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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단법인 우리땅걷기 원문보기 글쓴이: 이준태(바우)
1월23일 토요일 08시 5분에 경북 봉화군의 철도역 석포역 앞에서 차를 내리다. 어제 오후 다섯시에 전주에서 출발하여 서울회원들과 합류 후 다시 출발하여 밤늦게 태백시에 도착하여 찜질방에서 유숙한 후에 아침에 길을 나서 황지천을 따라 이곳까지 차량으로 이동을 하고 이곳 석포역에서부터 걷기 시작한다. 발원지인 태백산의 황지못에서 태백시를 거쳐 내려오는 개울물은 황지천이라하고 황지천은 철암천을 만나 큰내를 이루고, 비로소 낙동강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날씨가 얼음이 쩡쩡 얼도록 추운 날씨이다. 위아래로 방한복을 껴 입고, 두꺼운 장갑을 끼고, 빵모자를 뒤집어쓰고 마스크를 하고 눈만 내 놓고 걷는다. 찬바람에 눈이 시림을 느낀다.. 햇살이 쨍쨍하게 내리쬐어도 따스한 기운을 느낄 수 없다.
석포역을 지나서 강길을 따라 내려가니 강 좌우 산기슭에 큰 공장이 서있다. 영풍광업의 공장이라는 데 광물을 채취하여 1차 가공을 하는 공장일 것이다. 지금 같았으면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다. 천만 명에 가까운 영남인 들의 식수원인 낙동강 상류에 저렇게 큰 공장을 짓다니, 물론 폐수처리를 완벽하게 하여 방류를 하겠지만 2차 오염은 막을 수가 없을 것이다.
협곡 사이로 강물은 흘러내려가고, 강을 따라 길이 나 있다. 소나무 참나무 숲이 주류를 이루고 산기슭에 하얀 수피의 자작나무가 간간히 있어 고도가 높은 추운지방의 풍취를 더해준다. 강물도 강추위에 완전히 얼어버렸다.
얼음 아래로 물이 흐르는지 아니면 전혀 움직임도 없는 듯 하다가, 경사져 여울이 지는 곳에 속내를 드러냈다가 다시 얼음 속으로 숨는다.
다리를 건너고 산길을 올라서면 강물에 다시 이르고 또 다리를 건넌다. 인가가 드물지만, 어쩌다 눈에 뜨이는 집도 빈집이 더 많다. 강 건너 밭에 가을 배추를 수확하지 않고 버려두어 얼어 썩어가고 있다. 산자락에 손바닥만한 밭을 일구며 살아가는 산촌의 농심들이 얼마나 타들어 갔을 것인가 미루어 짐작이 된다.
마무이 길을 지나 하승부 길을 가는 산 중턱에 잘 지어진 집이 몇채 있다. 펜션과 민박을 운영하는 산촌 인가 보다. 옛날에는 이 궁박한 산촌에 얼마나 살기 힘들었을 것인가? 하지만 지금은 삶이 윤택해져 이렇게 산 좋고 물 좋은 산자락은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명당자리가 되었다.
금문교의 미니어춰 같은 작은 철제 현수교를 건너니 승부역이다. 오전 일정의 첫 기착지 이다. 일인 역장이 운영하는 중앙선 철도의 간이역이다. 아침에 출발하여 줄곧 내려왔던 곳이 승부리 였는데, 산골짜기의 인가를 통 털어도 삼십 가호가 되지 아니할 것이다. 이런 정도의 산골역이 폐쇄되지 않고 운영되고 있는 것은 관광 역으로서 유지 되어야할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도 세평, 땅도 세평’ 하는 승부역이란다. 키가 훤칠하게 큰 젊은 역장님이 친절하게 안내를 한다. 관광 철에는 하루에 2천명이 다녀 간단다. 물 건너에는 포장마차도 있었다.
좋은 시절에 이렇게 자그마한 산골의 작은 간이역에 내려서 좋은 사람에게 엽서를 쓴다든지, 연인들끼리 사랑의 열쇠에 소망 적어 서로 맹서하는 낭만을 누릴 수 있게 준비되어 있었다. 그 짧은 시간에 엽서를 보내는 회원도 몇 사람 있었다.
