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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수도에 가까운 몰입과 황홀의 이미지즘
민용태 (고려대 교수, 스페인 왕립한림원 위원)
박천순의 시는 엄청나게 신선한 이미지의 향연이다. 시 구절마다 오묘하고 섬세한 감성의 무늬가 가슴을 파고든다. 예를 들어 “바다가 사랑이다”에 나오는 어머니의 손짓 몸짓은 그대로 물결이고 따스함이다. 시인은 말한다.
바다는 토닥토닥 물결뚜껑을 매만진다
햇살 따라 장독 덮개를 갈무리하던 어머니처럼
-<바다가 사랑이다> 부분
여기서 바다는 어머니의 장독대이다. 물결은 그대로 장독들이 된다. 그래서 어머니는 장독 뚜껑, “물결뚜껑을 매만진다” 장독대에는 햇살의 손길이 어머니처럼 장을 익힌다. 그래서 장맛의 반은 햇살 맛이다.
박천순같이 예쁜 여류시인의 눈길이 아니고서는 거센 바다에서 이런 고운 시 맛이 느껴지는 표현을 하기란 쉽지 않다. 거친 바다는 이렇게 해서 “장독 덮개를 갈무리하던 어머니”의 따뜻한 모습이 된다. 그러나 바다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죽음과 생명, 사망과 탄생을 끝없이 반복하는 “환생”의 장소가 된다. 죽음을 생명으로 되바꾸는 조화롭고 눈부신 우주의 푸른 몸짓을 보여준다.
죽음과 생명이 끊임없이 몸을 바꾸고
푸르게 푸르게 익어가는 바다
이 많은 숨소리의 환생이 너무 눈부셔서 아프구나
-<바다가 사랑이다> 부분
이것은 삼라만상을 관리하고 가꾸는 대자연의 어머니의 모습을 바다가 하고 있는 것이다. 대자연을 “푸르고 푸르게” 가꾸는 손길이 바다의 파도에서 보인다. 그리하여 바다는 우주와 함께 날마다 “익어간다”.
그러나 바다의 이런 거룩한 행위는 결코 신과 같은 숭배의 대상이 아니다. 숭배보다는 오히려 여성 특유의 이해와 모성(母性)의 따스함으로 함께 살고 이룩하고 아파한다. 이 마지막 구절은 절구이다. “이 많은 숨소리의 환생이 너무 눈부셔서 아프구나”
이 눈이 부시도록 아픈 파도의 몸짓은 어머니가 되어보지 않고는 느낄 수 없다. 종교의 눈으로 보면 모든 탄생은 부활이요, “환생”이다. 바다는 어머니의 아픈 출산의 고통을 앓는다. 그 거룩한 바다의 몸짓을 보고 “너무 눈부셔서 아프구나” 라고 감탄한다.
박천순 시인은 바다가 먼 경북 영주 출신인데도 “파도 소리”를 참 좋아한다. 아니, 바다가 멀기에 파도 소리를 더 동경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해 질 무렵”이면 바닷가에서 이런 사랑을 꿈꾼다.
어둠이 온 세상을 덮어도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시간을 잊고 싶을 때
봉긋한 밥 한 쪽 푹 덜어
그의 밥그릇에 담아주고
찌개 그릇에 숟가락 부딪히며
오래도록 파도 소리 듣고 싶을 때
있나요?
-<해 질 무렵> 부분
참으로 여성스러운, 사랑에 가득 찬 몸짓이다. “봉긋한 밥 한 쪽 푹 덜어/그의 밥그릇에 담아주고/찌개 그릇에 숟가락 부딪히며” 파도 소리를 듣는 맛! 이것은 나 같은 둔탁한 남성에게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 살가운 이미지이다. 남성이 여성에게 푹 빠지는 것은 세상 어디에서도, 어느 시간에도 느낄 수 없는 여성의 이런 섬세한 감성 때문이리라.
박천순 시인은 끝까지 그런 여성스러운 힘으로 세상의 풍파와 사랑의 만남과 헤어짐, 기쁨과 아픔을 품어낸다.
