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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海金氏 族譜의 史的考證(Ⅱ)
釜山市宗親會 前常任理事 金琮石
다시 말을 원점으로 돌려서 己未譜 序文을 검토해 보겠다. 「근래에 들으니 甲戌譜 이후로 辛卯譜(1771) 丙申譜(1776) 丁酉譜(1777)의 은밀한 출판이 있었고 심지어 往年(1898)에 天安板과 今年에 廣德寺盜刊이 있었다. 그러한 무리는 앞으로 계속 번식할 것이고 또 끊이지 않을 것이다. 처음에는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일어나더니 지금은 전국 八道에 번지고 있다」이는 書頭에 기록한 (6)辛卯譜(1771), (7)丙申譜(1776), (8)丁酉譜(1777), (9)往年의 天安版(1798), (10)今年의 廣德寺刊(1799)을 뭉친 것이다. 이는 甲戌譜 이후로 전국적으로 金海金氏 族譜 發刊의 亂立을 개탄한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은 당연한 것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全國의 金海金氏들이 족보가 없어 애를 태웠지만 보고 베낄 基本譜가 없으니 族譜를 가질 方法이 없었다. 그러던 중 英祖甲戌譜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보고 이제부터는 보고 베낄 基本譜가 있으니 쉽게 族譜刊行을 할 수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全國的으로 族譜刊行의 붐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런 현상들은 모든 氏族들의 공통적인 現實이다.
어느 氏族할 것 없이 始錄譜를 만들기란 여간 어려운 作業이 아니다. 그러다가 어렵게 始錄譜를 發刊하고 보면 그 동안 학수고대하였던 一族들이 앞 다투어 족보간행에 열을 올리기 마련이다. 그러니 國鉉公도 族譜刊行 自體를 叱責하는 것이 아니라 系統을 문란케 한 것을 叱責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느 門中이나 上系를 모르면 모른다 하고 아는 것만 가지고 各立中祖하면 될 것인데 꼭 著名한 子孫이 되고 싶어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근거도 없는 곳에 자기 할아버지를 갖다 붙이는 것은 그야말로 易祖換父가 아니겠는가.
凡例中에 이런 글이 있다. 크게는 四派(參判公, 橫城公, 安敬公, 石城公)로 나누고 특히 安敬公 子孫이 가장 興盛하니 公의 玄孫 行列인 盡字와 直字 行列에서 十一派로 分派하라 하였으니 앞으로는 安敬公派譜는 그만하고 各11派別로 派譜를 했으면 하고 提案하는 바이다. 아니면 그 아래 行列 小派別로 派譜를 하면 더욱 좋겠다.
또 이런 글이 있다. 「金氏舊無譜印譜」라, 즉 「우리 金氏는 이전(甲戌譜 以前을 말함)에는 印刊된 족보는 없었다」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 이 글은 甲戌譜에도 있다. 이 글이 바로 宋時烈序文의 戊申譜와 肅宗丙寅譜가 僞譜임을 立證하는 글이다.
또 이런 글이 있다. 「甲戌年間 湖南井邑地有一譜 自 始祖以下六十餘代連係 而此非印本 公籍又多可疑無稽之言 故甲戌譜猶不敢合錄 丙戌年間井邑人金德埰潛刊此譜 而剽竊傳會巳極荒誕序文未知誰作 以假稱以尤翁丈岩所撰尤位駭妄且閱數本互有同異決非信筆 而諸家私諜 或有妄自繼序者 故特書于此以杜後弊」즉 「甲戌年間에 호남 정읍지방에서 한 보첩이 있으니 시조로부터 아래로 60여대의 系統이 연이어졌으나 이는 印本이 아니며 또한 의문되는 점도 많고 상고할 수 없으므로 지난 甲戌譜에도 合錄하지 않았다. 丙戌年間에 井邑사람 金德採가 이 족보(甲戌譜)를 표절하여 몰래 刊行하였을 뿐만 아니라 누가 지은 것인지 알 수 없는 지극히 황당한 서문을 짓고 假稱 尤翁과 丈巖이 지은 바라함은 더욱이 해괴하고 허망 되며 또한 몇 장의 책장을 펴보니 서로 맞지 않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기록이니 앞으로 여러 가문의 私諜에서 혹시라도 이런 허망 된 차례를 이어짐이 있을까 염려되어 특별히 여기에 기록하니 후일에 이런 폐단이 없도록 하여라.」라고 하였다.
