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엄경론 제14권
제2회(會)의 여섯 품 경전은 보살의 신심(信心)을 밝힌 문이다. 이 하나의 회상 속에는 스스로 서분(序分)과 정설분(正說分)과 유통분(流通分)이 있다. 지금 제12권 초의 “이때” 이하 4행 반의 경문은 서분이며, 그 이하 「현수품(賢首品)」까지는 정설분이며, 「현수품」 말미의 3행 반의 경문은 유통분이다.
7)여래명호품(如來名號品)① 이 품에서부터 「현수품」에 이르기까지는 제3 장과문(長科文) 가운데 과(果)로써 믿음을 성취해 자기 마음이 부처인 줄 믿는 분(分)이니, 이 한 단락 안에서 대략 6법(法)을 통해 자기 마음의 불과를 성취해 믿는 자로 하여금 불과(佛果)에 들게 하기 때문이다. 첫째, 「불명호품」은 신심(信心) 있는 자로 하여금 부처님의 명호가 일체 세간의 명칭에 두루함을 믿게 해서 명칭의 성품이 여읜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둘째, 「사성제품」은 신임 있는 자로 하여금 스스로 일체 세간의 고제(苦諦)가 바로 성제(聖諦)라는 것을 믿게 해서 따로 찾지 않게 한 것이다. 셋째 「광명각품」은 신심 있는 자로 하여금 스스로 자기 마음의 광명으로 일체 세간의 다함 없는 대천세계가 모두 부처님의 경계로서 자기와 동등하다는 것을 각조(覺照)하게 하는 것이다. 즉 마음이 광명을 따라 하나하나 비춤으로써 마음과 경계가 하나로 합쳐져 내외(內外)의 견(見)이 없어진다. 처음에는 삼천대천 세계를 끝내고, 다음에는 동방을 시초로 해서 광명이 동방의 1삼천대천세계에 이르고 100삼천대천세계를 비추니, 이같은 시방의 10중(重)을 두 배씩 두루 돌면서 시방을 원만히 비추면 몸과 마음의 동일한 성품이 걸림없이 두루하여 부처님의 경계와 같아진다. 하나하나 뜻을 지어 이같이 관찰한 뒤에 작위 없는 방편의 선정으로 인(印)을 쳐서 10주의 초심에 들어가 여래 짛의 집안에 태어나 여래 지혜법왕의 참된 자식이 되는 것이 광명이 비추는 바와 일여(一如:한결같음) 하니, 경전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다. 부처님의 고아명을 지을 수 있으면서도 스스로 그러한 분수가 없다고 해서는 안 되며, 반드시 자기 마음의 광명이 부처님의 광명과 같다는 것으로 그 마음을 깨달아 열어서 법계를 원만히 비추어야 한다. 넷째, 「문명품(問明品)」은 신심 있는 자로 하여금 믿고 있는 법문을 믿게 하는 것이다. 다섯째, 「정행품(淨行品)」은 보살이 초발심할 때는 모두 대원(大願)을 발하는 것으로 으뜸을 삼는다는 것을 신심 있는 자에게 믿게 하는 것이다. 아울러 신심 있는 자로 하여금 비롯 없는 망념을 문득 돌이켜서 지혜 바다의 생멸 없는 성품을 성취케 하는 것이다. 여섯째, 「현수품」은 불신력(佛神力)의 신통조화가 가없어서 대자재(大自在)를 얻는 것과 신심의 복(福)을 신심 있는 자에게 믿게 하는 것이니, 이 6법을 믿는 것을 현수(賢首)라 칭하고 이 6법으로 관행(觀行)이 상응하는 것을 신심(信心)이라 칭한다. 이는 부동지불 등의 10지(智) 여래가 모두 자기 마음의 과(果)로 부동지불(不動智佛)로 체(體)를 삼고 나머지 지혜로 용(用)을 삼는 것이니, 아래 경문에서 밝히겠다. 문수사리와 각수(覺首)와 목수(目首) 등의 10수(首) 보살은 신심을 수행하는 자의 몸이며, 이 품에서부터 「현수품」에 이르기까지의 여섯 품 경전은 이 일부의 경전을 장과(長科)한 중에서 세 번째인 과(果)로써 믿음을 이루는 문이다. 즉 초회는 불과를 들어 수행을 권함으로써 모든 부처님의 얻은 바를 믿게 하는 것이며, 제2회는 과(果)로 믿음을 성취함으로써 자기 마음이 부처로서 과불(果佛)과 다르지 않음을 믿게 하는 것이니, 본문에 가서 밝히겠다. 앞에서는 이미 성취한 불과로 수행을 권했지만 여기서는 불명호(佛名號)의 과(果)로 수행을 권했으니, 시방 세계의 어느 한 명칭도 부처님의 명호 아님이 없는 것의 명칭의 체성이 스스로 해탈했기 때문이니 다만 중생이 듣는 바에 따라 같지 않은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명호가 두루함을 밝힌 것이니, 곧 일체의 명칭에 대해 집착할 바가 없음을 밝힌 것이다. 이 품을 해석하는 데 세 가지 문을 지으리니, 첫째는 품의 온 뜻을 해석하는 것이며, 둘째는 품의 명목을 해석하는 것이며, 셋째는 경문에 따라 뜻을 해석하는 것이다. 첫째, 품의 온 뜻을 해석한다는 것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앞의 초회에서는 단지 여래의 등정각(等正覺)을 이룬 몸과 지혜의 중생 교화만 밝혔을 뿐 여래의 명호가 중생을 교화하는 광의(廣意)와 협의(狹意)는 밝히지 못했다. 이제 이 제2회 보광명전에서 비로소 불과명호(佛果名號)의 중생 교화를 밝히고 있기 때문에 이 품이 온 것이며, 또 불과의 명칭을 들어서 믿음과 이해를 내게 했기 때문에 이 품이 온 것이다. 앞 회상에서는 몸과 지혜가 두루함을 밝혓지만 이 회상에서는 명칭과 몸과 지혜가 함께 두루함을 밝히고 있으며, 초회에서는 세주(世主)가 물었어도 그 답이 없었지만 이 품에서는 앞의 질문에 답해 문득 나중에 믿는 자의 마음을 내게 함으로써 부처님의 명칭과 몸과 지혜가 법계에 두루하면서 기틀에 응해 사물을 이롭게 하고 세속을 비춰 미혹을 타격하기 때문에 보광명전이라 칭하는 것이니, 덕을 잡아서 전(殿)을 이루고 전을 잡아서 덕을 밝히기 때문에 이 폼이 온 것이다. 둘째, 품의 명목을 해석한다는 것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이 부처님의 명호속에는 대략 다섯 가지 연이 있어서 부처님의 명호를 이루고 있다. 첫째로 법계 자체의 근본지(根本智)의 연(緣)으로 부처님의 명호를 이루는 것이다. 둘째로 여래께서 정각 성취를 보인 자기 덕의 연(緣)을 자음으로써 부처님의 명호를 이루는 것이다. 셋째로 여래께서 중생을 이롭게 하는 방편의 연을 밝힌 것이니, 지위의 닦아 나아감을 근거로 하여 부처님의 명호를 이루는 것이다. 넷째로 여래께서 일체 중생이 근기에 따라 즐기는 바의 연을 밝힘으로써 부처님의 명호를 이루는 것이다. 다섯째로 법계의 체용이 평등한 연을 밝혀서 일체 모든 법을 부처님의 명호라 칭하는 것이다. 첫 번째의 법계 자체의 근본지의 연(緣)으로 부처님의 명호를 이룬다는 것은 가령 아래의 부동지불과 무애지불(無碍智佛)과 멸암지불(滅暗智佛)과 같은 10지(智)의 불호(佛號)가 이에 해당되는데, 이는 법계의 근본지 위에서 열 가지 명호를 시설함으로써 열 가지 믿음의 힘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 지위에 이르면 자세한 뜻을 밝히겠지만, 그 대의는 중생으로 하여금 자기의 근본 무명이 본래로 여래의 근본대지(根本大智)임을 요달케 해서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근본을 단박에 알게 하고 부처를 단박게 짓게 한 것이다. 두 번째의 여래께서 정각 성취를 보인 자기 덕의 연(緣)을 근거로 하여 명호를 이루었다는 것은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정각의 성취를 보일 때 공통된 열 가지 명호이니, 소위 여래(如來)ㆍ응공(應供)ㆍ정변지(正遍知)가 이에 해당되며, 또 비로자나는 총체적인 명호이니 대지혜광명으로 갖가지 모든 법과 온갖 중생을 비추기 때문이다. 비(毘)는 갖가지를 말하며, 노자나(盧遮那)는 두루 비춤을 말한다. 세 번째의 여래께서 중생을 이롭게 하는 방편의 연(緣)을 밝힌 것이니, 지위의 닦아 나아감을 근거로 하여 부처님의 명호를 이룬다는 것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이는 바로 아래 경문에서 10개의 근본부동지불을 들음으로써 10신을 성취하고, 10개 월불(月拂)의 이름 아래 글자가 다 똑같은 월(月)로 호칭됨을 들음으로써 10주를 이룬 것은 처음으로 법신의 근본지에 계합해 마음이 청량해짐을 밝혔으니, 이 지위의 보살이 이(理)에 계합해 미혹이 없어짐으로써 법성지(法性智)의 청량함을 얻기 때문에 자기가 이익을 얻은 법을 근거로 하여 부처님의 명호를 성취함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10행위 중에서 10개 안불(眼佛)의 이름 아래 글자가 다 똑같은 안(眼)이 되는 것은 10행에서 지혜의 눈으로 근기를 알아 중생을 이롭게 하기 때문에 부처님의 명호가 안(眼)이 된 것이니, 근기의 성품을 잘 알기 때문에 다 자기의 이익 얻음을 잡아서 명호를 세워 부처님이 됨을 밝힌 것이다. 10회향 중에서 10개 묘불(妙佛)의 이름 윗글자가 다 똑같은 묘(妙)로 호칭되는 것은 10회향위 속에서 보살의 닦아 나아감이 점점 익숙해지면서 묘한 지혜가 현전하기 때문에 부처님의 명호가 묘(妙)가 됨을 밝힌 것이며, 10지도 묘와 마찬가지다. 이상은 10신위에서부터 스스로 자기 마음이 분별하는 지혜가 일체 모든 부처님의 근본부동지불과 더불어 본래부터 하나라는 것을 믿음으로써 신심을 성취함을 밝힌 것이니, 마음 밖에서 법을 보면 신심을 이루지 못한다. 이 신(信)에서부터 그 다음 삼매력으로 이(理)에 계합해서 근원을 이해하는 것을 10주라 칭하는 것이니, 부처님의 명호가 월(月)이 된 것은 모두 수행하는 사람이 얻은 법을 근거로 하여 부처님의 명호를 이룬 것이다. 5위를 세운 50개 부처님의 명호가 50개의 인(因)이며 50개의 과(果)이니, 해당되는 지위마다 인과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100중(重)의 인과를 루고, 근본 5위 중에 본래로 5인(因)과 5과(果)가 있어서 도합 110중(重)의 인과를 이루고, 근본 5위 중에 본래로 5인(因)과 5과(果)가 있어서 도합 110중(重)의 인과를 이루고 있으니, 법문이 다르지 않고 법계의 체(體)가 다르지 않기 때문에 10신 중에서 믿고 있는 법인 근본부동지불로써 모든 지위의 닦아 나아감을 삼은 것이다. 대략은 이와 같으며, 자세한 뜻은 아래의 보위(本位)에 이르러서 자세히 밝힐 것이니, 이것이 ‘지위의 닦아 나아감을 따라서 부처님의 명호를 이룬다’고 칭하는 것이다. 네 번째의 여래께서 일체 중생이 근기 따라 즐기는 바의 연(緣)을 밝힘으로써 부처님의 명호를 이룬다는 것은 바로 색신(色身)을 대현(對現)하여 중생계와 동등하게 하되, 부처님도 되고 천(天)도 되고 신(神)도 되고 주(主)도 되고 인(仁:사람)도 되고 선(仙)도 되어 중생계에 두루하면서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악을 짓지 않게 하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스스로의 범속한 정(情)으로 측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총체적으로 부처님의 명호가 두루하는 것이다. 다섯 번째의 법계의 체용이 평등한 연(緣)을 밝혀서 일체 법을 부처님의 명호라 칭한다는 것은 일체 법과 명언(名言)이 자체성을 여의고 있기 때문이다. 일체법이 자체성을 여읜 것이 바로 법계의 성품이니, 법계의 성품이 바로 부처님의 명호인 것이다. 이 때문에 일체법과 명언(名言)이 모두 부처님의 명호인 것이니, 여래께서 이 이체법의 자성을 여읜 법에 부합함으로써 부처를 이루기 때문이다. 경문을 자세히 인용해 뜻을 증명하고자 하면, 경문이 너무 방대하고 말이 번잡해 근본을 가리게 됨으로써 작업자(作業者:중생)가 이해하기 어렵다. 다만 이 경문에 의거해 위아래로 서로 대조해 보면 작업자가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예컨대 삼승에서도 근본지와 후득지(後得智)를 설했지만, 이제 삼승인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이 금색세계의 부동지불을 가리킴으로써 자기 마음의 능히 분별하는 지혜가 본래 움직이는 바가 없으며, 문수사리가 바로 자기 마음의 잘 간택하는 무상묘혜(無相妙慧)이며, 각수(覺首)나 목수(目首) 등의 보살이 바로 자기 마음이 신해(信解)를 따르는 가운데 보는 이지(理智)라는 것을 곧바로 인식케 한 것이다. 그러나 삼승인 가운데 마음을 돌이키지 못하는 자는 결코 믿지 못하니 그 이유는 3아승기겁을 지낸 뒤에야 부처를 얻게 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자기 몸과 마음이 모두 범부임을 자인하는 것이라서, 오직 부처님만이 부동지 등이 있다고 믿을 뿐 자기 마음이 근본부동지불로서 부처님과 더불어 다름이 없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삼승인은 이 가르침의 법계승(法界乘) 속에서 근본지로 신심(信心)을 삼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전의 신심은 응당 이와 같다. 즉 자기 마음의 분별하는 성품이 법계의 성품 가운데 근본부동지불이며, 금색세계가 자기 마음의 오염 없는 이(理)이며, 문수사리가 자기 마음의 잘 간택하는 묘혜(妙慧)이며 각수나 목수 등의 보살이 바로 신심을 따르는 가운데 이지(理智)가 현전하는 것임을 믿는 것이다. 그리하여 믿음의 씨앗[神因] 속에서 모든 부처님의 과법(果法)에 계합하되, 털끝만치도 어긋나지 않아야 비로소 신심을 성취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믿음을 끝내고서 선정과 지혜로 닦아 나나가면서 10주ㆍ10행ㆍ10회향ㆍ10지ㆍ11지를 거치는데, 일월세겁(日月歲劫:세월)의 시간이 다시 변천함이 없고, 법계가 근본 그대로이고, 부동지불이 예전 그대로인 채 일체종지(一切種智)의 바다를 성취해서 중생을 교화하되 인과가 옮기지 않고 시간이 바뀌지 않아야 비로소 믿음을 성취하는 것이다. 만약 승지(勝祗)의 정해진 알맹이만 세워서 자신은 범부이고, 범성(凡聖)은 두 길이고, 시간은 변천하고, 마음 밖에 부처가 있다고 한다면, 신심을 성취하지 못할 것이다. 이상으로 다섯 가지 부처님의 명호가 같지 않음이 있다.
