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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7장 주석
전통에 대한 시비 (마가복음 7:1-23)
그리스도께서 오신 큰 의도 중의 하나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의식적인 율법을 폐기시키고 종지부를 찍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게 하시기 위한 방도로써 주께서는 먼저 인간이 만든 그리고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법에 부가한 예법에서부터 착수하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그것에 대한 의무에서 해방시키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그들이 이것을 지키지 않는다고 트집을 잡은 이 경우에 있어서 그 뜻을 충분히 나타내어 행하시었다. 예수와 더불어 논쟁을 벌인 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팔십 내지 일백 마일 떨어진 "예루살렘에서" 갈릴리에 온 것인데, 이는 예수께서 이곳에서 큰 인기와 명성을 얻고 있음을 그들이 생각하고 예수와 시비를 걸기 위해서인 것이다. 만일 그들이 예수에게서 배우기 위해서 그렇게 먼 길을 왔다면 그들의 열심은 칭찬을 받을 만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먼 길을 예수를 반대하고 그분의 복음의 진로를 저지하기 위해서 왔으니 큰 악이 아닐 수 없다. 예루살렘에 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지방에 있는 성직자들보다 자기들이 더 훌륭할 뿐만 아니라 더 권리가 있는 것처럼, 마치 요한이 출현하였을 때에 그에게 그러한 것처럼, 그들을 수시로 방문하고 조사단을 파송한 것 같이 보인다(요 1:19). 그럼 이하에서 본문 말씀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Ⅰ. 장로들의 유전이 무엇이었나 살펴보자. 장로의 유전에 의하면 누구나 식사하기 전에 "손을 씻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정결케 하는 관습이며 해로운 것이 없다. 그렇지만 그것을 지키는데 너무 까다롭데 된다면 "흙으로 만들어진" 몸에 대해서 너무 지나친 관심을 갖는 결과가 되고 만다. 그러나 그들은 그 관습에 종교성을 가하여, 그것이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닌데도, 그것의 준수 여부에 대해서 방관하지 않으려한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지키든지 안 지키든지 그들의 자유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권력을 개입시켜 그것을 준수하지 않으면 출교 시키겠다는 위협하에 강요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이것을 "장로의 유전"으로 지켜 온 것이다. 천주교도들은 권위와 고대 교회와 그 경전에 대해서 열심을 많이 보이는 듯하며, 종교 회의와 교부들에 대해서 많이 말한다. 그러나, 그 때에 그들은 그들 자신의 부와 이익과 그들을 다스리는 통치에 대해서 열심을 내는 것뿐이다. 바리새인들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바리새인들과 온 유대인들이 이 유전을 지키어 오고 있다는 설명을 보게 된다(3, 4절).
1. 그들은 "손을 부지런히 씻었다". 그들이 손을 부지런히 씻었다고 하는 이 "pugmh/ (부지런히)"에 대해서 비평가들의 구구한 설이 있다. 어떤 이들은 그 단어가 그들이 빈번히 씻었음을 가리킨다고 말한다(우리도 그렇게 생각한다). 또 어떤 이들은 이 말은 그들이 손을 씻는 일에 대한 귀찮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또 어떤 이들은 그들이 손을 씻을 때에 팔목까지 씻기 때문에 그들의 조심성을 나타낸 것이라고 생각한다(여기에도 일부 사람들은 동의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손을 씻을 때에 물에 젖기 때문에 팔꿈치로 흘러내리도록 손을 들고 씻는 것을 나타낸다고도 한다.
2. 그들은 말끔히 손을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였다". 그 말은 그들이 엄숙한 식탁에 앉기 전에 손을 씻은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그들의 규칙이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축복을 구하는 식탁에 앉기 전에 그들은 꼭 손을 씻어야만 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음식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기도를 드리며 식사를 하려는 자들은 식사를 전후해서 손을 씻지 않으면 단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부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3. 그들은 "시장에서 돌아와서는" 특히 주의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꼭 손을 씻어야 되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재판소 같은데서 돌아와도 그러해야 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곧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운집하는 광장에 가서 부정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부정하게 된 이방인이나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부정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가까이 가서 "이르기를 너는 네 자리에 섰고 네게 가까이 하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함이니라"(사 65:5) 하는 격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랍비들의 규칙은 만일 그들이 아침에 자기들의 손을 잘 씻으면 하루의 첫 번째 일을 한 것이며, 그들이 홀로 있게 되면, 그것으로 온 종일 효력을 나타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나가서 대중들과 접촉을 갖게 되면 그러지를 못하게 됨으로 그들이 집에 돌아와 손을 씻기 전에는 먹을 수도 기도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로들은 백성들 가운데서 거룩하다는 명성을 얻게 되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백성들의 양심에 자기들의 권위를 나타내고 행사한 것이다.