이 내용을 다시 정리하자면 「井邑에 金德採라 하는 사람이 正德譜라 하면서 해괴한 족보를 가지고 있더니 丙戌年(1766)間에는 甲戌譜를 剽竊하여 거기다 다시 60여대를 世代를 끼어 넣어 황당한 족보를 가지고 있으니 앞으로 혹시라도 우리 자손들이 이에 현혹될까 두려워서 여기에 특별히 이 글을 남기노라」는 말인데 이 말은 甲戌譜에서 運熙公께서도 특별히 경계한 말인데 國鉉公께서도 正德譜에 대하여 子孫들에게 당부하는 경계는 너무나 간절하다. 國鉉公은 이래도 못 믿어워서 己未譜孫錄 「巖」欄에 다시 이글을 기록해 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子孫들은 金德採의 正德譜 萬世聯系를 正統인양 행세하고 있으니 地下에서도 國鉉公께서 얼마나 탄식하고 계실까?
正德譜에 대한 경계는 이것 뿐 아니다. 京派 本孫들이 主管해서 發刊한 族譜마다 正德譜에 대한 경계의 글이 빠지지 않고 記錄되어 있는데, 이점에 대해서 앞으로 계속 입증하겠다.
始祖로부터 萬世一系로 聯系를 하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설명하겠다. 첫째 王世系는 10世 仇衡王에서 끝이 났는데 어찌해서 지금 70 몇 世孫이 나오느냐? 그리고 王世系는 王만이 이어받는 世系인데 오늘날 어찌해서 金海金氏들은 모두 王의 몇 世孫이라고 하느냐? 오늘날 數百萬의 金海金氏들은 모두가 王世系를 이어 받았단 말이냐? 王世系를 이어 받았다는 것은 바로 王이라는 말인데 그러니 오늘날 數百萬의 金海金氏들은 모두가 王이라는 말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全州李氏의 例를 하나 들겠다. 安平大君은 世宗의 셋째 아들인데 여기서 安平大君의 20世孫이 있다고 가정하자 이분은 安平大君의 20世孫이지만은 世宗大王의 21世孫이다. 그렇다면 이분 입장에서는 安平大君의 20世孫이라 하기보다 世宗大王의 21世孫이라 하면 엄청 자랑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절대로 어느 왕의 몇 世孫이라고 하지 않고 반드시 어느 大君의 몇 世孫 또는 어느 君의 몇 世孫이라고 할뿐이다. 王을 指稱하지 않더라도 全州李氏이면 太祖 李成桂의 後裔임을 모르는 사람이 있겠는가. 金海金氏도 마찬가지로 首露王의 後裔임을 모르는 사람이 있겠는가. 설사 남이 알든 모르든 어느 王의 몇 世孫이라 하는 것은 妄發이자 無識의 所致라 하는 것을 分明히 밝혀둔다.
