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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 상여집은 흙벽을 사용한 일반상여집과는 달리 목부재를 사용하고 있다. 외형은 목재벽인 판벽과 널빤지를 마루 귀틀에 끼워만든 바닥이 특이하다. 지붕은 기와로 얹어져 있어 건축학적 가치가 높다. 정훈진 기자 jhj131@idaegu.com](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idaegu.com%2Ffiles%2F2012%2F12%2F19%2F01010101401.20121218.000129826.0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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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와를 얹은 상여집
저무는 임진년, 경산시 하양읍 무학산 중턱에 자리 잡은 경산 상여집(국가 지정 중요민속자료 제266호)을 찾은 날엔 안개가 밀려왔다 사라지길 거듭했다.
해발 350m 높이에 소나무가 베풀어진 산과 안갯속에서 만난 상여집은 괴이쩍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지금은 흉가로 변하거나 허물어지고 말았지만, 산 아래 후미진 곳이나 마을의 외진 곳에 상여집이 있었다. 흉물스럽다며, 귀신 붙었다며 가까이 접근하는 것조차 꺼렸다. 하긴 저세상으로 떠나는 길, 그 황망하고 허허롭기 짝이 없는 길에 쓰였던 상여가 있는 곳이니 그럴 만도 했다.
겉으론 범상한 기와집처럼 보이는 이 상여집이 지닌 자산은 무한하다. 그 특별함이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일반적인 상여집(‘곳집’이라고도 한다)이 흙벽과 평지바닥으로 되어 있는 데 비해 이 상여집은 전체가 목부재를 사용한 판벽과 우물마루가 깔려 있고 지붕은 기와를 얹었다.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위엄을 갖춘 누각형으로 건축학적으로도 매우 가치가 높다. 상량문에 ‘上之 二十八年 辛卯 十九日 立柱 二十五日 午時 上梁’이라고 적혀 있어 고종 28년(1891년) 건립으로 여겨졌으나 올해 7월 해체 복원하는 과정에서 마루 밑에 “본래의 건물을 3번이나 중수했다”는 내용이 발견되어 초창은 1731년 이전으로 추정된다. 동네 사람들의 구전으로 전해 내려온 “지은 지 한 3백 년 쯤 되었다”고 하는 말이 결국 증명이 된 셈이다.
이 상여집은 외형부터 철학적인 사유를 제공한다. 문짝이 달린 2칸(왼쪽과 가운데 칸)은 나무판의 매끈한 면을 겉으로 마감하고, 그 안은 우물마루로 근사하게 꾸몄다.
마루엔 상두꾼(상여를 메는 사람) 16명씩 총 32명이 드는 대형 상여와 요여(상여 앞에 앞서 가는 작은 가마로 죽은 이의 혼백을 담는다), 상여를 올려 두는 7m60㎝짜리 방틀, 방상씨, 청룡·황룡 용마루를 모셔놓았다.
상여엔 전통매듭과 오방색 천이 곰삭아 있다. 오른쪽 칸은 반대로 나무판의 거친 부분을 밖으로 하고 여기에 흙을 퍼 나를 때 쓰는 들 것, 삽, 무덤 터다지는 망께 같은 각종 산역(山役) 도구와 햇볕을 가리기 위해 치는 천막 등 부속품을 보관하는 창고와 같은 역할을 했다. 엄격하게 구분하여 격을 달리했음을 알 수 있다.
◆ 조원경 목사가 자비로 구입해 복원
이 상여집은 당초 영천시 화북면 자천리 마을 중간 국유지에 마을 공동소유로 있었다.
지난 2009년 4월, 주민들이 상여집을 없애기로 한 것을 우연히 알게 된 조원경 목사가 자비로 구입해 이곳으로 이전해 왔다. 사흘만 지나면 포클레인으로 밀어버릴 처지였다.
이전해 오는 과정에서도 극적인 장면이 여러 번 연출되었다. 기와, 서까래를 걷어낸 뒤 대형 크레인과 트레일러를 동원해 건물 본체를 그대로 옮겼고 기와공을 불러 지붕을 복원했다. 마치 ‘문화재 복원이란 이렇게 하는 것’ 이라는 전형을 보여주었다.
작대기 하나, 먼지 한 톨까지도 죄다 가져오려고 했으니. 게다가 그 과정에서 상여 관련 물품과 문서(14종 19점)를 비롯, 모두 250여 점에 달하는 귀한 자료가 발견되었다.
관련 문서를 살펴보면, 1890년 어간(於間)으로 추정되는 상여 제작 시 지출 내역 기록, 정유년(1897년) 상여계와 관련하여 경비를 거둔 내역을 적은 기록과 상여를 만들고 제를 지내는 과정에서 술과 안주 등 물자 지원 기록이 있으며, 경자년(1900년) 정월 십오일 상여계에서 계금을 분배하여 이자를 받은 기록, 임인년(1902년) 정월 십일월 초팔일 상여계 지출기록부 등 역사적인 사료까지 뒷받침 해 주고 있다.
상여계 운영의 구체적이고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사항과 마을 공동체의 풍속, 촌락의 사회경제 활동 등 당시의 문서들은 민속학적, 학술적 가치가 크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목사가 상여집을?” 하면서 의문의 꼬리표를 달곤 한다.
청송 안덕이 고향인 조원경 목사는 동양철학을 전공, (사)국학연구소 대구경북지부 고문을 맡고 있다.