다음은 낙동강 기행의 ‘암흑과 공포의 구간’으로 수차례 전해 들었던 바 있었고 여행준비물 중 필수장비로 강조 되었던 랜턴을 사용해야하는 승부터널을 통과할 차례다. 역장님이 협조를 잘해 주시는 것이 우리땅 회원들의 수차례 방문에 익숙해 있는듯하다.
철로 위를 걷는 것이 명백한 현행법 위반일 진대 터널을 지나는 기차시간을 상세하게 가르쳐주고 전에 몰랐던 터널내의 보안등 까지 켜준다.
잔뜩 긴장도 하고 한순간의 스릴도 기대했었는데, 대충 통과하였다. 보안등이 켜지니 흑암의 시간도 없었고, 터널통과 시간도 전보다 짧아 7분정도 걸렸다. 터널길이가 대략 1KM정도 되었다.
그날 오후 늦게까지 우리가 걸었던 강 길은 철도와 나란히 내려갔다. 토목기술이 아직 미약했을 시절에 이렇게 큰 산맥을 넘기 위해서는 강 따라 공사를 하는 것이 수월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바다를 건너 다리를 놓는 것도 험산준령을 지나 터널을 뚫는 것도 거침없이 나아간다.
강을 따라가다가 강물이 너무 우회를 하면 터널을 따라 강변을 따라내려 가고 강물이 암벽을 만나 돌아가면 철길로 올라 터널을 따라가고
한시간 남짓 더 내려가니 양원역이 나온다, 플랫트 홈의 낡고 낡은 간판이 옛날에 간이역이었음을 말해준다.. 오래전에 간이역으로 쓰였고, 지금은 바람만이 머물렀다가는 곳이다. 대여섯평의 역사에 시계만은 제시간에 맞추어 돌아간다. 몇 달에 한번씩이라도 사람이 다녀간다는 흔적일 것이다. 양원역에서 여장을 풀고 점심식사를 준비하였다. 토요일과 양 이틀간에 걸쳐서 걸었던 낙동강 길은 식사할 곳이 없어서 도시락을 준비해갔었다.
이날 준비해갔던 도시락이 기막힌 아이디어 상품이라서 여러 사람을 즐겁게 해주었다.
직사각형의 종이상자에 내용물이 들어 있는데. 상자 위쪽을 열어 비닐포장을 뜯고 납작한 플라스틱 손잡이를 잡아 댕기면 하얀 김이 모락모락 나기 시작하면서 도시락에 들어 있는 내용물이 뜨끈하게 덥혀지기 시작한다. 도시락을 위 아래로 돌려놓아가면서 고루 열이 퍼지게하고 십여분 정도 기다리면 뜨끈한 짜장 밥, 카레 밥이 만들어지는데 거기다가 김치복음까지 곁들여서, 그렇게 추웠던 야지에서 대단한 성찬을 즐길 수 있었다.
12시 25분 점심을 마치고 다시 길을 내려간다. 대부분의 강물은 얼어 있고, 강변길은 빙판이 져 있다. 드물게 농업용 트럭이 빙판길을 지나가곤 했는데 미끌어 지지 않고 무사히 지나가는 것이 신통하다. 차바퀴자국 사이로 쌓인 눈위를 걸어서 가면 미끄럽지 않아 눈을 밟으며 뽀드득 소리를 내며 눈가루를 날리며 걷는다. 때마침 오후의 햇살이 그 위를 비추어주니 발걸음이 더욱 신난다.
14시 분천 역에 도착하였다. 하늘세평 땅 세평하던 좁은 강유역이 분천리에 내려오면서 넓어지고 마을다운 마을이다. 60여호 되여 보이고, 비로소 논이 보인다.
우리버스가 분천역 광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분천역 까지의 일정은 거의 쉼 없이 강행군을 하였다. 회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오늘 25킬로를 걸었네, 30킬로를 걸었네하면서 , 일부회원은 많이 지친듯하다.
남은 일정이 여기서 현동역까지 8킬로 정도 각자의 능력과 선택에 따라서 차로 이동하는 것과 걷는 것을 선택하기로 하였다. 반 반 정도 되는 듯 했다.