또 始祖로부터 萬世一系를 따르면 어떤 矛盾에 빠지게 되는지 한가지 더 설명하겠다. 萬世聯系譜를 보면 17世에서는 모두가 長淸이나 巖으로 聯系되어 있다. 그러니 이것이 사실이라면 오늘날 수백만의 金海金氏 모두가 金庾信將軍 한 사람의 자손이 되는 것이다. 1,400여년전에 한 사람의 先祖의 자손이 1,400여년 만에 수백만의 자손으로 번창할 수 있다 말인가. 혹시 남이 이런 질문을 한다면 무엇이라 답변할 것인가. 金海金氏는 駕洛國 500여년 동안에 王만 하더라도 十王인데 그 十王의 傍孫들의 자손들은 다 어디 갔느냐고 질문한다면 무어라고 답변할 것인가. 참으로 난감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族譜를 編纂할 적에도 王世系는 반드시 別段으로 독립시켜서 모셔 두어야 하는 것이다. 金海金氏의 경우에는 맨 앞에 王世系라 적고 그 다음 始祖 首露王에서 10世 仇衡王까지 적고 仇衡王 欄에 世宗, 武得, 武力의 三子를 두었다고 적고 다시 장을 넘겨서 中世系라고 하고 世宗, 武得, 武力을 적고 그 아래로 17世 長淸과 巖까지만 적고 다시 장을 넘겨서 中祖 牧卿으로부터 孫錄을 적어 나가면 될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할 점은 현재까지 모든 金海金氏 族譜엔 長淸과 巖을 16世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始錄譜인 甲戌譜, 己未譜 등에서 이렇게 되어 있으니 이렇게 하는 것을 나무랄 수 없으나 이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다. 우리나라 三國史記에 分明히 系代가 기록되어 있는데 先祖도 이를 허술히 본 탓이다. 長淸은 三國史記列傳, 金庾信傳記 末尾에 編纂者 金富軾이 이런 말을 적어 두었다. 「이 傳記는 庾信의 玄孫 新羅執事郞 長淸이 庾信의 行錄 10卷을 지어 행세하고 있으나 잘못된 것은 깍아버리고 쓸 수 있는 것은 취하여 傳을 만들었다」라고 하였다. 그러니 古記에 長淸의 기록은 이것이 唯一無二한 기록이며, 庾信의 玄孫이면 始祖로부터 17世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留意할 점은 庾信의 玄孫이라고만 했지 父系나 祖系를 밝힌 글은 아무데도 없다는 것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巖도 系代에 대한 기록은 金庾信 列傳안에 있는데, 다만 允中의 庶孫巖이라고만 기록되어 있을 뿐 父系를 밝힌 글은 古記에는 없다. 이 점 또한 기억해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己未譜에는 京派外에 다섯 개 派가 더 등재되어 있다. 첫 번째가 三賢派인데 「文科 龍角派」라고 등재되어 있는데 三賢派 中祖이신 管위에 한 代가 더 기록되어 있다. 甲戌譜에는 管이 中祖로 기록되어 있다. 두 번째는 「牧使珏派」라고 기록되어 있고, 세 번째는 「縣監 世華派」라 기록되어 있다. 네 번째는 「震서派」라 기록하면서 震敍의 父欄에 孝源을 적고 그 옆에다가 "見原譜天字"라는 附註를 달았는데 天字쪽에 보면 「四世 覲 一子 孝源, 子孫无傳 이라 적고 있다. 震敍는 甲戌譜에 孝源의 子로 등재되어 있고 國鉉공은 系統의 紊亂을 가장 염려하는 분인데 어찌해서 震敍의 單子를 접수하여 주었는지 또 震敍를 孝源의 子로서 등재해 주면서도 孝源이 子孫無傳이라는 것을 기어이 밝히려고 한 의도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宣傳官 德壽派」라고 등재하였다. 이 德壽는 京四派의 두 번째인 橫城公(永瑞)의 子 世緯 밑으로 入養하고 德壽派라 하여 中祖로 하였는데 「世緯-系子 德壽」라 기록하고 世緯 欄 옆에 또 見原譜鱗字라는 附註를 달았는데 原譜의 鱗字를 찾아보니 「永瑞- 子 世緯 一女, 子孫無傳」이라는 글이 적혀있다. 이 德壽도 역시 甲戌譜에 등재되어 있는데 震서의 曾孫으로 되어 있다. 두 분다(震敍와 德壽) 子孫無傳이라는 곳에 달려있다. 그러니 國鉉公은 이 두 분을 各立中祖하여 등재해 주면서도 그 所自出은 기어이 밝혀 두겠다는 뜻인 것 같다. 참으로 철두철미한 역사 기록 정신이 아니던가.
이번에는 京派와 三賢派 門中의 中祖以下 最古의 기록을 소개하겠다.
京派의 最古기록은 燕山君 7年(1501)에 세운 大提學 洪貴達 撰 校理公(震孫)의 神道碑銘이다. 要約하면 다음과 같다.
「公의 高祖의 諱는 普요 都僉議侍中 金寧府院君으로서 諡는 忠簡公이요 曾祖의 諱는 到門이고 奉常大夫三司副使이며 祖의 諱는 覲으로 奉常大夫戶曹摠郞이요 考의 諱는 孝芬으로 朝散大夫 瑞興都護副使이다」 이것이 族譜作成의 上系의 基本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牧卿祖가 빠진 것은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忠簡公 普를 中祖로 삼았는데 1628年 少전公께서 陽川許氏族譜에서 牧卿祖를 찾아낸 것이다.