문 명(名)과 호(號)가 어떻게 다릅니까?
답 두 가지 차이가 있으니, 두 가지란 무엇인가? 부모에게서 태어났을 때는 아직 어려서 덕이 없으므로 우선 자(字)를 지어 부르는 것이 명(名)이 되고, 덕이 있으면 그 덕에 근거하여 명(名)을 세우는데 그 명(名)은 높여서 부를 수 있으므로 호(號)가 된다. 명은 아랫사람이 부를 수 없지만, 호는 아랫사람이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덕 있음과 덕 없음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모두 명(名)의 수용에 속하는 것이니, 명언(名言)의 다스림을 받기 때문이다. 만약 이 경전의 부처님 명호에 근거한다면, 모두 법을 잡고 덕을 잡아서 명(名)을 세운 것이니 세속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 셋째, 경문에 따라 뜻을 해석한다는 것은, 그 단락 속의 뜻을 둘로 나누겠다. 첫째로 32품 경전의 뜻을 장과(長科)하는 것이니, 제3선(禪) 중에서 11지 1품을 설하는 것이 오지 않았다. 둘째로 해당되는 품의 경문의 뜻을 과(科)하는 것이다. 첫 번째의 32품을 장과한다는 것은 「여래명호품」 제2회(會)의 세주(世主)가 스물여덟 가지 질문을 일으킨 이하부터 곧바로 향후의 「여래출현품」에 이르기까지 세주가 물은 1종(終)의 인과이다. 답한 것은 모두 32품의 경문이 있는데 스물여덟 가지 질문에 답한 것이다. 그리하여 보광명지(寶光明智)의 법계불과(法界佛果)인 보거(報居:과보의 거처)의 전(殿)에서 불과의 명호를 들고, 아울러 불과가 행하는 중생 교화의 사성제(四聖諦) 법문을 들고, 아울러 법계근본지체(法界根本智體)의 부처님 명호인 부동지불을 들음으로써 믿음의 수행[信修]을 성취하는 데서부터 곧바로 저 「여래철현품」에 이르기까지 32품의 경전이 믿음으로 나아가 수행하는 1종(終) 인과의 극(極)이니, 이는 보광명지전(寶光明智殿)의 불과에서 「여래출현품」에 이르기까지 믿음으로 나아가는 수행의 인과가 둘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또 처음 정각을 성취한 과덕(果德) 위에서 신심을 일으켜 수행하는 것을 밝힘으로써 나중의 「여래출현품」에 이르기까지 법계가 시간의 간격이 없음을 밝혔기 때문이니, 이는 법계의 체(體) 속에서 범부가 망녕되게 한량없는 겁을 본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만약 믿음으로 나아가 수행을 일으키는 자라면, 진(眞)에 의거해 행을 일으키는 것으로 닦아 나아감을 삼기 때문에 5위의 행문(行門)을 거치더라도 시간의 변천이 없다. 만약 믿음으로 나아가 수행을 일으키지 않을 때는 늘 “이전의 모든 부처님은 앞서 이미 성불한 뒤에 한량없는 겁을 지냈다”고 말하다가, 올바른 믿음의 힘[正信力]으로 시방 무량겁의 이미 성불한 자를 문득 보는 데 이르러서는 자신과 저 먼저 성불한 자가 일시에 성불하여 먼저와 나중이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여래께서 처음 정각을 성취할 때, 지금의 범부가 비로소 보리심을 발하여서 행을 일으켜 닦아 나아가 스스로의 행이 이미 원만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여래께서 처음 정각을 성취한 최초의 출현시(出現時)를 여의지 않는 것이니, 이는 정(情)으로 헤아리지 않고 근본 법계에 의지함으로써 본래부터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처음의 발심과 궁극의 마지막이 다르지 않다”고 말한 것은 법계의 성품에는 삼세의 차별이 없기 때문이니, 이는 삼세의 시간에 차별이 없는 것이다. 시간이 없기 때문이니, 이는 삼세의 시간에 차별이 없는 것이다. 시간이 없기 때문에 차별이 없는 것이며, 지혜의 다름이 없기 때문에 차별이 없는 것이며, 부동지불의 체(體)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묘한 슬기의 작용이 차별이 없는 것이며, 문수의 잘 간택하는 묘한 슬기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행이 차별이 없는 것이며, 문수의 잘 간택하는 묘한 슬기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행이 차별이 없는 것이며, 초발심부터 10바라밀행의 보현행과 다름 없이 수행하기 때문에 대자비가 차별이 없는 것이며, 늘 교화하기 때문에 대원(大願)이 차별 없는 것이며, 중생을 버러지 않기 때문에 사섭법이 차별 없는 것이며, 사무량심이 차별 없는 것이며, 37조도품이 차별 없는 것이니, 이 열 가지 차별 없음 때문에 처음의 발심과 궁극의 마지막이 다르지 않다고 말한 거이다. 이같은 두 마음에서 먼저인 발심이 어렵다고 하는 것은 이 열 가지 신해(信解)에 드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마음 밖에서 다른 부처가 도를 얻는다는 것을 믿거나 나는 범부라고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정으로 헤아린 것이니, 이는 믿음으로 나아가는 수행을 논하지 않고 다만 생사의 장구한 흐름에서 늘 견망(見網:소견의 그물)을 다르는 것이 니 어찌 크게 괴롭지 않겠는가? 그래서 지금 제2회와 초회에서 처음 정각을 성취한 여래의 출현을 밝히고, 나중의 32품에서 또 「여래출현품」을 나타냄으로써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나아가 수행하는 자가 삼세의 부처님과 더불어 일시에 출현함을 밝혔으니, 이는 법계가 총체적으로 일시(一時)임을 밝힌 것이다. 마치 보배 거울을 갖고서 온갖 상(像)에 널리 임하니, 온갖 상이 단박에 나타나 전후의 시기가 없는 것과 같다. 이는 법계의 근본불지(根本佛智)의 경계 속에 단박에 온갖 법이 나타나는 것이라서 정(情)으로 재거나 헤아려서 먼저와 나중이라는 견해를 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니, 한결같이 미륵의 누각 속 경계의 의거하라. 초회 중 처음 정각을 성취한 부처님은 이 과(果)를 들어 수행을 권한 n처요, 「출현품」 속의 부처님은 모든 보살이 5위를 닦아 나아가서 인과의 행을 마친 부처이라는 것을 밝힌 것이니, 이는 신위(信位) 중 부동지불과 더불어 상대한 것이다.
문 모든 품을 보살들이 설했는데, 어째서 「아승기품」과 「수호품」만은 부처님께서 스스로 설했습니까?
답 보살의 가행(加行)과 5위의 무명번뇌는 여래위(如來位) 중 부사의한 보살 대중이 5위 보살에 의탁함으로써 해당되는 지위에 스스로 차제(次第) 법문을 드러낸 것이니, 바로 10혜(慧)ㆍ10림(林)ㆍ10당(幢)ㆍ10장(藏) 드의 보살이 이에 해당된다. 그러나 불위(佛位) 안에서 법을 미혹한 무명은 여래께서 스스로 설하고 있으니, 「아승기품」과 「수호품」이 이에 해당된다. 불위(佛位) 안의 무명은 불위 안에 이르러야 비로소 이 두 가지 미혹1)을 해결하는데, 이 때문에 무명주지(無明住地)는 불위라야 비로소 종결되니 『승만경』의 설과 같다. 이 가르침의 한 자락은 2승이나 3승과 비슷하지만, 2승과 정토보살이 근본무명을 끊었다고 결코 인정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무명이 근본지임을 요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1승의 가르침에서는 부동지불로 신심을 삼으니, 이 때문에 소유(所:3승)의 수행이 증명해 비추는 온갖 법은 이 경전과 같지 않다. 이 가르침은 당장의 일념에 초심(初心)과 궁극의 마음이 모두 다함을 밝히고 있으니 법계 안에는 삼세가 없기 때문이다. 3승은 절대적으로 승기(僧祗)가 가득 차야 하며, 또 3현(賢)과 10성(聖)이 닦아 나아가는 길이 달라서 지(地) 위에서는 가행(加行)이며, 지(地) 이전에는 4자량(資粮) 등이며, 불과는 반드시 승지를 채우는 것이니 앞에서 이미 밝혔다. 그러나 이 경전은 10주에 바로 도를 보며 가행(加行)과 자량이 일시(一時)이니, 그 이유는 무엇인가? 법계의 대지혜로써 그 행을 자량하여 행에 오염이 없게 하고, 행으로써 법계의 지체(智體)를 자량하여 익숙케 해서 성숙시키기 때문이니, 이는 범부에서부터 처음 여래의 이지성(理智性)을 봄을 밝힌 것이다. 또 이 5위 중의 수행은 각각의 지위마다 불과가 있지만 지위의 익숙한 곳에 따라 세운 명칭이 다르다. 그러나 삼승의 가르침에서는 앞의 지위가 뒤의 지위를 향해서 단지 보살의 과(果)만 있지 불과는 없는 것이니, 나중에 그 지위에 이르러서 자세히 밝히겠다. 이 법계의 법문은 한량없는 겁을 거친다고 설해도 연장하는 것임 아니며 1찰나라고 설해도 줄이는 것이 아닌데, 오직 미혹된 자만이 망녕되게 길고 짧음, 늘이고 줄임이란 견해를 지어서 즉각 진(眞)에 응하는 마음에 부합하지 못하고 있다. 이 「여래명호품」 이후부터 곧바로 「여래출현품」에 이르기까지 모두 32품의 경문이 있는 것은 10신ㆍ10주ㆍ10행ㆍ10회향ㆍ10지ㆍ11지의 닦아 나아가는 인과이니, 처음이 곧 나중이며 나중이 곧 처음인 불이(不二)의 지위이다. 마치 대왕의 길은 법이 늘 그러해서 낡은 체(體)도 아니고 새로운 체도 아닌 것과 같다. 문수사리의 게송에서는 “일념에 널리 한량없는 겁을 관하니, 가는 일도 없고 오는 일도 없고 머물지도 않는구나. 이같이 삼세의 일을 요달해 알면, 모든 방편을 초월해서 10력(力)을 이루리라”고 설하고 있다. 두 번째의2)해당되는 품을 과(科)한다는 것은 해당되는 품에서 네 가지로 장과(長科)한다. 첫째, “이때 세존께서는”부터 그 이하 8행 반의 경문은 ‘덕을 찬탄함’과 ‘모인 대중’을 밝힌 분(分)이다. 둘째, “당시 모든 보살이 이러한 사유를 했다” 이하 14행의 경문은 대중이 법을 청한 분(分)이다. 셋째, “이때 세존께서는 모든 보살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바를 알고” 이하 41행의 경문은 여래께서 신통으로 법을 나타냄을 밝힌 분(分)이다. 넷째, “이때 문수사리” 이하부터 품의 말미에 이르기까지는 법을 들어 연설하는 분(分)이다. 첫째의 ‘덕을 찬탄함’ 중에 둘이 있으니 하나는 여래의 덕을 찬탄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보살 대중의 덕을 찬탄한 거이다. 처음 여래의 덕 중에서 “이때” 이하 두 행의 경문은 서분(序分)이다. 앞서 처음 보리를 얻은 곳과 보광명전은 그 뜻이 두 곳의 다르지 않음을 밝힌 것이니, 본래 처소의 도량을 옮기지 않고서도 몸이 일체처에 두루 앉기 때문이며, 보리도량의 체(體)가 바로 법계의 체가 되기 대문이며, 보광명전이 법계의 보거(報居)가 도읍한 바가 되므로 법과 보(報)의 두 체(體)가 성(性)과 상(相)이 일진(一眞)이라서 본말의 인과가 본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니, 이러한 도리를 말미암기 때문에 거듭 서술한 것이다. 옛사람[古人]이 풀이하기를 “서로 가까움을 말미암기 때문에 거듭 서술했다”고 했는데, 경전의 뜻은 그렇지 않다. 또 “부처님께서 노거(露居:집 없이 거처함)하는 것을 보고 용이 보광명전을 지었다”고 하는데, 이 뜻도 역시 맞지 않으니 설령 이런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는 3승의 설이다. 또 “보리도량이 희련하(熙連河) 가에 있으면서 보광명전과의 거리가 3리(里)이며, 보광명전은 보리도량 동남쪽에 있다”고 한 것은 보리도량은 아란야로서 도를 얻은 곳이며, 보광명전은 보거(報居)의 집임을 밝힌 것이다. 이 한 부의 경전이 앞뒤로 「법계품」을 통해서 다섯 번에 걸쳐 거듭 “이때 부처님께서는”라고 한 것은 거처가 바로 법계이고, 여래의 몸과 궁전의 장엄이 모두 법계의 성상(性相)임을 밝힌 것이니, 근본지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섯 번 서문을 둔 뜻은 전회(前會)에서 이미 서술했다. “묘한 깨달음이 이미 원만하고” 이하부터 “널리 삼세를 보고”에 이르기까지 그 중에 2행 반의 경문은 바로 부처님의 덕을 찬탄한 것이다. “묘한 깨달음이 이미 원만하다”고 한 것은 10지(智)가 두루하면서 자재함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며, “2행(行)이 영원히 끊어졌다”라는 것은 유위와 무위의 2행(行)이 다했기 때문이며, 무상법(無相法)을 요달함은 취하고 버림이 다했기 때문이며, 부처님께서 머무는 곳에 머문다고 함은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삼세 모든 부처님께서 다 함께 법계의 대지혜와 대자비에 머물기 때문이다. 