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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佛經) & 붓다 스크랩 우리 문화 바로보기_01
앱솔 추천 0 조회 15 13.10.01 20:1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무령왕과 예산 사면석굴의 비밀

 

[ 북중국의 혼란 ]

전진(前秦) 황제 부견이 전연(前燕)을 멸망시키고 나자(470년) 북중국은 일시 통일이 이루어진다. 고구려도 숙적 연나라의 멸망을 다행으로 여기며 전진의 존재를 존중하여 영토분쟁 문제로 두 나라 관계를 악화시키려 하지 않았다. 이보다는 북쪽에 신경을 쓰느라 남쪽의 방비가 허술한 틈을 타 남쪽 영토를 끊임없이 잠식하고 있는 백제를 물리치는 일이 더 급한 일이었다.

 

고구려는 이제껏 시조를 같이하는 일가 나라라 하여 백제와는 우호관계를 유지해 왔었는데, 백제의 근초고왕이 인정사정 보지 않고 평양까지 북침해 고국원왕을 쏘아 죽이기까지 하였으니 고구려의 백제에 대한 감정은 과거 연나라에 대해 가졌던 감정보다 조금도 못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수림왕이 거의 매해 백제를 침공하여 백제 북변의 땅을 빼앗았던 것이 이런 사실을 대변해 준다.

 

그런데 소수림왕 13년(383) 8월에 부견은 남조 동진(東晋)을 정벌하여 천하를 통일하려고 112만 대군을 거느리고 남벌(南伐)의 길에 나섰다가 회수(淮水)의 남쪽 지류인 비수(肥水) 싸움에서 동진 재상 사안(謝安)의 전략에 말려들어 불과 8만 군사에게 대패하고 만다.

 

그 사건은 이렇게 전개된다. 부견의 아우로 전진의 총사령관이던 부융(融)이 동진의 선봉장 사현(謝玄)으로부터 비수 강가에 진을 친 그의 군대를 조금 물려주면 남군(南軍)이 비수를 건너가 일전을 벌이고자 한다는 편지를 받게 된다. 이에 부융은 비수를 건너는 남군을 섬멸하고자 자신의 군대에게 후퇴 명령을 내리는데, 대군이 전쟁에서 패하여 후퇴하라는 줄 알고 서로 밟고 달아나는 바람에 수습할 수 없는 사태가 생겨버렸다.

 

사현은 숙부인 사안의 밀명을 받고 이런 꾀로 북군(北軍)을 교란시킨 다음 정예 경기병 8000명을 거느리고 비수를 건너 달아나는 대군을 추격, 섬멸하는 작전을 펼쳤다. 이에 북군은 수십만의 사상자를 내며 완전 괴멸하고 말았다. 이 와중에 부융은 말이 거꾸러져 피살되었고, 부견은 화살에 맞은 채 필마단기로 도망쳐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사실 이때 부융으로부터 편지 내용을 보고받은 부견의 참모들은 모두 강가에서 적을 막아야 한다면서 이런 제의를 일축하려 했다. 그러나 부견이 철기(鐵騎, 무쇠 갑옷으로 무장한 기병) 수십만으로 물을 건너는 적들을 물 속으로 몰아넣어 죽일 수 있다고 판단하고 이를 허락했다고 한다. 100만 대군을 거느리고 있다는 오만이 겨우 8만 군사에게 대패하게 된 원인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100만 대군이 괴멸하자 전진의 위세에 눌려 지내던 피정복 세력들이 각처에서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전진과 대권을 다투다 멸망한 전연의 모용씨들이 제일 먼저 반기를 든다. 우선 전연 문황제(文皇帝) 모용황(慕容, 297∼348년)의 다섯째 왕자로 남벌군의 선봉장을 맡았던 평남(平南)장군 모용수(慕容垂, 326∼396년)는 자신의 군대만은 온전하게 지키고 있다가 고향에서 성묘(省墓)하고 오겠다는 핑계를 대고 고향으로 돌아와 연나라 구도인 업()성을 차지하려다 실패한 다음, 고구려 고국양왕 원년(384) 1월에 중산(中山)에서 후연(後燕)을 재건한다.

 

이 소식을 들은 전연 경소제(景昭帝) 모용준(慕容儁, 319∼360년)의 제4왕자이자 모용수의 조카인 모용홍(慕容泓, ?∼384년)도 북지장사(北地長史)로 있다가 관중(關中) 지방으로 도망쳐, 관중으로 강제 이주된 선비족들을 모아 화음(華陰)에서 반기를 들고 같은해 3월에 서연(西燕)을 건국한다.

 

그러자 부견이 남색의 상대로 삼을 만큼 극진히 사랑했던 모용준의 막내 황자 모용충(慕容 359∼386년)도 평양(平陽)태수로 있다가 하동(河東)에서 2만 군사를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켜, 부견이 머물고 있는 수도 장안으로 진격하기 위해 황하 건널목인 포판(蒲坂)을 공격한다.

 

결국 부견은 모용홍의 뒤를 이어 서연왕이 된 모용충의 공격을 받고 다음해인 고국양왕 2년(385)에 수도 장안을 포기하고 오장산(五將山)으로 피란해 들어간다. 그런데 여기서 부견은 후진(後秦)왕 요장(姚)이 보낸 장군 오충(吳忠)에게 사로잡혀 선위(禪位)를 강요받다가 불응하고 신평(新平)의 절에서 목매달려 죽고 만다. 고국양왕 2년(385) 8월의 일이었다.

 

이렇게 되자 북중국은 다시 사분오열(四分五裂) 상태로 되돌아간다. 후연, 서연, 후진, 서진(西秦), 후량(後凉), 북위(北魏), 서량(西凉), 북량(北凉), 남량(南凉), 하(夏), 북연(北燕), 남연(南燕) 등 많은 나라들이 계속 일어나 분립하게 된다. 이런 국제정세의 변화는 고구려가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해갈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마침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소수림왕과 근구수왕이 소수림왕 14년(384) 11월과 4월에 함께 돌아가고 고국양왕과 침류왕이 등극하여 새 시대를 열어간다. 백제는 그해 7월에 근구수왕이 돌아가고 침류왕이 등극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고부 겸 등극사(告訃兼登極使)를 동진(東晋)에 보내게 되는데, 9월에 이 사신 행차가 되돌아오는 배편으로 서역 승려인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불상과 불경을 가지고 옴으로써 백제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다.

 

동진은 그 전해에 비수에서 전진의 백만대군을 격파하여 국망의 위기를 모면하고 종주권을 지켜낸 것을 기념하기 위해 백제에 불교를 전해주었을 것이다. 이때 이미 도안의 제자인 혜원(慧遠, 335∼417년) 등이 동진으로 내려와서 중국화된 불교를 동진에 전면 확산시켰던 터였기 때문이다.

 

 

[ 광개토대왕의 웅비 ]

한편 고구려는 때를 놓치지 않고 고국양왕 2년(385) 6월에 4만 군사를 동원, 요동성과 현도성을 공격하여 이를 함락시킨 뒤 남녀 1만 명을 포로로 잡아온다. 전진의 토벌군과 싸우느라 정신 없던 후연왕 모용수는 모용족의 근거지인 요서 용성(龍城)을 아우인 대방왕(帶方王) 모용좌(慕容佐)에게 지키게 했는데, 모용좌가 요동성의 위급을 알고 사마(司馬) 학경(景)을 보내 이를 구원하고자 했으나 고구려군에게 대패함으로써 결국 요동성과 현도성이 고구려 수중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당황한 모용수는 아우 모용농(慕容農)에게 3만 군사를 주어 요동성과 현도성을 되찾게 하지만 이도 잠깐이었다. 고구려에서 광개토대왕(375∼413년)이란 영웅이 출현하여 17세 어린 나이로 즉위하고 나자(391년) 즉시 사방으로 영토 확장을 도모해 갔기 때문이다.

 

5월에 즉위한 광개토대왕은 다음해(392년) 7월에 백제를 공격하여 석현(石峴) 등 10성을 빼앗고, 9월에는 북쪽으로 글안을 공격하여 남녀 500명을 포로로 잡은 다음, 본국인으로서 글안에 붙잡혀 있던 백성 1만여 명을 구출해 돌아오며, 11월에는 다시 백제의 해상요새인 관미성(關彌城)을 7도(道)로 포위 공격하여 20일 만에 함락시켰다. 백제의 진사왕은 광개토대왕이 용병술에 능하다는 소식을 듣고 막아볼 생각도 못 하여 한강 이북의 모든 부락이 고구려 수중에 들어갔다.

