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에서, 영등포역에서 고픈 배를 움켜잡고 헤매다가 '인천에 가면 밥 먹을 수 있어요'라는 말에 전철을 무임승차해서 동인천역에서 내려 민들레국수집을 물어물어 찾아왔는데 문이 열려 있지 않습니다.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오전 열 시 조금 전에 국수집 문을 열었습니다. 금새 스물넷 자리가 꽉 차버렸습니다. 자리가 나길 애타게 기다립니다.
어제는 모니카오 함께 청송을 다녀왔습니다.
1995년도에 서울구치소 천주교 집회 때 처음 만났던 형제가 내일 출소한다고 합니다. 참으로 질긴 인연입니다. 징역은 벌써 끝난는데 벌금형 받은 것이 있고, 벌금을 내지 못해서 하루 오만 원 정도 계산해서 벌금형이 어제 날짜로 끝납니다. 그래서 밤 12시 이후에 출소를 해야하는데 마중 나오는 사람이 없으면 아침에 출소하게 됩니다. 그런데 돈이 한 푼도 없다고 합니다. 차비하라고 삼만 원을 교도관께 맡겼습니다.
1995년도에 폭력으로 서울구치소에 있던 형제가 징역 1년에 보호감호 처분을 받고 이송을 기다리던 중에 우연히 천주교 집회에 나왔다가 저와 편지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청송에서 1년 징역을 살고 7년 미만의 보호감호를 살게 되어 1감호소에 있다가 누진등급이 조금 올라서 청송 2감호소로 옮겨 왔을 때 저와 자매상담을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징역 1년을 살고 보호감호 5년여를 살다가 가석방되었는데 갈 곳이 없습니다. 겨자씨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한 달을 겨자씨의 집에서 살면서 참으로 많이 형제들과 다퉜습니다. 그러다가 떠났습니다. 얼마 후에 의성 대용감방에 잡혀있다는 소식을 듣고 면회를 다녀왔습니다. 그러다가 또 다시 징역형을 선고받고 청송에서 살다가 몇 년후에 출소를 하게 되었습니다. 갈 곳이 없다고 해서 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출소 하는 날 또 나오자마자 진보에서 음식점에서 소주 몇 병 마시고 칼부림을 하다가 또 잡혀들어갔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그러다가 2년 전에 청송교도소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매달 영치금을 갈 때마다 조금씩 넣어주었습니다. 이젠 나이도 육십을 바라봅니다. 평생 사랑은 받는 것인 줄 알고 사랑받으려 안달하다가 평생을 교도소에서 지냅니다. 이젠 편안하게 여생을 마친다면 참 좋겠습니다. 사랑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