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실록40권, 고종 37년 3월 14일 양력 1번째기사 1900년 대한 광무(光武) 4년
함흥과 영흥의 본궁으로 떠나는 윤용선과 이용직을 소견하다
국역
의정(議政) 윤용선(尹容善)과 장례원 경(掌禮院卿) 이용직(李容稙)을 소견(召見)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수일 내로 경들이 길을 떠나게 되어 혹 정탈(定奪)할 일이 있을 듯하기에 입시(入侍)하게 한 것이다."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수일 내에 떠나고자 하여 신들도 정탈할 일이 있습니다. 영정(影幀)을 모사(摹寫)하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일이므로 털끝만큼이라도 영정과 틀리게 모사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지금 솜씨있는 화사(畵師)를 얻기가 어렵고 또 화사의 솜씨를 보고서 재주있는 사람을 취해야 하나 영정의 진본(眞本)을 직접 놓고 본뜨는 것은 매우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공신(功臣)과 기신(耆臣)의 화상(畵像) 1본(本)을 도감(都監)에서 가져와서 여러 화사들로 하여금 모사하게 하여 그들의 솜씨가 능한가 서투른가만 보면 되니 반드시 일시에 모이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매일 한 사람씩 불러서 혼자서 그리게 하되 다른 화사들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고 도감에 보관하였다가 신들이 올라와 다음 다시 상의하고 이어 상께 봉해 올려서 결재받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서울에 있는 제조(提調)로 하여금 이대로 거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신련(神輦)이 출발한 후에 주정소(晝停所)에서는 으레 악차(幄次)를 설치하여 봉안하고, 숙소에서는 객사(客舍)의 동쪽상방(上房)에 봉안하였습니다. 그런데 근년에 객사가 완전한 것이 없는 것은 오랫동안 보수하지 못하여 형편상 그러한 것입니다. 기둥이 무너지고 벽이 떨어져서 보기에 민망하여 고을 군아(郡衙)의 동헌(東軒)에 봉안하려고 하는데, 군아는 예로부터 행궁(行宮)이라고 불렀으니 사체에 있어 별일 없을 듯하나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어서 감히 이렇게 우러러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행궁에 봉안하는 것이 객사보다 나을 듯하다. 이에 대해서는 경이 잘 살펴서 편의대로 봉안하라."
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각년의 《의궤(儀軌)》를 참고하면 신련이 출발한 후 주정소와 숙소에서 모두 계본(啓本)을 올렸기에 으레 파발마(派撥馬)를 세웠으나 경장(更張) 이후로는 책임지고 세운 곳이 없습니다. 형편상 할 수 없이 우체사(郵遞司)를 통해 서주(書奏)하지 않을 수 없는데 도중에서 지연될 것이 매우 우려되므로 농상공부(農商工部)로 하여금 연도(沿道)의 우체사에 신칙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마땅히 전화과 주사(電話課主事)가 기계를 가지고 동행하여야 할 것이니, 전화로 먼저 아뢰면 필경 빠를 것이다."
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그렇게 하면 이보다 더 편리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북도(北道)의 능침(陵寢)을 봉심(奉審)하는 것은 원래 연한이 있는데 갑오년(1894) 변란 이후로 오랫동안 예를 행하지 못하여 항상 송구스러웠다. 경이 어진(御眞)을 배종(陪從)하는 일로 북도에 내려가거든 예조(禮曹)의 당상(堂上) 함께 각릉(各陵)에 봉심하고 만약 고쳐야 할 곳이 있으면 편의대로 잘 처리하라. 해도의 도신(道臣)과 겸장례(兼掌禮)에게 분부하여 일체 봉심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삼가 칙명(勅命)대로 봉심하고 고쳐야 할 곳은 고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제도(諸道)의 각읍(各邑)이 경장 이후로 고을의 형편이 어떠한지 모르겠다. 경은 모쪼록 연로의 백성들 사정을 자세히 살펴서 주문(奏聞)하라. 지난 번에 이중하(李重夏)가 아뢴 것을 들으니 ‘북도의 각 능침에 능군(寢軍)의 요포(料布)가 너무 박하므로 이대로 두면 소홀하게 될 우려가 있을 듯합니다.’고 하였다. 요포를 더 마련하여 그들로 하여금 생업을 보존할 수 있게 한 다음에 책임지우는 것이 온당할 듯하다. 그리고 ‘재관(齋官)이 매번 재궁(齋宮)을 많이 비워둔다.’고 하는데 모쪼록 이렇게 하지 말도록 각별히 신칙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마땅히 재관을 신칙해야 하겠으나 지금 재정이 고갈되어 변통해낼 곳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내려가서 편리한 방도를 찾아서 상세히 살펴서 조처하는 것이 좋겠다. 준원전(濬源殿)의 어진을 온돌방에 봉안하고는 수시로 불을 때서 습기를 제거한다고 하는데, 항상 매우 조심하라."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신이 들으니 온돌방에 닷새에 한 번씩 불을 때는데, 벽에 은밀하게 구멍을 만들어 연기가 빠져 나오게 하였다가 근자에는 온돌을 마루로 고쳤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에는 연로마다 역참(驛站)이 있어서 왕래할 때에 그다지 구차하지 않았는데, 경장 이후로 모두 폐지하였다. 이번의 일은 바로 근년에 처음 있는 일이라서 도중에 봉안하는 절차에 불편한 점이 많을 듯하다. 그래서 이미 포천(抱川), 송우(松隅), 누원(樓院) 등에 행궁을 짓고 읍(邑)과 동(洞)에서 신련을 수호하게 하였다. 신련이 출발할 때에 위의(威儀)는 비록 웅장하고 화려하게 하지 못하더라도 너무 간략하게 해서도 안 될것이다."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배봉(陪奉)하는 사체(事體)는 매우 중대한데 연로에서 거행하는 데에는 소홀히 되는 점이 많을 듯합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더욱더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각도(各道)의 도신과 각읍의 수령(守令) 중에 잘 거행하지 않는 자들이 있으면 반드시 엄중하게 책망하여 그들로 하여금 조심하게 하라. 그런 연후에야 도로 봉안할 때에도 소홀히 하는 폐단이 없어서 정유년(1837) 배봉할 때에 거행하는데 구차한 점이 없었던 것처럼 될 것이다."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그때는 기강이 잡혀 있는 세상이었습니다."
