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10장 낙승원광(樂勝圓光)
“수현기(搜玄記)에서 화엄경 십지품(十地品)은 아함(阿含 : 여기서는 초기 불교 경전이 아니라 깨달음의 내용과 그에 상대(相對)되는, 그에 이르는 방법의 내용을 지칭함)으로 십지(十地)를 깨닫는(證) 것을 궁극적 가르침(宗)으로 한다고 하였는데, 첫 번째는 행(行)과 교(敎)의 상대(相對)로서, 일체의 언교(言敎)는 아함으로서 곧 능전(能詮)인 교(敎)이고 이 교의 소전(所詮)인 일체 행덕(行德) 등은 깨달음(證)입니다.
십지론(十地論)의 뒷부분에서 이야기하는 문자의 가르침(字藏)과 뜻의 가르침(義藏)이 이에 해당합니다. 두 번째는 십지(十地) 이전의 위계(位階)와 십지의 상대(相對)로서 십지 앞 단계의 일체 행덕(行德)은 교(敎)에 의거하여 닦는 것이므로 아함이고 십지 단계의 일체 행덕과 교의(敎義) 등은 다만 증위(證位)에 의거하여 수행하는 것이므로 모두 깨달음(證)입니다.
이것은 십지론의 뒷부분에서 십지 이전의 이생중(異生衆)을 아함정(阿含淨)이라고 하고 십지의 동생중(同生衆)을 증정(證淨)이라고 한 것 등에 해당합니다. 세 번째는 닦음(修)과 이룸(成)의 상대(相對)로서 십지의 각 지에서 닦는 문(聞)·사(思)·수(修) 등의 방편행의 지혜 및 십지 이전의 가행위(加行位) 보살의 수행으로 생겨난 자류(自類)의 보생식지(報生識智)는 별상(別相)이어서 말로 표현할 수 있으므로(可說) 아함이고 진무류증진여지(眞無流證眞如智) 등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不可說相)이므로 깨달음(證)입니다.
이것은 십지론의 뒷부분에서 문(聞)·사(思)·수(修) 등은 말로 표현할 수 있고 십지의 지혜(地智)는 문자를 여의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일(不可說事)이라고 한 것에 해당합니다. 네 번째는 참(眞)과 거짓(僞)의 상대(相對)로서 진증지(眞證智)에 있어서 앞뒤의 방편으로 그 진증지를 말하여 드러내는 것 등은 아함이고 방편을 버리고 진증지를 마주하는 것은 말할 수 없으므로 깨달음(證)입니다. 이것은 십지론 뒷부분의 의대(義大)는 말할 수 없고(不可說) 설대(說大)는 말할 수 있다(可說)는 것에 해당합니다.
설대(說大)는 먼저 인성취(因成就)가 있으니 곧 자비원력(慈悲願力) 입니다. 다음으로 인점점성취대(因漸漸成就大)가 있으니 문(聞)·사(思)·수(修)등 입니다. 다음으로 교설수성취대(敎說修成就大)가 있으니 곧 관수(觀修)와 만족수(滿足修) 등 입니다. 관수(觀修)는 앞의 방편으로 그 진증지(眞證智)가 장애를 제거하고 스스로 비추는 뜻을 말합니다. 만족수(滿足修)는 뒤의 방편으로 그 진증지(眞證智)가 항하수의 모래알처럼 많은 덕을 갖추고 드러나 있음을 말합니다.
의대(義大)는 설명(詮談)을 여읜 자증지(自證智)로서 오직 증지(證智)의 사람만 알 수 있고 드러내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의대를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다섯 번째는 상(相)과 실(實)의 상대(相對)로서 깨달음 이전의 방편 때 그 깨달음의 상(相)을 드러내는 것은 아함이고 곧 이 상(相)을 드러내는 것을 버리고 실제 깨달음에 들어가 계합하는 것이 증(證)입니다. 이것은 십지론 뒷부분의 증상묘법(增上妙法)과 광명법문(光明法門) 등에 해당합니다.