사랑의 힘은 흘러간다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따가운 가시들, 모든 사랑을 가진 그가 또 다른 사랑에 목말라 하듯이 사랑은 돌아오리라 그리고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콩나물국을 끓이리라 안개가 걷히고 다시 길을 떠나는 새벽이다
-<사랑의 눈동자> 부분
“사랑의 힘이 흘러가는” 것을 아는 그녀는 “사랑은 돌아오리라”는 것 또한 안다. “모든 사랑을 가진 그가 또 다른 사랑에 목말라 하는” 것도 그녀는 안다. 이런 소름 끼치는 배반의 장미도 그 “따가운 가시”도 그녀는 견뎌낸다.
그리고 다시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콩나물국을 끓이는” 일상으로 돌아온다. 사랑이라는 것, 부부 사이라는 것, 가정을 이루고 사랑을 가꿔 간다는 것이 다 이런 우여곡절의 “콩나물국 끓이기” 아니고 무엇이랴.
“매화 꽃잎 화르르 떨어지는” 밤에 박 시인은 “침대에 누워 빗소리를 만진다”. 빗소리를 만지는 것은 청각과 촉각을 동일시하는 공감각(synesthesia)을 이용한 이미지이다. 청각보다는 촉각이 밀착도가 더해서 밤의 빗소리가 훨씬 육감적이다. 시인은 비 오는 밤의 심상을 이어간다.
빗소리는 잠 사이를 걸어 다닌다
사랑하는 사람은 창을 열어
빗소리를 몸속 깊이 들여놓고
잠의 긴 골목을 돌아가는 중이다
-<매화 꽃잎 화르르 떨어지고> 부분
박 시인의 밤 빗소리는 온몸과 잠 사이를 뚫고 다닌다. 운동과 움직임 이미지(kinetic image)의 극치감이 느껴진다. “잠의 긴 골목을 돌아가는 중”이라는 영상은 잠이라는 무형의 실체를 긴 골목이라는 유형의 실체로 환치시킨다. 수면을 입체적으로 묘사하여 그 이미지를 활성화시킨 것이다.
박천순 시인은 다양한 이미지 활용의 달인이다.
저 눈발은 내 마음 어느 바닥쯤에 닿았을까요
공중에서 난무하던 흰 글씨들
내 안으로 전부 추락합니다
내 가슴은 녹아내린 당신으로 흥건합니다
시가 되어 찾아온 당신,
마침표가 없는 당신으로 인해
마음은 오래도록 젖어 있습니다
눈은 아직 그칠 기미가 없고
당신이라는 풍경만이 자꾸자꾸 겹쳐집니다
-<풍경은 지워지고> 부분
눈 오는 날의 풍경을 “시가 되어 찾아온 당신”에 대한 “마침표가 없는” 사랑이나 그리움으로 묘사한다. 눈송이는 아무래도 그리움이다. 눈발의 말이 가슴으로 녹아내려 “홍건하다”. 젖어 있다. 자꾸만 겹쳐지고 쌓여가는 것이 연정인지 풍경인지 모호하다. 결국 다른 풍경은 모두 지워지고 “당신이라는 풍경만이 자꾸자꾸 겹쳐”진다는 적절한 시 표현으로 독자를 감동시킨다.
일상이나 신문에서 읽은 감동적 기사가 시가 되기도 한다. 시인은 “오랫동안 신장투석을 해온 월번 우튼이 생의 마지막 날 아내를 꼭 껴안고 있다. --중앙일보 2008. 8. 30”이라고 기사를 적고 그 “아내”의 목소리로 사랑의 시를 쓴다.
당신 체취가 나를 비껴간 적이 있나요?
꼭꼭 여민 이불깃 위로
마지막까지 나를 토닥이는 숨결
내 심장이 당신 심장 박동을 반추합니다
당신 품에 안긴 이 가슴이
내 마지막 노래이고 꽃이고
머지않아 당신께 다다를 날개입니다
-<허밍버드>부분
사랑은 이렇게 이승을 건너 하늘에 이르는 "날개"나 구름다리이다. 가슴과 가슴을 마주 대고 죽음을 막는 숨결의 행보에 사랑의 힘이 있다.
아르헨티나의 시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시에 "헤라클리토스의 후회"라는 시가 있다. "나는 이런 저런 사람이 다 되어보았다./하지만 그 한 사람은 될 수 없었다, 마띨데 우르바흐가 마지막 숨져가는 것을 품에 안고 있던 그 사람…" 어느 고문서에서 발견했다는 이 구절은 출처가 불분명한데도 그 지극한 아픔이 절절하게 전해온다. 박천순의 위 시 또한 잘 모르는 어느 남편과 아내의 죽음과 이별 이야기지만 심장과 심장의 박동이 이승 넘어 저승까지 들리는 애절함이 전해온다.
