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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만5천 볼트의 사랑 이가림
2만5천 볼트의 사랑
나는 지하철을 사랑한다
2만5천 볼트의 전류가 흐르는
인천행 지하철에 흔들릴 때마다
2만5천 볼트의 사랑과
2만5천 볼트의 고독이
언제나 내 안에 안개처럼
넘실거리기 때문이다
징그러운 발을 감추고
안 보이는 한 쌍의 촉각을 세운 채
음습한 곳에 묻혀 사는 벌레들을
마구 잡아먹는
한 마리 길다란 지네
그 꿈틀거리는 몽뚱아리 마디마디
환히 불 밝힌 방 안에서
학생 공원 선생 군인 회사원
창녀 수녀 신문팔이 소매치기
이 땅의 눈물겨운 살붙이를 모두가
서로 빰을 맞대고
서로 어깨를 비벼대고
서로 밀치고
서로 부추기고
서로 껴안으며
즐거운 지옥의 밧줄에 묶여 끌려간다
이리 부딪치고 저리 쓰러지는
그 장삼이사(張三李四) 의 물결 속에
몸을 던져
나 또한 즐거이 자맥질한다
너의 살결에
나의 살결이 닿고
너의 숨결에
나의 숨결이 섞이는
황홀한 세상
거대한 군중의 파도가
물거품의 자취조차 없이
나의 파도를 삼킨다
나는 지하철을 사랑한다
2만5천 볼트의 전류가 흐르는
인천행 지하철에 흔들릴 때마다
2만5천 볼트의 사랑과
2만5천 볼트의 고독이
언제나 내 안에 안개처럼
넘실거리기 때문이다
순간의 거울, 창작과비평사, 1995
가물치 이가림
가물치
매초 일만 오천톤의 흙탕물이
밀어닥치는 하구에서
한사코 하늘을 향해 튀어오르는
가물치 한 마리
투망을 던지는 눈을 조롱하며
물살보다 빨리 내닫는 힘
까마득한 낭떠러지 거슬러 올라
기어이 가야 할 먼 강물의 뿌리 그리워
온 비늘로
삶의 독 내뿜고 있다.
아아 슬픔에 파닥거리는 사람아
넋 기댈 데 하나 없는
칙칙한 수초들 사이
안 보이는 작살이 우리들 아가미를 노릴지라도
몸 속에 자유의 피 흐르는 가물치되어
타고난 몸짓 뜨겁게 푸득거려 보자
등비늘 온통 벗겨질 때까지
뒹굴어 보자
순간의 거울, 창작과비평사, 1995
게들 이가림
게들
프라스틱통에 갇힌 게들이
어디론가 밖으로 나가려고
서로의 발을 걷어차며
등을 떠밀며
집게발을 허우적거린다
입 가득 절망의 거품을 문 채
까무러쳐 죽은 자들의 시체를 딛고
저 혼자
아수라의 벽 너머로 도망치면
잃어버린 바다로 돌아갈 수 있는 듯이
순간의 거울, 창작과비평사, 1995
겨울 논 이가림
겨울 논
참새 몇 마리 언 잔설(殘雪)을 쪼는 듯
볏가리도 다 걷힌 새벽 어스름
칼날처럼 살얼음이 깔리는 논바닥에
어디로 떠나간 고무신 발자욱인가
점점(點點)이 살아 파르르 떨고 있는 것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창작과비평사, 1981
겨울의 불꽃 이가림
겨울의 불꽃
저문 저자에서 몇되의 석유와 배추를 사 들고
태재치(太宰治)같이 시든 남자를 만나러 오는 그대여
하나님의 기침 소리보다 더 적막한 눈발이
퍼부어내리는 이 백팔번뇌의 뜰에서 입 맞추자
빙하기, 민음사, 1973
고부에 머무르며 이가림
고부에 머무르며
알 수 없는 부자유의 밤 속에서
휩쓰는 낫에 베어지는 풀잎들이 있다
바가지로 바가지로 설움의 물을 퍼올리며
끝끝내 잠자지 않는 노여움의 뿌리가
무식하게 곡괭이를 들고 무식하게
도끼를 들고 일어나 위협하는 바람을
이마와 어깨로써 막아내고 있다 아아
하나뿐인 참사랑도 허물어지고 험상궂은
능욕당한 흉터만 남아 있다 모시 적삼의
누이여 우리나라의 눈물이여
빙하기, 민음사, 1973
눈 이가림
눈&
너는
스러지기 위해
잠시 땅 위에 내리는 눈
알 수 없는 바람결에 왔다가
때묻은 이름으로 불리우기 전
먼 부재(不在)의 기슭으로 떠나가는
새
너의 슬픔은 너무 가벼워
살아 있는 자의 가슴에
더욱 오래 머무르는 그림자를 남긴다
드높은 창공에까지 날아오르지 못한 채
나 사는 지붕 위를
한없이 맴돌고만 있는
둥지 없는 혼
너는
스러지기 위해
잠시 땅 위에 내리는 눈
순간의 거울, 창작과비평사, 1995
닫힌 방에서 나는 움직인다 이가림
닫힌 방에서 나는 움직인다
닫힌 방에서 나는 움직인다
죄없는 조랑말처럼 눈물어린 날의 저녁 무지개
아무도 보는 이 없는 창의 틈새를 통해
바라본다 새로 태어난듯 벗어버린 나라
밖은 바람이 지배하고 내가 부를 돌 하나 없다
이 미쳐 날뛰는 심장이 멈추기 전에
이 웅크린 침묵이 쓰러지기 전에 소리쳐야 한다
타인들의 발소리가 놀라 눈치채도록
빙하기, 민음사, 1973
도깨비불 이가림
도깨비불&
단 한번만이라도
꺼지지 않는 사랑 보듬어보기 전에는
늪 속에 빠져 죽을 수가 없어
밤마다 얼굴 없는 절망을 껴안고
공중에 떠돌아다니는 사내의
시퍼런 시퍼런 그리움
순간의 거울, 창작과비평사, 1995
돌 이가림
돌&
끝없는 밤의 추위에
온몸을 할퀴며 목말라 쓰러질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는다 기다리는 힘
새벽을 기다리는 힘
이 천박한 끈질김 저주받아
골짜기에 내던저져 파묻힐지라도
나는 잃지 않는다 기어이 태어날 꿈
더욱 큰 삶으로 일어설 뿌리이기에
피와 눈물의 땅 위에서
번갯불에 비친 찰나밖에는 살지 못해
바람이 불 때마다 뜨겁게 우는 것
두려움 없이 하늘을 쳐다보는 것
빙하기, 민음사, 1973
돌의 언어 이가림
돌의 언어(言語)
□ 1
그들은 웅크린 채 울고 있었다.
