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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이병주
해박한 지식과 낭만적 휴머니스트
강석호
(수필가․문학평론가)
나림 선생을 처음 안 것은 30대 중반 시골학교 선생으로 있을 때였다. 하루에 버스가 두 번 정도 드나드는 시골벽지에 있는 학교였기 때문에 대처로부터 듣는 소식은 라디오방송 아니면 신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라디오는 뉴스시간을 놓치면 들을 수 없고 자연 신문에 더 의존도가 높았다.
신문도 지금처럼 아침, 저녁 그날치의 조간, 석간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일주일 정도 지나서 우편으로 배달되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그것도 개인별 구독보다 학교에 배달되는 것을 먼저 보는 자가 임자였다.
나는 신문 보는데 눈독을 들여 배달부가 왔다 갈 시각이면 수업 마침종을 치기가 바쁘게 곧장 직원실로 가서 신문을 먼저 펼쳐보았고 우선은 제목만 대강 보고 방과 후에 직원실에 혼자 남아 뉴스뿐 아니라 남들이 잘 안보는 사설과 광고까지 한 자도 빼놓지 않고 보고 나서야 퇴근길에 오르곤 했다.
그때 학교에서 구독하는 신문은 중앙지 1종과 지방지로는 ������국제신보������였다. 그 당시는 경남도와 부산시가 분리되지 않은 때였고 부산에서 부산일보와 국제신보가 나왔는데 부산일보는 사세가 좋아 지면이 좀 다양했고 국제신보는 사설이 좋은 편이었는데 우리 학교는 육성회장과 국제신보 지국장이 친하여서 국제신보를 보게 되었다.
나는 누구의 연줄로 보게 되었든 사설이 좋은 신문을 보게 된 것을 퍽 다행으로 여기고 사설과 칼럼을 즐겨 읽었다.
그런데 그때 그 신문의 편집국장 겸 주필이 이병주 선생이었다. 물론 사설 모두를 주필이 쓰는 것은 아니지만 비교적 정론을 펴고 독자들의 궁금한 곳과 아픈 곳을 찝어 주는 것은 주필의 의도에 따른 것이라 생각되어 호감을 갖고 꼼꼼히 읽었다.
뒤에 알고 보니 이병주 선생은 고향이 하동군 북천면으로 나와 면은 다르나 같은 군 출신이었고 진주농업학교를 거쳐 일본 명치대 전문부를 마치고 와세다대 불문과에서 수학한 당시는 드문 지식인이란 것을 알았다. 뿐만 아니라 선생은 4․19 직후 하동에서 전직교수(진주농대)로서 국회의원에 출마하였는데 유세장에서 뜻있는 유권자들로부터 해박한 달변가로 인기를 얻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일부러 시간을 내어 그의 유세장에 가서 연설을 들은 바도 있다. 그때 역시 선생은 다른 입후보자들이 농촌농민들의 구미에 맞는 인기몰이 만담이나 제스처를 쓰는데 비하여 지식인답게 당시 자유당의 독재성과 부정부패를 조목조목 열거했고 또 간혹 명저와 명언을 인용, 수준 있는 연설을 했다. 그러나 당시 정권의 횡포와 그리고 농촌농민들의 수준에 그런 지식이 통할 리도 없어 낙선은 당연한 것이었다.
나는 잠깐이나마 그의 유세를 듣고 선생의 실력에 매료되었으나 한동안 잊고 있다가 그가 신문의 편집국장 겸 주필이 되어 필봉을 휘두르자 그 기억을 되살리며 더욱 관심을 가지고 그 사설을 읽었다.
그러던 어느 해 가을 부산에 가서 볼일을 보고 시간이 남아 헌 책점을 뒤지다가 그의 소설 ������내일 없는 그날������을 발견, 그가 정치 사회의 해박한 지식 뿐 아니라 문학에도 조예가 깊다는 것을 알고 그가 쓴 글은 보이는 대로 읽는 등 어느덧 그의 팬이 되고 말았다.
소설 ������내일 없는 그날������은 등단 전 부산일보에 연재된 것을 단행본으로 출간한 것임을 뒤에야 알았다. 그러다가 5․16 이후 그가 쓴 한반도의 영세중립론 주장과 교원노조를 지지하는 사설이 군사정권의 비위를 거슬러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았다.
출옥 후 선생은 문단 데뷔작인 중편소설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世代������지에 발표했는데 나는 그 소설 또한 열심히 탐독했다.