그리고 三賢派의 最古기록은 점畢齋 金宗直의 文集中에 「節孝公孝閭碑銘」이라는 글이 있는데 要約하면 다음과 같다.
「成化十八年壬寅春 前執義金先生孟 自淸道遺其子 驥孫,馹孫從余門學 且以書索銘 其先君子孝行之碑其言曰 先公諱克一金海人也 金海故 金官國始祖首露王居故國者 世爲州吏 高麗時 有名管者 始應科目登于朝 管生文淑 文淑生伉 伉生서義興縣監 是吾先公之考也」하였는데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成化 18년(1482) 壬寅 봄에 전 執義金先生孟이 청도에서 그의 아들 驥孫. 馹孫을 나의 門下에 보내어 修學하게 하였다. 그리고 또 한 장의 書狀을 보니 그의 先親이신 節孝公 克一의 孝閭碑文에 말하기를 先親의 諱는 克一이며 金海人이고 金海는 옛날에 金官國始祖首露王이다 … 代代로 鄕里에 살면서 衙前을 하였다. 高麗때 管이 처음으로 科擧에 及第하여 벼슬을 살았다. 管이 文淑을 낳고 文淑이 伉을 낳고 伉이 서를 낳았다. 서는 義興縣監으로서 나의 祖父가 된다.」이다. 이글은 節孝公 孝閭碑銘 中에서 필요한 것만 拔萃한 것이다. 어쨌거나 三賢派도 中祖 以下 上系系譜는 이것이 最古의 글로서 이보다 더 오래된 글은 없다고 단언한다. 그러니 이것을 보더라도 長淸 이하 中祖 牧卿까지는 기록이 없음이 分明하다. 그러니 萬世一系譜는 僞譜라는 것이 또 한 번 立證되는 셈이다.
金海金氏 始錄譜(英祖甲戌 1754譜) 以來로 제대로 된 族譜는 正祖己未(1799)譜가 가장 자랑스러운 族譜이고 그 다음에 族譜다운 族譜는 지난 1978年에 發刊한 安敬公派譜인 戊午譜를 꼽고 싶다. 戊午譜도 두 가지 오류가 있다. 하나는 長淸을 允中의 孫으로 한 것이고(前述한 바와 같이 長淸은 庾信의 玄孫이라고만 했지 祖系, 父系가 밝혀진 것은 없다.) 또 하나는 道王이니 讓王이니 하는 私諡를 登載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이 두 가지 오류를 빼고는 상당히 模範이 될 만한 族譜이다. 앞으로 金海金氏族譜를 刊行하실 분은 이 戊午譜를 模範으로 한다면 大過없는 族譜가 되리라 믿는다. 이 族譜는 지난 1984年에 作故하신 耕山 沅泰族丈께서 編纂을 主管하셨는데 이 族丈은 漢文도 밝고 歷史에도 正通하신 분이다. 1980年度엔 崇善殿誌도 飜譯編纂하시고 金山齋(지금의 慶州 崇武殿)誌도 飜譯編纂하시고 그 外에도 宗親會에서 큰일을 많이 하신 분인데 戊午年 安敬公派譜도 이 어른께서 心血을 바쳐 編纂하였다는 것을 밝혀두는 바이다.
그리고 道王이니 讓王이니 하는 王의 諡號에 대해서도 한마디하겠다. 諡號란 二品官以上의 臣下가 죽으면 追尊의 뜻으로 임금이 내리는 것인데 王은 죽으면 그 位牌를 宗廟에 모셨기 때문에 廟號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新羅 智證王 때부터 사용하였으니 駕洛國時代에는 諡法制가 없었다. 그런데 1884年 許傳公이 제 멋대로 廟號를 만들어 가지고 崇善殿碑文에 새겨 넣은 것인데 裔孫이 그것도 王의 諡號를 제 멋대로 만든다는 것은 祖上에 대한 큰 妄發인데 이런 行爲가 妄發이라는 사실조차 아는 一族이 몇 분이나 있는지 모르겠다.
이번에는 (12)壬戌(1802)譜를 考證하겠다.
