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의 주요 업적 30가지 조명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 조명
부국대통령의 주요 업적 30가지
우리나라 부국 대통령으로 산업화를 통해 '한강의 기적'이라는 유례가 없는 경제발전을 이룩한 박정희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이 1974년 5월 20일에 적은 휘호인 ‘내一生 祖國과 民族을 爲하여’
18. 2001년~2012년까지 세계 1위를 놓치지 않았던 대표적인 조선산업의 기반을 다짐
- 1970년대 중화학공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 사업이 조선소 건설이었다. 조선소 건설은 돈도 기술도
없이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격이었다. 외국에 나가 손을 벌리니 돈을 빌려주겠다는 곳이 없었고, 정주영을 박정희가 거의 강제적으로 해외로 보냈다. 그 이후 청와대로 다시 돌아와 박정희 대통령과 의논을 한 뒤 조선사업은 시작되었다.
영국, 미국, 일본, 러시아 등 이들 국가들은 한결같이 군사강국인데다가 일자리 걱정을 하지 않았다. 특히 해양산업이
발달한 나라들이었다. 그에 비해서 우리나라는 울산 단지가 들어서고 일자리와 국민 총소득은 조금씩 늘어났지만 여전히 농사를 짓는 인구가 대부분이었고 거지는 넘쳐났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러한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고 조선산업을 결심했다. 그는 이 산업만 성공한다면 자주국방도, 일자리 창출도 모두 해결될 것이라고 봤다. 그리고 이 조선산업을 통해 자연히 기계와 자연산업이 발달할 것이라고 보았다. 이런 대규모 산업은 정부 관료의 힘만으로는 부족했는데, 경제기획원 장관인 김학렬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정주영을 추천했다.
정주영은 조선산업을 위해 해외로 나가 기술 제휴와 차관 도입에 나섰으나 미국, 일본, 캐나다 등의 회사는 냉담하게
그를 돌려보냈고, 이에 포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포기한다면 국가사업에 있어 현대건설에게 도움을
주지 않겠다는 배수진을 치게 하여 정주영은 계속 시도하였고, 드디어 영국에서 차관을 빌려왔다.
4,300만 달러의 어마어마한 차관을 빌려 한국으로 돌아가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조선산업을 시작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조선소를 완공했고 리바노스가 발주한 26만 톤급 유조선 두 척을 건조했다. 한국 땅에서는 처음으로 세계적인 대형 유조선을 만든 것이었다. 오늘날 세계 1위 조선국이 된 것도 모두 박정희 대통령의 집념과 정주영의 추진력이 결합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즉, 2001년부터 2012년까지 무려 11년을 대한민국이 조선산업에서 세계 1위를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19. '공업입국' 신호탄인 공업단지를 조성, 경공업·중화학공업을 통한 경제개발의 기틀을 다짐
- 1962년 2월 3일, 울산에 공업단지 기공식이 열렸다. 이 공업단지 기공식은 '공업입국'의 신호탄이었다.
군복을 입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울산공업단지를 혁명공약(경제개발)의 아이콘으로 내세웠다.
이 울산공업단지의 조성은 박정희에게는 경제개발의 거의 최초의 시도이자 계획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울산공업지구 설정 및 기공식을 가지기 이전에 이미 1962년 1월 27일에 울산을 중화학공업 우수 자연적 입지조건으로 결정하여 공포한 바가 있었다. 그리고 이후에 이 울산에는 여러 화학, 석유와 관련된 중화학공업이 실제로 시행되었다. 1960년대 초반에는 고작 생사 270만 달러를 수출했던 데 비해, 1970년에는 섬유류 수출이 3억 4,110만 달러나 되었다.
1960년대에는 노동집약적인 경공업 수출이 섬유류, 합판, 가발 등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수출을 증진하기 위해 대규모
공단이 조성되었다. 그 이후 1965년 3월 12일에는 구로공업단지의 기공식이 있었다. 또한 1967년 4월 20일에는 요소비료를 연간 33만 톤 규모로 생산하는 한국비료가 준공되었고, 1964년 5월 7일에는 울산정유공장 준공식이 있었다.