 

광개토대왕은 서북지방으로 세력을 뻗어 가려면 우선 남쪽의 근심을 미리 막아야 하므로 이렇게 과감하게 백제를 정벌함으로써 그 기세를 꺾어놓았던 듯하다. 영락(永樂) 3년(393) 8월에 백제 아신왕의 장인인 진무(眞武)가 1만 군사를 거느리고 대규모 반격을 가하여 해상요새인 수곡성(水谷城) 등 빼앗긴 성들을 되찾으려 했을 때, 광개토대왕이 이를 가볍게 물리친 다음 평양에 9개 사찰을 건립하여 남진의 뜻을 분명히 한 것을 보아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광개토대왕은 영락 4년(394) 7월에도 수곡성 탈환을 위해 쳐들어온 백제군을 물리친 다음 8월에는 이 부근에 7개 성을 더 쌓아서 백제를 방비하게 했다. 또 영락 5년(395) 8월에 백제 좌장군 진무가 다시 대군을 거느리고 침공해오자 광개토대왕은 직접 7000군사를 거느리고 임진강가로 나가 이를 격파하니, 백제는 8000여 군사를 이 싸움에서 잃었다 한다.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영락 6년(396) 병진년에 왕이 직접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내려가서 백제 연안의 18개 성을 공격해 빼앗으니 백제왕이 할 수 없이 남녀 1000인과 가는 베 1000필을 바치며 광개토대왕에게 의지하여 이후에는 영원히 노예가 되겠다고 스스로 맹세하므로, (왕이) 백제 왕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인질로 잡아 회군했다고 한다. 또 이때까지 백제로부터 빼앗은 성이 58개이고 촌락은 700개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에 백제는 해상으로 연결돼 있던 왜국의 힘을 빌려 고구려의 남침을 견제하려고 영락 7년(397) 5월에 태자 전지(典支)를 왜국으로 보내 군사를 빌려오게 한다. 영락 9년(399) 8월에 백제가 왜군과 연합하여 고구려에 복수하려고 전국에서 군사와 군마를 크게 징발하니 백성들은 그 고역을 못 이겨 신라로 많이 달아났다.

 

백제는 호구가 크게 감소할 지경에 이르자 왜군으로 하여금 신라를 먼저 침공하게 하였던 모양이다. 다급해진 신라 내물왕은 사촌아우인 실성(實聖)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 구원을 요청한다. 광개토대왕은 즉각 평양으로 내려와 본영을 차린 뒤, 다음해인 10년(400)에 5만 군사를 보내 신라 국경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백제와 왜 연합군을 쓸어버린다.

 

 

[ 동시에 출현한 두 마리 용 ]

그런데 고구려에서 광개토대왕(375∼413년)과 같은 영웅이 태어날 당시에 내몽고 지역에 살던 선비족 탁발부(拓跋部)에서도 탁발규(拓跋珪, 371∼409년)라는 영웅이 출현한다. 광개토대왕보다 4살 위인 탁발규는 16세 때인 고국양왕 3년(386) 1월에 벌써 내몽고 화림격이 부근의 성락(盛樂)에서 대왕(代王) 위에 올랐고, 26세 때인 광개토대왕 영락(永樂) 6년(396) 7월에는 황제를 일컬으며 북위(北魏)를 건국한다.

 

이후 탁발규는 모용수(慕容垂, 326∼396년)가 재건한 후연을 계속 공략하여 영토 대부분을 빼앗으니, 후연은 영락 7년(397) 10월에 수도였던 중산(中山)까지 함락당한다. 결국 후연의 제2대 황제인 모용보(慕容寶, ?∼398년)는 선대의 고향인 요서의 용성(龍城)으로 쫓겨오게 되고, 여기서 그는 영락 8년(398) 10월에 외척인 난한(蘭汗)에게 피살당한다.

 

이에 그 아들 모용성(慕容盛, 373∼401년)이 난한을 죽이고 겨우 발해만 북부 일대의 요서지방을 차지하여 후연의 명맥을 잇게 된다. 또 이해 정월에는 모용수의 아우인 모용덕(慕容德, 338∼405년)이 지금의 하남성 활현(滑縣)인 활대(滑臺)에서 자립하여 남연(南燕)을 건국하고, 영락 10년(400)에는 현재 산동성 익도현(益都縣)인 광고(廣固)를 도읍지로 삼아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이렇게 북위에 의해 북중국 대부분의 영토를 빼앗긴 모용씨들은 동북쪽의 요서와 동쪽의 산동반도 약간씩을 차지한 채 각각 나뉘어 연나라의 명맥을 겨우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모용씨들의 세력이 극도로 약화돼 요서도 지키기 힘들게 된 틈을 타서 광개토대왕은 5만 군사를 남쪽으로 보내 백제와 왜의 연합군을 깨뜨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 광개토대왕은 후연의 허실(虛實)을 탐지하기 위해 1월에 사신을 보냈는데, 광개토대왕이 저들에게 보낸 문서가 매우 오만하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모용보의 아우인 표기대장군 모용희(慕容熙, 385∼407년)가 2월에 3만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와 요동 지방에 있던 신성(新城)과 남소성(南蘇城)을 함락하고 5000여 호의 백성을 요서로 옮겨간다.

 

이는 광개토대왕이 남벌(南伐)에 주력하기 위해 짐짓 틈을 내주었던 것인데, 모용성은 여기서 있는 힘을 모두 허비하고 다시 서북쪽 고막해(庫莫奚)까지 정벌하느라 인심을 잃고 만다. 결국 영락 11년(401) 8월에 좌장군 모용국(慕容國)과 전중(殿中)장군 진여(秦輿) 및 단찬(段讚) 등이 금위병(禁衛兵)을 거느리고 모용성을 습격하려다 발각돼 처행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후 처형된 자들의 자제들이 다시 밤중에 모용성을 습격해 중상을 입혀 죽게 만들었다. 그때 모용성의 나이는 29세밖에 되지 않았다. 이에 그의 막내 숙부인 모용희가 제위를 계승한다.

 

이렇게 후연이 내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자 광개토대왕은 5만 군사로 백제와 신라 및 왜를 완전 제압한 다음 서서히 공격 목표를 서쪽으로 바꿔나간다. 영락 12년(402)에 요하를 건너 숙군성(宿軍城)을 들이치니 후연의 평주(平州)자사 모용귀(慕容歸)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다음해(403) 11월에도 연나라를 쳐서 땅을 빼앗으니 후연 황제 모용희는 영락 15년(405) 1월에 대군을 거느리고 와 요동성을 공격했으나 워낙 방비가 삼엄하여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모용희는 영락 16년(406) 12월에도 고구려의 목저성(木底城)을 공격했지만 무수한 사상자만 낸 채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모용희는 모용보의 아들들을 모두 죽이는 등 악행을 저지르다 다음해인 영락 17년(407) 7월에 모용보의 양자인 고운(高雲, ?∼409년) 등에게 시해당하고 만다.

 

고운은 그의 조부 고화(高和)가 고구려 왕족으로서 무슨 이유에서인지 연나라에 와서 살게 되었고, 고운 역시 그곳에서 태어났던 모양이다. 그는 무예가 뛰어나 모용보가 태자로 있을 때 동궁시위로 들어가 모용보의 눈에 들어 양자가 되었다. 모용보는 자신의 성인 모용씨를 내려줄 정도로 고운을 무척 사랑했다. 이런 인연으로 고운은 모용희가 모용보의 아들들을 모두 살해하자 중위(中衛)장군 풍발(馮跋) 등과 함께 모용희를 제거했던 것이다. 이에 풍발 등은 고구려 왕손인 고운을 추대하여 천왕위(天王位)에 오르게 하니, 모용씨의 후연은 막을 내리고 고씨의 북연(北燕)이 개국하기에 이르렀다.

 

광개토대왕은 이 소식을 듣고 영락 18년(408) 3월에 사신을 보내 이를 축하했고, 고운도 시어사(侍御使) 이발(李拔)을 사신으로 보내 답례하였다. 고구려 왕족이 일시 만주대륙을 모두 장악했던 때의 일이다. 그러나 북연 천왕 고운은 등극한 지 불과 2년 만인 영락 19년(409) 10월에 총애하던 신하인 이반(離班)과 도인(桃仁)에게 시해당하고 만다. 이에 시중 풍발이 이들 흉인(凶人)을 처단하고 자립하여 북연의 대통을 이어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광개토대왕은 북연과 영토분쟁을 일으킬 수 없으므로 부득이 서쪽으로 향하던 말머리를 동쪽으로 돌렸다. 영락 19년(409) 7월에는 동쪽에 독산성(禿山城) 등 6성을 쌓고 평양의 백성들을 이주시킨 다음, 20년(410)에는 몸소 군대를 거느리고 동부여 정벌에 나서 64성 1400촌락을 공략하여 수중에 넣는다. 이로써 고구려 영토는 요하 이동의 흑룡강 상류 전역과 연해주 지방에 걸치는 만주대륙, 그리고 한강 이북의 한반도 중북부 지방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으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아직 황제를 일컬을 만큼 충분한 영토는 아니었는데 애석하게도 광개토대왕은 겨우 39세의 나이로 영락 23년(413) 10월에 갑자기 돌아가고 만다. 대륙으로 웅비하려던 동쪽의 용이 승천의 순간에 추락하고 만 것이다.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은 부왕인 영락대왕, 즉 광개토대왕에게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란 시호를 올리고 그 능을 전례없는 규모로 축조한다. 피라미드형의 7단 석축에 제3단의 상면을 바닥으로 삼아 석실을 경영한 구조인데, 하단의 한 변 길이가 30m이고 높이가 13.5m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이다(도판 1).

 

그리고 장수왕은 태왕의 평생 위업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높이 5.4m, 각 면 너비가 1.5m의 거대한 네모기둥 형태의 자연석을 다듬은 다음 사방 표면에 10여cm 크기의 글자로 비문을 가득 새겨놓았다(도판 2).

 

비석의 석질은 녹색을 띤 회색 응회암이다. 글씨체는 기본적으로 위예법(魏隸法)에 바탕을 두었으나 삐침을 극도로 자제하여 전한(前漢) 고예(古隸)의 질박웅경(質樸雄勁, 소박하고 씩씩하며 굳셈)한 필의(筆意)를 계승한 듯한데, 네모 반듯하고 근엄한 기풍이 고구려 특유의 미감을 실감케 한다(도판 3).

