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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안은 ‘조선의 에게해’
해안선의 굴곡이 많으면 해운과 어업에 도움이 된다. 그런데 한반도의 동해안은 남해, 서해에 비해 단조롭다. 굴곡도 없고 섬도 거의 없다. 환경결정론자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불리한 조건이다. 그러나 김교신은 반론을 제기한다. 이런 빈약함은 남해와 서해에 비교해서 그렇다는 것이지 ‘절대적으로 나쁜 해안’이라는 뜻은 아니라고 했다. 함경북도만 해도 웅기, 청진, 성진, 나진 등 여러 항구가 자연적으로 분포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함경남도로 눈을 돌린 김교신은 특별히 흥남항에 주목한다.
몇 년 전에 조선질소비료회사가 흥남항을 건설함으로써 어선 10여 척이 전부이던 작은 포구가 갑자기 함경남도 최대의 무역항으로 약진하게 된 것도 우리의 기억에 새로운 바이다. 이처럼 약간의 사람의 힘을 더하면 좋은 항구가 될 만한 곳은 아직도 많다.
‘약간의 사람의 힘을 더하면’이라고 했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강조를 다시 확인한다. 결국 문제는 ‘사람’이란 말이다. 김교신의 고향 함흥은 함경남도의 중심 도시다. 흥남은 ‘함흥의 남쪽’이란 뜻으로, 1920년대 초까지는 제대로 된 지명조차 없었다가 일본의 신흥 재벌 일본질소비료주식회사(일본질소)가 흥남에 자리 잡으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1927년 초에 착공하고 불과 2년 반 만인 1929년 말에 1기 공사를 마무리했고, 1930년 1월부터 본격적으로 비료 생산에 돌입했다. 「조선지리소고」를 쓰기 4년 전의 일이다. 흥남은 대규모 중화학 공업도시로 탈바꿈했고 흥남항은 함경남도 최대 무역항으로 변신했다. 자연조건보다 중요한 건 사람의 노력이라는 김교신의 지론을 증명하는 좋은 사례다. 김교신은 이 글은 쓴 지 10년 만에 그 자신이 흥남 일본질소에 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함경남도 남쪽 원산항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많다. ‘중국 요동 지방 대련에 여순을 더한 것과 흡사’한 매우 유리한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그저 송도원 해수욕객이나 명사십리(明沙十里) 피서객’만 들어와 이용할 뿐이다. 김교신은 ‘러시아에 원산항 같은 항구가 하나만이라도 있었으면 아마 세계역사는 달라졌을 것이 분명’하다고 단언한다. ‘이렇게 좋은 항구를 동해에 만들어주신 하나님의 뜻을 분변’하지 못하는 조선 백성의 부족함이 문제다. 이번에도 김교신의 강조점은 ‘사람’에게 있다.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의지와 역량이 문제라는 말이다.
다음으로 서해안이다. 서해는 동해보다 자연조건이 훨씬 유리하다. ‘목포, 군산, 인천, 진남포, 용암포 등 좋은 항구가 거리도 적당하게 줄지어 있을뿐더러, 그 사이사이에 크고 작은 섬들과 리아스식 해안의 작은 항구들이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원시시대 이래 일찍부터 해상교통이 편리했다. 게다가 ‘연안의 경사면이 완만한 것과 압록강, 대동강 등 하구(河口)가 깔때기 모양을 이루고 있어서 여러 항구와 배후지와의 수륙 연락이 원활’하므로 동해안보다 훨씬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끝으로 남해안은 동해안, 서해안보다 압도적으로 우수하다. 김교신은 남해안을 ‘조선의 에게해’로 부르며 극찬한다.
남해안의 지절률(肢節率) 즉 해안선의 굴곡을 따라 잰 거리를 해안의 직선거리로 나눈 값이 세계적으로도 유례없이 크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것을 보통 부르는 리아스식 해안이라고도 하지 않고 특별히 ‘조선식 해안’이라고 명명하였다. 포도송이에 포도송이가 맺히듯이 이삭에 또 이삭이 달리듯이, 반도에 또 반도가 붙고, 섬에 또 새끼 섬이 달린 것이 조선의 에게해(Aegean Sea)라는 별칭을 가진 남해안이다.