박 시인은 사랑의 그 섬세한 근육과 근심 상태를 눈여겨본다.
"보고 싶다" 대신에
"잘 있지?"
'잘'이라는 한 마디, 얼마나 절절한가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해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곳
뭐라 불러야 할까
썼다 지웠다, 썼다 지웠다
마음이 나달나달 다 해졌다
아, 해 뜬다
-<사랑해, 사랑 해> 부분
“마음이 나달나달 다 해지도록” “썼다 지웠다, 썼다 지웠다”하는 것이 사랑하기이다. 시 쓰기이다. 마음 다스리기가 어디 쉬운가? 밤새도록 “근심”하고 “해가 뜨기”까지 “뼈를 마르게 해”도 명쾌한 답이 보이지 않는다. “해 뜬다”고 수천 번 되뇌다 한평생 인생이 다 간다.
절절하게 보고 싶은 마음을 몰라주는 것이 인생의 이치라면 차라리 웃어 버리는 게 낫다.
어둠 속에 낚싯대를 던진다
졸다 깨다, 어둠이 화들짝 놀란다
단어 하나 건진다
어절 하나 낚는다
흰 포말에 헹궈서
이리저리 꿰어 맞춘다
새벽은 온다
처음 보는 물고기 하나
기이하다
아침이 갸우뚱 한다
갸우뚱이 하하 웃는다
-<밤낚시> 전문
낚시하기나 시 쓰기나 어둠과의 놀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내 동생 이야기를 들으면 낚시는 밤낚시가 제맛이라나? “졸다 깨다, 어둠이 화들짝 놀란다” 이런 맛인가?
“흰 포말에 헹궈서/이리저리 꿰어 맞춘다”? 이것도 끝이 안 나는 작업 걸기…. 새벽에 “처음 보는 물고기 하나”를 발견한다. 그걸 신기해하는 “아침이 갸우뚱 한다” 그 웃음을 보고 “갸우뚱이 하하 웃는다”. 부처의 연꽃을 보고 마하가섭이 웃듯이. “갸우뚱”은 “하하”하지 않는다. 파안대소(破顔大笑)에 “갸우뚱”이 어디 있는가? 이렇게 해서 시 쓰기는 명상이나 좌선(坐禪)이 된다.
박 시인은 시 쓰기를 수도하듯 한다.
순간 사라지는 소리들
방은 다시 숨을 죽인다
부스럭부스럭 내가 소리를 만든다
볼펜이 굴러가는 소리
종이 위를 가볍게 흐른다
노트가 줄을 긋는다
펜이 천천히, 혹은 빠르게 걷는다
줄 사이로 새벽이 끼어든다
점점 아침이 밝아온다
-<아침이 오는 방식> 부분
그렇다 시 쓰기라는 밤길에 가야 할 길이 보이는 것은 아니다. “볼펜”이 어디를 향하여 가는가? “노트”가 어디에 줄을 긋는가? 사실은 쓰기보다 지우기가 더 힘들다. 지우기보다 비우기가 더 힘들다. 힘들기보다 힘 안 들이기가 더 어렵다. 그냥 앉아 있다. “아침이 밝아오기까지”.
시 쓰기를 동양에서는 시도(詩道)라고 했다. 시(詩)와 선(禪)을 하나로 보기도 한다. 박 시인의 이런 “지우기”, “비우기” 연습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요가에서처럼 몸을 조이기도 한다.
갇혀있는 것에 익숙한 나는
몸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몸은 가장 편안한 표정으로 구겨져 있다
머리 속으로 팔이 들어가고
다리 속으로 몸통이 들어가고
바람 빠진 풍선 인형처럼 꼬여
맞춰지지 않는 나
몸이 흘러내리지 않게 허리띠를 졸라맨다
-<나를 벗어나는 몸> 부분
선(禪)이 풀기라면 요가는 조이기이다. 그러나 도착점은 몸과 우주의 하나 되기라는 점에서 같다. 나를 한없이 풀면 우주가 된다. 나를 한없이 조이면 우주의 한 입자가 되겠지. 박 시인은 “갇혀있는 것에 익숙한 나”이다. 여기 시인의 몸짓은 거의 요가 자세이다. “다리 속으로 몸통이 들어가고/바람 빠진 풍선인형처럼 꼬여”의 표현이 그러하다.