4. 그들은 이 유전에다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는" 일을 부가한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음식을 드는 그 그릇들이 이방인들이나 부정한 사람들이 사용하였을 것이라는 의심에서이다. 아니 그것만이 아니다. 그들이 식사를 하는 바로 그 식탁이 그렇게 부정할 것이라는 의심에서인 것이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씻으라고 지적한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경우들에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율법과 같이 많은 전통들을 부가하여 그것들을 준행하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Ⅱ.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행한 일은 무엇이었나를 살펴보자. 그들은 율법이 무엇이며, 일반적인 관습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그것들에 대해서 친히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것에 얽매여 있을 수 없었다. 제자들은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음식을 들었던 것이다(2절). "씻지 아니한 손으로" 음식 먹는 것을 그들은 "부정한 손"이라고 불렀다. 인간들은, 그와 같이, 자기들에게 맞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악명을 붙여버림으로 말미암아 헛된 미신을 지켜오는 것이다. 제자들은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유전을 따름으로써 그들을 즐겁게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자유스럽게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들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부족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제자들은 자기들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다는 것을 밝히 보인 것이다(마 5:20).
Ⅲ. 여기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공격. 그들이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2절).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참람되고 대화가 통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비난하였다 또한 오히려 교회의 세력에 불복하고, 의식과 예식을 만드는 자들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반역적이고 당파적이고 종교를 분리하는 자들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들은 제자들을 예수께서 저지하고 따르게 해 줄 것을 기대하면서, 예수께 그들을 고소하였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의 창안이나 부과에 대해서 즐기는 자들은 보통 예수에게 호소하려고 한 것이다. 마치 예수께서 그들에게 호의를 보이는 것처럼, 마치 예수의 권위가 그들의 강요에 개입하고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자들을 책망하시는 것처럼 예수에게 제자들을 고소하였다. 그들은 왜 당신의 제자들은 우리와 같이 행하지 않습니까? 라고 묻지 않았다(비록 그들이 의미하는 바가 그러하였고, 그들 자신들을 표준으로 삼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나이까?"라고 물은 것이다(5절).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쉬운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훈을 배움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명철함이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 노인보다 승하"기 때문이다(시 119:99, 100).
Ⅳ. 제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변호.
1. 예수께서 바리새인들과 더불어 어떤 권세에 의해서 이 의식이 부과되었는가에 대해서 논쟁을 하시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심한 잔소리꾼들인 그들은 여기에 대해 논하기에 가장 적합한 상대들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일에 대해서 무리들에게 공개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으셨다[예수께서 무리를 불러 말씀하실 수 있었지만(14절)]. 그것은 예수께서 그들을 자극하여 당파를 만들고 그들의 통치자들에게 불만을 갖게 하였다는 인상을 받지 않으시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관계된 자들에게 여기에 대해서 책망하시면서 언급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자기에게 합당한 것을 취하라"는 규율이 있기 때문이다.
(1) 예수께서 그들이 그들의 종교적 의식에 있어서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처럼 하는 그들의 외식에 대해서 책망을 하시었다(6, 7절). 그들은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그런 일들을 그들에게 부과하고 그들을 이방인들과 구별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처럼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이는 그들이 야망과 탐욕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생각에서 사실은 멀지만 그들의 주 하나님께 자신들이 거룩한 백성으로 인정되고 있는 것처럼 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모든 종교적인 실행에서 언제나 밖에서만 머물었으며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지를 못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이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예배를 하나님께도 기뻐하시지 않으시며 그들 자신들도 아무런 유익이 없기 때문이다.
(2) 예수께서 그들이 그들의 장로들과 지도자들의 창안과 훈령들에다 종교를 개입시키는 것에 대해서 책망을 하였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그들이 사람들을 종교적인 큰 원칙에 대해서 공격할 때에, 그들은 그들의 교회의 경전을 따르도록 강요하며,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느냐 안하느냐에는 고려하지 않고, 그들이 유대인이냐 아니냐에 따라, 그리고 그들이 자기들에게 순응하느냐 아니하느냐에 따라서 판단하는 것이다. 모세의 율법에 의해 다양한 씻는 예법이 주어진 것은 사실이다(히 9:10). 그러나 그것들은 세상적인 육신의 정욕으로부터 내적인 심령의 성결을 의미하는 것을 목적한 것이며,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으로써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 본질을 제시하는 대신에, 그들은 뻔뻔스럽게도 의식에 더 참가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잔과 주발을 씻음"에나 좋은 것들이다. 예수께서 "너희가 사람의 계명을 지키느니라" 하시며 더 말씀하셨음을(8절) 살펴 보라. 미심은 끝이 없는 것이다. 만일 한 가지의 인간의 창안과 제도가, 비록 그것이 여기 손씻는 일처럼 외관상으로 언제나 허물이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용납된다면 군내와 같이 이를 것이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위해 문이 열리어 있게 되는 것이다.