□ 2
무서운 폭풍 속에 던져진 스스로의 무게를 미칠듯이, 괴로운 극광(極光)을 향하여 소리치다 소리치다 굳어간 형자(形姿). 어느날엔가 숨가쁜 노여움을 잔인하게 모으고 핏멍울 엉긴 자기를 참으로 응시해보려는가. 학살하려는가. 아아 도망을 치려는가.
□ 3
어쩌다가 흐느적이는 용암의 검은 파열이 솟구쳐 소리없이 울음을 깨무는 표정으로 뜨겁게 피어오른 죽음의 돌, 젊은 날개가 새로이 퍼덕이려는 라자루스의 찬란한 내부여. 피를 쏟아라, 비상하라, 선고당한 수인(囚人)의 정물 같은 동작을 깨뜨리기 위하여.
어쩌다가 징그러운 대륙의 물어뜯는 몸부림이 뒤채어 황홀하게 생명을 불사르는 욕정으로 순간 치켜오른 번뇌의 돌, 피투성이 꽃들이 순수히 터져나오려는 라자루스의 처절한 심장이여. 강물 넘쳐라, 부서져라, 통곡하라, 선고당한 수인(囚人)의 기도 같은 중심을 확인하기 위하여.
□ 4
지금 숨막히는 중량의 손은 무수히 그 황토 밭허리를 뒤덮어 상흔(傷痕)이 흐르던 가시철망의 흩어진 탄피와 어둔 바람 속에 쓰러져 누운 주검들의 하얀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
몸 저리는 포효의 손은 지금 수없이 그 황량한 벌판을 찢어져 깃발이 나부끼던 토치카의 아련한 육성과 피보라 안개 속에 까무러쳐 잠든 초병(哨兵)들의 캄캄한 침묵을 생각하고 있다.
□ 5
돌.
□ 6
해맑은 대낮이 주린 배때기 속에 괴어 부글부글 몸둘레로 넘치거나, 말 못할 피곤의 달밤 조개껍데기들이 죽어 널려 있는 오지(奧地)의 자갈밭을 헤매거나, 나는 이 절대한 두 개의 침몰해가는 운명 곁에 돌아와 대리석처럼 야윈 나의 두 손을 받쳐든 채, 아아 나는 어둠 안에 일그러진 얼굴을 파묻었다.
□ 7
한덩이 운석의 내부로부터 차고 쓰린 질식이 공간 속을 휘몰아, 왁자하게 제왕의 목울음을 태우며 녹아 빚어진 바다.
위대한 적멸 속 들끓는 바다의 처참한 고함 소리는 이미 그 누구의 귓가에도 들리지 않는 들리지 않는 침묵.
빙하기, 민음사, 1973
뒷개에서 이가림
뒷개에서
슬프고 외진 데서는
아주 따스한 어둠이 기다리고 있어
고달픈 뱃사람들을 덮어주는 것인가
바닷바람의 머리칼이
솜사탕보다 더 푸근하구나
이땅의 한 끄트머리에
용골만 남은 폐선 서너 척 묶어 놓고
그 위에 앉아서 바라보는
아스라한 적막,
팔이 아프도록
한없이 길어올리는 술의 두레박,
동강난 몸뚱이가 되어서조차
혀에 달라붙어 꿈틀거리는 낙지발의
헛된 절망적 싸움처럼
누군가 잔인한 이빨에
나 또한 아프게 물어뜯기우리
땀내나는 숨결 속에서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창작과비평사, 1981
땅뺏기 이가림
땅뺏기
동구 밖 왕골논에 지는 땅거미
한 뼘씩 따먹어들어가던 황토 길바닥 떠오르네
호박넝쿨 뒤엉킨 담장아래
꿈틀거리며 기어가던 나방이는 무엇이 되었나
이십오, 육년(二十五, 六年)도 전에 귓가에 맴돌던 풍뎅이 울음 들리는듯
지금 내 귓가에 돌아오는 소리여
쇤 삘기같은 계집애들 나부껴
깡마른 노래의 고무줄이나 넘고 있는 동구밖
이십오(二十五), 육년(六年)도 전에 곱돌로 그어둔 땅은
지워지고 지워진 흔적마저 없네
빙하기, 민음사, 1973
또 하나의 돌 이가림
또 하나의 돌
벌거벗은 벌판에 서서
나는 바라본다 캄캄한 밤이 오는 쪽을
오랜 굶주림 속에 버려진 어머니의 나라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장님으로
나는 모든 것을 바라본다
나는 바라본다 국도(國道)의 끝을
몸 전체가 불타는 저녁 노을 받아
몇명의 사역병들이
야전삽으로 안개를 퍼올리는 곳
임진강 모래밭에서 빛나는
노오란 털의 땀방울들
나는 바라본다 슬픈 증인처럼
어둠과 망각의 밑창에 잠들 수 없는
강한 바람을 향해 싸우는 나날
이마에는 그림자 깊게 파이고
살면서 부서져가는 것
나는 껴안는다 다만 나 자신의 죽음을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창작과비평사, 1981
마라도를 향하여 이가림
마라도(馬羅島)를 향하여
진눈깨비 붐비는 저녁 별도(別刀)에서
나보다 더 많은 비애(悲哀)를 알고 있는
파도와 함께 흐느낀다 청춘의 쓸개까지도
싸게 팔아버린 서울의 10년이여
이 마른 갯벌에 몰려오는 안개마저
벌거벗은 내 마음을 적셔주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한숨의 끝, 슬픈 감탄사(感歎詞)인
마라도여, 갈매기 피울음 우는 땅
끝의 끝에 가서 죽고 싶다 무서운 절교(絶交)로서
외칠 수 없는 것을 외치고 싶다
빙하기, 민음사, 1973
모닥불 이가림
모닥불&
한 무더기 동백꽃인 양
변두리 눈밭에서 피어나는 것
숨어서 더욱 타오르는 것
강아지도, 구두닦이도, 자전거 수리공도,
몸 파는 아가씨도
