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불이 일어나면 태평성대 온다는데
정운일
운주사를 가려면 서울 강남터미널에서 광주까지 5분 간격으로 고속버스가 운행한다. 광주터미널에서 운주사로 가는 시내버스는 20~50분 간격으로 운행하여 대중교통을 이용해도 편리하다.
일본 나카사키에서 한국으로 시집온 문화해설사가 유창한 한국말로 일본역사와 한국역사를 비교도하며 해설을 구수하게 해주었다. 외국의해설사라 그런지 더욱 흥미로워 졸졸 따라다니며 재미있게 들었다.
대분의 사찰에서는 탑이 많아야 3개정도이다. 신라는 불교국가를 만들겠다고 하던 불국사도 다보탑과 석가탑 2개뿐이다. 마이산 탑사에는 순수한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크고 작은 돌탑이 80여개가 있다. 돌을 정성스럽게 다듬어 만든 돌탑에 비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운주사는 천불천탑이라 하여 불상과 탑이 많은 곳으로 유명하다. 조선 성종 12년(1481)에 편찬되고 중종 25년(1530)에 증보된 동국여지승람에는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다. 절의 좌우 산마루에 석불과 석탑이 각각 1,000개 있고 또 석실이 있는데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 있다”(雲住寺在千佛山寺之左右山背石佛塔各一千 又有石室二石佛相背而坐)라는 기록되어 있어 1980년 6월에 절 주변이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석탑 12기와 석불 70여 기만이 남아 있다. 오랜 세월 부근에 사는 사람들이 탑이나 불상을 헐어다가 묘지 상석을 만들기도 하고 주춧돌, 섬돌, 정원, 축대를 쌓는 데 사용하고, 통째로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지금은 천불 천탑을 볼 수 없어 아쉽기만 하다. 골짜기에 버섯처럼 돋아난 불상과 죽순처럼 솟아오른 석탑을 보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머릿속으로 상상만 해야 하니 훼손한 사람들이 원망스럽다. 온 산과 계곡이 불상과 탑으로 가득 차있다면 금강산의 만물상을 보는 신비감에 빠져들 것만 같다.
황석영은 조선 숙종 때의 의적 장길산의 활약을 다룬 대하소설 ‘장길산’에서 와불을 용화세상으로 이끌 메시아로 등장시켰고, 2008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프랑스의 르 클레지오도 몇 해 전 운주사를 찾아 천불천탑에 감명을 받고 ‘운주사 가을비’란 시를 남겼다는 유서 깊은 절이다.
필자는 일본에서 온 해설사의 이야기를 참고해서 구층석탑, 석불감 쌍배불좌상, 원형다층탑, 와불, 칠성바위 등을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운주사(運舟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이다. 창건에 관한 이야기는 신라 운주화상이 거북이의 도움을 받아 만들었다는 설, 중국설화에 나오는 마고할미가 지었다는 설, 한사람이 평생을 받쳐 만들었다는 설, 도선이 세웠다는 설 등이 전해지고 있다.
이중에서 도선(道詵)이 세웠다는 설이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천불천탑의 신화를 간직한 운주사는 항상 신비감이 감돈다. 도대체 언제, 누가, 왜 이렇게 많은 석불과 석탑을 조성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안고 살펴보게 된다.
신라 말 도선국사는 한반도의 형국을 물 위에 떠 있는 배로 보았다. 백두대간에서 갈라진 낙동정맥의 큰 산줄기가 호남이 영남보다 산이 적어 배가 기울어지지 않게 운주사에 1,000개의 불상과 불탑을 하룻밤 사이에 조성하였다고 한다.
운주사는 일반적인 절집의 형식 같은 것은 찾아볼 수가 없다. 천왕문도 없고 국보급 문화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운주사의 저력은 무수한 석불과 석탑에 깃든 설화에서 출발해야한다.
일주문을 지나면 울타리도 없는 완만한 골짜기에 탑과 돌부처만이 즐비하게 서서 반겨주니 다른 세상에 온듯하다. 이렇게 단기간에 많은 불상을 조성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부근의 암반이 켜켜로 쉽게 떨어져 나오기 때문이다. 석불들이 모두 앞뒤가 납작한 것이 이를 반증한다.
구층석탑은 천탑중에서 중심이 되는 탑으로 가장 높고 아름답다. 도선은 운주사(運舟寺)의 지형을 배의 형상으로 보았다. 배의 중심인 돛대에 해당되는 곳에 구층탑을 세웠으니 탑 중에서 가장 높다. 이탑을 만들 때에도 더욱 정성들여 가장 아름다운 탑으로 꼽고 있다.