고대 그리스 문명의 발상지인 에게해는 해안선이 복잡하고 크고 작은 수많은 섬이 솟아 있는 바다다. 섬이 많아서 고대 선원들은 먼바다에서도 길 잃을 염려 없이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다. 해역 전체가 아시아와 유럽의 접촉점에 위치하고 고대 문명 발상지 이집트에도 가깝다. 그러므로 기원전 1500년경부터 이 해역을 중심으로 에게문명이 생겨났고, 고대 후기에는 그리스 문화의 중심부가 되었다. 철학자 플라톤은 그리스인을 ‘연못 주변에 사는 개구리’에 비유했을 정도다. 에게해 주변에서 살았던 그리스인을 개구리에 비유한 것이다. 그리스 문명은 에게해를 떠나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에게해야말로 서양문명의 원류다. 남해안을 ‘조선의 에게해’라고 부른 김교신은 한반도에 ‘사람’만 있다면 세계 최고의 문명도 건설할 수 있음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남해안 최대의 산물은 이순신
김교신은 『브리태니커백과사전』에서 ‘코리아’ 항목을 찾아보라고 말한다. ‘이순신과 거북선의 그림 설명’이 나온다고 알려준다. ‘300년 전에 무수한 적선이 공격해 오기 이전에 스스로 빼어난 장군을 배출한 곳도 남해안’이었다. 땅이 배출한 산물의 으뜸은 ‘인물’이라고 강조했던 김교신의 관점을 다시 볼 수 있다. 임진왜란(1592-1598) 때 ‘세계인들에게 조선을 기억하게 한 것은 다도해의 무궁무진한 조화와 그 기묘한 이치를 파악할 줄 알았던 한 장부(丈夫)’가 있었기 때문이며, 이순신의 지략과 통찰이 남해의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냈음을 강조한다. 남해는 이순신을 배출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세계만방에 자랑할만한 곳이라는 자부심이 보인다.
김교신이 『성서조선』 검열을 위해 매달 수시로 총독부 경무국을 드나들었음을 아는 독자라면, 남해안과 다도해를 설명하면서 일제가 껄끄럽게 여길 ‘이순신’을 슬며시 호명하고 있음을 눈여겨봐야 한다. ‘이순신’을 직접 소환하지 않고 굳이 『브리태니커백과사전』을 인용해 언급한 내막도 헤아려 볼 수 있어야 한다. “봐라, 내가 조선인이라서 이순신을 언급하는 게 아니라, 서양 학자들이 이렇게 보고 있다는 거야”라고 검열관에게 짐짓 객관성을 보이기 위함이다. 김교신의 글은 ‘행간을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조선지리소고」 발표 이듬해 함석헌이 『성서조선』에 연속 기고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의 ‘임진왜란의 발발과 이순신 장군’ 부분이 검열에 걸려 통째로 삭제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성서조선』 제77호, 1935년 6월). 김교신의 글 하나하나는 모두 검열관을 의식한 치열한 눈치 싸움의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남해의 ‘이 수많은 항만이 전시의 군항(軍港)도 되고 평시의 어항(漁港)도 되며 지략에 능한 자의 연마장도 되어서, 아르키메데스, 에우클리데스, 크세노폰 등을 배출하던 그리스의 다도해 역할을 다한다면’ 이 ‘조선식 해안’은 지구 위에 영원히 존재하고 빛날 것이다. 좋은 자연조건을 활용해 인물을 잘 키우기만 하면 남해는 에게해처럼 영원히 빛을 발하리라고 말한다. 이미 이순신을 배출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남해안의 가치는 입증되었다. 김교신이 일관해서 강조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난다. 가장 중요한 건 자연조건을 활용할 줄 아는 지혜로운 인간이다.
측우기 발명가 장영실
한국은 북위 33도부터 43도까지 걸쳐 있는 전형적인 온대지방이다. 다만 위도로는 지중해 연안과 비슷하나 기후는 그곳만큼 따뜻하지 않다. 그래서 ‘봄, 가을이 짧고 겨울이 너무 긴 것이 조선 반도 기후의 단점’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김교신은 ‘얼음 위에서 스케이팅하면서 의지를 단련할 수 있음은 추운 나라 백성에게만 허락된 각별한 은총’이라고 반박한다.