서로 다투어 꽃송이를 꺽는가
둥그렇게 둥그렇게 어우러져
언 손들을 내뻗고 있구나
노을빛인 양 물든 인간의 고리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창작과비평사, 1981
목마름 이가림
목마름
부제 : 옥봉(玉峰) 이씨(李氏)에게 보내는 편지
그대가 밤마다
이곳 문전까지 왔다가 가는
그 엷은 발자욱 소리를
내 어찌 모를 수 있으리
술 취하여
그대 무릎 베개 삼아
잠들고 싶은 날
꿈길
어디메쯤
마주칠 수도 있으련만
너무 눈부신 달빛 만리(萬里)에 내려 쌓여
눈먼 그리움
저 혼자서 떠돌다가
돌아올 뿐
그 동안
돌길은 반쯤이나 모래가 되고
또 작은 모래가 되어
흔적조차 사라져
이젠 내 간절한 목마름
땅에 묻고
다시 목마름에 싹 돋아
꽃필 날 기다려야 하리
순간의 거울, 창작과비평사, 1995
물수제비 뜨기 이가림
물수제비 뜨기
내가 던진 돌멩이가
물 위를 담방담방 뛰어가다가
간 곳 없이 사라진다
측심기로 잴 수 없는
미지의 바닥에 돌멩이는 잠드는 것일까
잠시 일렁이던 파문도 자고
물 거울에 뜨는 산 그림자의
입 다문 얼굴,
나는 무감동한 고요를 께뜨리기 위해
또 하나의 돌맹이를 멀리 팔매친다
죽음에 배를 대고
팽팽한 찰라만을 디디고 가는
한 줄기 생명의 퍼덕임을
어렴풋이 보았다
아이와 함께
물수제비 뜨는 날
순간의 거울, 창작과비평사, 1995
바지락 줍는 사람들 이가림
바지락 줍는 사람들
바르비죵 마을의 만종 같은
저녁 종소리가
천도복숭아 빛깔로
포구를 물들일 때
하루치의 이삭을 주신
모르는 분을 위해
무릎 끓어 개펄에 입맞추는
간절함이여
거룩하여라
호미 든 아낙네들의 옆모습
순간의 거울, 창작과비평사, 1995
반도의 눈물 이가림
반도(半島)의 눈물
기러기여 눈물나게 아름다운 우리나라의
푸른 하늘에서 소총에 맞은 기러기여
울어다오 자유의 이마가 깨어져
반절의 지도보다 커다랗게 피가 얼룩지는 것을.
보이지 않는 조정(朝廷)의 뒷 뜰에서는 날마다
더러운 무소들의 싸움이 들려오고
딴 아픔 딴 목소리의 털보들에게 밟혀
젊은 보리들은 배에 실려 팔려간다 모르는 곳
캄캄한 자본의 구렁으로 죄수들처럼
아아 모가지여, 전당잡힌 모가지여
빙하기, 민음사, 1973
뱀에게 이가림
뱀에게
뱀이여 불의 딸이여 오라
독기에 찬 혀의 그늘, 무르익은 살갗
마치 굴렁쇠를 굴리는 여름 아이와 같이
빨간 열기를 뿌리며 물을 향한 움직임으로
얼마나 많은 때를 견뎌왔느냐
두려움도 지혜도 없이 칼날 같은 풀들 사이
날름대는 본능을 떨면서 밤을 통해
기쁨의 시초를 떠올리는 자
오 뱀이여 오라, 저주받은 불을 끌고
언젠가 미지의 구멍 속으로 한가닥 어둠을 문 채
사라져간 날의 노여움이 싹트듯
얽매인 자기 동일성에 꿈틀거리는 혈관마다
피의 울음 소리는 뜨겁게 달리는구나
아직 닿지 않은 두 개의 살이
기묘하게 맺어지는 것의 잔인함을
이성(理性)의 빛이 약해지거든
뱀이여 불의 딸이여 오라
빙하기, 민음사, 1973
봄눈 이가림
봄눈&
가도가도 엎드린 벌판
바라보면 머리 조아린 지붕들 모여
어스름 불빛같이 안스러워라
내려 앉을 데 하나 없는
벌거숭이 산(山)번지
가벼운 한숨인 양 떠도는 것들
이 세상 가장 환한 꽃잎 되어
흩어지리, 헤픈 사랑 되어
넝마주이 변두리나 쓸어주리
맨 길바닥 아무데고 살 대면서
스러지는 눈물 몇점(點)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창작과비평사, 1981
비용의 노래 이가림
비용의 노래
아주머니
나 술 한잔만 더 주세요.
솜사탕 같은 눈송이가
이 세상의 어디에나 아낌없이
펑펑 쏟아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조금 미쳐볼 수 없을까요.
옛날에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
오늘도 바람 부는 저녁거리를
흐르며 헤매이다가,
눈발 속에서
아프게 아프게 살아나는 추억의
작은 구두가 이끄는 골목에 들어서면
한때 사랑했던 나의 여자 아뉴따가 살던
지금은 비행기의 불총으로 파괴되고 없는
그 불탄 자리, 그 정든 땅에
새로 난 주막의 불빛만 보입니다.
나의 고향이 어디냐구요?
찾아가 묻힐 안식이 없는
한 그루의 위험한 은화식물(隱花植物)은
언제쯤 뿌리의 자리를 잡고 서서
순한 연초록 잎사귀를 빗길 것인가.
내리어라, 사랑이여 내리어라
어느것 하나 가까이 할 수 없는
이 빙하의 가슴 가득히
따스한 입김, 따스한 음악으로
흘러넘치는 강하(江河)를 이룰 때까지
뿌리어라, 하늘의 양식이여 뿌리어라.
수많은 애정의 잎들은
무심히 나의 외투에 이마에 머리칼에
내려 쌓이고 자꾸만 내려 쌓이고
흰 겨울의 달은 헤설프게
슬픈 바람을 지켜주는 나무 끝에서
은가락지처럼 짤랑짤랑
마른 음성으로 웃고 있는데,
달빛의 물결이 흐르는 꿈속
누가 치고 있는 월광곡인가.