또 여래와 시방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 다섯 가지 두루함에 머물고 있으니, 첫째 정각 성취를 보인 두루함이니 초회의 보리도량이 이에 해당되며, 둘째 의보(依報)와 정보(正報)의 장엄과 명호의 두루함이니 제2회 보광명전이 이에 해당외며, 셋째 선정의 체가 두루한 것이니 「십정품」이 이에 해당되며, 넷째 보현행의 가르침이 두루함이니 「이세간품」이 이에 해당되며, 다섯째 법계의 원만무애하고 부사의한 지혜의 작용이 두루함이니 「법계품」이 이에 해당된다. 이 다섯가지 모든 부처님의 두루함을 쓰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머무는 곳에 머문다고 칭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 한 부의 경전에서 다섯 번에 걸쳐 “이때 부처님께서는 마갈국에 계시면서”를 안립(安立)하고 오직 「법계품」만이 조금 다를 뿐이니, 겹겹이 두루하는 것이 1처(處)ㆍ1보리체(菩提體)ㆍ1법계(法界)ㆍ1근본지(根本智)를 여의지 않고 일시(一時)로서 먼저와 나중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또 경문이 그 뜻을 잃을까 걱정해서 다섯 번에 걸쳐 거듭 차례를 정하여[敍] 나중에 배우는 자로 하여금 그 일을 미혹하지 않게 하려고 이 다섯 가지 두루함을 밝힌 것이다. 즉 총체적으로는 일젬(一際), 즉 먼저와 나중이 없는 1찰나의 둘 없는 염[念]에서 40년 간의 법륜을 굴린 것을 설하셨는데, 도솔천에서 오히려 내려오지도 않고 모태에서도 오히려 나오지 않고서 이미 열반에 들었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부처님의 평등을 얻었다’는 것은 이(理)와 사(事)가 둘이 아니기 때문이며, ‘장애 없는 곳에 이르렀다’와 ‘법을 굴릴 수 없다’는 것은 부처님께서 늘 생상 처하면서도 업이 변천하지 않기 때문이며, 또 능히 변천하지 않는 법을 굴리기 때문이다. ‘행하는 바에 장애가 없다’는 것은 부처님께서 생사 소에서 능히 일을 함께하면서도 진(眞)과 속(俗)에 걸리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부사의를 세우다’라는 것은 부처님의 도가 원만하고 행이 종결되니 총체적으로는 공용(功用)이 없어서 운(運)에 맡겨 중생을 이롭게 하는데 지혜로써 자재로우니, 이는 생각이나 상념, 뜻이나 식(識)으로 측량할 수 있는 게 아님을 찬탄한 것이다. ‘널리 삼세를 본다’는 것은 눈이 원만하고 밝기 때문에 삼세 아닌 중에서 삼세 속 중생의 일을 보는 것이다. “10불찰미진수의 모든 보살과 더불어” 이하부터 과거ㆍ현재ㆍ미래에 이르기까지 그 가운데 있는 4행의 경문은 보살의 더을 찬탄한 것이니, 10불찰미진수의 모든 보살과 함께했다는 것은 대중이 원만해서 법계의 바다에 두루함을 밝힌 것이며, ‘함께[俱]’라는 것은 동시에 이르러 가고 옴이 없기 때문이다. ‘다 일생보처(一生補處)가 아님이 없다는 것’은 모두 10지(地) 보살이기 때문이다. 10지가 등각위를 거치면서 보현위(普賢位)가 성숙하니, 도가 원만하고 공(功)이 종결되어야 비로소 불과에 오르기 때문에 그 명칭이 ‘일생(一生)’인 것이니 『영락본업경』의 설과 같다. 또 초발심주(住)부터 그 명칭이 일생 보살이니, 처음으로 성품의 근본지가 나타남으로써 생(生)의 먼저와 나중이 있음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 명칭이 ‘일생’인 것이니 『영락본업경』의 설과 같다. 또 초발심주(住)부터 그 명칭이 일생 보살이니, 처음으로 성품의 근본지가 나타남으로써 생(生)의 먼저와 나중이 있음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 명칭이 ‘일생’일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영락경』에서는 “3현(賢) 보살이 법류수(法流水) 속에서 운(運)에 맡겨 부처에 이른다”고 한 것이다. ‘다 타방(他方)으로부터 함께 와서 모였다’는 것은 타방에서 함께 와서 모인 것을 말함이지, 옛 대중3)이 아님을 구별한 것이니, 모두가 오지 않고 이르며 가지 않고 두루한 것이다. 또 전회(前會)는 과(果)를 들어 수행을 권함으로써 저 불과를 믿는다는 것을 밝혔지만, 이제 이 제2회(會)는 저 불과의 해행(解行)을 통해 자기 마음의 신증(信證)하는 도를 성취함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그 명칭이 ‘타방으로부터 함께 와서 모였다’고 한 것이니 이전의 불과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온 것이다. ‘다 일생보처이다’라는 것은 초회(初會)에서 신해(信解)가 생긴 것이 이 회(會)에 와서는 그 믿음이 원만해져 지위에 들면서 문득 성불함을 밝힌 것이니, 예컷대 용녀나 선재동자 등이다. 이런 뜻이 있기 때문에 타방에서 오는 것이 모두 일생의 대중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법에 들어가는 말을 나타냄으로써 타방으로부터 오는 것이니, 미혹을 타방이라 이름붙이고 깨달음을 ‘온다’고 말하는 것이다. “모든 중생계와 법계ㆍ세계ㆍ열반계를 널리 잘 관찰해서” 이하 3행의 경문은 도래한 대중이 이 세 가지 세계4)의 둘이 없는 성품을 잘 관하고, 또 중생의 번뇌를 따르는 업을 알고, 또 보살의 지위에 따른 번뇌아 행업(行業) 등의 일을 아는 것을 탄탄한 것이다. 나머지는 경문의 설과 같다. 둘째는 대중이 법을 청한 분(分)이다. “당시 모든 보살은 이렇게 사유했다” 이하 14행 반의 경문은 그 속에 서른두 가지 질문이 있는데 두 가지 뜻으로 나누겠다. 첫째로 처음 네 가지 질문은 네 종류의 불찰(佛刹)을 묻는 것이다. 둘째로 대보림을 성취하는 것이니, 시방 모든 부처님을 인증해서 설법을 권한 이하로 스물여덟 가지 질문이 있다. 보살의 주지(住地)와 부처님의 눈과 귀 등을 물은 이같은 스물여덟 가지 질문이 바로 「여래출현품」에 이르기까지의 답이니 경문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다.
문 초회에서 세주(世主)가 물은 것이 이와 더불어 뜻이 상당히 비슷하고 다만 자세하고 간략한 것이 다를 뿐인데, 어째서 이 제2회에서 다시 위와 같은 질문을 물었습니까?
답 전회(前會)는 세주가 물은 것인데, 불과를 들어 수행을 권함으로써 부처님께서 얻은 바를 믿게 하는 것이며, 이 회(會)는 스스로 자기 몸과 자기 마음이 부처닌 줄 믿게 함과 아울러 지위에 들어 수행케 하기 때문에 다시 물은 것이다. 전회의 지위는 보현이 선정에 들어가서 과(果)를 든 것이며, 이 회(會)는 문수가 믿음으로 들어가는 시초를 일으킴을 밝힌 것이다. 즉 범부가 처음 믿을 때 신심의 조잡함을 드러내기 때문에 선정에 들어가지 않고 설함을 밝힌 것이며, 10주 이후라야 비로소 해당되는 지위의 보살이 선정에 들어가 설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이 때문에 전회의 물음이 비록 의리(義理)가 다소 같기는 하지만 연(緣)에 응하는 차별 때문에 다른 것이니, 전회는 저 부처님께서 얻은 것을 믿는 것이며, 이 회(會)는 스스로 믿음에 들어가 수행하는 것이다. 옛사람이 설하길 “전회(前會)는 청한 것이요 이 회(會)는 물은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는 잘못된 뜻이니 전후가 모두 청한 것이다. 즉, 청함을 받았을 때 물은 것인데, 다만 수행을 권하는 것과 스스로 들어가는 법사(法事)가 조금 다를 뿐이다. 저 전회에서는 여래가 수행하는 도의 원만함과 이미 성도(成道)한 과거 모든 부처님의 행이 원만한 과(果)를 들고 있으며, 이 제2회에서는 시방 모든 부처님의 근본지를 범부와 성인이 공유한 과(果)를 들고 있으며, 이 제2회에서는 시방 모든 부처님의 근본지를 범부와 성인 공유한 과(果)를 들고 있으니 바로 일체처가 금색세계이며, 일체처가 부동지불의 10지불 등이라 한 것이 이에 해당되니, 일체의 모든 부처님과 주앵이 이 부동지(不動智)를 공유하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 금색은 이(理)의 법성신인데, 신심이 생멸하기 때문에 색(色)을 취해 10색세계로 표현한 것이다. 이 회(會)에서 물은 네 종류의 불찰(佛刹) 중에서 첫째, 부처님께서 머무는 불찰이란 것은 바로 일체 모든 부처님과 일체 중생이 다 함께 머물기 때문에 일체의 범부나 성인의 근본지가 되는 것이니, 이는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자기 마음이 부처님께서 머무는 바의 지혜이기 때문에 일체 모든 부처님께서 이 믿음으로부터 생기며, 일체의 범부도 이로부터 일어남을 믿게 하는 것을 들은 것이다. 둘째, 불법의 성품을 장엄하는 불찰이란 바로 10주ㆍ10행ㆍ10회향ㆍ10지ㆍ11지의 지위를 따라 각각 10개의 부처님 명호가 있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이는 자기 마음의 근보지를 말미암아 믿음을 일으켜 수행에 나아가서 지위와 행에 따라 모든 바라밀의 장엄을 통해 법신의 지신(智身)으로 만행을 장엄함으로써 행(行)으로 하여금 집착이 없게 하기 때문에 그 명칭이 ‘불법의 성품을 장엄하는 불찰’이다. 셋째, 청정한 부처님께서 법을 설한 불찰이란 여래께서 정각의 성취를 보여서 법륜을 굴리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넷째, 체성불(體性佛)의 위덕(威德)의 불찰이란 신통으로 응현(應現)해서 근기에 다라 세상에 나오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나중의 두 불찰은 앞의 두 불찰로부터 믿음을 일으켜서 수행으로 성숙하기 때문에 얻어진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 때문에 시방 모든 부처님께서 다 함께 이 한 길로써 출생하게 됨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반드시 이렇게 알고 반드시 이렇게 신해새서 신해(信解)의 성취를 얻으면 한결같이 모든 부처님의 믿는 바와 같기 때문에 이 믿음을 얻는 자는 「현수품」에서 설한 것처럼 손으로 삼천대천세계를 받들고 허공 중에 머무르면서 1겁을 지나는 것보다 뛰어나니 이는 그 믿기 어려움을 밝힌 것이며, 또 시방세계 미진수의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면서 1겁을 지내는 것보다 뛰어나니 공덕이 이같은 신심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이하 스물여덟 가지 질문은 경전에서 자세히 다하고 있는데, 뜻이 은밀해 밝히기 어려운 것은 풀이하고 뜻이 뚜렷한 것은 경문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서른두 가지 질문 중에 10통(通)과 10정(頂)을 물은 것이 있는데, 경문에서는 다만 10통과 10인(忍)만 있고 정(頂)의 명칭은 나타나지 않으니 10인은 남는 것이며 10정은 없는 것이다. “원하옵건대 부처님이신 세존께서도 모든 보살들을 위해 설하셔서”의 두 구절은 결론지어 청하는 것이며, “이로부터” 이하는 여래께서 신력(神力)으로 법을 들어서 답을 나타낸 것이다. 셋째5)“이때 세존게서는 모든 보살들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바를 알고” 이하 41행의 경문은 여래의 신통으로 법을 나타냄을 밝힌 분(分)이다. 이 속의 뜻을 둘로 나누리니, 하나는 유(類)를 따라 법을 나타냄을 밝힌 것이며, 다른 하나는 처음의 신심을 잡는 것을 밝힌 것이다. 첫 번째 유(類)를 따라 법을 나타낸다는 것은 5위 속 보살의 유(類)를 따라서 각각 열 가지 부처님의 지위를 나타낸 것이니, 10주ㆍ10행ㆍ10회향ㆍ10지ㆍ11지 중에 각각 지위에 따른 불과의 명호가 있는 것이 이에 해당되며, 또 일체의 국찰(國刹)과 일체 중생의 유(類)를 따라서 저마다 명호가 같이 않음을 나타낸 것이니, 아래에서 문수사리가 설한 부처님의 명호가 이에 해당된다. 두 번째 신심을 잡는다는 것은 바로 이 해당되는 1품과 1부(部)를 통틀어 모두 신심이 된다. 