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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와 근대성
Ⅰ.머리말
파우스트는 18세기 말~19세기 초 근대 시민 사회의 초석을 다진 정치.산업혁명의 시대에 괴테가 집필하였다. 독일 문화의 상징적인 걸작인 파우스트는 호기심과 함께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기에 고전 중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파우스트는 악마에 영혼을 판 이후 그리 도덕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마지막 눈을 감을 때 천사의 품에 안기었기에 종교적 구원이라는 해석과 더불어 파우스트는 악마에 이끌려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면서 근대성의 행위들을 하여 근대적 인간상의 구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자기 탐험과 자기실현을 향한 끝없는 도전은 독일 문학에 성장소설이라는 장르를 낳았다.
소설을 포함한 문학의 장점은 독자가 가공의 주인공이나 등장한 인물의 사고.행위에 공감함으로써 사상.철학을 대중화하는데 기여한다.
고교시절에 읽을 때에는 그리 여기에 아는 지식이 짧았기에 줄거리파악에 급급하면서 뭔가를 알려고 노력했던 기억은 남는다.
이런 이유 때문에 수 십년이 지난 지금 이렇게 다시 정리하면서 이 책을 감상해본다.
Ⅱ.파우스트의 내용과 구원
파우스트는 인간으로서의 모든 학문과 재주를 획득했음에도 끝내 만족하지 못하고, 우주의 신비와 최고의 향략을 맛보고자 악마에게 몸을 판다.인식과 향락에 대한 무한한 욕망을 만족시켜주고, 이십사 년 후에는 그의 영혼을 악마가 가져간다는 계약이 이루어진다. 파우스트는 악마를 종으로 동반시키며, 마술의 힘을 빌려 지상에서의 정신적 육체적 향락을 누린다. 그러나 마음의 충족이나 만족은 발견할 수 없어 결국 신에게 기도하려 한다. 그때 악마는 미녀의 전형인 헬레나를 마술로 재현한다. 아름다움에 도취된 파우스트가 그녀를 포옹하려는 순간, 복수의 여신으로 변신한 헬레나는 그를 지옥으로 이끌어간다.계약기간이 다 되었기 때문이다.
파우스트는 구원된다. 다른 사람들을 무수히 끊없는 불행으로 몰아넣고 죽음속에 묻어버린 인간이며 극단적인 이기주의자인 동시에 지독한 폭군인 파우스트.
만년의 괴테는 파우스트를 고귀한 사람이라 부르기도 하고, 천사와 악마의 안식일에 대한 거짓말을 하는가 하면,파우스트의 구원된 연혼이 향연에 싸여 둥실둥실 천국으로 떠나가도록 하기도 한다. 많은 연구가들은 파우스트의 구원을 이성의 범주를 벗어난 일종의 신비라고 말하면서, 죽음을 앞둔 괴테가 만들어낸 창조물로 간주한다.
비극의 마지막의 장면 심산유곡에서 천사들은 구원된 파우스트의 영혼을 하늘나라로 인도하며 이렇게 노래한다. “영들 세계의 고귀한 사람이 악으로부터 구원되었도다. 언제나 열망하며 노력하는자 그자를 우리 구원할 수 있노라. 그에게 사랑의 은총까지도 천상으로부터 관여해왔으니, 천복받은 신성한 무리가 그를 진심으로 환영해 맞이하노라”
이 노래는 주인공의 영혼을 구원함에 있어서 이승과 저승이 서로 협력하는 관계에 있음을 나타낸다. 이승의 요소로서는 파우스트가 언제나 열망하며 노력한다는 것이다. 죽음까지 초월한 초인적 노력을 함에 있어서 그는 혼미해지기도 하고 세속적 오류를 범하기도 하지만, 이는 지배와 피지배 사이에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운명적 사건들로 이해된다. 파우스트는 과 인간행동을 마비시키는 근심이 나타날 때에도 이를 거절하고 극복하며 마술로부터 몸을 돌린다. 요녀의 입김으로 눈까지 멀지만, 그는 마음속으로부터 밝아오는 내면의 빛에 인도되어 바다와의 투쟁을 계속한다. 언제나 열망하며 노력하는 자로서 요녀를 이겨내고 마술을 거부함으써 구원의 가능성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순수한 활동만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며, 여기에는 저승으로부터의 도움이 절대 필요하다. 천상으로부터 관여해오는 사랑과 은총의 힘이 협력해야만 한다. 그가 죽은 다음 옛애인 그레첸이 다시 등장하여 지고한 사랑의 힘으로 파우스트의 영혼과 하나가 된다.