김교신은 한반도 각 지역 주요 도시들의 1월 평균 기온을 전 세계 문명국 대도시와 비교하면서 서로 비슷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부산 2.2도. 파리, 교토와 비슷함.
대구 1.9도. 베를린, 워싱턴과 비슷함.
서울 –4.5도. 시카고, 베이징과 비슷함.
평양 –8.1도. 모스크바보다 온난.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 삿포로보다 조금 더 추움.
요컨대 조선의 기후는 사람이 살아가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다만 ‘강수량이 500~1,400mm 내외에 불과해서 일본의 800~3,000mm에 비하여 부족한 듯’하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이를 지혜롭게 극복했다.
강수량이 다소간 모자란 경향이 있었던 까닭에 서양 여러 나라보다도 200년이나 앞서서 조선 시대 초기에 벌써 측우기를 제작하였다. 우리 민족이 세계 최초로 과학적으로 강우량을 계산했다는 영예를 얻게 된 것은 우리 조상들이 화(禍)를 복(福)으로 바꾸는 일에도 비상하였다는 증거이다.
측우기를 만든 조선의 발명왕 장영실을 거명함으로써 자연환경, 지리적 조건보다 중요한 것이 인간의 지혜와 의지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게다가 김교신은 강수량 부족에도 나름의 장점이 있다고 지적한다. ‘하늘에 구름이 적은 것이 일찍이 천문학이 발달할 수 있는 이유가 되었으니 경주와 개성에 첨성대 옛터가 남아있어서 우리의 자랑거리’가 되었다는 말이다. 어디 그뿐인가. 김교신은 여기에 종교적 의미까지 부여한다. “맑은 하늘은 그 하늘 아래 백성의 마음을 맑게 하였으며, 맑은 마음이 어찌 하나님을 바라보기에 도움이 되지 않았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면 이 강산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것에 감사할 것은
극동의 중심, 한반도
‘위치’는 자연 지리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가 있는 요소’다. 따라서 위치를 다루는 것은 곧 「조선지리소고」의 ‘결론에 이르는’ 길이다. ‘지구의 표면을 열대, 온대, 한대의 세 가지로 나눌 때 한대에는 인류의 생활이 거의 불가능하고, 열대에는 국민의 지능이 발달하기를 기대하기 거의 힘들며, 오직 온대지방에서라야만 능히 문화의 발달’을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한반도는 ‘북위 약 33도로부터 43도까지에 걸쳐 있어서 온대 중에도 전형적 온대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대단히 복된 위치다.
김교신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조선은 ‘극동의 중심’이며 ‘심장’이라고 주장한다. 지금까지는 한반도 자연환경의 단점 지적에 대한 반론과 반박이 주를 이뤘다면, 결론 부분에 이르러서는 한층 공격적·적극적 주장을 펼친다. 그는 조선이 동아시아의 중심이라고 주장하면서, “중심적 위치라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좌우할 수 없는 속성을 품고 있다”라고 천명한다. 수비에서 공격으로의 태세 전환이다. 그는 조선이 ‘극동의 심장’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한반도와 닮은꼴이면서 세계사의 중심 역할을 했던 세 지역을 열거한다.
그 첫째는 문명의 다리 역할을 했던 ‘그리스 반도’다. ‘인류의 역사가 이집트, 바벨론, 아시리아 등 원시 거대 국가 생활로부터 로마제국같이 조직적이고 근대적인 새로운 생활 양식으로 옮겨 가는 중간에 그리스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했다. 이전 시대의 모든 우수한 유산을 종합해서 다음 시대에 전달해 주었다. 이를테면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한 셈이다. 기원전 4~5세기 무렵 고전기에 찬란하고도 독특한 문화를 세계역사에 남긴 그리스 반도는 몇 가지 점에서 한반도와 비슷하다. ①반도라는 것, ②산악이 많고 평야가 적은 것, ③북위 30~40도에 위치한 것 등이다.