총체적으로는 5위 중의 인과를 믿어서 마음에 걸림이 없어야 비로소 행할 수 있는 것이니, 어떤 교설에서는 비유하기를 “어떤 사람이 5백 유순의 험한 길을 지날 때는 먼저 막히고 통하는 것을 안 뒤에야 가는 것과 같다”고 했는데, 이는 10신의 보살이 먼저 신심(信心) 안에서 5위를 닦아 나아가는 데 막히고 통함을 알아서 미리 원행(願行)으로 반비하는 것과 같음을 비유한 것이다. 그리하여 자기 마음의 분별하는 성품이 본래 일체 모든 부처님의 부동지의 체(體)인 줄 믿음으로써 삿된 견해로 다른 경계를 취함을 막는 것이다. 즉 지위에 따른 망식(妄識)이 요동하여 참다운 지혜를 가로막기 땜누에 선(禪)바라밀로 방비하고, 지위에 따른 제8주와 제8행과 제8회향과 제8지에서는 지혜가 두드러지면서 공적(空寂)에 걸리게 되어 진(眞)의 작위 없는 대자비를 가로막기 때문에 140의 대원(大願)으로 방비하고, 생사를 즐겨서 참다운 지혜를 가로막기 때문에 4념처관 등의 37조보리분법(助菩提分法)으로 방비한다. 아울러 열 개의 4제관(諦觀)과 열 개의 12연생관으로 막고, 10바라밀로 중생을 이롭게 하면서도 넓지 못할까 걱정하기 때문에 4섭법과 4무량법으로 막고, 스스로 즐거움의 과(果)를 구하는라고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 드넓지 못하기 때문에 10회향을 일으키고, 아룰러 대원(大願)과 대자대비를 덧붙여 일체의 악도(惡道)와 지옥과 인천(人天)을 버리지 않고 두루 그곳에 태어남으로써 자신의 즐거움이 보리심을 어겨서 얻는 바가 있는 것을 방비한다. 이 대문에 10신의 마음이 모두 5위에 통하면서 미혹이 다 믿음을 이루는 것이니, 만약 스스로의 믿음이 사무치면 그 추구함이 마다 요달치 못함이 없겠지만, 만약 의심을 없애지 못한다면 어찌 믿음을 이루겠는가? 가령 이 품에서는 불과의 문(門)을 들고, 「현수품」에 이르러서는 부처님의 신통과 부처님의 소행인 행업(行業)을 들어서 처음 믿는 자로 하여금 믿음이 사무치게 했기 때문에 비로소 신심(信心)이라 이름붙인 것이다. 이제 이 1부의 경전은 단박에 5위의 인과와 모든 불과문(佛果門)을 들어서 총체적으로 믿음을 성취하는 것이니, 믿음을 이루고 나서 지위에 들어가 수행해야 비로소 이지(理智)를 미혹하지 않는 것이다. 마치 사람이 음식을 만들 때 다섯 가지 맛이 일시에 단박 익어야 비로소 먹는데, 처음 먹을 때부터 다섯 가지 맛을 다 함께 먹기 싲가해서 음식을 다 먹을 때까지 다섯 가지 맛을 여의지 않는 것과 같으니, 이는 5위의 인과를 10신에 모두 밝히고, 그 때[時]도 본말(本末)의 변천이 없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삼세가 일체(一際)임을 믿기 때문에 궁극적인 불과가 첫 믿음의 법을 여의지 않는 것이니, 모양에 의지해 상(像)을 그리는 등의 비유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신통으로 법문을 본인 것 중에 모두 41행의 경문이 있는데 11단락으로 장과(長科)된다. 첫째 “이대 세존께서는 모든 보살의” 이하 1행 반의 경문은 여래께서 대중이 생각하는 바를 알고서 신통으로 법을 나타냄을 밝힌 것이다. 첫 번째[第一] “동방으로 10불찰미진을 지나서” 이하 39행 반의 경문은 모두 시방의 보살이 와서 모인 것을 밝힌 것이다. 시방은 스스로 한계가 있어서 다시 번거롭게 과(科)하지 않겠지만, 이 시방 보살이 모인 대중 속의 뜻을 열 가지로 나누겠다. 첫째로 불찰(佛刹)의 방면(方面)을 드는 것이다. 둘째로 불찰의 멀고 가까움을 드는 것이다. 셋째로 세계의 명칭과 색깔을 드는 것이다. 넷째로 부처님의 명호를 드는 것이다. 다섯째로 상수(上首)보살의 명칭을 드는 것이다. 여섯째로 대중의 수를 밝히는 것이다. 일곱째로 대중이 다 와서 존경을 바침을 밝힌 것이다. 여덟째로 방위에 따라 법좌를 화(化)하는 것을 밝힌 것이다. 아홉째로 법좌의 명목을 밝힌 것이다. 열째로 대중이 법좌에 올라가 앉음을 밝힌 것이다. 첫 번째의 불찰의 발면을 든다는 것은 동방에 있다. 동방이란 진괘(震卦)ㆍ춘생(春生:봄의 생명)ㆍ초명(初明:새벽의 밝음)ㆍ장남(長男)ㆍ머리ㆍ청룡ㆍ길경(吉慶:길하고 경사로움)ㆍ진동(震動)이 되는데, 법사(法事)와 작업이 움직여 작용하는 시초라서 도(道)와 속(俗)에 공통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먼저 동방을 들어서 첫머리로 삼음을 밝힌 것이다. 방(方)이란 것은 법으로서 단지 방법이란 뜻과 움직여 작용하는 시초를 취했을 뿐이지, 세간에서 보는 동서남북의 방향으로 집착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일체처가 동방이며 일체처가 남방으로서 단지 그 법을 취했을 뿐이니 나머지는 이에 준거하라. 두 번째의 불찰의 멀고 가까움을 든다는 것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동방의 십불찰미진수 세계 밖을 지나는 데 네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십(十)이 완전한 수가 됨을 밝힌 것이니 멀고 가까움의 다함 없음을 밝힌 것이며, 둘째는 신심 있는 자로 하여금 부처님 경계의 광대함을 알게 해서 자기 마음을 넓히도록 함을 밝힌 것이며, 셋째는 부처님 경계의 두루함이 거울 속의 상(像)과 같아서 서로 사무쳐 걸림이 없음을 밝힌 것이며, 넷째는 신심을 일으크지 못한 자가 10불찰진(佛刹塵)으로서 미혹에 처한 데 비유한 것을 밝힌 것이니, 10무명(無明:열 가지 근본 번뇌)을 요달하지 못하고 스스로 부처님 경계를 가로막아서 현전하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에 진(塵)을 들어 법을 나타낸 것이다. 가령 『열반경』에서 “석가모니의 정토는 서방의 32항하사 세계 밖을 지닌다”고 한 것은 모두 법을 나타낸 수(數)이니 회석(會釋)에서 이미 서술했다. 그리고 여기서 “십불찰미진수 세계 밖에서 왔다”고 말한 것은 10무명이 가로막음을 밝힌 것이니, 10무명 속 하나하나의 무명이 한량없는 정사(正使)와 업습(業習)6)이 있어 주(主)와 반(伴)이 서로 훈(熏)을 하니 번뇌가 세계진(世界塵)의 수(數)를 능가해 끝간 데를 알 수 없어서 능히 지혜의 경계를 가로막기 때문에 십불찰미진수 세계라 말한 것이다. ‘왔다[來]’는 것은 미혹으로부터 믿음에 들어가지 때문에 그 호칭이 ‘내(來)’가 됨을 밝힌 것이다. 저 세계 속에 부처님의 명호인 부동지가 있다고 말한 것은 부동지불이 시방의 범부와 성인이 다 함께 근본지를 갖고 있음을 밝힌 것이니, 이는 이 지혜에서 능히 신심을 일으키기 때문에 ‘내(來)’라 호칭함을 밝힌 것이다. 이 부동지불은 일체 중생이 늘 스스로 갖고 있는데, 만약 상(相)을 취해서 미혹을 따르면 곧 진(塵)의 장애가 다함이 없고, 만약 일념에 미혹을 깨달아서 상(相)을 요달하면 곧 청정해지면서 허공과 같아진다. 다만 미혹을 따르는 것을 밖[外]이라 칭하고 깨달은 곳을 온다[來]고 말할지언정, 실제의 불찰은 본래 멀고 가까움과 안팎 등의 장애가 없으며, 또한 가고 옴[去來]도 없어서 다함 없는 불찰이 털구멍과 미진(微塵)의 밖으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멀고 가까움을 불러들이는 것은 그 뜻이 처음 믿는 자의 마음을 광대하ㅔ 하기 위한 것이며, 저 세계 속으로부터 왔다고 말한 것은 또한 미혹으로부터 깨달음에 들어가기 때문에 온다[來]고 말했음을 밝힌 것이며, 부처님의 명호인 부동지가 있는 것은 그것이 믿는 자 스스로의 부동지임을 밝힌 것이니, 이러한 지혜가 있기 때문에 일체 중생으로서도 능히보리심을 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근본지의 체(諦)로써 능히 미혹된 성품을 요달해서 신해(信解)를 일으키기 때문에 저 미혹된 경계를 일으키는 것을 온다[來]고 칭하는 것이다. 가령 『기신론(起信論)』에서는 “부사의업상(不思議業相)이란 것은 지혜의 청정한 상(相)에 의거해 능히 일체의 뛰어나고 묘한 경계를 짓는데, 소위 한량없는 공덕의 상(相)이 늘 다널함이 없이 중생의 근기를 따라 자연히 상응하면서 갖가지로 나타나 이익을 얻게하기 때문이다”라고 하며, 또 “본각(本覺)에 의거해서 불각(不覺)을 일으키기 때문이다”라 하고, 또 “지(智)에 의거하기 때문에 괴로움과 즐거움을 낳는다”고 하여 자세히 밝히고 있다. 생각하건대 이는 일체 중생이 근본지를 미혹함으로써 세간의 괴로움과 즐거움의 법이 있다는 것을 밝힌 것이니, 지혜에 자체성(自體性)이 없기 때문에 연(緣)을 따라 불각(不覺)함으로써 괴로움과 즐거움의 업이 생기는 것이며, 지혜에 자체성이 없기 때문에 괴로움에 속박되는데, 그러다가 비로소 근본에 자체성이 없으며 온갖 연(緣)에도 자체성이 없어서 만법이 스스로 공적하다는 것을 능히 스스로 깨닫는다. 만약 고(苦)를 깨닫지 못할 때는 자체성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 성품이 있고 성품이 없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니, 사람이 땅으로 인해 넘어졌다가 땅으로 인해 일어나는 것과 같아서 일체의 중생도 자기 마음의 근본지로 인해 넘어졌다가 자기 마음의 근본지로 인해 일어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여래께서 이 일승 경전에서 단박에 근본법을 드러내 금색세계로 삼은 것은 법신의 오염 없는 순백의 청정함을 밝힌 것이뎌, 단박에 근본지를 드러내 부동지불(不動智佛)이라고 호칭한 것이며, 단박에 문수사리가 바로 자기 마음의 묘하게 가려내는 슬기임을 드러낸 것이다. 나머지 아홉 개의 세계와 아홉 개의 지불(智佛)과 아홉 개의 보살은 자기 마음의 신해(信解)로 수행하는 지위의 닦아 나아가는 진보에 따라서 법신이 행에 따라 명칭이 다른 것이다. 이 자기 마음이 본래 부동지불임을 자각하는 데서부터 도를 보고 지위에 들어가서 10주ㆍ10행ㆍ10회향ㆍ10지ㆍ11지를 일으켜 가행(加行)으로 법신ㆍ지신(智身)과 대원(大願)ㆍ대자(大慈)ㆍ대비(大悲)와 4섭법ㆍ4무량심과 10바라밀과 37조도분법(助道分法)을 닦아 나아가는 것이니, 처음 발심한 근본 법신의 근본부동지체(根本不動體)를 통해 만행을 자량함으로써 자비와 염원이 사무쳐 융화하여 서로를 성숙시키면서도 법신으로 행을 자량해 오염이 없게 하고 행으로 법신을 자량해 순수하게 성숙시키는 것이다. 위 안에서 각각 열 개의 불과와 열 개의 보살을 세우는 것은 지위를 따라 닦아 나아가는 가운데 스스로의 행으로 터득한 곳의 불과와 보살행의 과를 잡아서 명칭을 세운 것이니, 이는 다른 부처님의 명호가 아니며 다른 보살로 명칭을 세운 것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지혜의 불과를 따라서, 그리고 행의 불과를 따라서 5위 상의 인과가 각각 50개가 있는데 합치면 100개가 되고, 근본 5위에 있는 다섯 개의 인과를 합치면 도합 110성(城)의 법문이 된다. 이는 앞서 질문한 네 종류의 불찰 중에서 부처님께서 머무는 불찰과 법성의 청정을 장엄하는 불찰에 답하는 것이니, 이 두 종류의 불찰로부터 정각 성취를 보인 불찰과 신통이 자재하는 부처님의 위덕 불찰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회에서 세주(世主)가 물은 거은 저 비로자나불의 자재함을 얻은 과이며, 이 제2회에서 보살이 물은 것은 스스로 수행하는 자의 불찰보살행(佛刹菩薩行)의 인과이니, 이로부터 곧바로 「여래출현품」에 이르기까지는 5위를 닦아 나가는 보살의 가행(加行)하는 자력(自力)이 한 번 종결된 지위이다. 이는 이 품이 신심으로 나아가는 과(果)이며, 이로써 「출현품」에 이르는 것은 수행의 지위가 지극한 인과의 모습임을 밝힌 것이다. 자기 마음의 근본불지(根本佛智) 위에서 닦아 나아가는 수행을 낳기 때문에 이 부동지가 바로 일체 모든 부처님과 일체 중생의 지(地)인 것이니, 이 지혜 때문에 중생을 짓고 이 지혜 때문에 정각을 이루는 것이다.7)즉, 이 지혜 때문에 미혹을 따라 중생을 지을 때는 6도(道) 속의 천상인간과 악도를 다라 모두 중생의 의보와 정보를 따름이 있는데, 업에 따라 조잡한 것과 미세한 것이 같지 않다. 또 이 지혜 때문에 깨달음을 따를 때는 삼승과 법계의 원만한 일승 불과의 오묘한 의보와 정보를 성취하니, 만약 이 지혜가 없다면 원래 허공이라서 중생도 아니고 부처님도 아닌 것이다.
문 일체 중생이 본래 부동지가 있는데, 무슨 이유로 스스로 진(眞)에 응하면서 늘 청정하지 않고 무슨 이유로 오염을 따르는 것입니까?
