930년 동신 출생
1935년 평양신학교 입학 1936년 모친 별세 1938년 평양신학교 졸업
1939년 7월 14일에 여수 애양원 교회로 부임하였다.
손 목사는 항일정신과 신사참배 반대는 신학교 시절부터 남달랐다.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부산지방을 돌면서 신사 참배 반대를 외쳤다.
이로 인하여 경남 노회에서 순회 강도사 사역을 못하게 하기도 했다.
손 목사는 애양원 교회에 부임해서도 설교 때마다 신사 참배반대를 외쳤으며
손 목사가 가는 곳곳마다 신사 참배에 대한 부당성이
카랑카랑한 검사의 논고와도 같이 지적되었다.
1940년 9월 25일, 손 목사는 수요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막 들어오자
기다렸던 여수 경찰서에서 나온 두형사에 의해 연행되어,
재판과정에서 1년 6개월 형을 받았으나 구속 기간까지 하여 거의 3년의 세월이 흘렀갔다
그 때 손 목사에게 적용된 죄는 신사 참배 거부와 백성들을 선동했다는 것이었다.
1943년 5월 17일, 출옥할 날이 가까이 왔을 때
담당 검사는 손 목사를 불러 놓고 사상의 전환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담당 검사는 손 목사에게 "덴꼬(轉向)" 해야 나간다는 위협을 하였다.
그러나 손 목사는 그 검사에게 전혀 굴하지 않고
"당신은 덴꼬가 문제이지만 나에게는 신꼬(信仰)가 문제이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는 8·15해방과 함께 감옥에서 나오자 곧장 이 사랑의 보금 자리인 애양원 교회를 찾았고
그리하여 교우들의 신앙은 더욱 불타오르게 되었다.
5년여만의 서로 만났던 벅찬 감회도 잠깐,
1948년 10월 25일, 여순 사건으로 두 아들이 잃게되는 비운을 맞게되었다.
여수, 순천 사건은 빨리 진압되어 정세는 바뀌었다.
동인, 동신 형제를 죽인 자들 중의 하나인 '안재선'이라는 학생도 체포되어 총살을 당하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손 목사는 계엄 사령관에게 찾아가서
"나의 죽은 아들들은 결코 자기들 때문에 친구가 죽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 애들은 친구의 죄 때문에 이미 죽었습니다.
만일 이 학생을 죽인다면 그것은 동인, 동신 형제의 죽음을 값없이 만드는 것입니다.
라고 하면서 그 학생의 석방을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간청은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손 목사는 그 학생을 손재선이라 하여 자신의 아들로 삼았다.
손 목사는 재선이를 부산의 고려 성경 고등 학교에 수학하도록 하여
전도사로 키워내는 놀라운 사랑의 역사를 보여 주었다.
양아들로 삼았던 안재선 씨는 성경 학교 졸업 후
잠시 부산의 어느 교회 전도사로 있다가
말년에는 제주도에서 어물 도매 사업을 하다 1979년 12월 서울에서 별세했다.
손 목사님은 실로 주님이 주신 계명을 말씀 그대로 순종하고 복종하여 실천한
20세기 사랑의 사도요,성자였던 것이다.
손양원목사 순교 기념관 관훈
입구 소개판
1950년 뜻하지 않는 6·25동란이 이 땅 위에 발발했다
이 때 애양원 교회의 교인들은 손 목사를 피난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했으나
허락을 하지 않자 결국은 교회의 제직들과 교역자들 모두 함께 떠나자고 간청을 하였다.
우선 몸부터 피하고 보자는 제직들의 간청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던 손 목사는
함께 송별 예배를 드리고 배에 올라가 마지막 찬송을 부른 후
갑자기 혼자만 배에서 가방을 들고 뛰어 내려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손 목사는 마침내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게 체포 되어
1950년 9월 28일 저녁11시 여수 근교 미평에서 총살당하여 순교의 영광을 간직하였다.
당시 손 목사의 나이는 48세였다.
그는 마지막까지 양들을 보호하고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총의 개머리 판으로 입을 맞아 얼굴이 피투성이 되었으며
마지막 죽음의 자리에서 두 손 모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시다가
공산군의 총에 맞아 순교를 하셨다.
기념관 내부 전시실
기도로 산 손양원 목사
손양원목사는 별명이 삼경목사이다.
손양원목사를 만나면 세 번 놀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손양원목사를 만나면 외모가 멋지게 생겼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그 외모가 초라하고 볼품이 없어서 첫 번째로 놀라고,
다음으로 그 조그마한 체구에 품어져 나오는 소리에 놀라고,
세 번째는 설교말씀에 놀란다고 한다. 그래서 별명이 삼경목사다.