 

한편 서쪽 내몽고 지방에서 출현한 또 한 마리의 용인 북위 태조 탁발규는 영락 6년(396) 7월에 북중국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칭제건원(稱帝建元, 황제를 일컫고 연호를 세움)한 이래 2년 뒤인 398년 7월에는 수도를 내몽고 지방의 성락(盛樂)으로부터 만리장성 안의 평성(平城)으로 옮겨 본격적으로 북중국 통일의 기반을 마련했는데, 39세 때인 영락 19년(409)에 한식산(寒食散)을 잘못 복용해 정신분열 증세가 나타나는 바람에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자제하지 못하고 무고한 살생을 자행하다가 16세 난 둘째 아들 청하왕(淸河王) 소(紹)에게 시해당함으로써 그 역시 웅비의 날개를 접어야 했다. 동·서에서 출현한 두 마리 용이 각각 39세라는 젊은 나이에 갑자기 돌아가게 되니, 여의주를 놓고 직접 한판 승부를 다투는 기회는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 석가문(釋迦文) 불제자(佛弟子) 모용진(慕容鎭) ]

 1976년 12월8일 북한의 평안남도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동(德興洞)에서 배수로 공사를 하던 중에 봉토 석실 벽화 고분이 나왔다. 이에 북한 당국은 1977년 1월에서 2월에 걸친 혹한기에 이를 발굴하게 되었고, 그 결과는 1978년 11월21일자 일본 조일(朝日)신문의 보도로 남한 학자들에게 알려졌다. 그런데 이 덕흥리 고분에서도 안악 3호분, 즉 동수묘에서와 같이 먹으로 쓴 묘지명이 발견되었다(도판 4). 일본에서 1979년에 발간한 ‘조선화보(朝鮮畵報)’ 11월호에 실린 사진과 읽어놓은 문장을 토대로 앞뒤 문맥을 헤아려 복원해 보면 대강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장락군(長樂郡) 신도현(信都縣) 도향(都鄕) ○감리(○甘里) 석가문 불제자 모용씨(慕容氏) 진(鎭)은 벼슬하여 지위가 건위장군 차소대형 좌장군 용양장군 요동태수 사지절 동이교위 유주자사에 올랐는데, 진의 나이 77에 벼슬 살다가 돌아갔다. 영락 18년으로 해는 무신년인데, 12월 신유가 초하루인 25일 을유에 옥관을 옮기니 주공(周公)은 땅을 상보고 공자(孔子)는 날을 택하며 무왕(武王)은 때를 골라서 한번 잘 장사지내 보내게 한 뒤에 부(富)는 7세(世)에 미치고 자손이 번창하며 벼슬에 나가 날마다 승진하여 지위가 제후와 왕에 이르고 만 가지 공(功)을 쌓도록 하소서. 날마다 소와 양을 잡고 술과 과실, 쌀과 반찬은 다 쓸어버릴 수 없게 하며 아침마다 소금 된장으로 한 상 차려 먹게 하소서. 기록하고 난 뒷세상에 아무 탈 없이 머물러 살게 하소서(長樂郡 信都縣 都鄕 ○甘里, 釋迦文 佛弟子 慕容氏鎭, 仕位 建威將軍 次小大兄 左將軍 龍將軍 遼東太守 使持節 東夷校尉 幽州刺史, 鎭年七十七薨官. 以永樂十八年 太歲在戊申十二月辛酉朔卄五日乙酉, 成遷移玉柩, 周公相地, 孔子擇日, 武王選時, 歲使一良葬送之後, 富及七世, 子孫蕃昌, 仕官日遷, 位至侯王, 造藏萬功. 日煞牛羊, 酒果米餐, 不可盡掃, 旦食鹽 食一卓. 記之後世, 寓寄無故).”

 

돌아간 때가 영락 18년(408) 무신 12월25일이라 했으니, 고운이 북연의 천왕자리에 있으면서 요서 일대의 모용씨 근거지를 장악하고 있던 때였다. 이 해는 동진 안제(安帝) 의희(義熙) 4년에 해당하고, 북연은 정시(正始) 2년이었으며, 북위는 태조 천사(天) 5년에 해당했다. 그런데 이 묘지명에서는 동수 묘지와는 다르게 동진의 연호는 물론 기타 주변의 다른 나라 연호를 쓰지 않고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연호인 영락 연호를 쓰고 있다. 이미 광개토대왕이 독자 연호를 가지고 독립자세를 취하며 칭제(稱帝)의 꿈을 키워가고 있었던 상황을 짐작케 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영락 18년이 무신이라 하여 서기 408년임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광개토대왕 비문 내용의 기년(紀年)과 일치하니 영락 원년이 서기 391년이고, 이해에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것이 분명한 만큼 ‘삼국사기’ 광개토대왕 기년과는 1년의 오차가 있음을 재차 확인해 주고 있다.

 

봉토석실고분벽화분이라는 무덤 양식은 주인공의 신분을 중국계로 짐작할 수 있게 하는데, 주인공이 두 자의 성을 쓰는 복성(復姓)을 가지고 있고 그 벼슬 이력이 요동태수와 유주자사라는 고위직을 거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요서와 요동을 근거지로 나라를 일으켜 한때 북중국의 절반을 차지하고 천하를 다투던 모용씨 일족일 가능성이 높아 지워진 그의 성씨를 모용으로 복원해 보았다.

 

더구나 벽화 중에는 그가 유주자사로 있을 때 유주 관내의 여러 군 태수와 내사(內史) 등이 내방한 사실을 인물과 함께 기록하고 있어 그런 가능성을 더욱 높여준다. 그 내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분위장군 연군태수가 내조(來朝; 지방 관리가 임금을 뵙기 위해 대궐로 들어옴)했을 때(奮威將軍燕郡太守來朝時)’ ‘범양내사가 내조하여 주의 일을 의논할 때(范陽內史來朝論州時)’‘어양태수가 와서 주의 일을 논의할 때(魚陽太守來論州時)’ ‘상곡태수가 와서 조하(朝賀, 조정에 나아가 임금께 하례를 드림)할 때(上谷太守來朝賀時)’ ‘광녕태수가 와서 조하할 때(廣寗太守來朝賀時)’ ‘대군내사가 와서 조하할 때(代郡內史來朝賀時)’ 등이다.

 

사용한 어휘를 보면 주인공이 유주자사라고는 하지만 거의 국왕 행세를 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내조(來朝)니 조하(朝賀)니 하는 용어는 임금에게만 쓸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무덤의 주인공인 모용진이 언제 고구려로 왔던지는 기록이 없어 알 길이 없지만, 그가 광개토대왕에게 중용돼 차소형과 차대형이라는 재상직 벼슬을 받고 있는 것을 보면 늦춰 잡아도 고구려가 요동성을 연나라로부터 빼앗는 과정에 항복해왔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고국양왕 2년(385) 6월에 고구려가 요동과 현도성을 빼앗을 때 모용진의 나이는 벌써 54세의 노성기에 접어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측 사서(史書)에 등장하는 모용진(慕容鎭)이라는 인물도 있다. 그는 남연의 재상으로 남연에서 활동하다가 남연이 멸망하는 영락 20년(410)에 운명을 같이했다는 사실을 ‘진서(晋書)’ 권 127 모용덕(慕容德) 기(記)에서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남연의 모용진은 고구려에 와서 둘째 정승자리인 차대형(次大兄)의 지위까지 올랐다가 408년에 먼저 죽은 모용진과는 동명이인이라 해야 할 것이다.

 

어떻든 고구려에 온 모용진은 자신의 초상화와 생활장면(도판 5)을 무덤의 석실 벽면에 벽화로 남기면서 스스로를 ‘석가문 불제자’라 일컫고 있어 독실한 불교신자임을 표방하였다. 그런 그가 평양 부근에 무덤을 남겼다는 사실과 광개토대왕이 영락 3년(393) 8월에 평양에 9개소의 절을 짓게 하였다는 사실은 결코 무관하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 불교 공식 전래 이전의 흔적들 ]

 그렇다면 소수림왕 원년(372) 고구려에 불교가 공식 전래되기 이전에도 불교가 중국계 내투자(來投者, 도망온 사람)나 민간인들에 의해 이미 고구려에 전해져서 중국문화특구에 해당하는 평양 일대에서는 크게 신봉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런 사실을 밝혀보기 위해 중국측 기록들을 뒤져보니 우선 양(梁)나라 혜교(慧皎, 497∼554년)가 지은 중국 최초의 승사(僧史)인 ‘고승전(高僧傳)’에서 불교가 우리에게 처음 전해지던 시대와 관련해 우리 불교의 정황을 짐작케 해주는 몇 가지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가장 오래된 것이 권 4 축잠심(竺潛心, 286∼374년)전에 나오는 ‘고려도인(高麗道人)’의 기사이다. 지둔도림(支遁道林, 314∼366년)이 그와 친분이 있는 고려도인에게 축잠심을 소개하는 편지 내용 중에 바로 고려도인의 존재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도림의 졸년(卒年)이 366년이고 보면 그가 존숭하던 고려도인은 불교가 공식 전래되는 372년보다 훨씬 이전에 불교를 알고 출가했어야만 한다. 이미 당시 고승들이 알아줄 정도였다면 그의 출가 이력이 결코 짧지 않았을 터이니 늦어도 4세기 중반경에는 불교가 고구려 사람들에게 전파돼 나간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렇다면 고려도인은 불도징(佛圖澄, 232∼348년)과 석도안(釋道安, 314∼385년) 사제간의 법맥을 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큰바, 순도(順道)나 아도(阿道) 중 한 사람이 바로 그일 수도 있을 듯하다.