독립애국지사였던 조부가 옥 중에서 기독교로 개종했지만 면면히 유교 집안의 피가 흘렀다. 우리 얼과 혼(그는 유독 이 말을 자주 쓴다)을 찾는 일에 열정적으로 이끈 것도 이런 영향 탓이다.
그는 “우리 얼이 서려 있고 혼이 녹아 있는 것을 지키는데 종교 차이가 있느냐?”고 되묻는다.
“상례문화의 상징인 상여 역시 조선시대에는 신유학과 불교의 혼용 속에서 삶과 죽음을 철학적으로 해석했다”며 “우리 스스로 무지해서 우리 것을 제기 차듯이 모두 내 버리고, 현재 중심으로 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못 박는다. 우리가 우리 것을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사랑해줄까.
“상여집은 한번 허물어지면 그대로 끝입니다. 우리나라 유일의 기와집으로 된 상여집, 이런 상여집은 지역을 떠나서 전 세계에도 없습니다. 조선 500년 정신세계, 우리 죽음의 문화를 어디에서 볼 겁니까? 유일하게 여기 밖에 없어요. 여기에 오면 다 볼 수 있지요. 이 상여집, 얼마나 멋있습니까?”
그에 따르면 우리 전통문화 중에서 상례문화는 가장 독특한, 세계에 내 놓을 만 하다는 것. 주자가례(朱子家禮)에서 관혼상제 중 상례부분이 7할 이상을 차지한다.
정통 한족(漢族)은 문화혁명으로 거의 사라져 버렸고, 소중화(小中華)라고 불렸던 우리나라에서는 그 정수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10월, 중국 길림성에 마지막 상여가 남아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내년 봄에 옮겨오기로 한 것도 동포의 혼이 녹아 있는 상여를 차마 허물게 버려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상여, 삶의 의미를 새롭게 다지다
이 상여집 알리기와 학문적 연구에 몰입하고 있는 또 한 사람은 황영례 박사(동양철학·(사)국학연구소 대구경북지부장)다. 그는 “한마디로 목사님의 의지와 혜안이 있었다”고 운을 떼면서 “우리의 전통 상례문화는 귀한 인류문화이자 정신문화지만 드러난 게 없어서 전승 활동이 너무 힘들다”고 토로한다.
“상여집에 담긴 것은 외형이 중요한 거 아닌 거 같아요. 정신인거 같아요. 한 사람의 죽음에 온 동네 사람들이 일손 놓고 집집마다 장정 한 명씩 갹출하고 그 없던 시절에 예쁜 걸로 다 꾸미고…. 상여를 꾸민 장식을 보더라도 정말 대단한 선조들의 사생관이 담겨져 있죠.” 사람들은 돈 되는 것에 치장을 하려 한다. 그러나 ‘돈 되지 않는’ 상여는 달랐다. 상여에 물심으로 집중한 것은 삶의 의미를 새롭게 다진 것이 아니겠는가.
그이 역시 ‘한국 정신문화, 생명문화의 백미’로 이름 지은 이 상여집에 깃든 소중함을 알기에 남들이 몰라줘도 해야 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다고 한다.
상례문화를 알리기 위한 방편으로 경산 자인단오제와 경주에서 ‘전통 상여 특별시연’을 펼쳤다.
발인축문을 시작으로 선소리를 하면 방상씨, 공포, 만장, 상두꾼, 상주, 유군, 복인 등이 출발한다. 경주 시연은 큰 호응을 얻었다. 지금은 보기 힘든 광경이지만 필자 또한 어린 시절 상여 행렬을 가끔씩 목격했다. 운구행렬이 시작되고 상주들은 곡을 하며 따라간다. 상여는 장지(葬地)로 향하기 전에 동네를 한 바퀴 휘 돌아서 나간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맨 앞에서 상두소리를 메기는 소리꾼의 상여 소리는 애잔하게 다가온다.
‘육신과 영혼이 헤어짐’이라는 죽음은 통과의례를 거치면서 슬픔을 한 차원 승화시킨 축제의 장이기도 하다. 그의 설명이 계속 이어진다.
“한 인생을 마무리하는 의례로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구나 하는 걸 여기 와서 보면서 느끼죠. 계(契) 중에서 가장 발달한 게 상여계가 아닌가 싶어요.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죽음의 의식을 익숙하게 가장 소중한 문화로 받아들인 거 같아요. 마을 어르신들은 상여집 없애는 것에 대해서 죄책감도 있고, 언젠가 한번은 써야겠다는 아련한 미련이 있으니까 마을마다 슬레이트집이라도, 흙집이라도 놔둔 채 있어요. 요즘은 거의 병원에서 장례식을 치르고 있지만….”
이제 상여집은 단순 보존을 떠나 전통 상례 문화와 관련 용구를 관람할 수 있는 상여박물관(혹은 경산 상례공원)으로 조성할 예정이다. 또한 전국의 유명인사 10인으로 ‘사단법인 나라얼 연구소’를 구성하여 조원경 목사가 땅을 기증하고 유네스코에 5년 이내로 등재하기를 목표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 상례문화가 세계에 어떤 바람을 일으킬지 자못 궁금해진다. 서구 자본주의 시선에 매몰된 채, 상여집을 혐오시설 운운하는 것은 얼마나 지리멸렬 한가? 죽음은 누구나 피해갈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죽음의 문화는 저세상에서 축복된 새로운 만남으로 승화되었던 것이다. 해가 지면 달이 뜨듯이.
손영학
대구가톨릭대 대학원 공예과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