손양원 목사 생가
손양원 목사님 부친 손종일 장로님 회갑때 찍은 모습이다.
손양원 목사님은 3남 1녀중 장남이다.
손양원 목사, 손문준 목사, 손의원 목사 그
리고 당시 미국 하와이에 살고 계시던 여동생이 있었다.
현재의 생가 자리에는 먼 친척뻘 되는 조카가 살고 있다.
생가는 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 685번지다.
그리고 손양원 목사님이 다녔던 모교회는 칠원교회이다.
손양원 목사님 당시 교회 모습
1939년7월14일 부임해서 1950년9월28일 순교 하실 때까지의 애양원교회의 외부모습이다.
현 애양원 교회의 모습은 손 목사님 순교 이후에 종탑 부분과 강단 부분이 증축되었다.
1939년7월14일 부임당시 애양원 사택 앞에서 찍은 가족 사진
당시에는 손목사님의 아버지 손종일장로님도 함께 계셨다.
애양원 안에는 환우들만 살 수 있었으므로 목사님 사택은 병원직원들이 사는 건강 마을에 있었다.
그래서 손양원목사 소원이 자신도 병이 들어서 애양원 안에 들어 가서 환우들과 함께 사는 것이었다.
당시 예배드리던 모습
손양원 목사와 당회원들
손양원 목사님 당시 애양원교회의 당회원들이다.
지금 생존해 계신분은 한분도 안계신다.
사진에 신풍교회당이라고 나와 있는데
애양원교회는 1909년 4월25일 광주 봉선리에서부터 시작이 되었다.
그래서 교회이름이 설립당시에는 봉선리 교회였다.
현재의 애양원으로 1925년에 이주한 이후에는 지역의 이름을 따라 신풍교회당이라 불렀다.
1936년에 애양원교회당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물론 애양원이라는 이름은 손목사님 부임전에 바꾸어진 이름으로
손양원 목사와는 상관이 없는 이름이다.
그 이후 1982년이 성산교회로 바뀌어서 현재 공식적인 명칭은 성산교회이다.
안재선과 함께 부흥회 인도
서울 남대문교회 부흥집회시 안재선과 함께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함께 다니는 것이 재선이에게 안좋은 영향을 끼쳐서 후에는 같이 다니지 않았다고 한다.
애양원 원장 손양원 목사와 애양원 직원들 , 1945.9.10- 10.15 까지 임시로 원장을 겸임 하였다.
한센환우를 입으로 빨아서 치료하시는 손양원 목사
한센병에 걸리면 감각 기능을 잃게 된다.
그래서 발이나 손에 상처가 나도 아픈줄을 모른다.
뜨거운 물에 넣어도 뜨거운줄을 모른다.
손목사님이 부산 감만동(戡蠻洞)에서 목회를 하실 때
한 한센환우가 발에 커다란 상처가 났는데 보니 상처가 아주 깊어
그대로 두면 다리를 절단해야 할 형편이 되었다.
그래서 손양원목사님이 그 환우의 깊은 상처를 입으로 빨아 치료를 해주고 있는 모습이다.
손목사님의 치료로 상처가 나아 건강하게 살다가 죽었다한다.
손양원 목사(왼쪽에서 2번째)와 김구 선생(왼쪽에서 3번째)
해방 후 김구 선생이 자신이 운영하던 학교에 손 목사를 교장으로 초대하였으나
"나는 환우들을 버리고 갈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성산 초등학교 졸업생인 3명의 여학생들과 함께
나환자를 위해 1915년에 설립한 학교로 당시는 봉선리 국민학교였으며 1971년 폐교되었다.
또한 1946.9.8. 나환자를 위한 성산중학교를 개교 하였고 1971년 폐교되었다.
한성신학교 옛 건물 사진
1955.4.12 애양원은 나환자를 위한 대학과정 한성신학교를 설립하였다. 1962년에 폐교되었다.
출옥 후 옥종면 성도들과 함께
신사참배를 안하기위해 애양원을 떠나서
하동군 옥종면 산속에 숨어 살면서 신앙을 지켜왔던 성도들이다.
둘째 줄 꼬마가 둘째아들 동인으로 신사참배를 하도록 일제는 군입대를 시키고자 하였으나
온 가족이 흩어져 신사참배를 안하도록 의논하였다.