증상묘법(增上妙法)은 깨달음(證)입니다. 앞의 상(相)을 늘리므로 증상(增上)이고 상을 여읜 세밀한 체(體)이므로 묘법(妙法)입니다. 광명법문(光明法門)은 아함으로 그 깨달은 법을 비추어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섯 번째는 체(體)와 덕(德)의 상대(相對)로서 상(相)을 여읜 참된 깨달음(眞證)에서 자체(自體) 그대로 밝게 드러난 것을 깨달음(證)이라 하고 곧 이 체(體)에 수순(隨順)하는 방편을 닦아 여러 덕(德)을 이룰 수 있는 것을 아함이라고 합니다. 그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고 수행하여 덕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십지론의 뒷부분에서 금(金) 자체와 금을 이용한 장엄구로 비유한 것 등에 해당합니다. 일곱 번째는 체(體)와 용(用)의 상대(相對)로서 앞의 여섯 번째의 체와 덕(德)을 포함한 것이 깨달음(證)이고 그 깨달음에 의거하여 근기와 인연에 맞춰 일으키는 교(敎)와 지(智)의 작용(用)이 아함입니다. 후득지(後得智)에서 교(敎)의 작용 등을 일으키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십지론 뒷부분에서 구슬과 구슬의 빛 등으로 비유한 것에 해당합니다.
여덟 번째는 자분(自分)과 승진(勝進)의 상대(相對)로서 앞의 체와 덕과 용은 자분(自分)으로 얻은 것이므로 깨달음(證)이라고 하고 윗 단계(上地)의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설명한 것(明解)이 아함입니다. 이것은 십지론의 뒷부분에서 금강장(金剛藏) 보살의 덕을 찬탄할 때의 증정(證淨)과 아함정(阿含淨)에 해당합니다.
아홉 번째는 전(詮)과 실(實)의 상대(相對)로서 머무름이 없는 큰 허공(無住大虛空)은 깨달음(證)이고 허공에 쓰인 십지(十地)의 교의(敎義) 등과 같은 여러 법문은 허공과 다른 모습이 없지만 완전히 없는 것이 아니므로 아함이 됩니다. 이것은 십지론의 뒷부분에서 허공과 그 곳에 있는 새의 자취를 비유한 뜻 등에 해당합니다.”
“이것은 다만 십지(十地)에 대한 것인지요, 아니면 십지 이전 단계까지 포함한 것인지요?”
“십지를 이야기하면 곧 앞의 위계들을 다 포괄합니다. 보법(普法)의 수행과 과덕(果德)으로서의 십지론에서 육상(六相)으로 십입(十入)을 이야기하였으므로 가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되는지요?”
“십지(十地)의 경우, 가분(加分) 중의 근본입(根本入), 본분(本分) 중의 원선결정(願善決定), 설분(說分) 중의 발보리심(發菩提心)이 바로 그것으로, 이는 본질(實)에 의거하여 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법문의 방식은 같지가 않습니다. 가분(加分) 중의 십입(十入)은 체(體)와 상(相)을 합하여 이야기하였고 본분(本分)에서는 체와 상을 나누었으니 육결정(六決定 : 초지 이상의 보살이 부처님의 지혜에 의거하여 진리를 증득하는 여섯 가지 양상)은 십지의 체(體)이고 이 체에 총상(總相)과 별상(別相) 등이 있고 십지의 이름을 이야기하는 것이 상(相)입니다.
설분(說分)에서는 다만 상(相)의 문(門)에 의거하여 행덕(行德)의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처럼 모두 같지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상(相)의 법문에서 열 가지 십구(十句) 등과 총상·별상 등을 이야기한 것은 그 여러 행덕이 곧 연기무장애보법(緣起無障礙普法)의 행덕임을 드러내 보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 상(相)은 체(體)가 아님이 없고 체는 상(相)이 아님이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어째서 십입(十入)이 체와 상을 합하여 이야기한 것인지요?”