먼 생활의 창가에서 울려오는 저음의
한줄기 눈물로 떨어지는 건반 소리,
나는 무한한 평화의 하늘을 향해
백랍(白蠟)의 얼굴을 맡긴 채
그리운 이름들을 불렀습니다.
아주머니,
나 술 한잔만 더 주세요.
솜사탕 같은 눈송이가
이 세상의 어디에나 아낌없이
펑펑 쏟아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조금 미쳐볼 수 없을까요.
빙하기, 민음사, 1973
빙하기 이가림
빙하기(氷河期)
그 헐벗은 비행장 옆
낡은 예레미야 병원 가까이
스물아홉살의 강한 그대가 죽어 있었지.
장 바티스트 클라망스
스토브조차 꺼진 다락방 안 추운 빙벽(氷壁) 밑에서
검은 목탄으로 뎃상한 그대 어둔 얼굴을 보고 있으면
킬리만자로의 눈 속에 묻혀 있는 표범 이마,
빛나는 대리석 토르소의 흰 손이 떠오르지.
지금 낡은 예레미야 병원 가까이의 지붕에도
눈은 내리고
겨울이 빈 나무 허리를 쓸며 있는 때.
캄캄한 안개 속
침몰하여 가는 내 선박은
이제 고달픈 닻을 내리어 정박하고서
축축히 꿈의 이슬에 잠자는 영원인 것을,
짙은 밤 부둣가 한 모퉁이로
내 아무렇게나 혼자서 떠나보네,
갈색 머리 흑인여자의 서러운 이빨같이
서걱이는 먼 겨울 밤바다 살갗은
유리의 달에 부딪쳐 바스러지고
죽음보다 고적한 외투 속의
내 사랑은
두 주일이나 그냥 있는 젖빛 엽서
나목 끝에 마지막 한장 가랑잎새로 지는 것을
씁쓸히 웃으며 있네.
지난 쌩 마르뗑의 여름 밤주막에서
빨갛게 등불을 켜 달고
여린 별빛들이 우리 잔등에 떨어져 와닿는,
들끓는 소주를 독하게 마시며 울었지.
장 바티스트 클라망스
그대 건강한 의사가 되겠다고 여름내 엄청난 야망은 살아
자기 안의 한 무더기 폭약에 방화(放火)도 했지만
참혹하게 파손되어 간 내실(內室)이었음을,
어느 저녁 식탁에선가, 눈물 글썽이게 하는
그대 슬픈 소식을 건네 들었지.
지금은
옷고름처럼 나부끼는 달빛에 젖어
마른 갯벌 바닥으로 배회하다
무릎까지 빠지는 맨발의, 괴로운 밤 게[蟹]가 되어서 돌아오는
조금씩 미쳐가며 나는 무서운 취안(醉眼)인 채
황폐한 자갈밭을 건너
흐린 가스등 그늘이 우울한 시장가에서
눈은 내리고
하얀 수의(囚衣) 입은 천사처럼 잠시 죽어봤으면 생각하다가
포효의 거대한 불꽃으로나 멸망하기를 소망하다가,
아아 자꾸만 목이 메이고 싶어지는
내 고단한 목관(木管)의 노래는 떨려
오뇌의 회오리 바람에 은빛 음계들이 머리칼마다
흩날리며 있네.
그 드뷔시 찻집 유리 속의 금발이 출렁이는 인형은
젖은 눈이 성에 낀 창밖을 보고
수런대는 목소리들 잔 둘레로 넘쳐나
비듬처럼 쌓여가는데
잊히인 의자 아래 이랑져 오는 음악의 꽃빛 눈부시는
바람결 소리여,
이 침전하는 장송(葬送)의 파도가에 앉아서 단 한 번
고운 색깔이 아롱진 어안(魚眼)의 나는
뜨거운 두 손으로 피곤한 이마를 묻어보네.
빙하기, 민음사, 1973
새우잠 이가림
새우잠
전세에서 전세로 쫓겨다니는
변두리 내 식구들, 그 무슨 기다림에도 길든
30촉 전등불의 정다움을 찾아
눈 내리는 자갈밭 술 취해서 간다
밤마다 새우처럼 허리 구부리고
나는 어린 딸의 발가락을 만지며 잔다
이 석화(石花) 껍질 같은 지구의 한모퉁이
살아 있는 몇 마리 새우들
고달픈 어미는 가로로 쓰러지고
새끼들은 세로로 쓰러져서
차디찬 식은땀의 잠꼬대들이다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싸움이냐
꿈속에서도 깊은 바다 밑을 헤매며
검은 상어에게 쫓겨다니는 길뿐이니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창작과비평사, 1973
석류 이가림
석류&
언제부터
이 잉걸불 같은 그리움이
텅 빈 가슴 속에 이글거리기 시작했을까
지난 여름 내내 앓던 몸살
더 이상 견딜 수 없구나
영혼의 가마솥에 들끓던 사랑의 힘
캄캄한 골방 안에
가둘 수 없구나
나 혼자 부등켜 안고
뒹굴고 또 뒹굴어도
자꾸만 익어가는 어둠을
이젠 알알이 쏟아 놓아야하리
무한히 새파란 심연의 하늘이 두려워
나는 땅을 향해 고개 숙인다
온 몸을 휩싸고 도는
어지러운 충만 이기지 못해
나 스스로 껍질을 부순다
아아 사랑하는 이여
지구가 쪼개지는 소리보다
더 아프게
네가 깨뜨리는 이 홍보석의 슬픔을
그대의 뜰에
받아주소서
순간의 거울, 창작과비평사, 1995
솔바람 소리 속에는 이가림
솔바람 소리 속에는
솔바람 소리 속에는
뒤돌아, 뒤돌아보며 떠나간 사내의
못내 아쉬운 마지막이
보이는 듯
보이는 듯도 하여라
솔바람 소리 속에는
우우우, 우우우 밀려가던 아우성의
살아나는 듯
살아나는 듯도 하여라
솔바람 소리 속에는
지나가, 지나가 버려 다 잊어버린 어메의
이젠 서러울 것조차 없는 한평생이
흐느끼는 듯
흐느끼는 듯도 하여라
솔바람 소리 속에는
산비탈 기어올라 칡뿌리 캐던 어린날의
푸른 상채기뿐인 얼굴이
숨어 있는 듯
숨어 있는 듯도 하여라
솔바람 소리 속에는
기어이, 기어이 피어나고야 말 그리움의
먼 강물 같은 이야기가
흘러가는 듯
흘러가는 듯도 하여라
순간의 거울, 창작과비평사, 1995
순간의 거울 1 이가림
순간의 거울 1
대지의 눈이
하늘의 거울을 바라보고 있다
눈 가장자리에
배 한 척이
가느다란 파문을 내이며 미끄러져 간다
몇 마리 놀란 구름 조각들이
물고기처럼 지느러미를 흔들며
잽싸게 흩어진다.