답 이 지혜 때문에 삼계에 태어나는 일체 중생은 지혜에 자체성이 없어서 이 지(智)와 비지(非智), 선과 악, 괴로움과 즐거움 등의 법을 알지 못한다. 지혜의 체(體)가 성품이 없기 때문에 다만 연(緣)을 따라 나타나는 것이 빈 골짜기의 메아리가 사물에 응해 소리를 이루는 것과 같아서 자체성 없는 지혜가 단지 연(緣) 응해 분별하는 것이다. 분별을 하기 때문에 어리석음과 애착이 따라 일어나고, 어리석음과 애착을 말미암기 때문에 아소(我所)의 병이 생기고, 아소(我所)가 있기 때문에 자타(自他)를 집착하는 업이 문득 일어나고, 집착을 말미암기 때문에 말나(末那)라 호칭하는 것이며, 말나의 집착을 하기 때문에 식(識)이라 이름붙이고, 식의 종자를 말미암아 생사가 상속하고, 이 생사 때문에 온갖 괴로움이 한량이 없고, 괴로움이 한량이 없기 때문에 비로소 괴로움이 없는 도를 구하는 것이니, 미혹해서 괴로움을 알지 못하는 자는 능히 발심하지 못하고 괴로움을 알아 진(眞)을 구하는 자는 구하는 그것이 바로 본래의 지혜이다. 괴로움의 연을 이해하기 때문에 비로소 능히 괴로움을 아는 것이며, 괴로움의 연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능히 괴로움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괴로움의 연(緣)을 알기 때문에 비로소 능히 발심하여 무상도(無上道)를 구한다. 종성(種性)이 있는 보살은 숙세(宿世)에서 미리 이 괴로움을 알고 발심하여 신해(信解)하는데, 종성이 강한 자는 비록 인천(人天)의 즐거운 과(果)를 받더라도 능히 발심해서 무상도를 구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지혜로 인해 미혹을 따르고 지혜로 인해 깨달음을 따르는 것이다. 마치 사람이 땅으로 인해 넘어졌다가 땅으로 인해 일어나는 것과 같으니, 올바로 미혹을 따를 때를 식(識)이라 이름 붙이고 올바로 깨달음[悟]을 따를 때를 지혜라 이름붙이며, 속박에 있으면 그 이름이 식(識)이요 깨달음[覺]에 있으면 그 이름이 지혜이니, 식과 지혜가 본래 스스로의 명칭이 없지만 다만 미혹과 깨달음을 따라 그 명칭을 세운 것이다. 그러하니 상견(常見)이나 단견(斷見)을 묶어서 이름지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지혜와 식은 다만 미혹과 깨달음을 따라 명칭을 세운 것인데도, 만약 어디서 비롯되고 어디서 끝나는가를 찾는다면 허공 중에서 자취를 찾는 것과 같으au, 그림자 속에서 사람을 찾는 것과 같으며, 몸 안에서 ‘나’가 의지하거나 머무는 소재를 찾는 것과 같아서 낡은 것과 새로운 것[故新]이나 길고 짧음이나 처소(處所)의 상(相)을 끝내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무명과 지혜가 시종이 없는 것이라서 설령 보리를 얻을 때라도 무명은 멸하지 않는 것이니, 그 이유는 본래가 없는 것이라서 다시 멸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 무명을 따를 때에도 부동지는 멸하지 않는 것이니, 이 역시 본래 없는 것이라서 다시 멸함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빛깔이나 소리나 냄새를 따라 취하는 바의 연이 되는 것을 무명이라 하고, 다만 괴로움을 알아 발심하는 연(緣)이 되는 것을 지혜라 칭하며, 다만 연(緣)에 따르는 것을 유(有)라 이름붙인 것이다. 그러므로 체(體)가 근본이 없어서 빈 골짜기의 메아리와 같은 것이니 생각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의 세계의 명칭과 색깔을 든다는 것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세계의 명칭이 금색인 것은 금(金)의 체가 순백으로 청정해서 오염이 없음을 든 것이니, 법신의 성품이 없어 그 체에 오염이 없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마치 세간에서 서쪽의 금이 백색이 되는 것과 같은데, 체(體)가 희고 색이 황색인 것은 진(眞)에 응하는 보살이 안으로는 흰 법에 계합하고 밖으로는 황색의 모습을 나타냄을 밝힌 것이니, 황색이란 진(眞)에 응하는 기(氣)이다. 허보(許父)는 “다섯 가지 색깔 중에서 황색이 최고이니, 사람의 얼굴이 누런 참외의 색깔과 같으면 안으로는 현명한 행(行)이 있다”고 하였으며, 경전에서도 “진(眞)에 응하는 보살은 모두 진금색(眞金色)이다”라고 하였다. 또 금색세계를 밝힌 것은 신심(信心)의 지위에서 비록 자기의 몸과 마음이 순백으로 청정해 본래 오염이 없는 법신지신(法身智身)인 줄 믿긴 하지만 그 믿음이 생멸하는 유루심(有漏心)이 되기 때문에 바로 색심(色心)이라는 것을 밝힌 것이다. 동방을 들어 첫머리로 삼은 것은 동방이 초명(初明)으로써 만물이 발생하고 진동하는 첫머리가 되기 때문에 이를 취해 법을 나타냄으로써 10신의 첫머리에 비유함을 밝힌 것이다. 이는 방위에 있으면서도 방위가 없는 것이라서 다만 그 법을 들어 이(理)에 비유함으로써 그 체용을 나타낸 것이니, 우왕(牛王)과 용왕(龍王) 등으로 부처님의 덕을 비유하는 것과 같다.
문 동방으로 법을 나타내서 10신의 첫머리에 비유했다고 하셨다. 하지만 금(金)의 방위는 서방에 있는데, 어째서 동방이 금색세계가 되어서 법신이 금색이 되는 것을 나타내고 근본지가 부동지가 됨을 드러내 것입니까?
답 이 물음이 도리를 깊이 드러내고 있다. 가령 경전에서 설했듯이 신심으로 태(胎)를 삼고 10주의 지위에 가서는 ‘처음으로 불가(佛家)에 태어난다’라고 이름붙인다. 이제 동방으로 금색세계를 삼은 것은 금(金)이 정월은 포(胞)요 2월은 태(胎)요 3월은 형(形)을 이루고 4월은 사(巳)d서 생기고 월은 오(午)에서 기르고 6월은 미(未)에서 관대(冠帶)하고 7월은 상(相)이요 8월은 왕(王)임을 밝힌 것인데, 이제 10신이 태(胎)와 같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동방의 금태(金胎)로써 나타낸 것이다. 다음 남방과 서방과 북방과 상하사유(上下四維)는 10신의 마음을 닦아 나아가는 것이 두드러짐을 나타내기 때문에 사(事)에 의탁해서 이해하기 쉽도록 비유한 것이다. 가령 이 품에서 문수사리는 “세존께서 과거 보살이었을 때 갖가지 담론(談論)의 방편과 지위 등으로 성취를 얻게 되었는데, 또한 중생을 이렇게 지견(知見)케 하기 위해 법을 설한다”고 하였으니, 후대의 배우는 자는 잘 살펴야 한다. 모든 것이 다 이 방우(方隅)를 설해서 법을 나타낸 것이니, 반드시 알라. 그물을 통해 고기를 잡을 때 고기가 그물은 아니지만, 그물이 없다면 또한 고기를 잡지 못하는 것이니, 뜻으로써 생각하면 지극한 이치[至理]에서 비로소 믿음을 이룰 것이다. 또 경전에서 “일체체거 금색세계이며, 일체처가 부동지불이며, 일체처가 문수사리이다”라고 한 것은 법신이 일체 중생의 몸과 마음에 두루하기 때문에 총체적으로 부동지불이며 총체적으로 문수사리임을 밝힌 것이니, 응당 이렇게 알고 이렇게 신해(信解)하라. 이는 금색세계가 신심 있는 자가 믿는 이치[理]로써 이 금색으로 세계의 명칭을 삼으며, 또 이러한 믿음으로 인해 반드시 낳는 바의 오염 없음과 거처하는 바의 집착 없음을 과보로 얻음을 밝힌 것이니, 즉 서방의 연화색세계가 이런 뜻이다. 예컨대 금색세계는 10신의 초인(初因)을 드는 것이며, 남방의 묘화색세계와 서방의 연화색세계 등은 10신을 닦아 나아가는 뛰어난 작용이기 때문에 이 속에 10인(因)과 10과(果)가 있는 것이다. 10과라는 것은 10지(智)의 부처님이 이에 해당되며, 10인이란 문수사리와 각수 등의 10보살이 이에 해당된다. 수행의 인(因)으로 인 속에서 이익을 얻는 것은 바로 인 소의 과(果)이니 부동지 등 열 개의 지불(智佛)이 이에 해당되며, 열 개의 세계는 수행하는 바의 법문이다. 네 번째의 부처님의 명호를 든다는 것을 설명하면, 부동지불이란 일체 모든 부처님과 일체 중생의 근본지체(根本智體)이므로 이제 먼저 이를 거양함으로써 첫믿음을 성취함을 밝힌 것이다. 이는 앞서 말한 부처님께서 머무는 불찰에 답함을 밝힌 것이니, 나머지 아홉 개의 지불(智佛)은 모두 이 근본부동지로부터 닦아 나아가는 명칭이니지 타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시방 모든 부처님께서 다 함치면서 ‘정각 성취를 보인 불찰’과 ‘부처님의 위덕(威德) 불찰’을 얻는다. 위덕 불찰이란 것은 바로 여래의 신통이니, 나머지 뜻은 앞에서 이미 서술했다. 다섯 번째의 상수보살의 명칭을 든다는 것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문수사리라 이름붙인 것은 바로 시방 모든 부처님의 성품 없는 가운데 법을 간택하는 묘한 슬기로서 일체 모든 부처님께서 모두 이 슬기로부터 정(正)과 사(邪)를 간택하여 정각을 성취하기 때문에 문수가 시방 모든 부처님의 스승이 된다고 칭하며, 또한 불모(佛母:부처의 모태)라고 이름붙이는 것이니, 이는 일체 모든 부처님께서 이 묘한 슬기로부터 생김을 밝힌 것이다. 만약 이 슬기가 없다면 설령 해탈을 닦더라도 단지 이승과 정토 보살을 얻을 뿐이지, 여래승을 타고서 정각을 성취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 부동지의 체(體)인 문수의 묘한 슬기의 법신묘리대지(法身妙理大智)를 타고서 신심에서부터 5위를 거치면서도 부동지불의 문수묘혜(文殊妙慧)를 여의지 않고 정각을 성취하기 때문에 그 호칭이 여래승ㆍ부사의승ㆍ최승승ㆍ무상승을 타고서 정각을 성취함이 되는 거이다. 또 문수사리를 호칭하기를 소남(小男)이라고도 하고 동자라고도 하는 것은 일체 모든 부처님께서 이 묘한 슬기로부터 정법을 잘 앎으로써 최초로 부처님의 집안에 태어남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그 호칭이 동자 보살이 된 것이다. 여래께서 세상을 떠나도 문수사리는 여전히 세간에 있다가 나중에 화연(化緣)이 다하게 되자 향산(香山)의 저앙에서 열반에 듦을 보였다는 것은 바로 삼승교의 설이며, 이 경전에서 “일체처가 문수사리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일체처의 중생이 평등히 공유하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 이제 이 경전의 신심 첫머리에서 그 명호를 드는 것은 신심 있는 자로 하여금 자기 마음의 묘하게 간택하는 슬기가 한결같이 이와 같아서 옛 자취에서 옮기지 않음을 믿게 하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이는 일체 모든 부처님과 중생의 근본적인 묘한 슬기로서 범부든 성인이든 평등히 갖고 있고 다시 다른 성품이 없으니, 마치 대왕의 길의 법칙이 항상 마찬가지인 것과 같다. 다만 모든 경전이 문수를 두어서 문답의 첫머리로 삼는 것은 다 법신의 묘한 슬기의 문을 밝힌 것이며, 보현으로 문답의 첫머리를 삼은 것은 모두 묘지(妙智)의 만행의 체용을 밝힌 것이니, 이같은 두 분은 일체 모든 부처님의 이지(理智)가 묘하게 작용하는 만행의 문이다. 그 법문에 의거해 명호를 세우고 몸을 나타내 조화를 이룸으로써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체 중생으로 발심한 자는 다 함께 닦고 다 스스로 자리이타(自利利他)의 행이 있는 것을 떳떳한 궤범으로 삼는다. 