이 탑은 바닥돌이 고인돌(지석묘)이라고 해서 자세히 보니 고인돌임에 틀림없다. 고인돌에 3단의 굄을 새기고, 그 위에 받침돌, 몸돌, 지붕돌을 올린 특이한 모습이다. 몸돌의 각 면에는 두 줄로 된 마름모꼴을 새기고, 그 안에 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이러한 조각 수법은 운주사의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것이다. 석탑의 꼭대기에는 원뿔 모양의 석재와 함께 보륜(寶輪:바퀴모양의 장식) 등의 상륜부(相輪部) 석재가 놓여 있다. 조성 수법으로 보아 고려 후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석불감 쌍배불좌상은 우리나라에서 보기드문 형태이다. 영귀산 골짜기는 야트막한 산 사이로 시냇물이 굽이굽이 흐르듯 평화롭게 보인다. 구층탑 뒤로 석불감 쌍배불좌상이 있다. 불감이란 석불을 모시기 위해 만든 방이나 집을 말한다. 팔작지붕에 용마루와 치미가 조각된 돌집 안에 석불 두 기가 등을 맞대고 앉아 있다. 남향한 불상은 석가모니불로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북향한 불상은 비로자나불로 옷 속에서 두 손을 모아 지권인을 한 모습이다. 이러한 등을 맞댄 불상은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보기 드문 형태이다. 고려 시대의 지방화 된 불상양식을 보인다.
원형다층 석탑은 고려시대에 지방에 따라 탑의 형태가 다양한 모양으로 변화된 모습이다. 탑의 형태는 백제시대 만든 정림사지 5층 석탑과 같이 틀에 박은 듯이 비슷하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이르러 각 지방에 따라 탑의 형태가 다양한 모양으로 변화되었다. 탑의 변화는 창의성이 존중되어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였다. 운주사에 있는 원형다층 석탑도 변형된 탑으로 기단을 제외하고 몸돌과 지붕돌이 모두 원형이다. 그래서 호떡을 쌓아 놓은 것 같아 호떡탑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현재는 6층탑 이지만 일본해설사는 일본에서 발행된 책에 의하면 7층탑으로 기록되었다고 한다.
대웅전은 특별히 눈여겨 볼만한 것이 없다. 다만 마당에 서 있는 탑보다도 탑 주변에 놓인 돌들은 한때 돌부처였거나 석탑이었던 것이다. 천년 세월 동안 얼굴이 비바람에 씻기고 지워져 지금은 돌무덤으로 존재한 것들이다.
절 뒤편에 있는 커다란 공사바위가 있다. 바위 절벽에는 매애불이 새겨져 있으나 오랜 세월 비바람에 지워져 자세히 보아야 알 수 있다. 바위에 오르니 운주사 일대의 아름다운 경관이 한눈에 들어와 환호성이 절로 나온다. 바위에 사람이 앉았던 자국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천불천탑 공사를 할 때 감독이 앉아서 내려다보며 지시를 했다고 해서 공사바위라고 한다.
와불이 일어서는 날 미륵세상이 도래한다는 전설이 있다. 와불은 누워있는 불상이라 하지만 미처 일으켜 세우지 못한 불상이라고 한다. 손의 모양으로 보아 각각 비로자나불좌상과 석가여래불입상이다. 머리는 남쪽에, 발은 북쪽을 향하고 있다. 해설사에 의하면 일어나면 임금님이 계신 북쪽을 바라본다는 설명이다. 설명을 들으며 그런 깊은 뜻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니 조상들의 지혜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 불상을 일으켜 세우면 세상이 바뀌고 1,000년 동안 태평성대가 온다고 하니 빨리 일어나 좋은 세상이 오길 소원해 본다.
황석영의 대하소설 ‘장길산’에서 와불을 용화세상으로 이끌 메시아로 등장시킨다. 천불산 골짜기에 천불천탑을 세우고 마지막으로 와불을 일으켜 세우면 미륵세상이 도래한다는 내용이다.
와불 밑에는 원형으로 깎아 놓은 7개의 칠성 바위가 있다. 배열 상태와 위치가 북두칠성의 같아 칠성바위라 한다. 고려 시대 불교에 수용된 칠성신앙의 상징이라 생각된다. 또한 원반형 칠층석탑을 만들기 위해 따로 놓은 돌이라고도 한다.
화순은 남원과 함께 전라도에서 추어탕을 잘 하기로 소문난 곳이다. 운주사 입구에도 추어탕과 추어숙회를 파는 집이 두어 곳 있다. 추어탕을 드시고 운주사를 관광하시면 좋을 듯하다.
황석영의 대하소설에도 나오고,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프랑스의 르 클레지오도 운주사를 찾아 감명을 받고 시를 남겼다고 하니 유서 깊은 절임에는 틀림없다.
운주사를 돌아보며 도대체 누가, 왜, 이렇게 많은 불상과 석탑을 조성했는지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기록으로 남겨졌더라면 얼마나 흥미진진할까 아쉬움만 남는다. 누워있는 불상이 일어나면 태평성대가 계속 된다고 하니 그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참고문헌
[네이버 지식백과] 화순 운주사 구층석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두산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도봉문화원 문화탐방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