순간의 거울, 창작과비평사, 1995
순간의 거울 2 이가림
순간의 거울 2
가랑잎 하나가
화엄사 한 채를 싣고
먼 가람으로 떠난 뒤
서늘한
기러기 울음
후두둑 떨어져
물거울 위를
점자(點字)인 양 구른다
노을 타는
단풍밭
보라빛 이내에 묻히고
깊은 하늘의 이마에 걸린
가버린 누이의 눈썹
그 그늘에 이슬들
아롱아롱 맺힌다
가랑잎 하나가
가을의 끝
한줌의 허무를 싣고
먼 어둠으로 떠난 뒤
순간의 거울, 창작과비평사, 1995
야경군 1 이가림
야경군 1
나는 성냥을 켠다, 거대한 어둠
외칠 수 없는 침묵의 구멍 속에 사로잡힌 채
먼데서 오는 수억만 개의 소리를 듣기 위해
잠시 세계의 저쪽으로 귀를 기울인다.
누이여, 키작은 흐느낌의 풀꽃이여
푸른 독약처럼 퍼져가는 나의 비애를 아느냐.
정다운 항구도 닻도 없이 헤매는
한 괴로움과 한 괴로움이 만나는 미지의 섬들 사이
어려서 익사한 혼의 도깨비들이 반짝거린다.
깊은 숲으로부터 솟아오른
한 마리 취한 자유의 새가 하늘의 끝을 넘어
일찌기 그의 나라였던 나라로 날아간다.
누이여, 키작은 흐느낌의 풀꽃이여
진남포 억량기리의 보리밭가를 지나온 바람 같이 눈부신
하나의 소리가 내 현존의 가운데를 뚫고 간다.
너무나 그 떨림이 강해서 나는 더욱 움직일 수가 없구나.
몇번이고 목마름의 벽에 이마를 부딪치며
탐색의 곡괭이로 어둠을 찍어내린다, 참된 사랑의 불을 구하기 위해
왜 나는 이 모든 사물들의 잠을 지켜야 하는가
이 모든 집들의 잠을.
빙하기, 민음사, 1973
야경군 3 이가림
야경군 3
한 가마니씩 무거운 가난을 지고
무명옷 입은 고무신들이 지나간 발자욱에
빗물이 고인다 한없이 죽고 싶은
법이 없는 내 고향 필생(畢生)의 논
불쌍한 발동기가 밤새워 돌다가
지친 노동의 끝에 한숨지듯 스스로 꺼진다
노오란 안개와 함께 강물은 죽어 있는 것일까
이제 더 이상 굶주림을 말하지 않는다
어린 달래들은 어려서 구겨지고
힘의 남근(男根)도 모두 병든 뿌리 뿐인 것을
짐승같이 털난 맨가슴의 싸움
그 퍼런 쟁기날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요즘 신문이 지껄이는 거짓말과 거짓말의
비겁함 뒤에서 뜨겁게 우는 땅
나는 엎드린다 하나의 풀잎으로
빈 들녘 어스름 속에서
빙하기, 민음사, 1973
어떤 안부 이가림
어떤 안부(安否)
다시는 다시는 되찾을 수 없는 것을 잃어버린 사람에게(보들레르)
전라도 정읍 산성리의
우리 외할머니네 집 굴뚝 밑에
묻어 놓았던 옥색 구슬은
순수하게 빛나며 아직 있을까.
얄미운 개가 매장된 시체를 파헤치듯
우왁스런 발톱으로
꺼내 버렸으면 어떡허나.
그 굴뚝 근처에서
금순이들과 모여 저녁마다
꿩의 깃털을 등에 꽂고
나는 숨바꼭질을 하며 즐거웠다.
어릴적, 그때 술래가 되어 숨은 뒤안의
귓속말 주고 받는 내외같이
정정하게 서 있던 은행(銀杏)나무는
지금쯤 목관(木棺)이라도 지을만큼 자라서
무성한 그늘로 지붕을 덮었겠지만,
무척이나 높아 보이던
한쌍 까치의 둥우리는 남아 있을까.
손 안닿는 정상(頂上)의 가지새에
오늘도 태연히 그냥 있을까.
바람개비처럼 사계(四季)의 바퀴는 돌아
삐걱 삐걱 굴러서 가나
위안도 없고 물소리 하나 없는
소란스런 시장(市場)속을 흘러가며
가금 짧막한 탄식이 터져나오는 것을 어찌하랴.
매마른 뇌수에 파인 생명의 샘처럼
생각 속에서만 간직되어 있는
내 소년의 동정(童貞)이여.
시방
저 전라도 정읍 산성리의
우리 외할머니네 집
왕골과 갈대풀 냄새가 나는
그 굴뚝밑으로 찾아가면,
겹눈이 기묘한 모밀 잠자리며
날카로운 밤새의 웃음소리 들리고
보릿대 타는 연기(煙氣)속에
별과 정령(精靈)과 그 무슨 꿈의 벌레들이 보일까.
빙하기, 민음사, 1973
오랑캐꽃 1 이가림
오랑캐꽃 1
나를 짓밟아 다오 제발
수세식 변소에 팔려온 이 비천한 몸
억울하게 모가지가 부러진 채
유리컵에나 꽂혀 썩어가는 외로움을
이 눈물겨운 목숨을, 누가 알랴.
말라 비틀어진 고향의 얼굴을 만나면
죽고 싶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슬픈 전라도 계집애의 죄,
풀꽃들만 흐느끼는 낯익은 핏줄의 벌판은
이미 닳아진 자(者)를 받아주지 않는다.