더구나 그리스 반도는 ‘그 반도에 또 반도가 달려 있어 항만 굴곡이 극심한 것’과 ‘수천수만의 섬들이 나열된 다도해 광경’이 ‘조선 반도의 남해안과 거의 일치’한다. 그뿐만 아니라 ‘(페르시아 등) 동방 제국이 지중해 남서 지역으로 뻗어나갈 때 필연코 그리스 반도를 거쳤고, 로마 군대가 소아시아 지역을 정복할 때 그 말발굽 소리가 우선 이 반도에서 들렸고, 북극곰 러시아의 발톱이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나무뿌리를 파헤치고 두드릴 때 먼저 진동한 곳’도 그리스 반도였다. 두 반도는 역사적으로 국제정세에 민감한 곳이다. 이점에서도 한반도와 그리스 반도의 처지는 똑같다. 그러므로 ‘그리스 반도에 동정할 점이 있다면 조선 반도에도 마찬가지’요, ‘그리스 반도에 자랑할 것이 있다면 조선 반도에도 자랑할 것’이 있다.
두 번째는 한반도와 비슷한 형상의 이탈리아반도다. 이탈리아반도가 조선 반도와 비슷하게 생긴 것은 세계 지도를 한번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폭이 좁고 길이가 긴 반도 전체의 형상도 닮았지만, 면적도 위도도 비슷하다. 지중해의 중앙에 돌출하여 서기 1, 2세기에 절정에 이르렀던 로마제국의 위력을 보라. 이탈리아반도는 오늘날까지 3,000년 간 문명을 이어왔다.
이탈리아반도는 그 위치가 ‘지중해의 심장’이어서 ‘강한 때에 주위를 지배하기에 편할뿐더러 약한 때에도 한가로이 낮잠만 잘 수도 없는 형편’이니 이 또한 조선 반도와 똑같다. 이탈리아반도는 그리스보다 더 중심적 위치인데 더하여 비옥한 롬바르디아 평원까지 갖추고 있기에 그리스보다 규모도 컸고 역할도 달랐다. 서기 1세기 초 이른바 ‘로마의 평화(Pax Romana)’ 시기에 지중해 문명은 로마의 주도하에 활짝 피어났다. 그리스가 스승이라면 로마는 제자다. 그리스가 어머니라면 로마는 아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는 그리스대로 숭고했고 로마는 로마대로 강대했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는 말이 있지만, 또한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다.
한반도는 이탈리아 남쪽에 그리스를 합친 모습
그러나 이탈리아반도의 해안은 좋은 조건이라 할 수 없다. 남단에 타란토만(灣) 하나가 있을 뿐이다. 굽 높은 장화 중앙의 아치 모양으로 쑥 들어간 곳이다. 항만 굴곡이 단순하고 밋밋하다. 만일 아펜니노 반도(이탈리아반도)의 칼라브리아 반도(발끝과 발등)와 풀리아 반도(뒷굽)를 끊어내고 거기에 굴곡이 복잡한 그리스 반도를 떼어 붙인다면, 호랑이가 날개를 단 형상일 것이다. 만일 두 반도를 합친 지형이 존재한다면 지구상에서는 그보다 나은 이상적 강토를 상상할 수 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반도가 바로 그런 형상이다. 김교신은 말한다. “궁금한 사람은 세계 지도에서 에게해의 그리스를 떼어 이탈리아 남단에 붙여 놓고 우리 반도와 대조하여보라.” 이탈리아반도 남쪽에 그리스를 합친 모습이 바로 한반도다. 한반도의 지리적 강점을 김교신처럼 설득력 있게 설명한 지리학자는 일찍이 없었다. 일본이 그토록 선망하는 서양문명의 발상지 두 곳이 모두 반도였고, 두 반도의 장점을 합친 것이 한반도라는 말이다. ‘반도적 성격론’에 대한 통렬한 받아치기다.