그 소설은 아프리카 최북단의 알렉산드리아란 도시가 무대인데 제2차 대전 당시 동생을 고문으로 죽인 나치의 게슈타포 요원인 안드레를 찾고 있는 한스와 독일 폭격에 의해 폐허가 된 게르니카 출신의 무용수 사라가 서로 만난다. 그녀는 돈을 모아 독일에 복수하는 것이 유일한 목표였다. 그들은 공모하여 결국 안드레를 살해하고 법정에 서지만 법정에서도 그들을 살해하지 못하고 국외로 추방한다. 그리고 끝에 가서는 ‘힘에 겨운 일을 시작하다가 좌절한 자를 나는 사랑한다’는 니체의 말로 끝맺음 하는 것으로 기억된다. 그 소설에는 주인공 프린스 김의 형이 감옥살이를 하면서 주인공에게 보내는 편지가 여러 통 나오는데 그 형은 작자인 선생의 화신이요, 그 주장 또한 선생의 지론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당시 나는 소설가를 지망하는 문학청년으로 그 소설 뿐 아니라 선생이 ������현대문학������에 발표한 「마술사」, ������여성중앙������에 연재한 「관부 연락선」, ������세대������에 연재한 「지리산」 등을 입수, 되는대로 읽었다.
그러면서 선생을 한번 직접 만나보고 싶었다. 사진이나 먼빛으로 그 모습을 보면 곱슬머리 두발과 수염이 인상적이었고 걸걸한 목소리가 결코 까다로운 선비가 아닌 다정한 이웃집 아저씨 같아 마음이 끌렸으나 직접 만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러다가 교직을 그만두고 상경하여 출판사에 다니고 있던 78년 가을에 영남문학회를 조직한다며 광화문 어느 음식점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때까지 나는 진주에서 접동문학동인회를 조직하고 회원들과 한 달에 두 번씩 만나 작품합평회를 하고 ������자오선������이란 동인지도 내었으며, 전국 유일하게 시골의 작은 도시인 진주에서 일간으로 발간되는 ������경남일보������에 두 차례나 연재소설을 쓴 바 있고 상경하여서는 73년에 ������현대문학������에 수필 「호주머니의 의미」를 발표, 등단의 절차를 거쳤기에 문학인 명단에 등재되어 있어 영남출신임을 알고 주관자들이 통지서를 보냈던 것이다.
별로 아는 문인도 없는 신인으로 서먹하여 갈까 말까 하다가 정공채 시인의 참석 권유 전화를 받고 그 음식점에 나갔더니 4,50명의 영남출신 문인들이 모여 있었다.
그 자리에서 이미 영남문학회 결성을 위해 준비위원들이 마련한 회칙이 통과되고 회장으로 이병주 선생을 만장일치로 추대하는 동시에 사무국장은 정공채 시인이 맡았다.
회장으로 추대된 나림 선생은 인사말을 통해 앞으로 영남문학상을 제정하는데 1년에 한 번씩 시상하고 상금은 3천만 원, 그 당시 문학상 중에서는 최고의 상금을 자신이 마련하겠다고 공언을 하였다.
나는 그 공언을 듣고 과연 내가 존경하는 선생님답고 한국의 거물급 유명작가답다고 생각되어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나뿐 아니라 다른 회원들도 좋아하며 영남출신 문인이 된 것을 큰 영광으로 여기는 분위기였다.
또 선생님은 폐회가 선언되자 자신이 회장턱을 낸다며 조선일보 옆에 있는 작은 일식집 ‘신원’으로 우리들을 안내하여 당시로선 귀한 생선회와 정종을 실컷 먹게 하였다. 그리고 또 이어서 앞으로 자기를 만나고 싶거나 술생각이 나면 오후 5시 이후 그 집에 나오면 언제든지 대화할 수 있고 술도 마음껏 그냥 대접하겠다고 선언을 했다.
그 일식집은 선생이 당시 조선일보에 소설 「바람과 구름과 비」를 연재하면서 밤새껏 쓴 원고를 그 시간쯤에 신문사에 넘기고 한잔 하며 피로를 푸는 단골집이었다.
거기엔 송지영, 남재희 같은 유명 작가와 언론인들이 선생과 함께 어울렸고 우리 영남문인들도 가서 술을 마시고 사인만 해놓으면 그만이었다.
나는 총회날은 그냥 통성명만 하고 1주일쯤 지난 후에 그곳에 나가 선생을 뵙고 인사를 드린 후 고향과 그간의 읽은 글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앞으로 소설을 쓰고 싶은데 많은 가르침을 달라고 했다.
선생은 내가 소설을 쓰고 싶다는 말에 너털웃음을 웃으며 술을 잘 하느냐고 묻기에 잘 못한다고 했더니 소설을 쓰려면 술부터 먼저 배워야 한다며 무조건 잔을 내밀고 술을 따라 주시었다. 그때 직접 본 인상은 소박하면서도 낭만적이며 호탕한 성품으로 의사 표시가 시원시원했다.
그것을 계기로 그 후에 그곳에서 선생을 종종 뵐 수 있었는데 모든 면에 해박하고 다식하여 언제나 화제를 끌고 갔고 우리는 그의 얘기를 듣기만 해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의 인간적 특성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박식한 지성과 낭만적 휴머니스트라고 할까.
선생은 글을 쓸 때 원고지나 타자기로 직접 쓰는 것이 아니라 미모의 타자수를 고용, 구술로 원고를 완성하는 천재성을 보였다고 한다.