壬戌譜는 金海金氏 甲戌(1754)大同譜 以來로 처음으로 하는 大同譜인데 1798年 慶南 山淸에서 仇衡王陵(사실은 仇衡王陵이 아니지만)을 發見한 紀念으로 三賢派의 顯道公이 主管하여 壬戌年(1802)에 發刊한 31卷의 族譜로써 이 族譜에 入單한 門中은 거의 대부분 嶺南地方과 湖南地方 金海金氏들인데 서울 京畿地方과 忠淸道地方의 金海金氏들은 거의 參與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바로 그 무렵(1799)에 京派門中에서는 己未譜를 發刊하였기 때문이다. 壬戌譜 맨 앞에 京派系譜가 등재되어 있지만 甲戌譜나 己未譜를 보고 移記한 것뿐이다. 물론 己未譜에서 누략된 京派子孫들中 一部가 入單하였을 것이다.
이 壬戌譜의 特徵은 中祖가 아무리 寒微하다 하더라도 名門子孫으로 끼어들지 않고 모두가 各立中祖하였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13)甲寅(1914)譜를 考證하겠다.
이 族譜도 金海金氏大同譜라 하겠는데 이 族譜를 主管한 이는 京派宗孫 濚培氏와 甲峯宗孫 雲培氏와 三賢派의 濯纓 宗孫 榮灝氏등이 主管하였는데 뒤에 의견차이로 濚培氏는 嶺南에 가서 崇善殿에서 刊行하였고, 雲培氏와 榮灝氏는 京城金海金氏 宗約所에서 全帙 38卷의 族譜를 刊行하였다. 그러므로 甲寅譜라 하면 京城譜와 嶺南譜의 두 帙을 말한다.
다음은 (14)甲子(1924)譜를 考證하겠다.
이 甲子譜도 京城譜와 嶺南譜 두 帙이 있는데 이번에도 甲寅譜할 때와 마찬가지로 濚培, 雲培, 榮灝 등 三氏가 같이 하려고 하였으나 역시 意見이 맞지 않아 이번에는 雲培氏가 分離하여 嶺南으로 내려가 慶州 金山齋에서 全帙 27卷의 大同譜를 發刊하였고, 서울에서는 榮灝氏가 作故하고 그의 아들 明在氏와 濚培氏가 主管하여 全帙 52卷의 大同譜를 發刊하였다. 이분들은 修譜事業을 多分히 營利를 目的으로 한 것 같으며 亂系도 적지 않다.
井邑 金德採의 萬世聯系에 대해서 京派本孫 先祖들께서 얼마나 염려를 하였는지 한번더 밝히겠다.
壬戌譜(1802)의 凡例에서도 또 甲寅譜(1914)의 凡例에서도 또 甲子譜(1924)에서도 이뿐 아니라 甲峯의 玄孫 濟運氏가 發刊한 乙丑譜(1865)의 凡例에서도, 또 甲峯의 五世孫 龍植甫가 發刊한 丙子(1876)譜에서도, 또 甲峯의 七世孫 元培氏가 發刊한 庚子譜(1900) 序文과 凡例에서도 이를 排斥하라는 글이 있다. 이 외에도 1900年前葉까지 京派 本孫들이 發刊하는 族譜마다 이 경고문이 없는 족보는 없다. 그러던 것이 해방전후부터 刊行된 족보에서는 이 경고문을 보기가 어려워지면서 오히려 萬世聯系族譜가 이제는 正統譜로 자리 잡아 가는 듯하므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번에는 派名에 대해서 몇 마디 하겠다.
京派派名에 대해서 잘못되었다고 하는 분들을 더러 보았다. 말하자면 金寧君派라고 해야 맞다는 것이다. 이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다고 京派라고 呼稱해서 瑕疵가 있는 것도 아니다. 京派의 出處는 바로 純祖壬戌譜에서 따온 말인데 壬戌譜의 系圖를 보면 맨 위칸에 各中祖의 諱字를 기록하고 中祖의 諱字위 欄外에 보면 그 자손들이 主로 居住하는 地名을 적었는데 金寧君 牧卿위에는 「京」字를 적었다. 그 이유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牧卿祖의 子孫들이 主로 서울에 살았기 때문에 서울 京字를 적은 것인데 이것이 그만 派名이 되어 오늘날은 京派로 通稱하고 있다.