끝으로 김교신은 그리스, 이탈리아에 이어 덴마크 반도로 눈을 돌린다. 덴마크가 자리 잡은 유틀란트반도의 면적은 한반도의 20%에도 못 미친다. 산악이라야 해발 200m를 넘는 것이 드무니, 서울의 남산(265m)을 옮겨놓으면 덴마크의 백두산 노릇을 할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덴마크는 농업과 축산업의 모범국으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나라다. 덴마크를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고 역설하며 일본에 처음 소개한 인물이 우치무라 간조였다. 식민지 조선도 그 영향을 받아 덴마크 농업을 본보기로 삼았다. 김교신이 덴마크에 주목한 건 우연이 아니다.
한반도보다 훨씬 크기가 작지만, 덴마크는 12, 13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스칸디나비아반도의 스웨덴, 노르웨이는 물론, 독일, 러시아, 영국, 프랑스 제국까지도 세력권 안에 거느린 대국이었다. 서북 유럽의 중심에 돌출한 위치 때문이었다. 이것은 마치 이탈리아반도가 지중해에, 조선 반도가 동해에 돌출한 것과 흡사하다. 김교신은 덴마크가 지금은 비록 예전의 정치적 위력이 시들어버렸지만 위대한 철학자 키르케고르의 조국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최근 반세기 동안 세계를 놀라게 한 덴마크 산업 발전의 바탕에는 키르케고르의 복음주의적 기독교 신앙이 있었다고 지적한다. 김교신의 지론이 다시 반복된다. 중요한 건 환경보다 사람이라는 것이다. 키르케고르가 가르친 기독교 신앙의 배경이 있었기에 덴마크 경제가 발전할 수 있었음을 지적한다.
한반도에 지리적 결함은 없다
그리스와 이탈리아와 덴마크, 이 세 나라가 모두 반도 국가라는 점을 김교신은 강조했다. 그러므로 조선의 지리적 조건은 불평보다 만족과 감사할 것이 많다. 백성이 넉넉히 한 살림살이를 꾸려갈 만한 강산이다. 넉넉히 인류 사상에 큰 공헌을 할 수 있는 무대다. 그러나 조선의 과거와 현재를 안다고 하는 식자들은 누구나 그 위치의 불리함을 한탄한다. 서해가 대서양만큼 넓거나, 압록강 저편에 알프스산맥 같은 험준한 봉우리들이 둘러싸서 대륙 세력의 침략을 피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탄식한다. 대한해협이 태평양만큼이나 넓었더라면 일본의 침탈에서 벗어나 태평하였을 것이라고 원망한다.
그런 조건을 누리지 못하기에, 중국·일본·러시아 3대 세력 한가운데, 마치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듯 반만년 역사에 편안한 날이 없었다고 투덜댄다. 그러나 김교신은 이것이 ‘약자의 비명’일 뿐이라고 단정한다. 약자가 태평을 구하여 피신하려면 천하에 안전한 곳이라고는 없다. 남미 페루에 살았던 인디오의 수도 쿠스코(Cuzco)는 백두산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 있었어도 스페인인들의 참혹한 침략을 피할 수 없었다. 티베트는 해발 4,000m 이상의 고원에 숨겨진 나라였으나 천하 최고의 히말라야산맥도 영국인의 진출로부터 보호해주는 장벽은 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김교신은 깨닫는다. ‘비겁한 자에게 안전한 곳이 없고 용감한 자에게 불안한 땅은 없다’라고. 무릇 생선을 낚으려면 물에 갈 것이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가야 한다. 조선 역사에 편안한 날이 없었다고 하는 것은 ‘이 반도가 동양 정국의 중심’인 것을 증명한다. 조선 반도는 ‘물러나 은둔하기에는 불안한 곳이나 나아가 활약하기에는’ 이만한 데가 다시 없다. 이 반도가 위험하다고 말하려면 차라리 러시아 극동의 캄차카반도나 그린란드의 빙하 속으로 가는 게 낫다. 현세적으로 물질적으로 정치적으로 고찰할 때 조선 반도에 지리적 결함, 선천적 결함은 없다. 다만 문제는 거기 사는 ‘백성의 소질과 담력이 중요할 뿐’이다. 김교신은 또 한 번 환경보다 사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강대한 외세의 침탈을 수없이 받아온 조선은 정신적인 면에서 특별한 희망이 있다. 유대 민족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들은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이집트, 아시리아 등 강대한 세력이 복잡하게 뒤섞인 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이들은 격변하는 국제정세와 척박하고 불리한 자연환경 속에서도 이방의 미신에 빠지지 않고 건전한 유일신 신앙을 지켜왔다. 