 

다음 민간차원에서 고구려에 불교를 처음 전파하였다는 석담시(釋曇始)의 기록이 ‘고승전’ 권 10 신이(神異) 하(下) 담시전(曇始傳)에 실려 있다.

 

“담시가 동진(東晋)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376∼396년) 말년에 경(經)·율(律) 수십 부를 가지고 요동으로 가서 삼승법(三乘法; 聲聞乘, 緣覺乘, 菩薩乘을 일컫는 말. 성문승과 연각승은 소승에 해당하고 보살승은 대승에 해당한다)으로 선화(宣化; 널리 펼쳐 교화함)하니 이것이 고구려가 도를 듣는 시초가 되었다.”

 

이 시기는 대체로 고구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391∼413년) 초년에 해당하여, 고구려가 비로소 요동성을 완전히 장악한 사실(385년)과 일치하기도 한다. 그러나 담시전의 내용을 계속 읽어가노라면, 담시란 분이 ‘발이 얼굴보다 희고 맨발로 다녀도 진흙이 묻지 않았다’는 백족도인(白足道人)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夏)의 임금인 혁련발발(赫連勃勃, 자는 屈381∼425년)이 장안을 함락하고(418년) 수많은 사람들을 목베어 죽일 때 담시도 칼을 맞았으나 다치지 않으므로 혁련발발이 스스로 보검을 뽑아 쳤으나 해칠 수 없어 사죄하고 도륙을 그쳤다고 한다. 담시는 또 이러한 신통력을 북위(北魏) 태무제(太武帝) 폐불 사건(446∼452년)에도 거듭 써서, 폐불의 장본인인 태무제를 참회시키고 이를 사주한 최호(崔浩)와 구겸지(寇謙之)를 모두 악병과 주문(誅門, 한가족을 모두 죽임)으로 응징하였다는 내용도 있다.

 

그런데 실제 백족도인이 활동하였던 나라인 북위의 정사 ‘위서(魏書)’ 권 114 석로지(釋老志)에서는 백족도인을 백각사(白脚師)라 하고 그 이름을 혜시(惠始)라 하였으며 혁련발발과의 일을 그대로 적고 있어서, 담시와 혜시가 동일 인물인 것을 알게 해준다. 아마 어느 한곳에서 오자를 낸 것이 이와 같이 별개 인명을 만들어 놓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두 기사를 자세히 대조해 보니 ‘고승전’ 기록은 태무제 폐불시 기록이 더 첨가되고, 그 출신이 관중(關中, 長安 부근)이라 하였으며, 돌아간 바를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에 반하여 석로지 기록은 다음과 같다. 성이 장(張)씨이고 본향은 산동성 청하(淸河)인데, 구마라습(鳩摩羅什, Kumrajiva, 343∼413년)이 장안에서 새로 경전을 번역해낸다는 소문을 듣고서는 그를 찾아뵙고 경전을 익히며 좌선에 힘쓴 결과 혁련발발에게 그런 신행(神行)을 보일 수 있었다. 그는 하(夏)나라가 북위 태무제에게 멸망하자(428년) 태무제를 좇아 위나라 수도인 평성(平城)으로 와서 태무제의 존숭을 받다가 태연(太延, 435∼439년)연간에 수도 안에 있는 팔각사(八角寺)에서 앉은 채로 열반하였다. 그 시신은 전신사리(全身舍利)가 돼 탑으로 만들어 세웠다. 그러나 10년 만인 태평진군(太平眞君) 6년(445)에 성 안에 무덤을 둘 수 없다는 법제 때문에 남교(南郊)로 옮기려고 보니 시신이 조금도 변함이 없어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였으며, 중서감(中書監) 고윤(高允)은 그의 전기를 지어 유덕을 칭송하였다. 그 무덤 위에 돌로 정사(精舍)를 만들어 세우고 그 형상을 그려놓았었는데 폐불시에도 훼손되지 않고 홀로 온전하였다.

 

이로 보면 석로지의 기록이 매우 자세하고 합리적인 데 반해 ‘고승전’의 기록은 자못 모호하며 신비로워 신이(神異)로 윤색한 느낌이 강하게 든다. 따라서 위수(魏收, 505∼572년)가 지은 ‘위서’ 석로지의 기록이 사실에 가깝다 할 것인데, 이는 ‘위서’가 정사(正史)일 뿐만 아니라 고윤의 ‘혜시전’을 직접 보고 약술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구려 전도 사실을 기록하고 있지 않은 석로지의 내용에 좇아서 혜시의 고구려 전도 사실을 윤색으로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은 신이승 혜시의 신행(神行)과는 별 관계가 없는 것이니, 오히려 석로지에서 생략된 내용이었으리라고 보아도 큰 무리는 없지 않을까 생각된다.

 

따라서 고구려 요동성 교화의 시조라는 담시는 혜시(惠始)라고 그 오자를 바로잡아야 하겠다. ‘고승전’을 그대로 추종한 최치원(崔致遠, 857∼?)의 봉암사 지증대사(智證大師) 비문의 내용이나 각훈(覺訓)이 지은 ‘해동고승전(1215년)’ 권 1 담시전의 내용과 이름자는 마땅히 재고되어야 할 것 같다.

 

어떻든 혜시가 구마라습 문하에 들어가 그의 번역인 신경(新經)을 바로 가지고 와서 고구려에 전파한 까닭에, 본래 도안 일파의 하북불교(河北佛敎)에만 연결돼 있던 고구려 불교는 이제 국제성이 강하며 가장 풍부하고 세련된 교학체계를 갖춘 장안파 불교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놓임으로써 장차 다양한 발전을 약속받게 되었다. 그 결과 얼마 뒤에 요동성에서는 남방 신삼론종(新三論宗)의 시조가 되는 승랑(僧朗) 같은 대인물이배출돼 중국 삼론종의 기틀을 다져 놓기도 한다.

 

 

[ 내실(內實)을 다지는 장수왕 ]

광개토대왕이 요서를 제외한 만주 전역과 한강 이북의 한반도 중북부 전역으로 국토를 확장해 놓고 영락 23년(413) 계축 10월에 불과 39세로 돌아가자 태자 거련(巨連)이 20세로 왕위를 계승한다. 바로 이분이 98세의 장수를 누리며 재위 79년이라는 긴 기간에 고구려를 안정적으로 다스려 나간 장수왕이다. 현명한 장수왕은 부왕이 넓혀 놓은 영토를 온전히 지키기 위해 즉위 후 10여년 동안은 정복지역을 안정시키는 데 심혈을 기울인 듯하다. 그래서 일체의 대외관계도 자제한다.

 

그런데 북중국의 강국으로 부상한 북위에서 태조를 계승한 태종 명원제(明元帝, 392∼423년)가 역시 한식산(寒食散)에 중독돼 32세에 폐인이 되어 돌아가고, 태자인 세조 태무제(太武帝, 408∼452년)가 장수왕 11년(423) 11월에 16세로 등극하여 그 다음해부터 영토 확장에 혈안이 돼 사방을 침공한다. 이에 장수왕은 그 실상을 탐지하여 대비하려는 듯 13년(425)에 처음으로 북위에 사신을 보낸다. 사신을 통해 북위 태무제의 통일 야욕을 확인한 장수왕은 서북으로의 진출이 곤란할 뿐만 아니라 저들의 침략을 각오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던 듯하다.

 

그리하여 장수왕은 한사군 설치 후 422년 동안 한제국의 식민통치 중심 거점으로 한의 수도권 문화가 그대로 이식되어 당시 중국문화권 내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문화를 누리고 있던 평양으로 과감하게 천도할 계획을 세운다. 사실 고구려가 낙랑을 몰아내고 평양을 차지한 지 110여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평양으로 천도해 가지 않은 것은 서북 진출의 기회를 노렸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수준 높은 문화특구로 천도해 들어갔다가 한문화에 문화적으로 역정복당할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고구려 집권층이 요동 일대를 정복하면서 중국문화에 대해 상당한 자신감을 얻은 후 평양으로의 천도 결정을 내렸던 듯하다.

 

드디어 장수왕 15년(427)에 고구려는 평양으로 천도해 간다. 이로써 장수왕의 계산은 맞아떨어져, 북위가 존재하는 동안, 즉 남북조시대에 있어서는 고구려가 중국의 침략을 끝내 받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문화적 역정복에 대한 자신감은 무너져 평양에 뿌리내리고 있던, 수준 높은 한문화에게 끝내 역정복당하고 말았던 듯하다. 이는 광개토대왕릉과 같은 고구려 전통 능묘제도가 평양 천도 이후에는 중국 능묘제도인 봉토석실벽화분으로 바뀐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어떻든 동북의 강국 고구려가 북위와의 충돌을 피해 수도를 남쪽으로 옮겨 서북 진출에 뜻이 없음을 보이자, 태무제는 마음놓고 북중국 서쪽 혁련(赫連)씨의 대하(大夏)를 공격하여 장수왕 16년(428) 2월에는 대하 황제 혁련창(赫連昌)을 사로잡았고 장수왕 19년(431) 6월에는 대하의 부흥군까지 완전 토멸하여 대하를 멸망시킨다. 그러고 나서 고구려와의 사이에 끼어 있는 동쪽의 북연으로 눈길을 돌려 이를 정벌하려 한다.