“경에서 ‘일체의 보살이 불가사의한 여러 부처님의 법문을 이야기하여 일체지(一切智)에 들어가게 하므로’ 라고 이야기하였는데 ‘여러 부처님의 법문’은 바로 부처의 깨달음의 지혜인 대허공(大虛空)이고 ‘지혜지(智慧智)’는 십지(十地)의 지혜로 부처의 지혜인 증지(證智)의 허공(虛空)에 들어가, 십진(十盡 : 보살이 십지 단계에서 내는 열 가지 큰 서원)을 내는 것입니다. 이미 들어가게 되면 곧 일미(一味)이므로 체(體)를 상(相)과 나누어 들어감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일미(一味)의 들어감(入)에 의거하여 십입(十入)을 이야기하여 나누어 보여준 것입니다. 만약 체문(體門)으로 하면 십입(十入)이 모두 체(體)이고 만약 상(相)으로 하면 십입(十入)이 모두 상(相)입니다. 만약 총상(總相)·별상(別相)에 의거하면 별상인 아홉 가지 입(入)이 온전히 총상(總相)인 근본입(入)이고 총상인 근본입(入)이 온전히 아홉 가지 입(入)이므로, 근본입이 체이고 아홉 가지 입(入)은 상이라고 나누어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체와 상을 합하여 이야기 한 것입니다. 본분(本分)에서는 이러한 십입(十入)을 나누었으니 체문(體門)은 육결정(六決定)이고 앞의 상문(相門)은 십지(十地)의 이름입니다.”
“어째서 십지(十地)의 이름이 상(相)이 되는지요?”
“열 가지 장애(十障 : 보살이 십지의 위계에서 끊는 열 가지 장애)에 대응하여 십지(十地)를 세우고 행덕(行德)을 나누어 볼 수 있는 모습(相)을 이야기하였으므로 상(相)입니다. 저 깨달음의 체(證體)에는 대응되는, 장애가 없으므로 자재무애(自在無礙)하여 여러 행덕(行德)이 갖춰져 있지만, 분별적 인식(情)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상(相)이 아닙니다.”
“수행자가 진전하여 깨달음을 얻는 측면에서 해행(解行) 때는 열등하고(劣) 깨달았을 때(證時) 뛰어나다는 뜻이 있는지요?”
“행위(行位)에 따라 말하자면 이러한 뜻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과(佛果)를 깨달을 때는 앞의 열등한 것이 깨달을 때의 뛰어난(勝) 법과 다르지 않습니다. 앞의 열등한 것이 본래 ‘뛰어남을 깨달음(證)’이라고 이름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깨달음의 때에 이르면 앞의 열등한 것은 열등함이나, 이미 뛰어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열등한 단계가 움직이는 것도 아니니 열등함도 없고 뛰어남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뛰어남과 열등함의 위계를 움직이지 않고서 그대로 둘이 아니며 둘이 아님이 움직이지 않은 채 그대로 뛰어남과 열등함, 그 둘인 것입니다. 연기무주법(緣起無住法)은 본래 그러하기(法爾)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십지(十地)가 곧 부처의 지혜로 십지 이외에 불지(佛地)는 없습니다. 그러나 불지(佛地)는 곧 과(果)이므로 설할 수 없고, 십지는 인행(因行)이어서 이야기해줄 수 있으므로 십지를 설해달라고 청하고 불지(佛地)를 설해달라고 청하지는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지를 얻었으면 이미 인(因)행을 만족하여 곧바로 불과(佛果)로 들어갈 텐데 무엇 때문에 십지를 설해달라고 다시 청하는지요?”
“십지(十地)가 다함이 없음을 보이기 위함입니다. 초지의 십지가 있고 제2지의 십지가 있고 제10지의 십지가 있어서 십지가 다함이 없습니다. 다함이 없는 십지를 닦아 마치고서 다함이 없는 불지(佛地)에 들어가니, 그런 이유이기 때문에 청하는데 아무런 문제는 없습니다.”
“십지의 네 가지 과(果)는 어떻게 다른지요?”
“첫째 조유과(調柔果)는 장애를 벗어나 스스로 실천하는 행(行)이 거침을 벗어났으며, 둘째, 발취과(發趣果)는 초지에 있을 때 십지에서 행할 여러 일을 잘 이해하는 것으로 문혜(聞慧)와 사혜(思慧)에 의거하여 말하는 것이며, 셋째, 섭보과(攝報果)는 뛰어난 자재보(自在報)를 얻어 자신과 남에게 이익이 되며, 넷째, 원지과(願智果)는 행(行)이 무르익어 곧바로 자체무주실상(自體無住實相)을 깨달아 행을 완성하니 그 용(用)과 체(體)가 다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보법(普法)에서는 어째서 해행(解行)의 처음(初)에서 일체의 식분별(識分別)을 돌이키고(返) 그 이후에는 무분별심(無分別心)으로 공덕을 닦는다고 말하는지요?”