그 뒤 1972년 ������세대������지에 연재한 「지리산」이 세운문화사에서 간행되고 1980년 「행복어 사전」이 문학사상사에서 간행되었는데 「지리산」은 별로 큰 반응을 얻지 못하다가 85년 기린원에서 재간행 되자 크게 인기를 얻었고 「행복어 사전」은 TV에서 연속극으로 방영되자 대중들로부터 그 진가를 인정받게 된 것으로 알고 있다.
������지리산������은 선생의 대표작이자 지리산을 중심한 빨치산의 실화를 다룬 것으로 6․25를 전후한 민족분단이 빚은 비극의 한 실상을 그렸다. 두고두고 후대에 전해질 역사적 사명을 띠고 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그 소설은 진주를 시발점으로 하여 진주중학 동창생이 등장하고 빨치산의 실제 이야기가 등장하여 진주에서 학교를 다니고 빨치산의 비극을 체험한 나로서는 큰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줄거리는 일제가 말기현상에 접어들자 조선인들을 몰살시키려는 계략을 꾸미고 그 일환책으로 징용과 징병, 학병을 강제로 집행한다. 일제의 이런 야수적 행동에 반기를 든 하준규와 박태영은 이를 피하기 위하여 지리산으로 모여들어 다른 징병 도피자들과 普光黨을 조직, 일제의 주재소와 경찰서를 습격하는 등 항일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한다.
그러다 8․15 광복을 맞으면서 각자 귀가하지만 피비린내 나는 좌우익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극심해지면서 그들은 당초의 순수한 민족주의자 입장에서 사회주의로 기울기 시작한다.
그러나 얼마 못가 다시 그들은 공산주의(남로당)에 환멸을 느낀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은 때이다. 이어 자신들을 구할 겨를도 없이 6․25의 동족상잔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빨치산이 된 그들은 끝내 지리산에서 최후를 마친다.
이 소설에는 빨치산 활동의 실상이 리얼하게 전개되는데 빨치산 경험이 없는 작가가 그 실상을 리얼하게 쓴 것은 당시에 나온 ������남부군������의 작가 이태의 글을 그대로 전재했다는 이야기가 분분했다.
이에 대해 나와 몇몇 젊은 문인들은 선생을 만난 자리에서 그 진위를 물었다. 그랬더니 인용했다고도 할 수 있고 안했다고도 할 수 있지 하고는 본문과 후기에 모두 밝혀놨다고 말했다.
정작 ������지리산������의 후기에 보면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등장인물의 한 사람인 이태의 수기가 없었더라면 가능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밝혀져 있다. 그리고 본문 중에도 ‘이태에 의하면’ 하고 그 인용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인용을 하려면 좀더 선명하게 본격적으로 밝혔어야 할 것이라는 것이 독자들의 의견이었다. 어쨌든 이 소설은 전반부는 좀 지리멸렬했으나 후반부에 가서 빨치산의 활동상이 본격적으로 부각됨으로써 한결 활력을 얻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본문 중 박태영의 2년 선배로 ‘이나림’이 나오는데 빨치산으로 끌려갈 뻔한 나림을 박태영이 구해준다. 那林은 이병주 선생의 아호와 같고 그에 따라 나림은 선생의 분신으로 부각되고 빨치산과 연관된 많은 후일담을 남기고 있어 재미가 있다.
앞서 결성한 영남문학회와 문학상 시상문제는 그날 이후로 끝나고 말았다. 자세한 이유는 모르나 공수표가 되었다. 선생은 많은 작품을 쓰고 정계와 재계에 많은 인사들을 알고 있어 상금 마련같은 것은 문제가 없을 줄 알았는데 측근의 말을 빌리면 지극히 이재에는 둔하고 무슨 돈이든 쓰고 나면 그만이라는 평도 있었다.
5․16 이후 김현옥 서울시장과 친하여 김 시장이 서울을 개발할 때 선생에게 말죽거리 땅을 싼 값에 사게 하여 뒤에 몇 갑절의 이익을 남기고 부자가 되었다는 소문도 자자했으나 실제와는 다르다는 얘기다. 다만 용산의 한 하천을 복개하여 큰 건물을 짓고 관리를 했으나 그것도 얼마지 않아 남의 손에 넘어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상금마련도 어려웠을 테고 또 상금이 적은 액수도 아닌 3천만 원에다 문학회를 운영하자면 많은 돈이 소요되므로 실행이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선생은 그 누구보다도 많은 작품을 남긴 다재다능한 작가요, 걸출한 삶을 살고 간 풍운아로서 우리의 문학사에 시간이 흐를수록 그 이름이 크게 빛날 것으로 믿는다.
나는 선생과 고향을 같이 했다는 것과 잠간이나마 대화를 나누고 육성을 들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자랑스러움을 금치 못한다.
필자 약력
․������현대문학������으로 수필 등단
․������월간문학������ 신인상 평론부문 당선
․한국문협 부이사장 역임
․현, 한국수필문학가협회장
․하동문학작가회장
․E-mail : goessay@kor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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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남강문학지에 무게를 잡아줄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나림 이병주 선생에 대해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어 나림 선생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