 

때마침 북연의 사정은 좋지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고운의 뒤를 이어 자립한 풍발(馮跋, 409∼430년)이 재위 20년 만인 장수왕 17년(429)에 중병에 걸리는데 후궁 송씨가 자신의 소생 왕자로 하여금 대통을 잇게 하려고 태자를 비롯한 정궁 소생 왕자들의 출입을 차단한다. 그러자 국정을 총괄하고 있던 풍발의 막내 아우인 풍홍(馮弘)이 송씨를 견제하기 위해 장수왕 18년(430) 9월에 군사를 거느리고 대내에 진입한다. 이에 풍발은 놀라서 죽고 마는데, 풍홍은 태자를 비롯하여 풍발의 아들 100여명을 죽이고 자립한다.

 

이에 북위 태무제는 장수왕 20년(432) 6월 풍홍을 응징하는 대군을 일으켜 몸소 정벌에 나선다. 여기서 태무제는 요서지방에 있던 영구(營丘), 성주(成周), 요동, 낙랑, 대방, 현도 등 6성을 함락하고 3만여 가구를 포로로 잡아 9월에 회군한다. 그런데 풍홍도 집안이 복잡하여 정비인 왕(王)씨를 폐출하고 후궁 모용씨를 정비로 삼았던 까닭에 정비 소생인 세자 숭(崇)도 역시 폐위돼 요서의 변방인 비여(肥如)로 쫓겨나 그곳을 지키게 되었고 모용씨 소생의 왕인(王仁)이 세자가 되었다.

 

이런 형편에 태무제가 침략해와 전국을 유린하고 돌아가니 풍홍의 정비 소생 왕자들인 광평공(廣平公) 낭(朗)과 낙릉공(樂陵公) 막(邈)이 의논하기를 ‘대운(大運)의 소재는 분명하여 집안과 나라는 이미 망하였는데 또 모용씨의 참소로 장차 화가 미쳐올 것이다’라 하고, 비여로 달아나 같은 어머니 소생의 형인 숭으로 하여금 북위에 항복하기를 권한다.

 

숭이 아우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북위에 항복하기로 뜻을 굳히자 12월에 막내인 막이 형 숭의 뜻을 가지고 북위로 가서 태무제에게 이를 전한다. 태무제는 크게 반가워하며 겸홍로(兼鴻盧) 이계(李繼)를 보내 풍숭을 시중(侍中) 도독유평이주동이제군사(都督幽平二州東夷諸軍事) 거기장군(車騎將軍) 영호동이교위(領護東夷校尉) 유평이주목(幽平二州牧) 요서왕(遼西王)에 봉하고, 요서 10군을 식읍(食邑)으로 내려주어 사실상 북연의 전체 통치권을 위임한다.

 

이에 풍홍은 장군 봉우(封羽)를 보내 요서를 포위 공격하게 하지만 태무제의 구원군이 밀려와서 도리어 봉우마저 항복하니 3000여 가구만 포로가 되고 말았다. 다급해진 풍홍은 막내공주를 태무제의 후궁으로 보내고 세자 왕인을 인질로 보내기로 하여 겨우 강화를 맺는데 차마 세자를 보낼 수 없어 고구려에 도움을 청한다.

 

장수왕은 이를 북연의 국세(國勢)를 흡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한다. 장수왕은 우선 북위를 안심시키기 위해 23년(435) 6월에 북위로 사신을 보내 많은 공물을 선사하고 북위 역대 황제들의 이름자를 물었다. 피휘(避諱, 제왕이나 선조의 이름자를 공경하는 뜻으로 피하여 쓰지 않음)하기 위해서라는 이유에서였다. 그 정성에 감복한 태무제는 북위의 황제 세계와 이름자를 적어주게 하고 원외산기시랑(員外散騎侍郞) 이오(李敖)를 사신으로 보내 장수왕을 도독요해제군사정동장군영호동이중랑장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 (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郞將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으로 책봉한다.

 

이렇게 북위를 안심시킨 장수왕은 24년(436) 4월 북위의 연나라 침공이 시작되자 장군 갈로(葛盧)와 맹광(孟光)으로 하여금 수만 군사를 거느리고 청군하러 온 북연 상서(尙書) 양이(陽伊)를 따라 은밀하게 북연 수도 화룡성(和龍城)으로 가서 풍홍을 맞이해 오게 한다. 이에 고구려 군사들은 화룡성에 이르러 북연의 창고에서 새 옷과 새 병장기를 꺼내 새롭게 무장하고, 화룡성의 일체 재물과 백성들을 챙긴 다음, 화룡성 안의 궁전을 비롯한 모든 건물에 불지르고 5월에 고구려로 돌아온다. 여자와 아이들은 가운데 있게 하고 양이 등은 북연의 정병을 이끌고 좌우를 둘러싸며 갈로와 맹광은 고구려 군사를 이끌고 앞뒤를 호위하는 네모꼴 형태로 행진해 오는데 그 길이가 80리에 이르렀다 한다.

 

이들 일행이 요하를 건너 고구려 국경 안으로 들어오자 장수왕은 이들을 우선 요하의 하구 부근에 있는 지금의 요령성 개평현(蓋平縣)인 평곽(平郭)에 머무르게 한다. 그리고 사신을 보내 ‘용성왕 풍군(馮君)이 이에 들로 나왔으니 군사와 말이 피곤하겠구려’라고 인사했다 한다. 이에 풍홍은 부끄럽고 화가 나서 황제의 행세로 응대했다 하는데, 본래 풍홍이 고구려를 무시하여 이곳에 피난해 와 있으면서도 형정(刑政)과 상벌(賞罰)을 제 나라에서처럼 행하려 하고 남조 송(宋)에 기별하여 그곳으로 갈 뜻을 밝힌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장수왕은 풍홍 일행을 남조 송과 연결되는 바닷길에서 멀리 떼어놓기 위해 우선 지금의 요령성 심양(瀋陽) 부근인 북풍(北豊)으로 옮기게 한다. 그리고 시중드는 사람을 빼앗고 세자 왕인을 인질로 삼으니, 풍홍이 이를 원통히 여겨 남조 송에 밀사를 보내 군대가 와서 데려가 주기를 청한다.

 

남조 송 문제가 왕백구(王白駒) 등을 사신으로 보내 고구려로 하여금 풍홍 일행을 호송해 보내기를 청하자, 장수왕은 26년(438) 3월에 장군 손수(孫漱)와 고구(高仇)를 보내어 북평에서 풍홍을 죽여버리도록 한다. 이에 왕백구는 거느리고 있던 7000군사로 고구려군을 공격하여 장군 고구를 살해하고 손수를 사로잡는다. 장수왕은 즉각 대군을 동원하여 송군을 격파한 뒤, 백구 등이 마음대로 살육을 자행했다는 죄목으로 사신 편에 이를 묶어 보내며 본국에서 다스려주기를 청하는 외교수완을 발휘한다.

 

송은 이미 지나간 일로 고구려와 적대관계를 맺는 것이 이롭지 않다고 생각하여 백구 등을 고구려가 원하는 대로 옥에 가두었다가 얼마 뒤에 풀어주는 것으로 이 일을 매듭짓게 되니, 풍홍이 이끌고 온 북연의 국세(國勢)는 고스란히 고구려에 흡수되고 말았다.

 

이로부터 고구려의 국력은 더욱 고강(高强)해져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돼버린 북위 태무제마저 고구려 정벌을 단념할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천하제패의 야망을 가진 태무제는 고구려의 배신에 발을 굴렀으나 그의 참모인 낙평왕(樂平王) 비(丕)가 극구 만류해 정벌을 포기하고 말았던 것이다. 태무제는 울분을 풀기 위해 장수왕 27년(439) 7월에 서쪽으로 북량(北凉) 정벌에 나서 9월에 북량을 멸망시킴으로써 북중국 통일을 완성한다.

 

 

[ 제해권을 빼앗긴 해상왕국 ]

백제의 지배층은 본래 압록강 유역을 근거지로 하여 해상활동을 하던 졸본부여 계통의 해양세력이었다. 주몽이 이들의 도움으로 고구려를 건국했던 것인데 북부여로부터 유리왕자가 찾아오자, 주몽과 졸본부여 왕의 제2공주 사이에서 출생한 비류(沸流)와 온조(溫祚)가 오간(烏干) 마려(馬黎) 등 10명의 신하와 따르는 백성을 데리고 그 모후와 함께 남쪽으로 바다를 따라 내려와 강화만을 거점으로 삼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지금의 서울인 위례성에 도읍하여 백제를 건국했던 것이다.

 

사실 강화도와 교동도의 북쪽을 휘감아돌아 서해바다로 들어가는 조강(祖江)은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의 물머리가 합쳐져서 이루어진 강이다. 이 조강의 물줄기를 따라가면 한반도 중부권 거의 전지역으로 이어지므로, 이곳은 한반도의 심장과 같은 곳이었다. 백제가 이곳 조강을 차지하여 해상세력의 거점을 삼았다는 것은 곧 한반도의 심장을 장악했다는 의미이니, 백제가 이곳을 중심으로 해양강국으로 성장해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실제 백제는 한반도의 서남해안을 장악하고 제주도와 대마도를 거쳐 일본 열도에까지 세력을 펼쳐 한반도 주변 바다의 제해권을 장악해갔던 듯하다.