유대 민족이 그랬듯이, 반만년의 고난을 겪은 반도의 백성은 강대국 백성이 도저히 알 수 없는 진리를 깨달아 알 수 있다. 다른 사상이나 발명은 몰라도, 지극히 높은 사상, 즉 신의 경륜에 관한 사상만은 가난하고 약하고 멸시당하고 유린당하여 타고난 교만의 뿌리가 뽑힌 자에게만 특별히 계시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음을 맡기기 위해 저들에게 온갖 부끄러움과 모욕을 안겨주었다. 최근 조선의 이웃 나라들에서 더 이상 정직함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약소국 조선을 침탈하는 강대국 백성들의 내면은 탐욕과 교만으로 가득 들어차 있다. 오만한 그들에게 신의 섭리가 이해될 리 없다. 이런 시국에 맑은 마음을 이 백성에게 두신 신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우리는 그윽이 기다리고 바라지 않을 수 없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근동 문명이 서쪽 유럽으로 옮겨 갈 때 그리스 문명의 꽃이 화려하게 피었던 것처럼, 인도 서역 문명이 동쪽으로 옮겨 올 때 조선 반도에는 찬란한 문화가 출현했다. 지금은 반대로 북미 대륙에서 태평양을 건너온 문화의 물결이 태백산과 소백산의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가 북쪽 백두산기슭까지 적셨다. 서쪽에서든 동쪽에서든 고귀한 문화의 광명이 출현했을 때 이 반도는 어둠 속에 머문 적이 없었다.
무교회주의적 문제의식
그러므로 「조선지리소고」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동양의 모든 고난이 이 땅에 모여 있거니와 동양에서 산출하여야 할 바 무슨 고귀한 사상, 동반구의 반만년의 모든 것을 용광로에 달여 낸 정수(精髓)는 필연코 이 반도에서 찾아보리라.” 김교신은 반만년 한반도에 뿌리내리고 살아온 조선 백성이 세계사의 주역이 되어 ‘고귀한 사상’과 ‘정수’를 찾아내리라고, 아니 찾아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반도적 성격론에 대한 통쾌한 반박과 함께, 조선의 청년들에게 반도의 지리적 위치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과 꿈을 제시한 것이다. 불리하다고 여겨졌던 것이 알고 보니 지극히 유리한 것이었다.
한국사학자 이기백은 일제의 식민주의사관이란 일제가 한국에 대한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작해낸 사관이라고 지적한다. 이 목적을 위해 그들은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왜곡·조작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이상으로 한국 역사의 기본적인 성격에 대해 심한 왜곡을 했다. 우리가 식민주의사관이라고 부르는 일제 식민주의 역사학자들의 한국사관은 무엇보다도 한국사가 주위 강대국에 의해 좌우되었다는 타율성(他律性) 이론에 입각하고 있다.
이 이론에 따르면 한국사는 스스로 자율적으로 발전해온 것이 못 되며, 따라서 독립 국가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 그러므로 일본의 식민지가 됨으로써 비로소 이런 타율성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이렇게 된 이유는 한국사가 대륙에 붙어 있는 작은 반도에서 전개되었다는 지리적 조건에 기인한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그러므로 이기백은 식민주의사관을 타파하는 근본적인 방법은 바로 이 지리적 결정론과 반도적 성격론 자체를 논파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한국사학자들이 식민주의사관에 관해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문제 제기한 건 광복 후의 일이다. 이기백이 「식민주의적 한국사관 비판」을 처음 발표한 것은 1961년이었다. 「조선지리소고」는 1934년에 발표되었다. 광복되기 11년 전, 식민지 시대의 한복판에서 반도적 성격론에 대한 학문적 비판을 시도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조선 김치 냄새나는 기독교’의 기치를 내걸었던 지리학자 김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낳은 값진 열매다. 예배당 건물이 아닌 우주와 역사를 교회로 여기는 무교회주의적 문제의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