“하나의 법문을 알지 못했을 때는 완전히 미혹되어 자신이 본래 미혹되지 않았음을 알지 못합니다. 일부의 무생인(無生忍)을 얻은 후에는 자신이 미혹되지 않았음을 온전히 알고 보법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모습(相)임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알게 되면 미래(後際)에 끊지 못하는 미혹이 없고 닦지 못하는 공덕도 없으므로 다시 닦고 끊을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이러한 무분별심(無分別心)에서 끊임없는 법의 흐름(法流)에 들어가 여러 공덕을 갖추고 닦아서 매 순간 새롭게 닦음이 늘어납니다. 하지만 본래 닦아서 끊지 않음이 없으므로 그래서 경에 제8지에서 ‘실성(實性)을 깨닫는 것이 성불하는 것이 아니고 공덕을 닦아 성불한다. 그러나 이 인문(忍門)을 버리지 말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인문(忍門)은 곧 그 자체가 본래 공(空)하다는 적멸인(寂滅忍)으로 이 적멸을 움직이지 않고 여러 공덕을 닦으며 비록 공덕을 닦더라도 적멸인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끝없이 닦음을 늘리지만 터럭만큼도 늘어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음이 바로 실로 늘어나면서 또한 늘어나지 않음인 이치입니다. 두 법이 없지만 하나의 법은 아닌 것입니다. 모든 행이 이와 같으니 생각하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90일간의 추혈(錐穴)에서 이어진 화엄경 법문을 마치고, 문도들이 스승의 법문 중에서 이해가 되지 않았거나 평소 확인하고 싶었던 내용을 진솔하게 자세히 질문하였고, 그에 대한 의상의 깊이 있고 자애로운 문답이 모두 마무리가 되었다.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에서, 선재동자가 여러 선지식 가운데, 세속의 번뇌를 끊어내고 지극한 평온에 이르러, 그 힘으로 모든 생명을 이롭게 하기를 발원한 최적정바라문(最寂靜婆羅門) 선지식을 만나 법을 들었는데, 선지식이 말하기를 ‘선남자여, 저는 보살의 해탈을 얻었으니 이름이 ‘진실한 말(誠願語)의 해탈’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 보살들이 이 진실한 말을 인(因)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물러나지 않나니 이미 물러간 이도 없고, 지금 물러가는 이도 없고, 장차 물러갈 이도 없습니다. 선남자여, 저는 ‘진실하게 원(願)하는 말’에 머물렀으므로 뜻대로 짓는 일이 만족하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선지식이 얻은 법문인 바로 ‘진실한 발원(發願)’이란 거짓이 없다는 뜻인데, 여기에는 별도로 네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진리에 계합하여 잃어버림이 없기 때문이며, 둘째는 처음과 끝이 상반되지 않기 때문이며, 셋째는 스스로 행함에 어긋남이 없기 때문이며, 넷째는 남을 이롭게 하는 데 헛됨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네 가지 의미를 갖추었으므로 ‘진실한 발원’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의미를 마음속 깊이 새기면서 같이 진실하게 발원합시다.
응당 마음의 성(心城)을 수호할지니, 모든 나고 죽는 경계를 탐하지 않음이니라.
응당 마음의 성을 장엄할지니, 일심으로 여래의 열 가지 힘을 구할지니라.
응당 마음의 성을 깨끗이 다스릴지니, 간탐하고 질투하고 아첨하고 속이는 일을 끝까지 끊음이니 라.
응당 마음의 성을 서늘하게 할지니, 일체 모든 법의 참된 성품을 생각함이니라.
응당 마음의 성을 증장케 할지니, 도를 돕는 모든 법을 마련함이니라.