쑥을 뜯고 있는 주름살의 어머니에게
마지막으로 갈 수 있을까.
이 곪아 터지지도 못하는 아픔
맥주잔에 넘치는 비애의 거품을 마시고
더럽게 더럽게 웃는 밤이여
나를 짓밟아 다오 제발
빙하기, 민음사, 1973
오랑캐꽃 2 이가림
오랑캐꽃 2
나는 간다
쓰레기 되어 나는 간다
찬 새벽밥 물 말아 먹고
낮도 밤도 전등불뿐인
길고긴 가발공장
또 목마른 하루를 벌러
아직 덜 깬 눈썹의 잠을 털며 털며
해골 같은 연탄재 널린 길
나는 간다
여름 억새풀들 종아리를 긁히우는
백암리(白岩里) 길 그립다
나는 간다
쓰레기 되어 나는 간다
달랑달랑 목숨 같은 도시락 들고
알 수 없는 그림자의 입
멀고먼 아메리카
꿈길에도 못 만날 갈색머리 빗질하러
아침 노을에 어리는 눈물 마시며 마시며
녹슨 고철더미, 웅덩이 파인 길
나는 간다
여름 억새풀들 종아리를 긁히우는
백암리(白岩里) 길 그립다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창작과비평사, 1981
오랑캐꽃 3 이가림
오랑캐꽃 3
짐짝과 함께
화물트럭에 실려서 왔다
찬 번갯불에 드러나는 이 빈약한 얼굴
항구에는 눈비 내리고
나는 혼자였다
철새들이 곤두박히는 하늘
옛 미두장(米豆場)의 양철지붕 삐걱거리는 소리 들리고
길게 우는 뱃고동
뼈대뿐인 배들이 떠 있는
노란 등불들의 한모퉁이
나는 낯선 슬픔을 찾아 기웃거렸다
술 취한 망나니같이
바람이 사방팔방으로 춤추고
검은 물결들은 상어떼로 갈라져
나를 물어뜯었다
ꡒ거꾸러져라, 거꾸러져라……ꡓ
한밤중 철교를 건너는 꿈
사내는 지폐처럼 구겨지고
나는 자꾸 목이 말랐다
모래처럼
하얗게 하얗게 외로움만 남고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창작과비평사, 1981
오랑캐꽃 4 이가림
오랑캐꽃 4
언니야, 저녁이면 집게 부러진 게[蟹] 되어 어기적거리는 사내를 본다. 또 저녁이면 기름 보자기 되어 굴러오는 아이를 본다. 또 저녁이면 절름발이 노새 되어 덜컹거리는 달구지를 본다. 또 저녁이면 참담한 고기 몇마리 매달고 헉헉 돌아오는 발동선을 본다. 살갗 터지고 얼굴 부서져 쿨럭이는 헛김만 목소리라고 외쳐대는 막국수 시간, 시린 손에 손을 포개는 모닥불 식구들의 둘레, 복수(複數)로 살아 있는 그림자의 움직임을 본다, 언니야.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창작과비평사, 1981
오랑캐꽃 5 이가림
오랑캐꽃 5
뜨물같이 가라앉은 날
그저 망연히
불구의 포플러 몇 그루 먼 데를 바라보는
저녁 천변에 서면
구름조각들 뿔뿔이 달아나는
개울 위에 뜬 무쇠 녹물의 무지개
아름다와라 온갖 썩어가는 것들의
광채나는 기다림이여,
교대를 하러 가는
태평동(太平洞) 방직공장 계집애들의
신발 끄는 소리에도 가을은 오는가
가랑잎 쏠리는 길
피어오르는 안개의 울부짖음
가슴 허공 깊이 다져넣어
불러본다
다 망가지고 망가진 사랑노래를,
가만히 기대자마자
무너져버리는
밤의 살
내가 기댈 곳은
이제 이 땅 위엔 없는 걸까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창작과비평사, 1981
오랑캐꽃 6 이가림
오랑캐꽃 6
강물이
저문 강물이 내게 일러준다
일그러진 이름일랑
물거품에 실어 보내고,
서울이 가르쳐준 모든 것을
이젠 모래톱에 묻어버리라고,
강물이
저문 강물이 내게 일러준다
삐비꽃 팰 무렵 둑길에 서서
두 팔로 안아보던 만경(萬頃)벌
논 내음새
꿈엔듯 스며드는 바람을
찾아가라고, 찾아가라고
강물이
저문 강물이 내게 일러준다
살결에 찍힌 수없는 발자욱의
메이드 인 U.S.A.