 

북중국의 황하는 황토의 침전에 따라 하류로 내려올수록 강바닥이 높아져서 배가 다닐 수 없으므로 황하 하구에서는 일찍이 해상세력이 발달할 수 없었다. 반면 양자강은 수심이 깊고 주변에 호수가 많아 일찍부터 배 부리는 기술이 발달하여 해상세력이 성장할 수 있었다. 즉 중국에서는 양자강 하구를 중심으로 하는 남중국 해안이 해상세력의 거점이 되고 있었다.

 

이에 백제의 해상세력은 자연 남중국 해양세력과 제해권을 다투면서 연결을 맺게 되는데, 중국 대륙이 남북조로 나뉘면서 남조에서 해상세력을 적극 지원하자 백제의 해상세력이 상대적으로 위축되는 상황이 전개된다. 설상가상으로 고구려가 낙랑과 대방을 아우르자 본래 그들의 세력기반이었던 압록강 일대의 해상세력이 대동강 하구의 남포만과 황해도 옹진반도까지 밀고 내려오고 광개토대왕 시기에는 요하 하구인 요동만 일대까지 장악하니, 백제의 수군세력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백제는 할 수 없이 그들의 연결세력이던 왜군을 끌어들여 고구려와 일전을 벌였던 것인데, 광개토대왕의 수군에게 옹진반도를 지키는 요해처였던 수곡성(水谷城)을 빼앗기는 바람에 강화만이 항상 고구려 수군에게 위협받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여 남진의 뜻을 분명하게 표방하고 북연의 국세를 흡수하여 엄청난 강국으로 부상하니 백제의 위기감은 극도로 고조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백제의 개로왕(재위 455∼474년)은 즉위하고 나자 남조 송과의 관계를 더욱 긴밀히 하여 해상세력을 키워가기 위해 4년(458)에 관군장군(冠軍將軍) 우현왕(右賢王) 여기(餘紀) 및 정로장군(征虜將軍) 좌현왕(左賢王) 여곤(餘昆) 등 11인에게 송나라 관직을 내려줄 것을 청하여 허락받는다. 이는 송나라 연안에서 활동할 때 이들의 신분을 보장받기 위한 예비조처였을 것이다. 그리고 왜군의 활동을 합법화하기 위해 송으로 하여금 왜국왕을 사지절(使持節) 도독왜신라임나라가라진한모한육국제군사(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摹韓六國諸軍事) 안동(安東)장군 왜국왕을 봉하게 한다(‘宋書’ 권 97 倭國傳).

 

백제가 이와 같이 남조 송과 밀착돼 가자 고구려도 송과의 관계를 긴밀하게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고구려의 주축이 해양세력이 아니었던 만큼 그 관계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장수왕은 북연의 흡수를 둘러싸고 국교가 단절되어 있던 북위와 국교를 재개한다. 태무제가 돌아가고 난 뒤 고종 문성제(440∼465년)가 등극하여 10년이 지난 장수왕 50년(462) 3월에 사신을 보냈던 것이다. 북위도 이제는 정복전쟁을 끝마친 마당에 굳이 고구려를 적대시할 필요가 없었을 뿐더러, 고구려가 남조 송과 비길 만한 강국이 되었으므로 오히려 대국으로 깍듯이 예우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고구려와 북위는 급속도로 밀착돼 백제와 왜, 남조 송으로 이어지는 남방세력을 견제하려 든다.

 

그러자 백제 개로왕은 장수왕 60년(472)에 북위로 사신을 보내 고구려의 강성과 침략상을 과장하여 알리며 고구려를 정벌해 주도록 요청한다. 북위 문성제는 지금 중하(中夏)가 통일돼 나라에 근심이 없고 고구려 역시 뜻을 거스르지 않으니 정벌할 이유가 없다며 이를 거절한다. 그리고 사신 소안(邵安)을 백제 사신과 함께 보내며 고구려를 거쳐가게 한다.

 

장수왕은 개로왕과 원수를 진 일이 있어서 통과시킬 수 없다고 하며 소안 일행을 되돌려 보내는데, 이때 벌써 개로왕을 응징하려는 결심을 굳힌 듯하다. 그래서 승려인 도림(道琳)을 간첩으로 보내어 백제의 틈새를 엿보게 한 다음 장수왕 63년(475) 9월에 3만 군사를 동원하여 수륙 양면으로 일시에 진격한다. 고구려군은 위례성을 사방으로 포위하고 화공(火攻)으로 성문을 태운 다음 성 안으로 쳐들어가 겨우 수십기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달아나는 개로왕을 잡아다가 아단성으로 끌고가 죽여버린다.

 

그런데 백제가 고구려의 침공을 예측하여 이미 여러 방면으로 이를 모면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승려 도림의 간첩행위로 개로왕이 토목사업을 벌이다 국력이 고갈돼 이처럼 허무하게 멸망하였다는 ‘삼국사기’ 권 25 개로왕 본기의 내용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을 듯하다. 토목사업을 벌였다면 오히려 성곽의 보수 등 전쟁 대비를 위한 것이었을 듯하다.

 

다만 3만 군사에게 일시에 포위되었다는 사실이 납득하기 힘든 대목인데, 아마 개로왕이 믿는 구석이 있어서 방심하다가 이와 같은 실수를 저질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개로왕은 조강을 지키고 있는 강화만의 수군이 결코 깨지지 않으리라 믿으면서 고구려 육군의 저지에만 신경을 쓰다가 뜻밖에 강화만의 막강한 수군선단이 고구려 수군에게 격파당함으로써 조강을 거슬러 온 고구려 수군에게 허를 찔려 어이없는 참패를 당했을 듯하다. 성문을 나서서 서쪽으로 달아나려 했다는 것도 선단의 괴멸 소식을 접하지 못한 상황에서, 선단이 있는 곳으로 피란하려는 계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때 태자인 문주왕은 신라로 구원병을 청하러 가서 1만 군사를 빌려 와보니 벌써 국도는 고구려 수중에 넘어가 있었다 한다. 강화만을 지키던 백제 수군 선단이 완전 괴멸하여 조강과 위례성이 고구려의 수중으로 넘어갔던 것이다. 이에 고구려는 한강의 물길을 따라 남한강 상류지역까지 진격하여 여주, 충주, 단양 등을 차례로 손에 넣고 백두대간을 넘는 길목인 죽령을 넘어 신라지역까지 넘보게 된다.

 

이렇게 백제는 국가존망의 위기에 몰리게 되자 각 지방에 흩어져 있던 수군세력을 모아 결사적으로 아산만을 지켜내려 한다. 이곳에서 밀리면 더 버틸 곳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산만 배후 깊숙이 자리잡은 금강 상류의 공주가 피란 수도로는 가장 적합한 곳이었으므로 금강을 거슬러 올라 이곳에 도읍을 정하게 된다. 그러고는 아산만을 수군 선단의 재건 중심기지로 삼아 은밀하고 신속하게 선단을 재건해내는 작업에 착수한다.

 

한편 해상세력으로 연결돼 있는 남조세력의 핵심인 백제 수군세력이 고구려 선단에게 무참히 격파돼 강화만과 한강 이북의 영토를 모두 잃게 되자 남북의 세력균형이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왜국은 장수왕 66년(478)에 송 순제(順帝)에게 고구려 정벌을 제의하지만, 송나라 형편도 신하에게 제위를 찬탈당하는 어려운 지경에 처해 있었으므로 실현되지 못하고 만다.

 

한편 발해만 등지에 흩어져 있던 백제 해상세력들은 본국 주력 선단이 괴멸하자 각처에서 반격을 시도하는 듯하니, 장수왕 65년(477)경에는 송화강 일대와 연해주 일대에 걸쳐 살던 물길(勿吉)을 움직여 북위 효문제(467∼499년)에게 고구려 정벌 여부를 타진하게 한다. 그러나 효문제는 그의 황후 고(高)씨가 고구려계였으므로 고구려에 대해서는 매우 우호적이어서 서로 침략하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고 타일러 보낸다.

 

이로부터 북위 효문제는 고구려를 더욱 우대하여 남조 제(齊)나라 사신과 고구려 사신을 동렬에 앉게 하고 거처하는 집도 차등이 없게 하니(‘資治通鑑’ 권 136 齊紀 2 世祖紀上 및 ‘南齊書’ 권58 고구려전), 백제는 동성왕(東城王) 10년(488)에 북위를 침공하여 진(晋)·평(平) 2군을 빼앗는다. 이에 북위는 기병(騎兵) 수십만을 보내 이를 물리치려다가 도리어 참패를 당하였다고 한다(‘資治通鑑’ 권 136 齊紀 2 世祖上之下 및 ‘南齊書’ 권 58 百濟傳, ‘三國史記’ 권26 百濟本紀 東城王 10年條).

 

   

[ 예산(禮山) 사면석불(四面石佛) ]

이후에 백제는 서해 북부의 제해권 탈환을 위해 고구려와 끊임없는 각축전을 벌이다 결국 반세기 만인 무령왕(武寧王, 461∼523년) 21년(521)에 비로소 완전히 이를 되찾는 듯하다. 무령왕이 양(梁) 무제(武帝)에게 사신을 보내면서 “여러번 고구려를 격파하여 비로소 더불어 통호(通好)하게 되었으며 다시 강국이 되었다”라고 한 말에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고구려로부터 서해 북부의 제해권을 회복하여 해양강국의 면모를 되찾아놓은 무령왕의 왕릉이 1971년 7월에 발견되고, 능 안에서 출토된 <묘지명>(도판 6)으로 무령왕의 생존연대가 정확히 밝혀졌다. 세로 35cm, 가로 41.5cm, 두께 5cm의 석판에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영동(寧東) 대장군 백제 사마(斯麻)왕이 나이 62세로 계묘년(523) 5월 병술이 초하루인 7일 임진에 돌아가셨다. 을사(525)년 8월 계유가 초하루인 12일 갑신에 등관(登冠)대묘에 편안히 모시고 묘지를 왼쪽과 같이 써서 세운다(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 年六十二歲, 癸卯年五月丙申朔七日壬辰崩到. 乙巳年八月癸酉朔十二日甲申, 安登冠大墓, 立志如左).”