이에 동희와 동장이는 구포 고아원으로 동신이는 옥종면으로
동인, 동수, 어머니는 남해 산골로 각 흩어져 살다가 해방 후 모이게 되었다.
손양원 목사가 사용하던 성경 책, 1937년 발행 관주성경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라는 성구가 첫 장에 써있다.
손양원 목사의 설교노트
청주구금소에 있는 손목사님에게 어린딸이 보낸 편지
손양원 목사 옥중 생활 모습
손양원 목사가 일제시대 때와 육이오 사변때 옥중생활 하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목사님은 언제 화장실 옆에 자리를 하셨다.
그 키가 큰 사람들의 발을 가슴에 품고 잠을 잤다.
주먹밥은 하나님께서 자신은 키도 조그마하게 만드시고 체구 적게 만드셔서
조금만 먹어도 된다며 주먹밥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옥중생활할 때 취조받게 고문받는 장면이다.
손양원 목사 순교장면
공산군에게 9월13일 붙잡혀 가셔서 여수 경찰서에서 계시다가
9월28일 끌려 나가 여수시 미평 과수원에서 총에 맞아 순교 하셨다.
손목사님은 순교를 예감하시고 여수 경찰서에서 순교 장소까지 계속 공산군에게 전도를 했다.
그러자 공산군들이 시끄럽다고 총 개머리판으로 목사님의 입을 내리쳐서 입이 짖이겨졌다.
그럼에도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전도를 하셨다.
저녁 11시쯤에 순교하셨다.
현재는 여수 입구 새중앙교회 옆에 순교비가 서있다. 관리는 여수 산돌교회에서 하고 있다.
순교자 손양원 목사와 사모, 안고있는 아들은 손 목사님이 순교하신 날 낳은 아들이다.
순교하신 손목사님 시신과 함께한 가족들
정면에 누워계신 분이 순교하신 손양원목사님이시다.
우측부터 둘째 딸 손동임씨, 그 아래 막내 딸 손동연씨, 정양순 사모님,
사모님이 안고 있는 갓난 아기는 유복자 손동길 목사이고,
그 우측으로 양 아들 안재선씨와 셋째 아들 손동장씨이다.
큰 딸 손동희씨만 빠져있다.
중요한 것은 동인,동신씨를 죽인 안재선이 손목사님의 양아들이 되어서
손목사님의 장례식에서 맏 상주가 되었다.
안재선씨는 1988년에 목암으로 소천되었다.
(막내는 손동길 목사, 세째 사위 김원하 목사, 큰 외손자 박유신 목사)
손양원 목사 장례식
순교자 동인, 동신 장례식, 1948. 10.24 애양원 교회 장례식 장면
1948. 10. 19 여순 사건 발생으로 동년 10.21 공산폭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다.
동인 나이 23살, 동신 나이 18살이었다.
손양원 목사 안장후 손동인,동신씨의 무덤 앞에선 가족들과 교우들
사진 정면에서 왼쪽이 손동인의 묘이고 오른쪽이 손동신씨의 묘이다.
그리고 보이는 비석은 두 아들의 묘 비석이다. 그 비석뒤에 손양원목사님이 안장되었다.
1948년 10월 21일 여순사건으로 두 아들이 순교하자
손목사님이 친히 두 아들의 묘를 쓰시고
현재 안장된 자리에서서 내가 죽거든 이 자리에 나를 묻으라고 했다.
그래서 순교하신 손목사님을 순교지에서 모셔와서 목사님께서 말씀한 자리에 안장을 하게 되었다.
손목사님이 안장 당시 사모님이 내가 죽거든 목사님과 합장을 해달라고 해서
1977년 11월 26일 사모님이 부산청십자 병원에서 돌아가셨는데 모셔와 합장을 했다.
그래서 현재 애양원에 있는 동도섬의 무덤들은 두아들과 합장된 손양원 목사님의 묘가 있다.
순교자 손동인
1925년 11월 6일 손양원 목사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절대 하나님 중심으로 살다가
1948.10.21 여순사건 때 공산폭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다 23세에 순교하였다.
안재선을 용서하시는 손양원 목사
여수사건때 동인,동신씨를 죽인 안재선씨를 용서해 아들로 받아들이는 장면이다.
안재선
손양원 목사 순교 후 가족들과 함께한 안재선
동인 동신 형제를 죽였으나 손 목사님이 양자로 삼았다.
아홉가지 감사
손양원 목사님의 생애를 영화화한 사랑의 원자탄 포스터와 비디오
대한민국건국훈장, 1995.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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