三賢派도 中祖가 版圖判書를 지냈으니 版圖判書公派라 해야 맞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은 것으로 안다. 그러나 이 또한 三賢派라 불러도 전혀 瑕疵가 없는 것으로 안다.
三賢派의 由來는 四代孫 節孝公(克一)이 孝子로서 孝閭碑까지 받았고 六代孫 濯纓 金馹孫은 점畢齋 金宗直의 門下에서 修學하였고 史官으로서 在任中 燕山君四年(1498) 戊午史禍에서 犧牲되기는 하였으나 當代에 존경받던 젊은 學者로써 有名하였고, 三足堂 金大有는 人生의 가장 기본인 세 가지가 다 滿足하다고 해서 스스로 三足堂이라 自號하였는데 첫째 벼슬은 漆原縣監과 戶曹佐郞을 역임하였으니 이만 하면 足하고, 먹는 것도 이만하면 足하고, 壽도 70을 넘겼으니(74歲卒) 이만하면 足하다고 하였다 한다. 이 자손들이 세 할아버지를 가리켜 三賢人이라 하여 그 후손들을 三賢派라고 呼稱하였다. 三賢派라고 하는 공식기록은 소위 肅宗丙寅譜에 처음으로 「三賢派譜」라고 기록하였다. 이 족보는 실제 刊行年度는 1910年 전후에 出刊된 것이라고 前述(3)에서 상세히 설명하였다.
또 金海金氏璿源世譜」라는 譜冊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것 또한 잘못된 것이다. 璿源世系란 王世系란 뜻이니 모든 자손들을 수록하면서 璿源世譜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金海金氏의 경우에는 그냥 金海金氏族譜 또는 金海金氏○○派譜라고만 적고 다만 系譜 欄 첫장에 璿源世系 또는 王世系라 적고 駕洛國十王만 적어야 한다. 다만 仇衡王 欄에 記事로서 世宗, 武得, 武力 세 아들을 두었다고 적어 넣으면 된다. 그리고 장을 넘겨서 中世系라 하고 一世 世宗, 武得, 武力으로 시작하여 六世 칸은 한間을 空欄으로 비워두고 七世에 長淸과 巖을 기록하면 될 것이다. 六世 칸을 비워두라 한 것은 長淸과 巖의 父系를 모르기 때문이다.
前述한 바와 같이 1979年刊 戊午譜가 상당히 模範譜이기는 하나 두가지 誤謬가 있다고 記述하였는데 한가지 더 誤謬를 追加해야 하겠다. 그것은 戊午譜 中世系에 世宗, 武得, 武力을 11世로 기록하였는데 이것이 하나 더 추가되는 오류다. 武力은 11世가 아니라 中世 1世로 해야 옳은 것이다. 筆者는 武力을 三子로 표기하였는데 그 이유는 駕洛國記에는 武力이 二子로 되어 있지만 三國史記에는 三子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역사를 인용할 적에는 항상 正史가 우선이고 正史에 없는 것만 野史를 인용하는 것이다. 그러니 正史인 三國史記에는 武力이 三子로 표기되어 있으니 正史를 따르는 것이 원칙일 것이다.
璿源이란 用語를 좀 안다는 사람의 설명을 들어보면 朝鮮王朝가 璿源殿에 歷代王의 影幀과 王의 族譜인 璿源世譜를 保管함으로 해서 朝鮮王朝의 王의 族譜를 璿源世譜라고 하는데 설명이 좀 부족하다. 왜냐하면 朝鮮王朝만이 璿源世譜라 한 것이 아니고 高麗王室도 璿源世譜라고 하였다. 高麗史列傳 卷一 任翊 欄에 보면 忠烈王 때 任翊이 同修國史로 있을 적에 敎旨를 받들어 璿源錄을 撰하였다는 글이 있다. 字典에 璿字풀이를 보니 (1)옥선, (2)天子之寶珠라 하였다. 그러니 이 璿玉은 天子만이 쓰는 구슬이라는 뜻인데 그러면 어디에 썼을까 바로 天子의 玉璽를 이 璿玉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駕洛國시대에는 玉璽도 없었고 하니 그냥 王世系라 했으면 하고 提案한다.