 

사마는 무령왕의 이름이고 영동대장군은 양 무제가 무령왕을 백제왕으로 인정하며 더 보탠 양나라 벼슬이름이다. 이 내용은 ‘일본서기(日本書紀)’ 권 14에서 웅략천황(雄略天皇) 5년(461) 6월1일에 사마왕이 탄생했다는 기록과 일치하여 더욱 신기한데, ‘일본서기’ 권16 무열(武烈)천황 4년(502)조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겨 ‘삼국사기’ 백제본기 중 무령왕의 계보와는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백제신찬(百濟新撰)에 이르기를 말다(末多, 삼국사기에서는 牟大 혹은 麻大라 한다 하였다)왕이 무도하여 백성을 포악하게 대하니 나라사람들이 함께 제거하고 무령왕을 세웠다. 이는 곤지(琨支, 삼국사기에서는 昆支라 하였다). 왕자의 아들이니 곧 말다왕의 배다른 형이다. 곤지가 왜국으로 가는데 축자(築紫)의 섬에 이르렀을 때 사마왕을 낳았다. 섬에서 되돌려 보냈으나 서울에 이르지 못하고 섬에서 낳았다 하여 그런 까닭으로 사마(斯麻 ; 섬이란 의미의 백제어)라 이름지었다(百濟新撰云, 末多王無道, 暴虐百姓, 國人共除, 武寧王立. 諱斯麻王, 是琨支王子之子, 則末多王異母兄也. 琨支向倭, 時至筑紫嶋, 生斯麻王. 自嶋還送, 不至於京, 産於嶋, 故因名焉).”

 

‘삼국사기’ 무령왕 본기에서는 무령왕이 가림(加林)성주 백가(加)가 보낸 자객에게 시해된 동성왕의 둘째 왕자라 하였는데, 이곳에서는 오히려 동성왕의 배다른 형이라 하고 있다. 이때 무령왕의 나이가 41세인 점을 감안하면 이 기사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또 앞서 든 ‘일본서기’ 권 14 웅략(雄略)천황기에서는 곤지왕자가 개로왕의 왕제(王弟)로 개로왕 당시 군사권을 총괄하던 군군(軍君)이었는데, 개로왕이 임신시킨 후궁을 산달이 가까운 시기에 하사받아 함께 왜국으로 가던 중 6월1일 축자의 각라도(各羅島)에 이르러 무령왕을 출산하였다 하고 있다.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면 무령왕은 개로왕의 왕자로 숙부인 곤지왕자의 양자가 된 인물이다. 그러니 곤지왕자의 적자이던 동성왕의 배다른 형이라고 볼 수도 있는 관계였다. 무령왕은 이렇게 복잡한 출생 배경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어떻든 무령왕은 해양왕국 백제의 최고 사령관인 군군 곤지왕자의 아들로 항해중에 왜국 섬에서 탄생한 왕자였으니 나면서부터 바다와 인연이 깊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유년시절에 벌써 대선에 올라타 선단을 지휘하는 훈련을 받고 있었을 터인데, 그가 한창 감수성이 예민해가던 15세 때에 대참상을 겪게 된다. 대양을 누비던 강화만의 백제선단이 고구려 수군에 의해 모두 박살나고, 백부이자 부왕인 개로왕이 고구려의 앞잡이가 된 재증걸루(再曾桀婁)나 고이만년(古萬年) 등 반역자들에게 무참히 시해당하는 참상을 목격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소년왕자가 가지는 통한과 적개심이 어떠했겠는가.

 

무령왕은 등극하자마자 고구려 정벌에 적극성을 보여 한강 일대의 고토(故土) 회복에 열을 올리는 한편, 제해권 탈환에 심혈을 기울인다. 그래서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의 강머리가 합쳐지는 조강구(祖江口), 즉 강화만 일대에 포진한 고구려 수군 선단의 주력부대를 깨기 위해 내해가 깊숙이 파고든 내포의 큰물현(今勿縣, 현재 예산군 고덕면 봉산면 일대)에 수군 본영을 설치하고 전선(戰船) 건조에 국력을 기울였던 듯하다. 가야산 연맥에 울창하게 들어 찬 나무숲과 물산이 풍부한 내포평야가 그런 일을 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결국 무령왕은 끝내 그 21년(521)에는 강화만의 고구려 선단을 깨고 제해권을 되찾은 다음 신라사절단까지 데리고 당당하게 양나라로 찾아가서 동방 해양왕국의 재건을 과시하였던 것이다. ‘양서(梁書)’ 권 54 신라전(新羅傳)에 기록된 다음 내용이 이를 증명한다.

 

“보통(普通) 2년(521)에 성이 모(某), 이름이 진(秦)인 왕이 비로소 사신을 보냈는데, 사신은 백제를 따라와서 방물(方物, 지방 특산물)을 바쳤다.”

 

또 무령왕은 고구려에게 빼앗겼던 제해권(制海權)을 되찾은 다음 실지 회복의 꿈에 부풀어, 다음해인 22년(522) 9월에는 호산(狐山, 지금의 예산)벌에서 사냥대회를 크게 열고 23년 2월에는 옛 수도가 있던 한성을 찾아가서 한성 이북 주군의 15세 이상 백성들을 징발하여 쌍현성(雙峴城)을 쌓게 하는 등 적극적인 북진정책을 감행해 나간다. 그러나 이런 강행군이 62세의 노인에게는 무리였던지 3월에 한성에서 공주로 돌아와 바로 병석에 눕게 되어 5월7일에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이에 태자인 명농(明)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바로 성왕(聖王, 523∼553년)이다. 성왕은 무령왕의 추복(追福)을 위해 수군 본영으로 전함 건조의 중심지였던 큰물현 요지에 백제 최초의 사방불을 조성하게 한 듯하다. 이는 북위에서 이미 문성제 화평(和平) 원년(460)부터 운강석굴(雲岡石窟)에 역대 황제들의 추복을 겸해 그 얼굴의 초상조각으로 불상을 조성하여 추선굴(追善窟)로 삼던 풍습을 그대로 수용해들인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이 사방불의 중심불(도판 7) 모습은 바로 무령왕의 초상이라 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현재 남면하도록 중수해 놓은 좌불이 바로 무령왕의 모습이라 해야 할 터인데, 중국화된 불의(佛衣)인 포복식(袍服式) 불의를 입고 포수좌(袍垂坐)를 지으며 좌정한 모습이다. 거의 정삼각 형태의 안정된 비례를 갖춘 앉음새나, 가사 형태의 불의를 두 벌 덧입으면서 겉옷을 오른쪽 어깨 뒤쪽으로만 걸쳐 내려 겨드랑이 아래로 빼내고 있는 착의법(着衣法) 등이 중국 낙양 용문석굴(龍門石窟) 빈양중동(賓陽中洞)의 주불좌상(도판 8)과 방불한 양식을 보이고 있다.

 

이로 미루어보면 예산 사면석불은 무령왕릉이 완성된 뒤인 성왕 5년(527)경에 조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빈양중동의 주존불이 북위 효문제(471∼499년) 추선굴로, 선무제(宣武帝) 연창(延昌) 4년(515)경에 조성을 완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방불의 불두는 파괴된 채로 공주박물관에 보존돼 있다.

 

한편 성왕은 태자로 있으면서 부왕이 국권 회복에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를 충분히 보아왔던 터라, 즉위하자마자 선왕의 유지를 계승하여 고구려 정벌에 앞장섰다. 지식이 뛰어나고 결단력이 있었다는 평가대로 성왕은 즉위년 8월에 고구려가 임진강으로 쳐내려오자 좌장(左將) 지충(志忠)으로 하여금 즉시 1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격퇴하게 하였다. 그리고 3년(525) 2월에는 고구려 정벌을 위해 신라와 동맹을 맺고 임진강을 건너 황해도 지역까지 진격해 들어갔다.

 

이에 고구려 안장왕(519~530년)은 성왕 7년(529) 10월에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내려와 비혈성(鄙穴城)을 빼앗는데 좌평 연모(燕謨)가 이끄는 백제의 3만 군사는 오곡(五谷, 황해도 서흥)벌에서 벌인 전쟁에서 크게 패해 2000군사를 잃는다.

 

 

[ 신라에 배신당한 성왕 ]

백제와 고구려가 이와 같이 강화만 일대 3강(예성강, 임진강, 한강) 유역 쟁탈전에 여념이 없는 사이에, 무령왕 21년(법흥왕 8년) 백제를 따라 양(梁)나라에 사신을 보내 국제무대에 진출하기 시작한 신라는 드디어 법흥왕 15년(528, 성왕 6년) 불교를 공인하여 이념기반을 다지더니, 법흥왕 19년(532)에는 백제와 오랜 동맹관계에 있던 낙동강 하구의 해상왕국인 금관가야를 일거에 합병해 들인다. 고구려와의 쟁패에 여념이 없던 성왕은 배후에서 허를 찔린 것이다. 동맹관계만 믿고 신라를 과소평가하고 있던 성왕이 방심한 사이에 일어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을 것이다.