다시 길을 나선다. 발걸음이 팍팍해지면서 대열에 뒤로 처지면서 잠시 후회하는 마음이 인다. 그러나 잠시 였고, 아름다운 마을 숲길에 들어서니 다시 활기를 찾아 발걸음을 재촉하다.
마을에 접어드는 길에서 철길로 올라서다. 풍애 터널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들어서 기차 운행이 잦다. 강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돌아야하고 힘이 들것 같고, 운영진들이 기차시간을 알아 와서 터널 앞에서 기차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다. 화물열차가 올라가고 객차가 내려간다. 객차를 뒤 쫒아 바로 따라나섰다. 풍애 터널 614미터, 짧지 않은 거리였다. 5분이상 걸렸고, 보안등도 없어서 몇사람이 준비해온 랜턴빛을 따라 동굴을 나설 수 있었다.
16시 12분 현동역에 이르렀고 첫날 토요일 일정을 여기서 마쳤다. 30킬로 남짓 걸었고, 시간당 4킬로 이상을 걸어 만만치 않은 일정이었다.
1월 24일 일요일 낙동강 천 삼백리길 중에서 가장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길 : 임기교에서 합강까지
8시25분 봉화군 소천면 임기교에서 시작하다. 우리땅의 행수 신정일 선생이 어제 밤에 오셔 오늘 일정은 신 선생님이 이끌어 가신다. 요즈음 지방자치단체마다 길 만들기에 열성이어서 신 선생님 모셔가기에 바쁘다. 어제는 강원도 고성군에 자문 일정이 있어 고성군에 다녀오시느라 자리를 같이 하지 못하였고
어제 운영위원들이 훌륭히 선도를 하였지만, 그래도 행수가 오시니 행렬이 활기에 넘친다.
강폭이 넓어지더니 물 막은 보가 나온다. 임기 소수력 댐이다. 여기서 물을 막아 산을 관통하는 물길을 뚫어 도수로를 만들고 산을 휘돌아 오는 강에다 모아놓은 물을 쏟아 부으며 그 낙차를 이용해 전기를 만드는 것이다. 물이 훨씬 줄어든 강을 따라 커다란 반 타원형의 강 구비를 돌아가니 발전소가 나온다.
여기까지 차량이 다닐 수 있는길이 나 있고, 발전소 다음 부터는 강을 건너서 가야한다. 여름에 물이 많을 때는 도강준비를 단단히 해야 하지만 지금은 겨울 갈수기 이고 얼음이 얼어 강 건너기에 불편함이 없다.
강을 건너서 부터는 우리가 길을 만들어 가야한다.
오솔길도 아니고, 관목사이로 억새풀밭을 헤치고 강자갈을 밟아가며 강 따라 가는 길이다.
호젓한 길이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길이라서 좀더 좋은 정경을 보고 싶은 유혹을 버릴 수가 없다. 잠시 대오를 벗어나서 강가로 걸었다. 얼음 밑으로 물이 힘차게 흐르는지 가끔 “쩡 쩡” 하며 얼음 갈라지는 소리가 들린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가시 나무와 관목사이를 헤치고 나가다 너럭 바위에서 길어진 대오도 정리할 겸 10분간 휴식, 여기 저기 간식거리가 나온다. 빵과 고구마 와 오징어 사탕 등
여성회원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다시 걷기 시작하여 야지를 헤치고 나가니 논밭이 나온다. 발전소에서 한 시간 남짓 걸었나? 밭이 끝나는 오르막에 오래된 기와집이 두채 있었다. 인기척은 없었지만 사람이 살고 있는 듯 하다.
차량이 다닐 수 있는 널찍한 도로에 올라섰다. 그 사이 소주가 돌려지기 시작하여 두어 잔 들었다. 강행군하였던 어제 보다는 사뭇 넉넉한 분위기이다. 날씨도 어제 보다는 한결 포근해졌고 바람도 없다.