그러나 이런 갇히고 조이기 시보다 “하루는 가늘다”라는 시가 더 재미있다.
하루는 허리가 아프다 허리띠를 졸라맨다 나는 걸어간다 그대는 나를 모르는 척 한다 우리의 만남은 몽상의 문턱에 걸린 무지개, 거울 속 눈동자에 물을 뿌린다 흩어진 글자들이 새털처럼 날아다닌다 손을 펴도 잡히지 않는다 손가락 끝에서 풍문이 흘러나와 변방을 적신다 속절없이 아픈 외계인의 언어, 질문도 대답도 없는 하루가 저물어간다 몸은 여전히 읽을 수 없는 우주, 위태하게 건너가는 허리, 적막이 몸을 감싼다 혁명도 가슴도 없다 피 흘리는 망막은 언제쯤 바닥에 뿌리 내릴 수 있을까? 여위어만 가는 하루 하루 몰입, 하자 하자 하자
-<하루는 가늘다> 전문
탄트리즘에서는 “몸은 우주”이다. 들숨과 날숨 사이 내 몸이, 나의 우주가 숨 쉰다. 그것은 물리학적으로는 사실이다. 그러나 깨닫지 않고는 끝내 이해할 수 없는, “읽을 수 없는”, “외계인이 언어”이다. 그저 내 몸속에서 “질문도 대답도 없는 하루가” 허리가 아프도록 숨 가쁘게 지나간다.
부질없이 바쁜 나날이다. 그러나 내 몸을 스쳐 가는, 혹은 흘러가는 “하루”는 여전히 “위태하게 건너가는 허리”이다. 그래서 하루는 허리가 아프고 가늘다. 이해할 수 없이 흘러가는 우주의 시간들…. 그러나 시간은 나와의 대화가 없다. “적막이 몸을 감쌀” 뿐. 여기 “혁명도 가슴도 없다”. 고행의 아픔도 투쟁도 “바닥”이나 안식을 가져오지 않는다.
명상은 쉬운 말로 자기를 함몰시키는 “몰입” 행위이다. 무아(無我)의 경지로 빠져드는 일 아닌 일. 그러나 여기에 역설이 있다. “빠져 든다”고 하면 무위(無爲)가 아니다. 하는 것(爲)이다. 그래서 박천순 시인은 여기에서 엄청난 도약을 시도한다. “하루 하루 몰입, 하자 하자 하자”. 이 말은 선문답 같다. 마치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에게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물으니 “무(無)”라고 대답했다는 것과 같다. 글자 그대로 풀면 개는 불성이 없다(無)로 들린다. 그러나 “무”라는 소리가 있다(有). 느껴지지 않는가?
박천순 시인의 “하”자 반복(alliteration homophony)은 “하자”는 의미를 넘어선다. 그대로 마치 무위(無爲)의 리듬처럼 가슴에 반추된다. “아”는 밝은 소리이다. 밝게 “하, 하, 하, 하…”하면 큰 웃음소리가 들린다. 난센스(nonsense)의 웃음소리, 의미 없기 소리이다. 그렇다고 박천순 시인이 여기에서 선문답이나 화두를 두고 명상을 하고 있다는 소리는 아니다. 박 시인은 그 무엇보다도 시인이다. 그녀는 시를 통해 수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알기로 박 시인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다. 100세에 가까운 기독교 신학자 유동식 교수는 한국의 종교 정신의 뿌리를 ‘풍류도(風流道)’에서 찾았다. 최치원의 ‘풍류도’는 ‘유불선(儒彿仙)’을 통합한 것으로 유 교수는 이 정신이 한국인 고유의 심성이 되었다고 본다. 우리보다 먼저 기독교를 접한 중국, 일본과 달리 한국에서만 기독교가 뿌리내리고 잘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심성 위에 기독교 복음의 씨앗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의 모습, 우주와 인간의 삶의 조화, 신인합일(神人合一)적 이상이라고 한 것을 본다. 그렇다면 박천순 시인은 뿌리까지 한국인의 심성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며 시를 통해 끊임없이 수행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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