괴테의 은총이란 기독교적 은총개념과 일치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는 인본주의적 요소와 기독교적 상징세계를 결부시켜 파우스트의 죽음과 구원문제를 우주적 의미에서 조화롭게 해결한다.
괴테는 파우스트의 영혼의 구제를 통해 인간의 신적 요소인 불멸성에 대한 독자적 믿음을 표현한다. 즉 그는 끊임없는 활동에 내재하는 인간의 지속적 본질인 엔텔레케이아를 믿으며 파우스트의 노력을 이러한 원칙으로 간주한다.
천사들이 이 영혼을 팔아넘긴 자인 파우스트를 신의 품으로 끌어올린다. 그가 구원받는 것은 끝없이 노력하고 분투했기 때문이다. 즉 자기실현을 향한 투쟁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Ⅲ.파우스트와 근대성
파우스트는 근대인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인류는 개체적 발생으로나 계통적 발생으로나 원초적인 욕망을 억압함으로써 한 인간이 사회의 한 일원으로 성장할 수 있고, 문명이 탄생. 성장할 수 있다.
그래서 기본적 욕망을 억압하고 자기 내면의 규율과 훈련을 쌓음으로써 분열된 자아가 창출되고 나아가 타인과 타문명을 배제하는 기본적인 토대가 된다.
이런 자아는 근대인의 출발점으로 자연과 인간에 대한 생명없는 기계적인 자연과 인간을 창출하여 언제든지 인간의 욕망에 맞게 조작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파우스트는 욕망충족을 위해서라면, 영혼도 팔겠다는 강한의지를 볼 수 있다. 너가 이 세상을 산산조각 때려부순다면, 그 다음 어떤 다른 세상이 생겨나도 상관없다는 파우스트의 외침에서 중세적 세계관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온 근대성의 싹을 보게 된다.
인간의 영혼도 욕망충족을 위해서라면 자본주의 시장에서 얼마든지 교환이 가능하게 되어 있다
악마의 힘에 기댄 파우스트가 한 일은 그저 그의 충동을 분출하고 그의 발전에 걸림돌이 된 모든 것을 점차 제거 해버렸을 뿐이다. 이는 자본주의에서 경제가 정치.사회.문화를 압도하여 시장에서 자본축적에 방해되는 것들을 정리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국고가 텅텅 빈 황제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파우스트와메피스토펠레스는 돈을 창조한다. 무가치한 어떤 물질을 유가치한 것으로 바꾸는 것 즉 종이를 돈으로 바꾸는 것을 뜻한다.더 이상 초자연에 기댈 필요가 없다. 기적은 자연적인 것이다.
유럽에서 화폐발행권은 국가에 있지 않고 국가가 권한을 준 민간은행이 갖고 있었다.영국의 중앙은행은 기업인들이 주도로 설립된 뒤 왕에 의해 발행가치를 금으로 태환할 필요없는 지폐발행권을 부여받았다.이것이 현재 화폐시스템의 출발점이다.
다음은 실제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다. 돈은 하나의 자본으로서 투자돼야 한다.돈은 경제분야에서행위와 창조를 가능하게 한다. 돈이 하나의 자본으로 성립되기 위해선 자본-임노동관계가 최소한 일국내에서 일정 정도 성립되어야 한다.그래야만 잉여가치를 창출한 자본가들이 자본축적을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파우스트는 내가 쟁취하려는 것은 힘이자 소유다.행위가 전부다. 영예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선언한다.