응당 마음의 성을 잘 꾸밀지니, 모든 선정과 해탈의 궁전을 지음이니라.
응당 마음의 성을 밝게 비출지니, 일체 모든 부처님의 도량에 두루 들어가서 반야바라밀법을 들음 이니라.
응당 마음의 성을 더 이익하게 할지니, 모든 부처님의 방편의 도를 널리 거두어 가짐이니라.
응당 마음의 성을 견고하게 할지니, 보현의 행과 원을 항상 부지런히 닦음이니라.
응당 마음의 성을 방비하여 보호할지니, 나쁜 동무와 마군을 항상 방어함이니라.
응당 마음의 성을 훤칠하게 통달할지니, 모든 부처님의 지혜광명을 열고 이끌어 들임이니라.
응당 마음의 성을 잘 보충할지니, 모든 부처님의 말씀하신 법을 들음이니라.
응당 마음의 성을 붙들어 도울지니, 모든 부처님의 공덕바다를 깊이 믿음이니라.
응당 마음의 성을 넓고 크게 할지니, 크게 인자함이 모든 세간에 널리 미침이니라.
응당 마음의 성을 잘 덮어 보호할지니, 여러 가지 착한 법을 모아 그 위에 덮음이니라.
응당 마음의 성을 넓힐지니, 크게 가엾이 여김으로 모든 중생을 불쌍히 여김이니라.
응당 마음의 성문을 열어놓을지니, 가진 것을 모두 버려서 필요로 함을 따라서 알맞게 보시 함이니라.
응당 마음의 성을 세밀하게 보호할지니, 모든 나쁜 욕망을 막아서 들어오지 못하게 함이니 라.
응당 마음의 성을 엄숙하게 할지니, 모든 나쁜 법을 쫓아버리어 머무르지 못하게 함이니라.
응당 마음의 성을 결정케 할지니, 일체 지혜와 도를 돕는 여러 가지 법을 모으고 항상 물러 가지 아니함이니라.
응당 마음의 성을 편안하게 세울지니, 세 세상 일체 여래의 가지신 경계를 바르게 생각함이 니라.
응당 마음의 성을 사무치어 맑게 할지니, 모든 부처님의 바른 법륜인 경에 있는 법문과 갖가 지 연기(緣起)를 밝게 통달함이니라.
응당 마음의 성을 여러 부분으로 분별할지니, 모든 중생에게 널리 밝게 알려서 모두 살바야 의 길을 열어 보게 함이니라.
응당 마음의 성에 머물러 유지할지니, 모든 세 세상 여래의 큰 서원바다를 냄이니라.
응당 마음의 성을 풍부하게 할지니, 법계에 가득한 큰 복덕더미를 모음이니라.
응당 마음의 성을 밝게 할지니, 중생의 근성과 욕망 등의 법을 널리 앎이니라.
응당 마음의 성을 자유자재하게 할지니, 모든 시방 법계를 두루 거둠이니라.
응당 마음의 성을 청정하게 할지니, 일체 모든 부처님 여래를 바르게 생각함이니라.
응당 마음의 성의 자체성품을 알지니, 모든 법이 다 제 성품이 없는 줄을 앎이니라.
응당 마음의 성이 환술과 같음을 알지니, 일체 지혜로 모든 법과 성품을 앎이니라.”
선재동자가 지나온 여러 지위(位)의 차별한 인연(因緣)을 모아서 하나의 ‘진실한 법계’에 들어간다는(會緣入實相) 총의(總義)의 선지식인 마야부인(摩耶夫人)이 계시는 곳에 한결같이 진실된 마음으로 나아가고자 하니, 즉시에 곧바로 부처님의 경계를 관찰하는 지혜를 얻게 되자, 여러 수승(殊勝)한 인연(因緣) 중 ‘마음의 성(心城)’을 맡은 ‘보안(寶眼)’이라는 이름을 가진 신(神)이 그러한 선재동자를 위해 인도(引導)하여 전한 가르침이었다.
제9권 終
|
|
첫댓글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_()()()_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 _()()()_
元曉大師와 義湘大師(91) - 第9卷 《華嚴經問答》 - 第10章 樂勝圓光 (第9卷 終)
고맙습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