이제 교설 중에서, 둥북방의 청량산(淸凉山)에 있다고 미루면서 문수사리와 아울러 1만 보살이 그 속에 머문다는 것에는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 이 세계의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기쁜 마음으로 나아가게 함으로써 선근(善根)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며, 둘째 보살이 세간에 항상 머무는 것을 밝힌 것이며, 셋째 방위를 따라 법을 나타내서 법을 이해하기 쉽게 보이도록 밝힌 것이다. 앞의 두 가지는 알 수 있을 것이며, 셋째의 ‘방위에 따라 법을 나타낸다’는 것은 동북방이 이 염부제 한 경계의 동북방을 취함을 밝힌 거이니, 청량산이 이에 해당된다. 경전에서 진단국(震旦國)에 있다고 미루고 또한 지제나국(支提那國)이라고 말한 것은 한역하면 사유(思惟)이니, 그 나라 사람이 사려하는 바가 많고 계교하는 바가 많기 때문에 이러한 명칭을 세운 것으로서 바로 한(漢)나라이다. 법을 나타낸 것은 동북방이 간괘(艮卦)로서 간(艮l 소남이 되고 동몽(童蒙)이 되며, 축인(丑寅)의 사이가 초명(初明)이기 때문에 문수사리보살이늘 범부의 올바른 믿음에 들어가는 것과 아울러 처음 도를 보는 동몽(童蒙)을 발기(發起)함으로써 묘한 슬기로 하여금 밝음[明]이 생기게 하는 것과 같음을 밝힌 것이다. 또한 산의 정상에 올라가 모습이 다한 곳에 이르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는 처음으로 올바른 믿음에 들어가는 자가 비로소 모든 법이 공(空)한 줄 믿기 때문에 능히 법의 공함을 믿음으로써 묘한 슬기가 생기기 때문이다. 축(丑)은 첫믿음과 같고, 인(寅)은 처음 증득해서 도를 보는 것과 같고, 묘(卯)와 진(辰)과 사(巳)는 닦아 나아감이 되고, 오(午)는 중도가 되고, 미(未)와 신(申)과 유(酉)와 술(戌)과 해(亥)는 일을 같이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 되고, 자(字)는 스승의 지위가 됨으로써, 감괘(坎卦)가 임금이 되고 스승이 되어서 어리석음에 처해 규범을 세우고 법을 제정해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북방이 임금이 되고 스승이 되어서 존자(尊者)가 거처하는 곳이 되는 것이니, 이는 더을 밝혀서 다스리기 때문이다. 여섯 번째의 대중의 수를 밝힌다는 것을 설명하면, 십불찰미진수가 있는 것은 몸과 행이 두루함을 밝힌 것이다. 1불찰진도 오히려 스스로 두루하거늘 하물며 십불찰진이겠는가? 모두 몸이 겹겹이 다함이 없이 두루함을 밝힌 것이다. 일곱 번째의 대중이 다 와서 모인 뒤에 존경을 바침을 밝힌다는 것은, 이는 스승과 제자의 법칙이 존경하며 따르는 의식(儀式)임을 밝힌 것이다. 여덟 번째의 방위에 따라 법좌의 화현을 밝힌다는 것은 동방에 있다는 것이다. 아홉 번째의 법좌의 명목을 밝힌다는 것을 설명하면, 연화장사자(蓮花藏師子)의 법좌라 이름붙인 분(分) 속의 뜻을 셋으로 나누겠다. 첫째로 연화(蓮華)는 오염이 없다는 뜻이다. 이는 법에 의거하고 행에 의거한 과보로 얻은 것이니, 법신의 행으로 성품이 세간의 오염이 없기 때문에 능히 이지(理智)의 과(果)를 꽃 피워서 더욱더 밝고 청정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과가 서로 자량해서 순수하게 성숙시킴을 밝힌 것이며, 연꽃을 꽃피워서 사법(事法)을 장엄한 것이 볼 만함을 밝힌 것이니, 이 법행(法行)의 꽃이 이 과보의 연꽃을 감응해 불러들여 법좌로 삼는 것이다. 둘째로 장(藏)이란 것은 갈무리한다는 뜻이다. 법신의 이지(理智)로 세상에 처해 행에 따라 중생을 이롭게 하면서도 널리 법계를 갈무리하여 일체의 많은 공덕으로 요익케 하는 것을 장(藏)이라 이름붙인다. 셋째로 사자(師子)라 이름붙인 것은 주(主)에 의거해서 명칭을 얻은 것이다. 법성 대지혜의 생멸 없는 몸으로 세간에 처해 사람을 이롭게 하면서도 생사에 두려움이 없으며, 또 바른 지혜 광명으로 변재(辯才)가 두려움이 없고 나아가 5포외(怖畏)8)등이 없는 것이 사자와 같은 것이다. 열 번째의 대중이 법좌에 올라가 앉음을 밝힌다는 것은, 법좌가 법계를 좌座)의 체(體)로 삼는 것이니, 이는 범부에서부터 법계의 체에 계합하기 때문에 이를 닦아 나아가는 수행으로 삼음으로써 비로소 믿음을 성취함을 밝힌 것이다. 이것은 일체 시방 모든 부처님의 과좌(果座)이니, 이는 첫믿음에서부터 단박에 불과를 믿는 것으로 스스로의 행으로 행해야 하는 법을 삼기 때문에 비로소 믿음을 성취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이 단락을 다시 둘로 나누리니, 첫째는 법좌의 넓고 좁음을 밝힌 것이며, 둘째는 보살이 어떻게 편안히 앉는가를 밝힌 것이다. 첫째, 법좌의 넓고 좁음을 밝힌다는 것은 가령 「법계품」에서 “그 사자좌가 법계를 포함한다” 등을 말한 것으로서 경문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는데, 그 대의는 의지허가너 머묾[依住]이 없고 고요하거나 흐트러짐[定亂]이 없는 심성의 체(體)로써 법좌의 체(體)를 삼는 것이다. 둘째, 보살이 어떻게 편안히 앉는가를 밝힌다는 것은 결가부좌(結跏趺坐)를 말하는 것이다. 세간의 온갖 연(緣)을 회통해서 하나의 법계를 만드는 것을 결(結)이라 이름붙이고, 하나의 법으로 온갖 연(緣)에 부합하는 것을 가(跏)라 이름붙인다. 또 결가부좌라는 것은 안정되어 움직이지 않는 위의(威儀)의 상(相)이기 때문이다. 이 지위는 단바라밀 중 10바라밀을 주재한다. 두 번째9)로 “남방” 이하 4행의 경문은 그 단락 속의 뜻을 열 가지로 나누겠다. 첫째로 세계의 명칭과 색깔을 드는 것이다. 넷째로 부처님의 명호를 드는 것이다. 다섯째로 상수 보살의 명칭을 드는 것이다. 여섯째로 대중의 수를 밝히는 것이다. 일곱째로 대중이 다 모인 뒤에 존경을 바침을 밝히는 것이다. 여덟째로 방위를 따라 법좌가 화(化)함을 밝히는 것이다. 아홉째로 법좌의 명목을 밝히는 것이다. 열째로 대중이 법좌에 올라가 앉음을 밝히는 것이다. 첫 번째의 불찰의 방면을 든다는 것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경전에서 남방(南方)이라고 말한 것은, 법을 나타내는 것에서 남(南)은 정(正)이 되고 일(日)이 되고 명(明)이 되고 허무(虛無)가 되고, 리(离) 가운데 허(虛)가 되기 때문에 바로 밝음[明]이 연(緣)이 되는 것이니, 10신을 닦아 나아가면서 모든 법의 허무를 요달하여 점점 더 밝아지는 것이다. 이 때문에 문수 각모(覺母)가 처음 배우는 자를 믿게 함으로써 바로 근기를 각성(覺成)의 동쪽에 따르게 하니, 선재동자가 도에 들어가 닦아 나아갈 때 남쪽으로 모든 벗을 순방하는 것은 그 남방이 정(正)이 되고 일(日l 되고 명(明)이 되고 허무(虛無)의 이(理)가 됨을 나타낸 것이다. 이 때문에 예불(禮佛)할 때 모두 ‘나무(南無)’라고 말하는 것이니, 이는 남방의 허무를 밝힌 것이다. 단지 허무의 이(理)가 남방의 뜻이므로 일체처가 남방인 것이며, 다만 최초로 믿음을 낼 때가 바로 일체처가 동방인 뜻이다. 이 때문에 4제(諦)에서 고(苦)와 집(集)을 동과 서로 짝짓고 멸(滅)과 도(道)를 남과 북에 짝지은 것이다. 그러나 법은 방향이나 처소가 없이 초학자를 교화해서 이해를 낳고 믿음을 일으키는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법성을 밝히기가 어렵다. 이 품 아래의 경문에서 “세존께서 보살이었을 때는 갖가지 담론과 갖가지 언어와 나아가 갖가지 신해(信解) 등으로 성숙함을 얻었는데, 또한 중생에게도 이같이 지견케 하기 위해 법을 설한다”고 하였으니, 경전에서 설한 대로이다. 또 나무(南無)라는 것은 바르게 따름[正順]을 밝힌 것이니, 올바로 허무의 이(理)를 따르기 때문에 나무라고 이름붙인 것이며, 모갑불(某甲佛:어떠어떠한 부처)이란 것은 바로 허무를 요달한 지혜로운 사람이기 때문에 나무모갑불이라 칭하는 것이다. 두 번째의 불찰의 멀고 가까움을 든다는 것을 설명하면, 십불찰미진수라고 말한 것은 그 뜻이 앞서 해석한 것처럼 미혹함을 밖[外]이라 말하고 법에 들어감을 온다[來]라고 말한다. 세 번째의 세계의 명칭과 색깔을 든다는 것을 설명하면, 묘한 색깔[妙色]이라 칭한 것은 제2의 신심이 점점 더 묘해지면서 이전의 신심보다 뛰어나기 대문이니, 법의 허무를 요달하여 법에 즉(卽)해서 스스로 묘하게 된 것이다. 네 번째의 부처님의 호칭이 무애지(無碍智)임을 든다는 것을 설명하면, 부동지의 체(體)로 닦아 나아가 신심이 더욱 밝아짐으로써 지혜가 걸림 없음을 밝힌 것이니, 총체적으로는 자기 마음의 신위(信位)의 부처님이지 다른 부처님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마음과 중생의 마음과 자기 마음이 총체적으로 일심(一心)ㆍ일법계(一法界)ㆍ일지혜(一智慧)가 되어야 비로소 믿음을 이루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의 상수보살의 명칭을 든다는 것을 설명하면, 명칭이 각수(覺首)가 되는 것은 문수의 묘한 슬기로써 정(正)과 사(邪)를 잘 간책해 능히 자각하기 때문이며, 또한 스스로 깨달은 법에서 능히 타자를 깨닫게 함을 밝히기 때문이다. 이 지위의 보살이 깨달은 것이 무슨 법인가? 이 지위 속의 깨달음이 셋이 있다. 첫째는 스스로의 몸과 마음이 본래 법계로서 오염 없는 순백의 청정함임을 깨닫는 것으로서 앞서 말한 금색세계 같은 것이 이에 해당되며, 둘째는 스스로의 몸과 마음이 분별하는 성품이 본래 능소(能所)가 없어서 근본적으로 부동지불임을 깨닫는 것이며, 셋째는 자기 마음의 정(正)과 사(邪)를 잘 간책하는 묘한 슬기가 문수사리임을 깨닫는 것이다. 신심의 첫머리에서 이 세 가지 법을 깨닫는 것이 그 이름이 각수인데, 이는 바로 신심 속에서 잘 깨닫는 행이 각수보살이란 명칭이 됨을 밝힌 것이다. 총체적으로는 자기가 행하는 바의 법문인 줄 스스로 깨달아야 비로소 믿음을 성취하기 때문이니, 타나만을 믿고 스스로는 그러한 분수가 없다고 믿는다면 믿음이라 이름붙이지 못하는 것이다. 여섯 번째의 대중의 수를 밝힌다는 것을 설명하면, 십불찰미진수가 있다는 뜻은 앞에서 이미 해석했다. 일곱 번째의 대중이 다 모인 뒤에 존경을 바침을 밝힌다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알 수 있다. 여덟 번째의 방위에 따라 법좌의 화(化)함을 밝힌다는 것도 앞섬 라한 대로 알 수 있다. 아홉 번째의 법좌의 명목을 밝힌다는 것은 믿음의 성취에 들어가 생사 속에서 능히 무외(無畏)를 얻음을 밝힌 것이니, 주(主)에 의거해 명칭을 얻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머지 뜻은 앞의 해석과 같다. 열 번째의 대중이 법좌에 올라가 앉음을 밝힌다는 것도 앞의 해석과 같다. 이 지위는 계(戒)바라밀로 주(主)를 삼고 나머지 아홉이 반(伴)이 된다.