슬픔도 땀방울도 다 한데 모아
쓰레기통에 불태우라고
내던져버리라고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창작과비평사, 1981
오랑캐꽃 7 이가림
오랑캐꽃 7
나는
오늘도 버스를 타고 먼지의 도시로 간다
나는 오늘도
버스를 타고 먼지의 도시로 간다
나는 오늘도 버스를
타고 먼지의 도시로 간다
나는 오늘도 버스를 타고
먼지의 도시로 간다
나는 오늘도 버스를 타고 먼지의
도시로 간다
나는 오늘도 버스를 타고 먼지의 도시로
간다
나는 오늘도 버스를 타고 먼지의 도시로 간다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창작과비평사, 1981
오랑캐꽃 10 이가림
오랑캐꽃 10
밤으로 빠져 나온 곳
이끌리어, 다시 이끌리어
예까지 몰래 왔다
범인이 현장에 다시 찾아가듯
지금 갈꽃 날리는 방죽가에 돌아와
숨어서 바라본다
엎드린 게딱지 지붕들의
촉수 낮은 불빛을
성큼 들어서지 못하고
문 밖에서만 엿보는 마당
퀴퀴한 청국장이라도 끓이고 있는가
어둑한 부엌에서
새어 나오는 어머니의
달그락거리는 소리
나는 돌아가야 한다
부서진 얼굴을 감추고
돌아가야 한다
저 번쩍이는 도시의 수렁 속으로
밤 속으로
순간의 거울, 창작과비평사, 1995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이가림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모래알 같은 이름 하나 불러본다
기어이 끊어낼 수 없는 죄의 탯줄을
깊은 땅에 묻고 돌아선 날의
막막한 벌판 끝에 열리는 밤
내가 일천번도 더 입 맞춘 별이 있음을
이 지상의 사람들은 모르리라
날마다 잃었다가 되찾는 눈동자
먼 부재(不在)의 저편에서 오는 빛이기에
끝내 아무도 볼 수 없으리라
어디서 이 투명한 이슬은 오는가
얼굴을 가리우는 차가운 입김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물방울 같은 이름 하나 불러본다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창작과비평사, 1981
이끼 낀 고향에 돌아오다 이가림
이끼 낀 고향에 돌아오다
맨드라미 몇 송이
머리 잘려 서 있는 길
그날의 불 뿜는 기총소사
곰보가 된 흙벽돌 담장 너머
내 어릴 적
국민학교 운동장 바라보면
까마중 따먹던 시절이
흰 자막(字幕)처럼 지나가고
시외버스 정류장 옆 빈터에
산나물 팔러 오는
먼 친척인 것만 같은 아낙네들의
새까만 얼굴들,
소주 마신 듯
붉은 달이 비틀거리는
개울물에
바퀴를 씻고
무거운 그림자 끌며 돌아가는
달구지들의 하루
짠 고들빼기 김치맛 나던 곳
고왔던 양가집 사랑 모두 시들어져
낯선 골목마다
다 닳아진 창(唱) 몇 가닥
빨래처럼 펄럭이누나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창작과비평사, 1981
이슬의 꿈 이가림
이슬의 꿈
내가 이슬이 되어
칼날 선 풀잎을 타고
차디 찬 어둠을 넘어서 가는 새벽
그 실날 같은 외길 끝에
언제나 나를 부르는 별 하나
떨고 있었네
천길 벼랑 위에
환한 금강초롱의 등불로 매달려
날 기다리는 얼굴 하나 있어
입술 터지고
무릎 피멍들어 문드러져도
캄캄한 안개 속
홀로 갈 수 있었네
삶은 온몸을 찰나에 내던지는
눈부신 죽음
그대와 나
조그만 빛의 이슬이 되어
생의 사닥다리
그 아득한 꼭대기에서 떨어지고파
부서지고파
순간의 거울, 창작과비평사, 1995
정읍기행 이가림
정읍기행(井邑紀行)
개구리들이 육자배기로 울어제키는
논길을 가면 떠올라라 대창에 찔려
곤두박힌 어떤 장정의 피묻은 잠
약삭빠른 비료가 무더기로 밀어닥쳐
그 꿀벌떼 잉잉대던 자운영 논을 뒤엎고
남은 건 한 가마니의 빈 겨
한 가마니의 설움 뿐
두엄자리 오줌에 재려 태어난
일찌기 뒈져야 마땅한 낱알로서 버려진 머슴으로서
들말같이 살아온 흉터의
사내가 낫을 들어 내리찍은 그림자
제길할, 제길할, 제길할
푸짐한 달덩이도 뜨면 무엇하나
홀로 골방에 가서 죽을거나
옛 방앗간의 전깃불 아래
한 사발 막걸리를 얻어마시고
논길을 가면 부끄러워라 서울에서 팔린
젊은 늑대의 발톱, 빛나는 이빨
빙하기, 민음사, 1973
찌르레기의 노래 3 이가림
찌르레기의 노래 3
지상의 오막살이 집 한 채
그 아궁이에 기어드는 가랑잎같이
그대 따스한 슬픔에
내 언 슬픔을 묻을 수 있다면
이 세상 밤길 뿐이었던 나날들
언제나 캄캄했다고
말하지 않으리
우리가 정녕
생의 거미줄에 매달린
하나가 되기 위한 두 개의 물방울 같이
마주보는 시선의 신비로 다가간다면
번개불 번쩍 내리쳤다 스러지는
그 찰나 그 영원 속에
별 머금은 듯 영롱한
눈물의 보석 하나
아픈 땅에
떨굴 수 있으리
지상의 오막살이 집 한 채
그 아궁이에 기어드는 가랑잎같이
오늘밤
화알활 피어나는
그대 모닥불 품에
내 사그러져가는 영혼의 숯을
태우고 말리
순간의 거울, 창작과비평사, 1995
풀 이가림
풀&
벌거벗은 칼날처럼
나 그렇게 꽂혀서 살으리,
어디쯤인가 발짝 소리 울리며
더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오는 그대 봄이여,
한아름 껴안고 싶은 이 목메인 그리움
너무나 커다란 맨가슴이기에
이 언 살결로는 기댈 수 없구나
이 메마른 눈물 바칠 수 없구나
다가올수록
더욱 눈 멀게 하는 그대
힘을 내라, 빨리 힘을 내라고
내 엎드린 등 두드리지만
이 찢긴 입술로는
입 맞출 수가 없구나
얼어붙은 땅의 어둠을 밀어헤치고
한줌 푸르름이 있는 곳으로
더 높이, 더 높이
솟아오르고만 싶은 이 피묻은 몸부림
벌거벗은 칼날처럼
나 그렇게 꽂혀서 살으리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창작과비평사, 1973
프루스트의 편지 이가림
프루스트의 편지
누님, 기억하시겠지요. 우리의 귀여웠던 과거를 기억하시겠지요. 자살연습으로 그친 내 피스톨의 상처가 회복 될 수 있다면, 우리 고향의 성 미카엘 여자고등학교 근처에 꼭 한번 가보고 싶어요.
요새는 그르넬르 4가, 가장 윤택한 거리에 새로 편물상점을 하나 차리셨다지요. 얼마나 섬세한 마음의 실을 엮어보겠다고 기나 긴 한을 풀으시나요. 하루에도 몇 번씩 옛 사진첩을 넘기며 젖어 있나요.
그때 흰 가방을 팔뚝에 걸고 샌달을 신기 좋아했던 누님은 성 미카엘 여자고등학교 삼학년이었읍니다. 내가 중학교 축구선수의 유니폼을 빛내며 벽돌담 모퉁이를 돌아오는 저녁이면, 크림빛 옥상에서 노오란 애프론을 흔들거나, 종이 비행기를 날리기도 하였읍니다. 때때로 골목의 코나에 숨어 있다 나비처럼 몰래몰래 따라와서는 내 눈을 가리었고, 콤파스와 삼각자의 필통소리를 갑자기 내기도 하였지요.