우리 始祖의 머리글을 보면 始祖王, 太祖王, 普州皇太王, 太祖皇太王 등등인데 일반적으로 太祖는 나라를 처음 세운 王을 太祖라 한다고 알고 있는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설명이 좀 부족하다. 나라를 처음 세웠다고 해도 高麗 王建이나 朝鮮 李成桂와 新羅 赫居世, 駕洛의 首露는 다르다. 前記의 두분은 어떤 나라를 征服해서 새로운 나라를 세운 분이고, 後記의 두분은 그야말로 처음으로 나라를 세운 분이다. 이와 같이 처음으로 나라를 세운 분은 아무런 수식어가 필요 없다. 그냥 始祖王이다. 또 太祖는 征服의 王의 諡號이지만 征服의 王이라고 해서 모두 太祖를 쓰지 않는다. 큰 나라 몇 개만 예를 들겠다. 漢나라를 세운 劉邦은 高祖이고 隨나라를 세운 楊堅(文帝)도 高祖이고 唐나라를 세운 李淵도 高祖이다. 太祖를 諡號로 쓰는 皇帝는 宋太祖, 明太祖, 淸太祖 등이 있다. 이 外에도 中國史에는 수많은 征服에 의한 建國의 君主들이 많지만 太祖와 高祖를 쓰는 경우가 거의 비슷하다.
우리 金海金氏는 首露王을 그냥 始祖王 또는 駕洛國始祖首露王이라 하면 될 것이다. 皇太王이니 皇太后이니 또는 太祖니 또는 太祖皇太王이니 하는 이런 用語는 안 썼으면 한다. 왜냐 하면 당당한 王朝였던 高句麗, 百濟, 新羅도 皇字는 쓰지 안 했는데 겨우 部族聯盟國으로서 亡한 나라의 王에게 너무 極尊稱을 쓰는 것도 남보기에 민망하지 않는가. 「過恭도 非禮」라는 말이 있다. 즉 지나친 공대도 예의가 아니다는 말이 아니겠느냐? 오히려 祖上을 욕되게 하는 일이 아닌가 싶어 두려운 마음 금할 수 없다.
이번에는 行列字作名에 대해서 한 가지 더 提案하고자 한다. 옛날에는 子孫의 數가 얼마 되지 안았기 때문에 行列字로 作名하였으나 오늘날은 子孫의 數가 엄청 많다보니 行列字로 作名하면 同姓同名이 너무 많아서 혼란스럽지 그지없다. 그래서 行列字는 다만 子孫들에게 알려만 주고 作名은 좀 더 多樣하게 했으면 하고 提案하는 바이다.
끝으로 世와 代에 대해서 한마디 더하고 이 글을 끝낼까 한다.
예를 들어「中祖1世, 2世, 3세, 4世, 5世, 6世, 7世, 8世, 9世, 10世」에서 10世가 나라고 가정하자. 이런 경우 代孫으로 말할 적에는 나는 中祖로부터 9代孫이고 世孫으로 말할 적에는 나는 中祖의 10世孫이다라고 한다는데, 그게 아니다.
사실은 世는 代와 같은 뜻으로 쓰인다. 할아버지가 나의 9代祖라면 나는 할아버지의 9代孫이고, 世로 말하여 할아버지가 나의 9世祖라면 나는 할아버지의 9世孫이라고 해야 맞는 것이다. 즉 世祖와 代祖도 같은 뜻이며 世孫과 代孫도 같은 뜻으로 쓰이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무슨法이냐고 질문한다면 우리 先祖들이 그렇게 써왔고 또 모든 古記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노라고 하는 답변 외에는 더 할 말이 없다.
이 世와 代에 대해서 認識을 혼란하게 만든 사람이 바로 한글 學者 韓甲洙시인데 지난 70年代初로 기억되는데 그때 TV에 「바른 말 고운 말」이라는 固定時間이 있었는데 그 때 韓甲洙씨께서 한 말이 代는 한 代를 빼고 世는 한 代를 더해서 한다고 하였는데 筆者도 그 강의를 열심히 보았다. 「바른 말 고운 말」은 좋은 교양시간이었는데 아마 韓甲洙씨는 古典을 많이 보지 안 했기 때문에 그런 엉뚱한 설명을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니면 韓先生 自身의 個人 主張이었을 것이다.
以上 筆者의 글에서 혹시 의문이 있는 분은 전화(010-5578-2227)해 주시면 상세히 답변 드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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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