길은 제법 오르막을 타고 오르고 강물은 여울져 흘러 격한 소리를 내며 흐른다. 내리막이 끝나는 지점에 옹달샘이 있었다. 빨간 재생 고무다라와 플라스틱 바가지가 무공해 자연에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눌산리 아람 골에 이르고 묵은 집이 두 채 있었다. 벌통도 보이고 언뜻 사람이 사는 듯 보였지만 폐가 였다. 신선생 님이 두어해전 들렸을 적 만해도 할머니 한분이 사셨다는데 지금은 위 아랫집 다 비어서 묵어가고 있었다. 빈집에 들러서 단체 사진을 찍고 잠시 쉬었다. 마루위의 시계는 두시 삼십팔 분에 그대로 멈춰 있었다.
다시 길을 나선다. 강변 언덕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고, 전망이 좋은 너른 공터가 나온다. 시절이 좋을 때에는 이 강변에 사람이 많이 붐비는 가 보다, 이동식 화장실도 구비된 곳이다. 지난번 투어 때에는 여기서 홈재를 넘어 찻길로 나갔다는 데 오늘은 지난번에 가지 않았던 강 길을 더 걸어 내려갈 계획이란다. 숨을 고르듯 소나무 아래서 쉬고 있었다. 지난 사월투어 때는 산꽃이 피기 시작하여 선경이었다 하는데 , 강물이 꽁꽁 얼어있는 겨울강도 더할 나위가 없이 좋았다. 이런 감흥을 이겨내지 못한 듯 동화님이 노래를 부른다. 김영동의 ‘어디로 갈까나’, 노랫말이 구성지고 가락이 구슬프다.
어디로 갈까나 어리로 갈까나
내님을찾아서 어디로 갈까나
이 강을 건너도 내 쉴곳은 아니오
저 산을 넘어도 머물 곳은 없어라.
어디에 있을까 어디에 있을까
내님은 어디에 어디에 있을까
흰구름 따라 내일은 어디로
달빛을 쫒아 내님 찾아 간다.
어디에 있을까 어디에 있을까
내님은 어디에 어디에 있을까.
답가로 남자 회원이 두곡을 불렀다
‘강건너 봄이 오듯’ 과 ‘옛날은 가고 없어도’를 불렀는데 무난했다.
마지막으로 가곡 보리밭을 함께 불렀고 길을 나설 차비를 한다.
여흥이 아쉽다. 좀더 짜임새 있게 구성해 본다면 멋진 음악회가 될 수도 있겠다.
강가로 내려서서 바윗돌사이로 거친 관목을 헤치고 나아간다. 신선생님 왈, 본인이외에는 이 길을 걸어가 본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자면 前人未踏의 강변 길이다. 우리땅걷기에서도 처음 걷는 길이다. 길은 없고 우리가 가는 길이 길이다. 아침에 수력발전소를 지나서부터 4킬로 되는 길이 거칠었는데, 그 때는 희미하지만 사람발자국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길은 인적을 전혀 느낄수 없는 처녀지 이다. 푹신한 모래사장을 지나면, 억새밭이 나오고, 관목 숲을 지나면, 벼랑이 나온다. 서너 길이나 되는 벼랑을 지날 수 없다. 산으로 우회를 하고, 거친 바윗돌 위를 힘들게 지나는데 콩자반 같은 염소의 배설물이 눈에 뜨이기 시작한다. 간접적으로 나마 사람의 흔적을 처음 느낀다.
인가에 이르는 중간지점에 이르렀다. 억새사이를 헤치고 나가니, 너른 모래사장이 나온다. 여기서 점심, 어제와 같은 방식으로 각자가 점심을 마련한다. 오십명 가까이 되는 인원이 일시에 김을 피워 올리는 것도 장관이다.
점심이 끝나니 쓰레기도 소각할 겸 신샘의 퍼포먼스가 시작된다. 이곳 저곳 강변에 널려 있는 불소시개를 준비하고 화목을 구해온다. 훨훨 불꽃이 사라 오른다. 어제 같이 추웠으면 더 좋았겠지만, 오늘도 좋았다. 모닥불 주위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행복해 보인다.