만물을 계속 움직이게 하고 사회전체가 쉼도 방해도 없이 지속적으로 노동을 통해 활동하게 하는 것이다.그로 인해 항구적 불안속에 놓여 있던 사회는 더 이상 머물러 있지 않고, 이제는 공포사회가 된다. 파우스트에게 휴식은 영영 없다. 마녀들이 부뚜막에서 파우스트를 위해 만든 묘약과 같은 일탈이 일어난다.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를 데려가기 전에 그에게 속삭인다. “자, 삼켜라.두려움없이 삼켜라.어서 나가자.쉬면 안된다.”
노동이 중독이 될 정도로 일하는 것. 경제행위에 대한 강렬한 욕망은 이 지상에서 불멸의 광적인 추구를 드러낸다. 죽은 시간을 좇으며 죽음의 시간을 죽인다. 그러나 시간을 쟁취하기 원했던 파우스트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메피스토펠레스는 시간이 주인이 된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마르크스가 말한 자본의 탄생과정을 볼 수 있다." 자본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모든 땀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뚝뚝 흘리며 태어날 것이다 "라는 마르크스의 말대로 자본의 탄생과정은 인간에 의한 인간의 노예화와 수탈의 역사다. 영국에서 값싼 노동력창출을 위해서 2차에 걸쳐 인클로저운동을 얼마나 비극적인 국가폭력으로 쟁취했는가? 그런 다음 자본축적을 위해 아주 어린이들조차 하루에 16~19시간씩을 일을 해야만했다.
근대이후 시간이 시간단위를 넘어서 분, 초까지 세분화시켜서 노동자를 하루 24시간도 부족할 만큼 노동을 시켰다.
파우스트가 마지막이면도 최대의 공사를 펼친다. 수백만명의 백성에서 땅을 마련해주는 간척 사업을 벌인것이다. 이 공사감독은 메피스토펠레스이니 진정한 가치조차 타락한 방법으로 이루려는 악마이다. 내일을 위해 오늘의 희생을 강요했던 근대적 계몽의 어두운 그림자이다. 계몽주의 이후 인류의 미래를 결정할 새로운 출발, 인간이 피조물이 아닌 창조주가 되어 이상적인 세계를 건설하려는 프로젝트 모던이 주체가 된다.
근대자연상은 대단히 인공적인 자연상이며 그것은 만들어진 것, 지적 조작에 의해 구축된 자연상이다. 주어진 자연을 주체가 구축한 이념에 의해 변형시키고 그렇게 제작된 표상을 가지고 자연에 대해 조작을 가한다는 발상법이다.
자연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양적 존재자의 덩어리라는 것,즉 순순한 양적 공간이라는 것이다.
기계적 자연에서 자연은 수학적 언어로 씌어 있다고 말하는 순간 개체가 가지고 있던 고유성r은 사라지고 모든 사물의 기본성격이 완전히 똑같아져 버린다. 양적차이만 있을 뿐이고,양적존재라는 점에서 만물은 완전히 똑같다. 이는 오늘날 무분별한 자연파괴로 인한 생태계위기가 심각하게 한 자연을 바라보는 태도이다.
인간의 자연에 대한 관계행위는 무엇보다 먼저 노동이다.근대인의 노동의 에토스는 세속적 금욕에 의해 뒷받침된 근면에 있으며,직접적 소비의 단념이다. 이 노동관의 특질은 자연에 대하여 지배와 관리의 관점으로부터 관계하는 점에 있다. 자연은 기계이며, 만들고 해체할 수 있다고 하는 세계관(세계의 기계화)은 자연을 실험의 대상으로 삼고, 자연을 폭력적으로 처리하는 정신의 구축 방식을 의도한다.이 자연에 대한 계산합리적으로 행하는 폭력적인 관계를 물질적으로 체현하고 있는 것이 근대기술이다.
미래에로의 시간의식인 근대의 시간의식의 특징은 단적으로 직접적 등질적 시간이기도 하지만 앞으로의 도약에 극단적인 강조가 주어져 있다는 점이다. 근대인은 정해져 있지 않은 암울한 미래를 향하여 무슨 일인가를 기도企圖한다.미래를 향한 投企는 불확정적인 암울한 것으로 비약하기 때문에 投機이며 도박이다. 이 투기의 관념은 전진,발전,향상,완성가능,진보 등의 관념들을 거느리고 있다.