하였다.
원문
十四日。 召見議政尹容善、掌禮院卿李容稙。 上曰: "日間卿等, 當登程慮, 或有定奪之事, 故使之入侍矣。" 容善曰: "日間欲發行, 而臣等亦有所稟定之事矣。 影幀摹寫, 極其重大, 思所以無一毫失眞之道。 而卽今畫師, 難得善手, 且畫師工拙, 所當取才。 而以影幀眞本, 直爲臨畫, 事極未安。 功臣與耆臣畫像一本, 自都監取來, 使諸畫師摹寫, 以觀其工拙。 而不必一時聚會, 每日招致一人, 獨自摹出, 不令他師見之, 藏置於都監, 待臣等上來, 更爲相議, 仍爲封進, 以備上裁, 宜當。 使在京提調, 依此擧行何如?" 上曰: "依爲之。" 容善曰: "神輦進發後, 晝停則例設幄次, 奉安宿所, 則客舍東上房奉安。 而近年客舍, 無苟完者, 久未修葺, 其勢然矣。 頹柱、破壁, 所見未安, 則將欲奉安於郡衙東軒。 而郡衙自古稱行宮, 其在事體, 恐無如何, 不敢擅便, 敢此仰達矣。" 上曰: "行宮奉安, 似勝於客舍。 此則卿須奉審, 從便奉安也。" 容善曰: "參攷各年儀軌, 則神輦進發後, 晝停宿所, 皆有啓本, 例立撥馬, 而更張以後, 責立無所矣。 勢不得不從郵遞書奏, 而中路遲緩, 十分可慮, 令農商工部, 申飭於沿路郵遞司何如?" 上曰: "當有電話課主事, 持器械伴行矣。 以電話先奏, 則必迅速也。" 容善曰: "如此則便利莫過於此矣。" 上曰: "北道陵寢奉審, 元有年限, 而甲午變亂之後, 久未行禮, 每切悚悶。 卿因御眞陪從, 而下往北道, 與禮堂, 各陵奉審, 如有修改處, 便宜從事。 分付於該道臣兼掌禮, 一體奉審可也。" 容善曰: "謹依勅命, 奉審而修改矣。" 上曰: "諸道各邑, 更張以後邑樣, 未知何如。 卿須沿路, 詳探民情奏聞。 而向聞李重夏所奏, 則‘北道各陵寢陵軍料布, 甚薄擧行, 從此而恐有疎忽之慮’云。 料布更加磨鍊, 使渠輩支保, 然後責任似穩當。 而‘齋官每多空齋’云, 須勿如是之意, 各別申飭可也。" 容善曰: "當申飭齋官, 而現今財力罄竭, 無辦出之處矣。" 上曰: "卿其下去, 方便之道, 詳察措處好矣。 ‘濬源殿御眞, 奉安于溫堗之中, 有時爇火去濕’云, 常切小心矣。" 容善曰: "臣嘗聞之, ‘溫堗每五日一次爇火, 而壁裏有隱穴, 使出煙炎, 近者改堗爲廳’云矣。" 上曰: "前者沿路, 皆有驛站, 往來之際, 不甚苟且。 更張以後, 皆已廢之, 而此乃近年初有之事也。 路中奉安之節, 想多難便之端。 故已於抱川、松隅、樓院等地, 營建行宮, 自邑、自洞, 使之守護神輦進發之際, 威儀雖不壯麗, 亦不可爲草草矣。" 容善曰: "陪奉事體, 極其重大, 沿路擧行, 恐多疎虞。 思之及此, 殊切憧憧矣。" 上曰: "各道道臣, 與各邑守令中, 若有不善擧行者, 必重責之, 使能惕念, 然後還奉時, 可無疎忽之弊。 而丁酉陪奉時, 似無擧行之苟且矣。" 容善曰: "伊時有紀綱之世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