 

이에 가야와 일본으로 이어지는 해상연합이 허물어지면서 백제의 제해권은 심각한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성왕이 16년(538) 봄에 수도를 사비(泗, 지금의 부여)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고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가야의 상실을 보상하려면 남해안 일대를 철저히 장악해야 하는데 강화만과 아산만의 수군으로는 거리상 그 신속한 제압이 불가능하였기에 금강구에 수군기지를 강화할 필요성이 절실하였던 것이다.

 

백제와 신라는 이 사건으로 동맹관계가 일시 파기되는 듯한데, 마침 성왕 18년(540) 7월에 법흥왕이 돌아가고 진흥왕이 불과 7세의 어린 나이에 등극하자 백제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장군 연회(燕會)로 하여금 5000병력을 이끌고 고구려 우산성(牛山城, 황해도 우봉)을 공략하나 실패하고 만다. 이에 성왕은 고구려와 영토분쟁이 쉽게 결말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 아래 19년(541) 진흥왕에게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고 다시 동맹을 맺는다. 신라의 힘을 빌려 고구려와의 영토분쟁을 종식시키려는 심모원려였을 것이다.

 

그래서 성왕 26년(548) 1월에 고구려 양원왕이 6000병력으로 한북 독산성(獨山城, 지금의 포천)을 포위 공격해 오자 성왕은 신라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진흥왕은 장군 주진(朱珍)으로 하여금 3000병력을 거느리고 가서 이를 돕도록 한다. 주진은 밤낮으로 달려와 독산성 아래에서 고구려군을 일전으로 대파하여 신라의 위세를 과시하는데, 이를 계기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 쪽으로 영토확장의 가능성을 감지하게 된다.

 

성왕 28년(550) 1월 백제 성왕이 1만 군사로 고구려 도살성(道薩城)을 빼앗자 3월에 고구려가 금현성(金峴城)을 포위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때 백제의 구원요청을 빌미로 신라는 그 틈에 끼어들어 두 성을 모두 빼앗고 만다. 성왕은 또 한 번 철저한 배신을 통감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다음해(551년)에는 신라 진흥왕이 18세의 어엿한 장부가 돼 영토 확장의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거칠부 등으로 하여금 승세를 몰아 고구려로부터 10군을 빼앗게 하고, 9월에는 고구려가 돌궐의 침입을 받자 이 틈을 타서 다시 10성을 빼앗아 한강과 임진강 일대를 모두 차지한다.

 

그리고 성왕 31년(553) 7월에는 백제 동북부인 현재 충청북도 일원을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금관가야 백성을 이주시킨 다음 금관가야 구해(仇亥)왕의 막내 왕자인 김무력(金武力, 김유신 부친)을 군주(軍主)로 삼아 이 지역을 통치하게 한다. 물길에 익숙한 가야 백성을 이주시켜 백제를 견제하게 한 것이다. 이는 백제로부터 제해권을 탈취하여 숨통을 죄려는 심각한 도전이었다.

 

이에 성왕은 10월에 왕녀를 진흥왕 소비로 출가시키는 화친외교로 일단 신라침공의 예봉을 피하면서 다음해인 성왕 32년(554) 7월에 아직 남해안과 낙동강 이서에 잔존한 가야세력과 연합하여 3만 군사로 신라를 침공해 들어가는 대공세를 취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관산성(管山城, 지금의 옥천)전투에서 대군과 유리되는 전략적인 실수를 범하여 한낱 필부인 삼년산(三年山, 지금의 보은)군의 비장 고간도도(高干都刀)에게 피살되는데, 이는 신주 군주 김무력의 신속한 구원군이 도달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성왕은 고구려로부터 고토를 회복하려는 원대한 포부를 물거품으로 돌린 채 신라의 배신에 통한을 품고 일생을 마친다. 이때 호종했던 좌평 4인과 장졸 2만9600인이 모두 함께 장렬하게 전사했다 한다. 그래서 백제는 개로왕이 잡혀 죽고 공주로 남하해오던 때보다 더 심각하게 국망의 위기에 몰리게 되니, 고구려는 이해 10월에 대군을 몰아 공주까지 침공해 내려오고, 신라는 다음해 1월에 비사벌(比斯伐, 지금의 전주)에 완산주(完山州)를 설치할 정도였다.

 

 

[ 태안(泰安) 마애삼존불(磨崖三尊佛) ]

그러나 아산만과 태안반도에 본영을 두고 있던 수군세력이 굳건하게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위덕왕(威德王, 554∼597년)이 등극하여 민심을 수습해 가면서부터는 점차 국세를 회복해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위덕왕은 부왕인 성왕의 불행한 죽음을 위로하고 백성들의 울분을 달래기 위해 당연히 그 추선공양 불사를 대대적으로 거행하였을 것이다. 그것이 민심을 수습하여 국가를 재건하는 구심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왕이 고토회복의 전진기지로 삼고 있었던 태안의 진산 백화산 상봉에 불상 높이가 250cm나 되는 거대한 <마애삼존불>(도판 9)을 건립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이 마애삼존불은 특이하게도 같은 크기의 양대 불입상 사이에 180cm의 작은 보살 입상이 끼워 서 있는 이상한 구도를 보이고 있어 사계의 전문학자들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이 삼존불의 존재는 1927년에 간행된 ‘서산군지(瑞山郡誌)’ 권 1 산악 백화산(白華山)조에 “산 중복에 태을암(太乙庵)이 있고 암자 뒤에 암각(岩刻) 고불상(古佛像) 2좌가 있다”라고 하여 세상에 알리고 있었다.

 

그러나 학계에 소개된 것은 1962년이며 1969년에 추보(追報)가 이루어졌는데, 여기서 중국 제(齊) 주(周) 양식의 영향으로 600년경에 조성되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발표되었다. 그 이유는 백제 불교의 흥륭기인 성왕과 위덕왕 양대에 작은 석상을 시험 조성한 다음 무왕(武王, 600∼640년)대에 융성의 추세에 따라 대불(大佛)을 조성해 갔으리라는 추정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혹은 수(隋)·당(唐) 초 불상 양식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거나 북위불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이견이 나오게 되었는데, 최근에는 수나라 불상양식의 영향을 받은 7세기 초기작이라는 데 동조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남제(南齊) <영명(永明) 원년(483) 명(銘) 아미타불좌상>(제5회 도판 11)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새끼손가락과 그 다음 무명지를 구부리는 독특한 수인(手印) 양식을 보이고 있다든지, 포복식 불의(袍服式佛衣) 양식을 철저히 계승하고 있는 것 등으로 보아서 6세기 중반을 넘어서지 않는 양식적 특색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애초에는 왼손으로 옷자락을 잡는 데서 연유하였을 이런 곡지(曲指) 양식은 중국에서 북위 효문제 태화(太和) 원년(477)을 전후한 시기에 이루어진 운강석굴의 포복불 양식에서 비롯되고, 포복불 양식과 함께 <영명 원년명 아미타불좌상>에 이어지고, 이어 용문 초기 양식으로 계승되어, 북위 선무제 연창 4년(515)경에 완성되는 효문제 추선굴인 빈양중동(賓陽 中洞)의 주불과 <북벽 협시 삼존불>(도판 10)에 이르며, 북위 효명제(孝明帝) 신귀(神龜) 원년(518) 조성의 <이불병좌상(二佛坐像)>(도판 11) 등을 거쳐 동·서위에서 535년경에 만들어진 불상에까지 표현되다가 이후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양대 불입상과 그 사이에 끼여 있는 보살 입상의 당당한 체구와 네모진 어깨가 마치 빈양중동의 남북벽 협시 삼존불의 양대 중앙입불과 그 곁의 협시보살입상의 그것과 너무 흡사하다. 즉 태안 마애불의 삼존구도는 이로부터 촉발된 영감의 소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남북벽 양대 주불을 취하고 그 사이에 협시 보살 하나를 취한다면 바로 태안 마애삼존불 형식의 구도가 되기 때문이다.

 

동향한 삼존불의 북쪽 불입상은 왼손으로 보주(寶珠)형의 지물(持物)을 받쳐들고 있어 이를 약사여래로 보고, 남쪽 불입상을 아미타여래로 보아 새 중간의 보살입상을 관세음보살로 보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양불은 그렇다 하더라도 보살이 반드시 관세음보살이어야 할 이유는 없을 듯하다.

 

이 산의 이름이 백화산인 것과 연결지어 관음 주처(住處)인 보타락가(小白華樹의 의미)를 상징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관음보살로 확정짓는 빌미를 제공한 듯한데, 사실 백화산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당의 실차난타(實叉難陀)가 당 중종(中宗) 사성(嗣聖) 12년(695)에서 사성 16년(699) 사이에 번역한 80권본 ‘신역화엄경’에서부터이니, 이 삼존불상이 조성될 당시에는 그 산 이름과 존상은 아무 관련이 없었을 터이기 때문이다.

 

당시 유행하던 법화신앙에 따랐다면 ‘관세음보살본문품’이나 ‘약왕보살본사품’에 따라 관세음보살상일 수도 있고 약왕보살상일 수도 있다. 특히 두 손으로 보주를 받들고 있으니 말이다. 무릎 이하가 땅에 묻혀 있었는데 1995년에 발굴하여 일시 이를 노출시켜 조사한 다음 다시 묻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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