꺼진 불도 다시보자, 완전히 얼음장을 덮어씌워 불을 끄고 출발 한 시간 남짓 걸려서 인가가 있는 나루터에 도착하였다. 건너편 계곡의 제산천과 합류하는 지점이라서 합강이라는 지명을 가지고 있다. 강 건너 언덕에 집이 한 채 보이는데 사람이 사는 것 같지는 않고, 얼어붙은 강의 얼음위로 작은 배가 한척 얹혀 있다.
강변 가까운 언덕에 흑염소 몇 마리를 가두어 놓은 울타리가 있었고, 경사가 가파른 언덕에 여유 없게 지어진 농가가 한 채 있다. 초로의 촌부 내외가 살고 있었는데. 신샘과는 구연이 있는 듯 하였다. 몇해 전 낙동강 탐사를 처음으로 시작해서 내려갈 즈음에 가도 가도 인가도 없고, 밥 사먹을 식당은 더더구나 없어서, 허기진 배를 움겨 쥐고 어떤 인가를 찾았는데 그 집 내외가 옥수수를 배불리 먹게 해주고, 또 배낭에 넣어주어서 푸짐한 대접을 받았다는 미담을 여러 번 들었는데, 그 때의 그 분들이었다. 아저씨는 산악용 바이크를 새로 샀는데 작동이 잘 되질 않아서, 마을사람들과 엔진 살리기에 바빴고, 아주머니가 일시에 들이 닥친 손님 대접에 경황이 없어 했다.
소주 4홉들이 세병과 집에서 먹는 밑반찬을 꺼내 놓으시고 미안해하신다. 심성이 어질고 좋으신 분들이다. 우리 측에서도 배낭을 털어 빵, 오징어, 과자류 등으로 답례를 했다. 혹 다음에 올 기회가 있으면 무엇이라도 준비해와야겠다. 고마운 분들이다.
가파른 산을 넘고 넘으니, 황새마을이 나오고 황새마을에서 다시 십여 분을 더 가서 우리버스가 있는 곳에 도착을 하였다.
오후 두시반 쯤 낙동강 탐사 기행은 이렇게 끝나고, 다음은 봉화군에 있는 문화유산을 답사
하기 위해 나섰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영남의 4대길지로 경주의 양동, 안동의 하회마을과 내앞 마을, 봉화의 닭실 마을을 꼽았는데, 오늘 가는 곳이 봉화의 닭실 마을이다.
닭실 마을에 도착 주위의 산세를 보니 마을을 감싸고 있는 형국이었다. 북고남저, 마을 앞 남쪽에 운수산이 병풍처럼 둘러져있고, 마을의 배경이 되는 백설봉이 우뚝 솟아 있다. 금닭이 알을 품은 듯 하여 금계포란의 명당이라는데, 조선조 중기에 예조판서를 지낸 충재 권벌선생의 종가가 있고, 안동권씨 들이 모여사는 안동권씨의 세거지 였다. 종택안에 청암정 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커다란 바위위에 정자가 세워졌고, 그 바위를 빙둘러 물길을 내고 시냇물을 끌어와 물이 돌아가게끔 정자를 만들었는데, 초목이 무성하게 잎을 피우고 비가 많이 와서 물이 풍부할 때 이 정자에서 풍류를 즐긴다면 아주 제격이겠다.
마을을 벗어나서 권벌선생의 아드님이 지었다던 석정정사는 더 운치가 있었다. . 은근하게 시냇물이 흘러가는 바위위에 세운 정자인데 소나무와 바위와 오솔길이 조화로웠다.
첫댓글 추위함께한 기행문 대원들의 훈훈함이 느껴진다.. 마무튼 대단하이 ...잘 읽었다..
실감나게 잘 읽었네. 난 언제쯤이나 허허로이 길을 나설 수 있을까.................
준태의 글을 읽으면 내가 그자리에 있는 느낌이 든다. 나도 내년 이맘때쯤에는 대한민국 모든곳 돌아다니고 싶다. 좋은글 올려주는 준태의 건강을 위하여 기도할께
경식아!! 내년이라면 혹? 졸업하능겨 ??
준태야 관심과 자상함이 있어야 구석 구석 어우려진 산천이 눈에 들어올것같은데.... 부러움이 가득하다
나도 이렇게 한가로운 도보 여행길 따라 다니고시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