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보스턴 항구에 정박해 있던 동인도회사 소속의 선박 2척에 인디언
차림을 한 괴한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선박 안에 있던 선원들을 제압하고는 배에 가득 실려 있던 340여
개의 상자들을 모두 깨뜨렸다.
그리고는 그 속에 들어 있던 내용물을 몽땅 바닷물 속으로 던져 버렸다.
1773년 12월 16일 밤에 일어났던 이 사건은 바로 그 유명한 ‘보스턴 차 사건’이다.
이날 인디언으로 변장하고 선박을 습격한 이들은 반영국을 부르짖던
보스턴 시민들이었다.
그들은 영국 수상 F. 노스가 미국 상인에 의한 차의 밀무역을 중단시키고,
이를 동인도회사에게 독점권을 부여하는 관세법을 통과시키자 격분하여
그 같은 일을 저질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영국은 식민지 탄압을 더욱 강화하였으며,
결국 미국 독립전쟁으로까지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날 보스턴 시민들이 바다 속으로 처넣은 것은 다름 아닌 차(茶)였다.
차는 기원전 2700년경 중국에서 비롯되었다.
‘의약의 신’ 신농이 처음으로 차를 마셨다고 하니 그 역사가 5천년이 넘는다.
세계의 음료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셈이다.
중국의 음료인 차가 유럽으로 전파된 것은 16세기경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의해서였다.
그 후 차는 영국에서 폭발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18세기경에는 영국이 차의
최대 소비국가가 되었다.
그런데 구미인들은 녹차보다는 거의 대부분 홍차를 즐긴다.
그것은 고기를 많이 먹는 구미인들에게 발효된 차가 입맛에 더 맞았기
때문이다.
또 1823년 영국의 탐험가 로버트 브루스가 인도 아삼 지방에서 발견한
아삼 차나무도 홍차의 발달을 부추겼다.
아삼 차나무는 찻잎의 크기가 중국종의 3배나 되는데,
홍차로 가공하면 종래의 중국차에서 볼 수 없는 뛰어난 맛을 냈다.
그때만 해도 유럽인들은 차나무가 중국 이외의 토지에서는 자라지 않는다고
믿었기에 아삼 차나무의 발견은 홍차 산업의 혁명을 초래했다.
그럼 홍차와 녹차는 과연 어떻게 다른 것일까.
홍차와 녹차는 품종은 다르지만 모두 차나무의 잎으로 만들어진다.
하지만 이들을 구분하는 기준은 차나무의 품종이 아니라 차 제조과정의
차이에 있다.
즉, 찻잎을 따서 발효를 했느냐 안했느냐에 따라 홍차와 녹차로 구분된다.
발효가 전혀 일어나지 않은 비발효차가 녹차이며,
완전히 발효가 된 발효차가 홍차이다.
그리고 발효가 그 중간 정도로 이루어진 반발효차를 우롱차라 한다.
그러나 사실 차의 발효는 진정한 의미의 발효가 아니라 찻잎에 존재하는
효소에 의해 일어나는 산화 현상이다.
사과를 깎아 놓으면 색이 갈색으로 변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 바로 산화다.
찻잎을 따서 그대로 시들게 하면 산화 현상이 일어나 새로운 성분이 형성된다.
이 새로운 성분들이 붉은색과 홍차의 강하고 독특한 향기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반발효차인 우롱차는 색에 있어서는 홍차의 붉은 갈색에 가깝고,
향기는 녹차에 가깝다.
최근 영국의 런던 유니버시티 칼리지 연구팀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홍차가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한다.
실험은 피실험자들을 무작위로 홍차 섭취 그룹과 위약(맛은 홍차와 동일하나
차의 유효성분이 결여된 카페인 음료) 섭취 그룹으로 나뉘어 6주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그 결과 스트레스 유발 상황에 대한 스트레스 정도는 두 그룹 모두
비슷했지만, 약 50분이 지난 시점에서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티솔의 농도
감소 결과는 다르게 나왔다.
즉, 홍차 섭취 그룹의 경우 가짜 홍차 섭취 그룹보다 코티솔의 혈중 농도가
20% 정도 낮았던 것이다.
이는 홍차가 스트레스 이후의 회복에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 연구팀은 홍차 성분 가운데 어떤 성분이 이 같은 작용을 발휘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차 성분 가운데 아미노산의 일종인 데아닌은 흥분을 가라앉히는
진정 작용이 있는 것으로 이미 알려져 있다.
또 데아닌 같은 아미노산 성분은 용해도가 높아 높은 온도에서 우려내는
홍차보다 녹차처럼 비교적 저온에서 잘 우러난다.
요즘 북핵 문제로 방송과 신문 지면이 도배되다시피 할 만큼 연일 시끄럽다.
하늘이 맑은 차 색깔만큼이나 투명해진 가을에,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다면
차 한잔으로 달래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이성규 편집위원 yess0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