울산공업단지는 급속하게 성장했고 한국산업화의 중심지로 변모해갔다. 이후 이 울산공업단지에는 중화학공업에 속하는 현대자동차 공장이 1968년부터 가동에 들어갔고, 1972년에는 현대미포조선소가 준공됐다. 울산이 공업단지로 선정되면서 변변한 항만시설도 없는 곳에 기계와 시설자재를 실은 대형선박들의 왕래가 부쩍 잦아졌다.
당시 울산은 인구 8만 5000명 정도의 전형적인 농어촌에 불과했다. 하지만 1962년 1월 15일에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했고, 울산이라는 농어촌을 대한민국 최초의 공업도시로 만든 것이었다.
이후 우리 나라에서 석유화학제품이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1966년 카바이드법에 의하여 폴리염화비닐(PVC)을 생산해 낸 것을 그 효시로 한다.
우리 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석유화학공업이 시작된 것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정부가 석유화학공업단지 건설을 추진하기 시작한 이후부터이다. 1964년 대한석유공사의 정유공장 가동으로 원료인 나프타의 국내 공급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기간중 섬유·플라스틱·타이어·세제 등 석유화학산업으로부터 원료를 제공받는 산업들이 개발됨에 따라 석유화학단지 건설의 필요성이 높아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업스트림 부문은 대한석유공사를, 다운스트림 부문은 충주비료를 주축으로 하여 1968년 3월 울산석유화학단지 건설이 추진되었다. 1970년에 대한석유공사가 울산정유공장 내에 석유화학의 방향족계 원료인 BTX(벤젠·톨루엔·크실렌)공장을 건설·가동하기 시작하였고, 1972년 10월에는 에틸렌 기준 연간 10만 톤 생산규모의 나프타 분해공장 및 9개 계열공장이 완전 가동되었다.
이로써 국내 석유화학공업은 대량생산으로 본격적인 자립의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으며, 기초 유분에서 최종 제품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생산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공업단지의 신호탄으로 경공업을 하던 공업단지에서 이제는 더 나아가 중화학공업이라는 한층 성장된 공업단지가 되어 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된 것이었다.
20. 서민들의 원활한 도로교통을 위해 서울지하철 1호선 개통
- 1968년에 원활한 도로교통을 위해 서울전차가 폐지되었다. 이후 서울로 이주해 온 도시 노동자들에게는 대량 수송이 가능한 대중교통이 하나 사라지게 되었는데, 결국 대한민국 철도청이 지하철에 대해 연구하였으나 다른 과제로 인해
묻혀버렸고, 당시 서울특별시장 윤치영과 김현옥에 의해 최초의 지하철 건설이 시작되었다.
예전에 철도청장을 지냈었던 양택식이 김현옥 후임으로 부임하면서 재임중에 지하철을 건설하겠다고 하였으나 김학렬 당시 경제부총리의 반대에 부딪혔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결국 지하철을 건설하겠다는 양택식의 편을 들어주었고, 일본과의 기술 제휴를 통해 지하철을 건설하겠다고 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서울지하철은 1호선이 1971년 4월 12일 착공해 3년 4개월 만인 1974년 광복절에 개통했다.
거리는 서울역~청량리로 7.8km 길이였다. 당시에는 서울역이 서울역앞역으로, 시청역은 시청앞역으로 불렸으며,
동묘앞역은 만들어지지도 않았던 때였다. 1971년에 일본에서 들여온 외자 94억원과 국내자금 240억원을 투입하였다.
대한민국 최초의 지하철이지만 일본의 기술협력과 엔 차관이 결합하여 논란이 되기는 했지만, 이 지하철 개통은 새로운 주거지역이 개발되고, 또 대단위 주택단지가 건설되고, 또 도시기능이 분산이라는 막대한 경제적 효과를 창출하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