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속의 낮은 음자리표(9회)
- 심재원의 겨울나기
김장철이 지나자마자 바로 농장은 겨울준비에 들어갔다. 다알리아와 글라디올러스 등 구근은 캐어 혹한을 대비할 수 있는 창고에 들여놓았고, 나무들은 보온용 부직포로 감싸주었다. 추위에 약한 나무들을 작년에는 보온처리를 하지 않았더니 얼어 죽었다. 수선화와 복수초 등 추위에 강한 다년생 꽃은, 내년 화단 조성 계획에 따라 크기와 간격들을 적절하게 고려하여 이식하였다. 추가로 구입해야 할 구근과 나무들은 원예종묘사에 미리 주문해서, 3월 중순에 배달되도록 했다.
심재원의 실내 화장실과 부엌에는 겨울을 싫어하는 꽃들이 가득하다. 난초를 비롯하여 군자란, 제라늄, 호야를 비롯하여 각종 다육식물이 들어차 있어 운신하기조차 어렵다. 작은 온실을 마련해야겠다는 계획은 가지고 있으나, 서울과 심재원을 오가는, 주말농장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난방시설을 관리할 자신이 서지 않아 망설이고 있다.
월동준비가 끝이 나면, 봄이 오기를 기다리며 글을 쓰고 화선지에 그림을 그린다. 실내에 들여놓은 난초 화분에서는 꽃대가 올라와 향기가 그윽하다. 그림 그리기와 글쓰기는 나의 말년 삶의 근간이 되고 있다.
요즘 겨울 저녁에 책을 읽다 보면 찹쌀떡 장사의 목소리가 그리워진다. 내가 어렸을 때는, 여름 한낮에는 아이스케키 장사와, 겨울밤에는 찹쌀떡과 메밀묵을 파는 목소리가 조용한 시골 마을을 심심치 않게 했다. 엿장수의 가위소리는 계절을 가리지 않고 들려왔다.
찹싸알 떠억 ~
밤이 길어
속이 꿀찌하면
기다려지는 소리
겨울 배달부의 꼬리가 긴 능청
겨울을 밟고
장독대 동치미를 깨우고는
문풍지를 울리며
고개를 디민다
메미일 무욱 ~
- 김철교, 「밤으로 오는 겨울 편지」(『달빛나무』, 시문학사, 2006) 전문
내가 문인화를 배우기 시작한 계기는, 시화전을 할 때마다 나의 시를 그림으로 그려주려는 화가들의 그림이 내 시와 조화가 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처음 몇 년 동안은 양천구청 평생교육원과 ‘예술의 전당’ 실기 아카데미에서 배우다가, 아무래도 체계적인 공부를 하고 싶어서, 홍익대학교 문화예술 평생교육원에 개설된 동양화 학점은행제 과정에 2016년 등록하여 2022년 2월에 드디어 미술학사(동양화전공) 학위증을 받게 되었다.
배우고 싶은 것이 있으면 정규과정을 택하는 것이 좋다. 독학은 어지간한 독종이 아니면 쉬운 게 아니다. 정부에서 설계하고 관리·감독하고 있는 학점은행제 학위과정에서는, 해당 분야 전체를 조망할 수 있고, 개별분야를 깊게 공부할 수 있게 교과과정이 설계되어있다. 말하자면 숲과 나무를 다 볼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다.
예부터 그림을 배우는 방법은, 도제(徒弟)가 되어 유명한 스승 밑에 계속 배우는 방법이 있으나, 요즘같이 창의성이 중요한 시대에는 다양한 방법을 이해하고 있을 필요성이 있다 싶어, 정규과정을 밟게 된 것이다. 학점은행제 학사학위과정 동양화전공에서는, 채색화, 문인화, 산수화, 민화, 인물화, 서예 등의 실습과목은 물론이고, 동서양 미술사와 미학 등 미술학사에게 필요한 과목들을 종합적으로 배워서 미술 전반에 대한 기초지식을 습득할 수 있어 좋았다. 이제 미술 학사과정에서 배운 모든 기법과 지혜를 나의 문인화에 접목해 정착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우리 가문에는 그림 소질이 유전자에 들어 있나 보다. 매천 황현(梅泉 黃玹, 1855-1910)의 수제자였던 조부님은 서당을 하시면서, 글씨를 잘 쓰셔서 남들의 비문을 써 주시고, 거의 매일 소두(小斗) 한 되 정도 드셨던 막걸릿값은 걱정 없으셨다. 아버님도 초등학교에 평생 봉직하시면서 환경미화를 위해 직접 그림을 많이 그리셨고, 여동생은 공주사대 미술과를 졸업하고 미술 선생님으로 오래 근무했다.
나는 음악에 대한 소질은 물려받지 못했다. 타고난 음치가 어디 있을까 싶었는데, 노래를 못하는 수준을 넘어, 피아노와 클라리넷 등 악기를 배워보려 수년간 노력했으나 악보 속의 음을 제대로 짚어내지 못하고 있다. 겨우 교회에서 가족합창대회 때, 내가 피아노 반주를 하고 아내와 아이들이 찬송가를 부른 것이 전부다. 앞으로 나의 문인화 개인전 개막식에서는, 내가 직접 악기를 연주하려고, 몇 년 동안 배우기를 중단했던 클라리넷을 다시 만지작거리고 있으나 자신이 서지 않는다.
어릴 적 조부님이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칠 때 배웠던 구절, 學而時習之 不亦說乎(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는 몸소 실천하고 있는 셈이나,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음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는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은 군자의 덕목을 흉내 내기가 버겁다. 앞으로 여생을 문인화를 그리며, 시와 산문을 쓰며, 가끔은 클라리넷을 조율하며 보낼 계획이나, 또 배우고 싶은 욕망이 언제 꿈틀거려 학생 신분으로 돌아갈지 장담하기는 어렵다.
그림을 그리다가 글을 쓰다가
눈을 정원으로 돌리면
겨울 땅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땅속 세상에는
온갖 벌레들과 뿌리들이
봄이 오면 땅 위에
창조주의 뜻을 펼치기 위해
서로 얽히고설켜
풍요로운 세상을 장만하고 있다
화폭 앞에 서기만 하면
음악에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화가가 살던 세상
음악가가 휘젓던 세상으로 빨려 들어간다
거기에는 시와 노래가 있고
거기에는 내가 있고 이야기가 있다
- 졸시, 심재원(心齋園)의 겨울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