그즈음 우리는 베드로 성당의 일곱번째 고목나무에 집게벌레의 집을 파놓았고, 키보다 더 자란 호밀들이 소금을 뿌린듯 반짝이는 그 비행장 공터에 오색 유리구슬을 묻었읍니다. 정말 완전히 증명된 피타고라스의 왕국안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즐거웠고 평안할 수가 있었읍니다.
색종이만큼이나 이쁜 지혜를 분도기로 재어가며 나는 정직하게 작문을 짓기도 하였지요. 그때의 제목에 `바다와 잠자리'라는 것이 있었던가요. 누님은 순결한 스카트 깊숙히 아네모네같은 비밀을 키워가며, 설겆이도 도와주던 고운 손으로 음악교실에서 피아노를 치기도 하였읍니다. 가끔씩 그 소강당 옆 담쟁이 돌담에 기대어 돌아보곤 했는데, 건반의 아주 환상적인 음계만을 건드리는 손이 어떻게 떨리는가 하고 안쓰러울 때가 많았읍니다.
누님, 기억하시겠지요. 우리의 귀여웠던 과거를 기억하시겠지요. 자살연습으로 그친 내 피스톨의 상처가 회복 될 수 있다면, 우리 고향의 성 미카엘 여자고등학교 근처에 꼭 한 번 가보고 싶어요.
빙하기, 민음사, 1973
피리타령 이가림
피리타령
가시내야, 가시내야
우리도 예전엔
한개 고운 피리였단다
가느랗게 심금(心琴) 울리는 피리였단다
그것은 어느 날인가
피 토하며 지지지 검은 불발탄(不發彈)이 관통해간
피리의 시커먼 구멍. 가시내야
그때부터 찢겨진 사랑의
텅빈 헛소리가 새었단다.
속아서 속아서 병든 게[蟹]같이 어기적거리며
지금은 더 슬프고 팍팍한 땅을 찾아
가고 있다, 가고 있다. 가시내야
비명 하나 내지르지 못하는
이 변두리의 삶을 불지를 수 있다면
뙤약볕 부서져 삐비꽃 피는 고향
바람부는 언덕에서 울고 싶어라.
영영 깨어져버린 피리의
얼빠진 헛소리는 얼마나 서러운 것인가
무심히도 가슴에 그리움 돋아
허연 못물같은 설움이 흐르누나.
가시내야, 가시내야
우리도 예전엔
한개 고운 피리였단다
가느랗게 심금(心琴) 울리는 피리였단다.
빙하기, 민음사, 1973
하나가 되기 위한 빗방울들의 운동 이가림
하나가 되기 위한 빗방울들의 운동
까마득한 높이에서
빗방울들이 수직으로 떨어진다
죽음조차 두렵지 않다는 듯
해맑은 얼굴로
떨어진다
떨어지는 빗방울들은
산산조각 제 몸을 땅에 바친다
아까울 것 하나 없는 운명이라는 듯
제 몸을 바친다
낮은 데로 낮은 데로 흘러
모여서
더 이상 갈라서지지 않는
하나의 무리가 되어
나아갈 제 길을 스스로 만든다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홈통을 타고 흘러내리는
이 조그만 것들의 가느다란 소리가
꽉 막힌 하수구를 뚫고 둑을 무너뜨리고
콘크리트 장벽을 허물게 되는 것을
하나뿐인 제 몸을 내던져
살갗과 살갗 서로 부비는
저 빛 머금은 눈물 같은
목숨들의 발걸음!
순간의 거울, 창작과비평사, 1995
하늘을 걷는 사람 이가림
하늘을 걷는 사람
한 세상
쓰레기 치우는 청소부 되어
온갖 더러운 길 다 쓸고 쓸다가
이제는 큰 발자국 내이며
성큼성큼 구름밭을 걷는
사람이여
그러나
그대는 언제나 땅에 묶여 있는
하늘의 나그네
해질녘 흐릿한 알전등 아래 날아드는
하루살이떼같이
때 절은 드럼통 술상 둘레에
불그레 흔들리는
못난 이름을 그리워
뼈만 남은 한 개 헐벗은 빗자루로 서서
오늘도 손 흔들고 있네
채찍 휘감기는 종의 잔등이 되라 하면
그 잔등이 되고
앉은뱅이 업어주는 발이 되라 하면
그 발이 되고
상처가 되고 감옥이 되고 죽음이 되어
떠돌고 또 떠돌다가
마침내 하늘과 땅 함께 걷는
우주의 주인이 되었는가
번갯불 번쩍이는 먹구름 사이로
언뜻 비치는
환한 얼굴 하나 보이네
순간의 거울, 창작과비평사, 1995
황토에 내리는 비 이가림
황토(黃土)에 내리는 비
동풍이 목놓아 소리치는 날
빈 창자를 쓰리게 하는 소주 마시며
호남선에 매달려 간다 차창 밖 바라보면
달려와 마중하는 누우런 안개
호롱불의 얼굴들은 왜 떠오르지 않는가
언제나 버려져 있는 고향땅
단 한번 무쇠낫이 빛났을 때에도
모든 목숨들은 언문(諺文)으로 울었을 뿐이다
논두렁 밭두렁에
장삼이사(張三李四)의 아우성처럼 내리는 비
캄캄한 들녘 어디선가
녹두장군의 발짝 소리 들려온다
하늘에게 직소(直訴)하듯 치켜든
말없이 젖어 있는 풀들의 머리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창작과비평사, 1981
황토길 가면 이가림
황토길 가면
온 세상 햇빛뿐인
내 고향 황토길 가면
떠나신 님 그리워 그리워라
솔바람 타고 떠나가신 님
아지랑이 아른아른 날 부르는데
정다운 목소리 간 곳 없어라
정다운 목소리 간 곳 없어라
온 세상 바람뿐인
내 고향 황토길 가면
푸르른 들 반가워 반가워라
뻐꾸기 홀로 울음 우는 곳
산 메아리 자꾸자꾸 날 부르는데
수줍은 찔레꽃 울듯 하여라
수줍은 찔레꽃 울듯 하여라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창작과비평사,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