비극적인 세계는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한 법칙적 운행구조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고 그 절대적인 세계의 질서에 개입할 수 없다면 인간은 소외되고 회의감에 빠지며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는 곳이다. 그곳은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갈등과 아픔, 고민과 우연들에 섭동하거나 공조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절대적이고 완전한 세계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을 알면서도 그 벽을 뛰어 넘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스스로의 한계를 시험하는 주체는 희극적인 세계의 출발점이며, 그 안엔 숭고미가 짙게 흐른다.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세계는 끊임없이 모든 사물들이 변화하고 뭇 생명들이 태어나고 죽고 다시 태어나는 곳이며, 따뜻하고 축축하고 다채로우며 모순이 산재해 있고 목적도 끝도 없는 곳이다. 그 리얼한 세계를 바로 보기 위해, 그 세계에 다가가서 스스로 관찰하고 세계를 이해하는 새로운 질서와 원리를 만들어내는 과정이 희극의 재탄생, 근대의 출발점이다.
Ⅳ.파우스트와 성장소설
파우스트의 자기탐험과 자기실현을 향한 끝없는 도전의 드라마는 괴테 이후 독일문학에 성장소설이라는 장르를 낳았다.
고교시절에 두 번이나 읽어보면서 가치관을 정립해가는 주인공이 데미안이라는 신적 존재(?)와 악마와 같은 크로마가 공존하는 모습을 보았다.
헤세는 에밀 싱클레어라는 주인공을 내세워 13살부터 20살 무렵까지 성장기를 겪는 젊은이의 내적 갈등과 진통을 빼어나게 묘사했다. 에밀의 삶에 ‘멘토’로 등장하는 것이 상급생 데미안이다.
어린 에밀에게 데미안은 “어른처럼 낮설고 성숙하며, 너무나도 우월하고 냉정하고 의지에 가득 찬 완벽한 초인”이다. 에밀은 데미안을 통해 자기투쟁과 자기극복의 비전을 본다.
청년이 된 그가 발견한 삶의 진리는 이 소설의 유명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알을 깨고 나온 새, 미숙에서 성숙으로 진화한 새는 ‘아브락사스’에게로 날아간다. 아브락사스는 악마적인 것과 신적인 것을 통합한 신이다. 이 신은 인간 내면에 거주한다. 그러므로 헤세가 말하려는 것은 분명하다.
선과 악, 정신과 본능, 성스러운 것과 추한 것이 공존하는 내면을 직시하고 그 대립하는 두 세계를 조화시킴으로써 삶을 온전히 사는 것이다. 성숙한 인간은 여성적인 것과 남성적인 것이 하나로 포개져 있다. 자기실현은 절망과 고통의 강을 건너는 일이다. 거센 물살이 두려워 거기서 멈춰서는 강 건너의 세계로 갈 수 없다고 지은이는 강조한다.
카뮈가 시지프스 신화를 빌려 보여주는 인간의 삶은 무의미 자체다. 시지프스는 산 꼭대기로 바위를 굴러올리는 형벌을 받았다. 바위가 굴러 떨어지면 그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 이 무한한 반복의 형벌을 카뮈는 ‘반항’으로 역전시킨다.
자유를 품은 인간의 결단으로 카뮈의 주인공들은 구원도 희망도 없는 사막에서 자살에도 포기에도 호소하지 않고 반항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존재의 승리를 확인한다.
“이리하여 일관성 있는 유일한 철학적 입장은 반항이 된다. 반항은 인간이 자신의 어둠과 벌이는 끝없는 대결이다.” 반항을 삶의 형식으로 삼은 시지프스는 자기 운명 앞에서 절망하지 않는다. 카뮈는 말한다.
“그가 꼭대기를 떠나 신의 소굴을 향하여 조금씩 더 깊숙이 내려가는 순간 시지프스는 자신의 운명보다 더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강하다.”
2012.8.16. 2:05 두암동 미라보 아파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