新華嚴經論卷第十四長者李 通玄 撰第二會六品經,明菩薩信心門,於此一會之中,自有序分、正說分、流通分,從第十二卷初爾時已下有四行半經,是序分,已下至賢首品,是正說分,賢首品末有三行半經,是流通分。如來名號品第七從此品,至賢首品,是第三長科文中,以果成信,信自己心之是佛分,於此一段之中,約有六法,以成自心佛果,以令信者入佛果故。一佛名號品,令信心者,信佛名號遍一切世間名知名性離故。二四聖諦品,令信心者,自信一切世間苦諦卽聖諦不別求故。三光明覺品,令信心者,自以自心光明覺照一切世間無盡大千世界摠佛境界自亦同等,以心隨光,一一照之,心境合一內外見亡,初三千大千世界已,次還以東方爲首,光至東方十三千世界,照百三千大千世界。如是十方十重倍倍周迴十方圓照,身心一性,無㝵遍周,同佛境界,一一作意如是觀察,然後以無作方便定印之。入十住初心生如來智慧家,爲如來智慧法王之眞子,一如光明所照如經具明,不可作佛光明自無其分,須當自以心光如佛光明開覺其心圓照法界。四問明品,令信心者,信所信之法門。五淨行品,令信心者,信菩薩初發心時,皆發大願爲首。又令信心者,便迴無始妄念以成智海無生滅性。六賢首品,令信心者,信佛神力通化無邊得大自在及信心之福,信此六法名爲賢首,以此六法觀行相應名爲信心,皆以不動智佛等十智如來是自心之果,以不動智佛爲體,餘智爲用,至下方明。文殊師利覺首目首等十首菩薩,是修行信心者之身,此品已下至賢首品已來六品經,是長科一部經中,第三以果成信門也。爲明初會是擧佛果勸修信諸佛所得,此第二會以果成信,信自心是佛與果佛不異故,至文方明,前之以成佛果將用勸修,此擧佛名號果勸修,十方世界無有一名非佛名者,名體性自解脫故,但隨衆生所聞不同故,此明佛號遍周卽明於一切名無所著故。將釋此品略作三門,一釋品來意,二釋品名目,三隨文釋意。一釋品來意者,明前之初會,但明如來成等正覺之身及智攝生,未明如來名號攝生廣狹,今此第二會普光明殿,方明佛果名號攝生故,此品須來。又爲擧佛果名令生信解故,此品須來,前會明身智遍周。此會明名身及智俱遍周故,初會世主雖問未有其荅。此品荅前所問,便令後信者之心,令使信佛名身及智普遍法界蔭機利物照俗破迷故,名普光明殿,約德成殿,約殿明德故,此品須來。二釋品名目者,於此佛號中,約有五緣,以成佛號,一以法界自體根本智緣以成佛號,二約如來示成正覺自德緣以成佛號,三明如來利生方便緣約位進修以成佛號,四明如來以一切衆生隨根所樂緣以成佛號,五明法界體用平等緣一切諸法㧾名佛號。一以法界自體根本智緣以成佛號者,如下不動智佛、無㝵智佛、滅闇智佛,如是十智佛號是也。以此法界根本智上,以施十種之名,以成十種信力,至位方明廣意,大意令衆生達自根本無明本唯如來根本大智,令諸衆生頓識本故,頓作佛故。二約如來示成正覺自德緣以成佛號者,卽十方諸佛示成正覺,共同十號,所謂如來應供正遍知是。又毘盧遮那是摠名,是大智光明照耀種種諸法及種種衆生故,故毘云種種,盧遮那云遍照。三明如來利生方便緣約位進修以成佛號者,卽如下擧十箇根本不動智佛以成十信,擧十箇月佛,下名悉同,號之爲月,以成十住,明創契法身本智心得淸涼,爲明此位菩薩契理惑亡得法性智淸涼故,約自得益之法,以成佛號,十行位中以十箇眼佛下名悉同號之爲眼,爲明十行以智智眼利生攝益故,佛號爲眼,以善知根性故,皆是約得益立名爲佛。十迴向中以十箇妙佛上名悉同號之爲妙,爲明十迴向位中菩薩進修漸熟妙智現前故,佛號爲妙,十地同妙已上,以明從十信中,自信自心分別之智與一切諸佛根本不動智佛本來是一,以成信心,心外見法不成信心也。從此信已下以三昧力契理會源,名爲十住,佛號爲月,皆是約修行之人所得之法,以成佛號,安立五位五十箇佛名,五十箇因,五十箇果,爲當位具因果故,成一百重因果,爲根本五位中本,有五因五果,成一百一十重因果法門,不異法界體,不異十信中所信之法,根本不動智佛以爲諸位進修,且約如是,廣意至下本位廣明,是名隨位進修以成佛號。四明如來,以一切衆生隨根所樂緣以成佛號者,卽以對現色身等衆生界,爲佛爲天,爲神爲主,爲仁爲仙,遍衆生界令諸衆生不作惡者,摠是不可以自凡情所測也。摠是佛名號遍周。五明法界體用平等緣一切諸法摠名佛號者,爲一切諸法及以名言自體性離故,一切法自體性離卽法界性,法界性卽佛號故,一切法及名言皆是佛號故,爲如來稱此一切法自性離之法以成佛故,欲廣引經文證義,爲此教文弘廣言煩翳,本作業者難解,但依此經上下自相契會,作業者易解故如三乘中亦說根本智後得智今欲令三乘人迴心,指此金色世界不動智佛,令使直認是自心能分別智本無所動。文殊師利卽是自心善簡擇無相妙慧,覺首目首等菩薩,卽是自心隨信解中所見之理智,如是三乘之人未迴心者,定當不信。何以故?爲立三阿僧祇劫後當得佛故,爲直自認身及心摠是凡夫,但信佛有不動智等,不自信自心是根本不動智佛與佛無異。以是義故,不成此教法界乘中以根本智爲信心。此經信心應當如是,直信自心分別之性,是法界性中根本不動智佛,金色世界是自心無染之理,文殊師利是自心善簡擇妙慧,覺首、目首等菩薩是隨信心中理智現前,以信因中契諸佛果法分毫不謬,方成信心,從此信已以定慧進修,經歷十住、十行、十迴向、十地、十一地,日月歲劫時、復無遷,法界如本,不動智佛如舊,而成一切種智海,教化衆生,因果不遷,時劫不改,方成信也。若立僧祇定實身是凡夫,凡聖二途時劫移改,心外有佛不成信心,如是已上有此五種佛名號不同。問曰:名之與號何異?荅曰:有二同別,何者爲二?約父母所生幼稚無德,且作字呼之爲名,有德卽約德立名,其名可尊,稱之爲號,名卽下人不得呼稱,其號卽下人得呼稱之,故雖有德無德之異,亦摠屬名,收爲名言所攝故,若約此經佛號,摠是約法,約德立名,不同世俗也。三隨文釋義者,於此段中義分爲二。一長科三十二品經意,第三禪中說十一地一品未來。二科當品經意,從此如來名號品,第二會世主起問,二十八問已下直至向後如來出現品,是世主所問,一終因果所荅,摠有三十二品經,是荅二十八問,故以從普光明智法界佛果報居之殿,擧佛果名號幷擧佛果所行教化衆生,四聖諦法門幷擧法界根本智體佛號不動智佛,以成信修,直至彼如來出現品,三十二品經,是信進修行之一終因果之極也。明此普光明智殿佛果至如來出現品,此信進修行因果不二故。又明此始成正覺果德之上起信心修行,至後如來出現品中,明法界無時可隔故,以明法界體中凡夫妄見無量劫,如起信進修行者,依眞起行,以爲進修,經歷五位行門,無時可移故。若未起信進修行時,常謂已前諸佛先已成佛經無量劫及其以正信力便見十方無量劫已成佛者,而自身與彼先成佛者,一時成佛無先後故。以是義故,如來始成正覺時,如今凡夫始發菩提心,起行進修自行已滿,畢竟不離如來始成正覺初出現時,爲無情量依本法界本無時故。是故經言:發心畢竟二不別者,爲法界性無三世別故,以三世時無別以無時別故,以智無別故,無別爲不異,不動智佛體故,妙慧用無別,不異文殊善簡擇妙慧故,行無別,爲從初發心不異十波羅蜜行普賢行而爲修行故大悲無別,常教化故,大願無別,不捨衆生故,四攝無別,四無量心無別,三十七助道品無別,以此十種無別,故云:發心畢竟二不別,如是二心先心難,爲明入此十種信解者難故,若心外信有他佛得道我是凡夫者,卽世間人情量,是此乃不論信進修行,直是生死長流常隨見網,何大苦哉?以此如今第二會及初會,明始成正覺如來出現,後三十二品。又著如來出現明始終信進修行者,與三世佛一時出現,明法界摠一時故,如持寶鏡普臨衆像頓照顯現無前後時故,明於法界根本佛智境界中頓現衆法,不可將情量度量作前後解故,一依彌勒樓閣中境界,初會中始成正覺佛,是擧果勸修,佛出現品中佛,是明諸菩薩進修五位因果行終佛與信位中不動智佛相對故。問曰:何故諸品諸菩薩說,唯阿僧祇品、隨好品,是佛自說?荅曰:如菩薩加行,如五位煩惱無明,以如來位中不思議菩薩衆,寄成五位菩薩當位,自彰次第法門,卽如十慧、十林、十幢、十藏等菩薩是。佛位之內迷法無明,如來自說,如此阿僧祇品、隨好品,是佛位之內無明,至佛位內方決此二迷。是故無明住地佛位方終,如勝鬘經說,一分教網,二三乘相似,唯不許二乘及淨土菩薩斷得根本無明,爲不了無明是根本智故。以此一乘教以不動智佛爲信心,以此所有修行證照衆法不同此經故,此教明當念初心畢竟心摠盡,以法界中無三世故,三乘定滿僧祇。又三賢十聖進修路別,地上加行地前四資糧等佛果,定滿僧祇,如前以明。此經十住卽見道加行資糧一時。何以然?以法界大智用資其行令行無染,以行資糧法界智體使慣習令熟,爲明從凡創見如來理智性故。又此五位中修行位位各有佛果,隨位慣習處安立名,別三乘教中前位向後位,但有菩薩果非佛果故,後至位廣明。此法界法門說之經無量劫不延,說之一剎那不促,唯迷之者妄作長短延促之解,卽不稱應眞之心自此如來名號品以去直至如來出現品,摠有三十二品經,是十住、十行、十迴向、十地、十一地進修因果,以初卽後以後卽初不二之位故,如大王路其法常爾非故,新體也。如文殊師利頌云,一念普觀無量劫,無去無來亦無住,如是了知三世事,超諸方便成十力。二科當品者,於當品中長科爲四。一從爾時世尊已下有八行半經,明歎德集衆分,二時諸菩薩作是思惟已下,十四行經,是大衆請法分,三爾時世尊知諸菩薩心之所念已下,四十一行經,明如來神通現法分,四爾時文殊師利已下,至品末已來擧法演說分。一從初歎德中二,一歎如來德,二歎菩薩大衆德,徒初如來德中,爾時已下兩行經,是敍分。敍前初得菩提處幷普光明殿,意明二處不異,爲不移本處道場而身遍坐一切處故,爲菩提場體是法界體故,爲普光明殿是法界報居所都故,法報二體性相一眞本末因果本末無異故,由斯道理故重敍。古人釋云:由相近故,故須重敍者,經意不然。又云:見佛露居龍造普光明殿,此意亦不然。設有此事,是三乘之說。又云:菩提場在熙連河邊,與普光明殿相去三里,在菩提場東南,明菩提場,是阿蘭若得道之處,普光明殿是報居之宅,一部之經前後通法界品五度重有,爾時世尊在者,意明居處是法界如來身及宮殿莊嚴,摠是法界性相根本智不二故。五度敍意,前會已述,從妙悟已滿下至普見三世於中,有兩行半經,是正歎佛德妙悟已滿,明十智遍周自在故,二行永絕者,爲有爲無爲二行盡故,達無相法取捨盡故,住於佛住者,過去、未來三世諸佛共住法界大智大悲故。又如來及十方三世諸佛住五種遍周。一示成正覺遍周,如初會菩提場是也。二依報正報莊嚴及名號遍周,卽第二會普光明殿是也。三定體遍周,卽十定品是也。四普賢行教遍周,卽離世間品是也。五法界圓滿無㝵不思議智用遍周,卽法界品是也。以此五種諸佛遍周故,故名住佛所住也。以此義故,於此一部之經安立五度。爾時世尊在摩竭提國,唯法界品少異,明重重遍周不離一處一菩提體一法界一根本智一時無前後故,經文恐失其意。五度重敍,令後學者,不迷其事故,明此五遍周,摠明一際無前後,於一剎那際無二念,說四十年中所轉法輪兜率天,猶未下母胎,猶未出已入涅槃,得佛平等者,理事無二故。到無障處,不可轉法者,明佛常處生死不爲業遷故。又能轉不遷之法也。所行無㝵者,明佛於生死中,皆能同事眞俗不㝵故,立不思議者,歎佛道滿行終摠無功用任運利生,以智自在非想思意議可度量故,普見三世者,眼圓明故,非三世中見三世中衆生事也。從與十佛剎微塵數諸菩薩俱已下至過、現、未來,於中可有四行經,歎菩薩德與十佛剎微塵數諸菩薩俱者,明從衆圓滿遍法界海故,俱者同時而至無去來故,莫不皆是一生補處者,皆十地菩薩故,爲十地。經等覺位中,普賢位熟道滿功終方登佛果故名一生也。如瓔珞本業經說,又從初發心住亦名一生菩薩,以初見性根本智不見有生前後際故,名爲一生。瓔珞經云:三賢菩薩法流水中任運至佛,悉從他方而共來集者,言他方共來集簡非舊衆,皆是不來而到,不去而遍。又明前會奉果勸修信他佛果,今此第二會明以他佛果行解成其自心信證之道,名從他方而共來集,爲從前信佛果中來,皆是一生補處者,明於初會信解生至於此會信滿入位便成佛故。如龍女善財等,由是義故,爲他方來皆是一生之衆,此乃卽是表入法之言從他方來也。迷名他方,悟名曰來,普善觀察諸衆生界法界世界涅槃界已下此三行經,歎所來衆善觀此三種世界無二性故,亦知衆生隨煩惱業,亦知菩薩隨位煩惱行業等事故,餘如經說。第二大衆請法分者,時諸菩薩作是思惟已下十四行半經,於中有三十二問,義分爲二。一初有四問,問四種佛剎,二成就大菩提心引十方諸佛勸說已下有二十八問菩薩住地佛眼耳等,如是三十二問,直至如來出現品,是荅如經具。問曰:初會中世主所問與此義多相似,但廣略不同,何故此第二會還復再問如上之問?荅曰:前會是世主問擧佛果勸修信佛所得,此會是自信自身自心是佛及入位修行故須再問,前位是普賢入定擧果,此會卽明文殊生起入信之初,卽明凡夫始信爲彰信心麤故不入定說,十住已去始明當位菩薩入定始說。以是義故,前問雖義理少同應緣差別,故異前會信他佛得此會自入信修行也。古人說前會是請,此會是問,其義不然,前後摠是其請,當請是問故,但爲勸修與自入法事少殊,如前會,如來修行道滿及過去諸佛已成道者,行滿之果。此第二會擧十方諸佛根本之智凡聖共有之果,卽一切處金色世界一切處不動智佛十智佛等是也。明一切諸佛衆生共有此不動智,金色是理法性身也。爲信心生滅故言色也。以十色世界表之,卽是此會所問四種佛剎中,佛住佛剎者,明一切諸佛及以一切衆生共所住故,爲一切凡聖根本之智,擧令一切衆生信自心是佛所住智故,一切諸佛從此信生,一切凡夫亦從此起,莊嚴佛法性佛剎者,卽如十住、十行、十迴向、十地、十一地,隨位各有十箇佛號是也因此自心根本智起信進修行隨位隨行,諸波羅蜜莊嚴,以嚴法身、智身令成熟故,以法身、智身用,嚴萬行令行無著,故名莊嚴佛法性佛剎,淸淨佛所說法佛剎者,如來示成正覺轉法輪是。體性佛威德佛剎者,神通應現隨根出世者是。明後二佛剎從前二佛剎起信修行成熟故得。以此義故,應知十方諸佛,共此一道而得出生故,應如是知,應如是信解,卽得信解成就一如諸佛所信故,得是信者,如賢首品說,勝以手擎三千大千世界住於空中經過一劫,明其難信故,亦勝供養十方世界塵數諸佛經過一劫功德,不如如是信心已下二十八問經自具荅,義隱難明者釋之,義顯者如文可知。此三十二問中有問十通十頂,經中但有十通、十忍,不見頂名,剩其十忍少其十頂,願佛世尊爲諸菩薩,亦爲我說此兩句結請,自此已下,是如來以神力擧法顯荅。第三如來神通現法分者,放此分中義分爲二,一明隨類現法,二明約初信心。一隨類現法者,隨五位之中菩薩之類,各現十種佛住,十住、十行、十向、十地、十一地中,各有隨位佛果名號是,隨一切國剎一切衆生之類,各現名號不同,如下文殊師利所說佛號者是。二明約初信心者,卽此當一品及通一部,摠爲信心,摠信五位中因果,心無疑滯方可以行,如有教說。譬如有人過五百由旬嶮道,先知通塞然後行往,喩如十信,菩薩於信心之中,先知五位進修通塞,預以願行防之,以信自心分別之性本是一切諸佛不動智體,用防邪見,外取他境故,以隨位妄謂散動障眞智故,以禪波羅蜜防之,以隨位第八住、第八行、第八迴向、第八地智增滯寂,障眞無作大悲故,以一百四十大願防之,以樂生死障眞智故,以四念處觀等三十七助菩提分法防之,及十諦觀及十十二緣生觀防之,以十波羅蜜利益衆生恐不弘廣故,以四攝、四無量法防之,以自求樂果教化衆生不周廣故,起十迴向,加以大願大慈大悲,不捨一切惡道地獄人天,遍生其處以防自樂,違菩提心有所得故,以是義故,十信之心,摠通五位迷皆成信。若自信徹趣求無法不達,若也疑心不除豈成信也?如此品擧佛果門,至賢首品擧佛神通及佛所行業行,使之初信心者,信徹故,始名信心。今此一部之經,頓擧五位因果諸佛果門,摠成信已入位修行,方始不迷理智,如人造食五味一時頓熟,方始食之,從初食時五味同食,乃至食竟其味不離五也。明五位因果,十信摠明,時亦不移,本末爲信,三世一際故,畢竟佛果不離初信之法,如依樣畫像等喩可知,於此神通示法門中摠有四十一行經,長科爲十一段,第一爾時世尊知諸菩薩已下一行半經,明如來知衆所念以神通現法。第一東方過十佛剎塵已下三十九行半經,摠明十方菩薩來集十方,自有分劑,不煩更科,於此十方菩薩來衆之中,義分爲十,一擧佛剎方面,二擧佛剎遠近,三擧世界名色,四擧佛名號,五擧上首菩薩之名,六明大衆之數,七明大衆來已致敬,八明隨方化座,九明座之名目,十明大衆昇座而坐。一擧佛剎方面者,在東方,東方者,爲震卦,爲春生,爲初明長男,爲頭首,爲靑龍,爲吉慶,爲震動,明法事作業動用之初故,道俗通以用之故,先擧東方爲首故,方者法也,但取方法之義,動用之始,非如世所見執,東西南北可得之方,一切處東方,一切處南方,但取其法故,餘准此。二擧佛剎遠近者,過東方十佛剎微塵數世界之外,此有四義。一明十爲圓數爲明遠近無盡,二明令信心者知佛境廣大令自心弘博,三明佛境界遍周如鏡中像互參無㝵,四明未起信心者以十佛剎塵,況喩處迷?十無明未達,自障佛境界,而不現前故,擧塵表迷故,如涅槃經云,釋迦淨土過西方三十二恒河沙世界之外,摠是表法之數,如會釋已述。此云十佛剎微塵數世界之外來者,明隔十無明中,一一無明有無量正使業習主伴相熏煩惱,過於世界塵數,莫知涯際,能障智境故,言十佛剎微塵數世界外也。來者明從迷入信,故號爲來,言彼世界中,有佛號不動智者,爲明不動智佛是十方凡聖共有根本之智,明於此智能起信心故。號之爲來,此不動智佛,一切衆生常自有之。若取相隨迷卽塵障無盡,若一念覺迷達相卽淨若虛空,但爲隨迷稱外悟處言來,而實佛剎本無遠近內外等障,亦無去來,無邊佛剎不出毛孔微塵之表,今致遠近意,令初信心者心廣大故,言其從彼世界中來,又明從迷入悟故言爲來故,有佛號不動智者,明是信者自根本智故,由有此智故,一切衆生而能發菩提心故,以根本智體能了迷性起信解故,起彼迷境,稱之曰來。如起信論云,不思議業相者,以依智淨相能作一切勝妙境界,所謂無量功德之,相常無斷絕,隨衆生根自然相應,種種而現得利益故,又云依本覺故而有不覺故,又云依於智故生其苦樂,如起信論廣明,意明一切衆生迷根本智而有世間苦樂法故,爲智無性故,隨緣不覺苦樂業生爲智無性故,爲苦所纏,方能自覺根本無性,衆緣無性萬法自寂,若不覺苦時以無性故,摠不自知有性無性,如人因地而倒因地而起,一切衆生因自心根本智而倒,因自心根本智而起。以是義故,如來於此一乘之經,頓彰本法爲金色世界,明法身白淨無染頓彰本智號不動智佛,頓彰文殊師利,是自心妙擇之慧,餘九箇世界九箇智佛九箇菩薩,是隨自信解修行位上進修增勝,法身隨行異名故,從斯自心本不動智佛自覺之上,見道入位,起十住、十行、十迴向、十地、十一地加行,進修法身智身,大願、大慈、大悲、四攝、四無量、十波羅蜜、三十七助道分法,從初發心根本法身本不動智體上,用資萬行悲願參融,互爲資熟,法身資行,使令無染,行資法身,使令純熟,五位中各各立十箇佛果十箇菩薩,明隨位進修中約自行得處佛果菩薩行果立名故,非他佛號,非他菩薩而立其名,隨智佛果,隨其行果,五位之上因果各有五十,共爲一百,通本五位有五箇因果,共爲一百一十城之法門故,此荅前菩薩問四種佛剎中佛住佛剎莊嚴法性淸淨佛剎,從此二佛剎上,得示成正覺佛剎神通自在佛威德佛剎。是故前會世主所問是他毘盧遮那佛得自在之果,此第二會菩薩所問是自修行者佛剎菩薩行之因果,從之已後直至如來出現品,是五位勝進菩薩加行自力一終之位,明此品,是信心進趣之果,至出現品是修行位極之因果之相,於自心根本佛智上而生信進修行故。此不動智是一切諸佛一初衆生之地,以此智故而作衆生以此智故隨迷作衆生時,於六道中,隨天上人間及惡道中,皆有隨衆生依正之果報也。隨業麤細不同,以此智故隨覺悟時,成就三乘及法果圓滿一乘佛果依正妙報。若無此智,無是虛空,亦非衆生,亦非諸佛故。問曰:一切衆生本有不動智,何故不自應眞常淨,何故隨染?荅曰:一切衆生以此智故,而生三界者,爲智無性,不能自知,是智非智,善惡苦樂等法,爲智體無性,但隨緣現,如空中響應物成音,無性之智,但應緣分別,以分別故癡愛隨起,因癡愛故卽我所病生,有我所故自他執業便起,因執取故號曰末那,以末那執取故名之爲識,因識種子生死相續,以生死故,衆苦無量,以苦無量方求不苦之道,迷不知苦者不能發心,知苦求眞者還是本智,會苦緣故方能知苦,不會苦緣故不能知苦,知苦緣故,方能發心求無上道,有種性菩薩,以宿世先已知苦發心,信解種强者,雖受人天樂果,亦能發心求無上道。是故因智隨迷因智隨悟。是故如人因地而倒因地而起,正隨迷時名之爲識,正隨悟時名之爲智,在纏名識,在覺名智,識之與智本無自名,但隨迷悟而立其名,故不可繫常繫斷名也。此智之與識,但隨迷悟立名,若覓始終如空中求迹,如影中求人,如身中求我,依住所在故,新長短處所之相終不可得也。如此無明及智無有始終,若得菩提時無明不滅。何以故?爲本無故,更無有滅。若隨無明時不動智亦不滅,爲本無故,亦更無滅,但爲隨色聲香所取緣,名爲無明,但爲知苦發心緣,名之爲智,但隨緣名之有,故體無本也。如空中響,思之可見。三擧世界名色者,世界名金色,爲明金體白淨無染擧之,況喩法身無性體?無垢染故,如世間西方金爲白色也。體白色黃,明應眞菩薩內契白法外現黃相。黃色者,是應眞之氣,許父云:五色之中黃色爲最,人面如黃瓜,內有賢行。經云:應眞菩薩皆眞金色。又明金色世界者,明信心之位,雖信自身心是法身智身白淨本來無染,爲信是生滅有漏心故,是色心也。擧東方爲首者,明東方是初,明爲萬物發生震動之首故。故取之表法,況喩十信之初首也?在方無方,但擧其法,以況其理?表其體用故,如牛王龍王等,況佛德也?問曰:以東方表法,況喩十信初首者?如金位在西方,何故東方爲金色世界?以表法身爲金色,顯根本智爲不動智?荅曰:此問甚彰道理如經所說以信心爲胎,至十住之位名初生佛家,今以東方爲金色世界者,明金正月胞二月胎三月成形四月生於已五月養於午六月冠帶於未七月相八月王,明十信如胎故,以東方金胎表之,以次南西北四維上下,表十信心修進增勝故。以託事,況之令易解?故如此品文殊師利云,世尊昔爲菩薩時,以種種談論方便及地位等而得成就,亦令衆生如是知見而爲說法,後諸學者,以能觀察,皆是說此方隅以表法故,當知藉網求魚魚非網也。若無網者,亦不可得魚故。以義思之,至理方成信也。又經云:一切處金色世界一切處不動智佛,一切處文殊師利者,明法身遍一切衆生身心故,摠不動智佛摠文殊師利故,應如是知如是信解也。明金色世界是信心者,所信之理以爲世界之名,亦是因此信故,還當報得所生無染,所居無著,卽如西方蓮華色世界是其義,如金色世界此是擧十信初因,如南方妙色世界西方蓮華色世界等,是十信進修之勝用故。此中有十因、十果故,十果者,十智佛是,十因者,文殊師利覺首等十菩薩是修行之因,因中得益,卽因中之果,卽不動智等十箇智佛是,十箇世界是所修之法門。四擧佛名號不動智佛者,此明一切諸佛一切衆生根本智體,今先擧之以成初信,此明荅前佛住佛剎餘九箇智佛摠是從此根本不動智上,進修之名非是他有,十方諸佛,皆同此名號之迹,而起信進修行,經歷五位得示成正覺佛剎及佛威德,佛剎者,如來神通是也。餘意如前已述。五擧上首菩薩之名者,名文殊師利,卽是十方諸佛無性之中擇法妙慧,一切諸佛皆從此慧簡擇正邪,而成正覺故,號文殊爲十方一切諸佛之師,亦云佛母,明一切諸佛從此妙慧生故。若無此慧設修解脫,但得二乘及淨土菩薩,非是乘如來乘而成正覺。是故乘此不動智體,文殊妙慧法身妙理大智,從信心上而經歷五位,不離不動智佛文殊妙慧,而成正覺故,號爲乘如來乘不思議乘最勝乘無上乘,而成正覺故,亦號文殊師利爲小男爲童子,明一切諸佛從此妙慧善知正法,而初生佛家故。故號爲童子菩薩,如來去世,文殊師利猶在世間,後當化緣以畢於香山頂上示入涅槃。此是三乘教說。此經云:一切處文殊師利,卽明一切處衆生等共有之。今於此經信心之首,擧其名號,明信心者,信自心妙擇之慧一同於此不移古迹,此是一切諸佛及以衆生根本妙慧凡聖等有。更無異性,如大王路,法則常然,但是諸經但有文殊爲問荅之首者,皆明法身妙慧之門,以普賢爲問荅之首者,皆妙智之萬行體用,如二士,是一切諸佛理智妙用萬行之門,依其法門,立其名號,現身成化以利衆生故。一切衆生發心之者,皆悉同修,皆悉自有自利利他之行,以爲常範。今於教中,推在東北方淸涼山,文殊師利幷一萬菩薩於中住者,有三義。一令此界一切衆生忻心有趣善根不絕,二菩薩常住世間,三明隨方顯法示法易解故。前二門可知,第三隨方顯法者,明東北方者取此閻浮一境,東北方此淸涼山是也。經推在震旦國,亦曰支提那國。此云思惟,以其國人多所思慮多所計度故,以立其名,卽是漢國也。表法明東北是艮卦艮爲小男爲童蒙,丑寅之間,是初明故,像文殊師利菩薩,常以發起凡夫入正信及初見道之童蒙令妙慧明生故。又如蹬山之頂至相盡處故,明如初入正信者創信諸法空故,能信法空妙慧生故,以丑如初信,以寅如初證見道故,卯辰已爲進修,午爲中道,未申酉戌亥以爲同事利生,子爲師位,以坎卦爲君,爲師處愚立範制,法利生故。是故爲北方爲君爲師尊者所居,以明德而治故。六明大衆之數者,有十佛剎微塵數,爲明身行遍故,一佛剎塵尚自周遍,何況十佛剎塵?明身無盡重重之遍故。七明大衆來已致敬者,明師弟法則敬順之儀。八明隨方化座者,還在於東方故。九明座之名目者,名蓮華藏師子之座,於此分中義分爲三。一蓮華是無染義,此依行之報得也。以法身之行性無染世間故,能開敷理智之果轉明淨故,明因果相資令純熟故,明開敷菡萏莊嚴事法有可觀故,以此法行之華感招此報,蓮華爲座。二藏者含藏義,爲明以法身理智處世隨行利生普含法界饒益一切多功德,名之爲藏。三名師子者,依主得名也。爲以法性大智無生滅身處世利人生死無畏,又以正智光明辯才無畏乃至無五怖畏等如師子。十明大衆昇座,而坐其座,以法界爲座體,明以從凡契法界體故,以爲信進修行方成信故,此是一切十方諸佛果座也。明初信心頓信佛果以爲自行所行法故,方成信也。於此段中復爲二,一明座廣狹,二明菩薩云何安坐?一明座廣狹者,如法界品云,其師子座包含法界等,如文具明,大意以心性無依定亂體以爲座體故。二明菩薩如何安坐者,云結跏趺坐,以會世間衆緣爲一法界,名之爲結,以一法而稱多緣,名之爲跏,又跏趺坐者,是安靜不動威儀之相故,此位主檀波羅蜜中,十波羅蜜。第二南方已下可四行經,於此段中義分爲十。一擧佛剎方面,二擧佛剎遠近,三擧世界名色,四擧佛名號,五擧上首菩薩之名,六明大衆之數,七明大衆來已致敬,八明隨方化座,九明座之名目,十明大衆昇座而坐。一擧佛剎方面者,如經云,南方表法,中南者,爲正,爲日爲明,爲虛無,爲离中虛故,卽明爲緣十信進修了諸法虛無漸增明也。是故文殊覺母啓蒙令信,卽逐根,於覺城之東善財入道進修,卽南巡諸友,表其南方爲正,爲日爲明,爲虛無之理。是故禮佛皆云南無,明南方虛無也。但虛無之理,是南方之義,是一切處南方,但創首生信,卽是一切處東方義也。是故四諦,東西配苦集,南北配滅道,然法無方所,化蒙生解起信,不爾卽法性難明,如此品下文云,世尊爲菩薩時,以種種談論種種語言,乃至種種信解等而得成就,亦令衆生如是知見,而爲說法,具如經說。又南無者,爲明正順,正順虛無之理故號南無。某甲佛者,卽是了虛無之智人,故稱南無某甲佛。二擧佛剎遠近者,云十佛剎微塵數義如前釋,迷云外入法云來。三擧世界名色者,名妙色,爲第二信,漸增妙故,勝前信心故,爲達法虛無卽法自妙故。四擧佛號無㝵智者,明以不動智體進修信心增,明智卽無㝵,摠明自心信位之佛也。非他佛故,佛心衆生心自心,摠爲一心一性一法界一智慧始成信故。五擧上首菩薩之名者,爲覺首,爲明以文殊妙慧善簡正邪能自覺故,亦於自所覺法覺他故,此位菩薩所覺何法?於此位中其覺爲三。一覺自身心本是法界白淨無染,如前金色世界是。二覺自身心分別之性本無能所本來是不動智佛。三覺自心善簡擇正邪妙慧是文殊師利,於信心之初覺此三法,名爲覺首,卽明是信心之中善覺之行名爲覺首菩薩,摠須自悟是自所行之法門方成信故,信他而有自無其分不名信故。六明大衆之數者,有十佛剎塵義如初釋。七明大衆來已致敬者,如前可知。八明隨方化座者,如前可知。九明座之名目者,爲明入信成就得於生死之中能無畏故,依主得故餘義如前。十明大衆昇座而坐者,義如前釋,此位主戒波羅蜜爲主,餘九爲伴。新華嚴經論卷第十四丙午歲分司大藏都監開板
1)부처님의 수법(數法)을 알지 못하는 것과 부처님의 수호광명공덕(隨好光明功德)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2)경문에 따라 뜻을 해석하는 두 가지 중 두 번째이다. 3)이미 여래의 집안에서 태어난 대중. 4)법제가 둘이 없는 성품이기 때문에 세 가지만 말한 것이다. 5)해당되는 품에서 네 가지로 장과(長科)한 것 중 셋째이다. 6)정사(正使)는 습기(習氣)에 대해 칭하는 용어이다. 바로 나타나 일어나는 번뇌의 정체를 정사라 하고, 그 번뇌의 여습(餘習)을 습기라 하는데 업습(業習)이다. 정사는 현행(現行)을 말하고, 업습은 종자(種子)를 말한다. 7)이 지혜 때문에 정각을 이루는 것이라는 구절은 고려대장경에는 없지만, 문맥상 필요해서 집어 넣었다. 8)첫째는 불활외(不活畏)이며, 둘째는 오명외(惡名畏)이며, 셋째는 대중위덕외(大衆威德畏)이며, 넷째는 사외(死畏)이며, 다섯째는 수악도외(隨惡道畏)이다. 9)여기서 두 번째란 제14권 p. 31 하단의 첫 번째[第一]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