(3) 예수께서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있음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을 무시함에 대해서와 그들의 설교에서 그것을 강조하지 않음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의 시련 중에 계명을, 마치 그것이 더 이상 힘이 없는 것처럼, 범하는 것 등을 책망하시었다(8절). 그들은 너무나 자주 유전들을 부과하는 데는 열심들이었지만 종교의 본질적인 의무에 대해서는 열심히 적었던 것이며 그것들이 버려진 상태에 있는 것을 만족스럽게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아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버렸던 것이다(9절).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 도다."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도다"라고 하시었다(13절). 하나님의 법령이 폐지된 낡은 법처럼 망각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유전이 자리를 잡도록 사실 폐지된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실행케 하도록 위임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임무를 수행하는 것처럼 가장하여 율법을 범하며, 율법의 효력을 무력하게 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석 한다면서 파괴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특별히 잘못된 예를 들어 말씀하시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는 자연의 법에 이하여 자녀들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셨으며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었다(10절). 그러므로, 만일 그들의 부모가 빈곤하게 되었을 때에 힘이 미치는 대로 정성껏 잘 봉양해야 하며, 그리고 만일 그 부모를 저주하거나 부모를 굶어 죽게 하였다면 그 자녀는 죽어 마땅하다는 추론을 쉽게 내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철저하게 장로의 유전들을 따르기만 하면 부모에 대한 이런 의무는 준행치 않아도 된다는 구실을 그들은 내세운다는 것이다(11절). 만일 부모가 어려운 가운데 있으며, 자녀가 도와드릴 여유도 있는데,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없으면, "고르반"으로 말미암아, 곧 "성전의 금"과 "제단 위에 있는 예물"로 말미암아 맹세함으로써 그 부모들은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되며 그는 그 부모를 섬기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부모들이 자식에게 무엇을 요구할 때에, 부모에게 그렇게 말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마치 이 악한 맹세로 말미암아 자식이 준행해야 할 하나님의 거룩하신 율법에 대한 의무에서 해방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몬드 박사(Dr. Hammond)는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다. 고대 랍비들의 경전에는 율법에 의해 명령된 일도, 그렇지 않은 일에서와 마찬가지로 맹세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에 누가 하나님의 계열을 파괴하지 않고는 맹세를 할 수 없는 경우에도, 맹세는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계명은 범하는 것이다. 휘트비 박사(Dr. Whitby)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와 같은 교리를 천주교 교도들이 가르친다. 즉 수도 서원을 하거나 천주교에 입교한 신자들은 그들의 부모에 대한 모든 의무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결론적으로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었다. 그들이 일단 하나님의 말씀에서 유전을 행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였을 때에 어디에서 이를 중단하겠는가? 그러한 의식의 이 열심꾼들은 처음에는 그들의 유전에 비하여 다만 하나님의 계명을 무효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실은 이 모든 일에 대해서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였다. 이사야 선지자가 그 당시의 위선자들에 대해서 말한 것이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도 적합한 것이다(6절). 우리가 현 시대의 악을 볼 때에 그것에 대하여 불평하게 된다. 그렇지만 우리는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이 지혜가 아니니라"(전 7:10) 하신 말씀에 유의하도록 하자. 위선자들과 행악자들의 가장 불행한 일은 그들은 그러한 조상을 가졌다는 것이다.
2.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이 의식이 근거한 원리들에 대해서 가르치신 것이다. 지금 예수에게 이야기를 듣고자 나온 이 무리들에게도 공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매일 실행하는 것이며,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장로들에 의하여 잘못 인도되는 큰 오류를 그들이 범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고 하신 것이다(14절). 일반 사람들에게 있어서 듣는 것만으로는 족하지 않다. "듣고"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먹기 전에 손 씻는 것에 대한 이 장로들의 유전의 모순을 설명하려고 하였을 때에 그 문제를 근본적으로 다루신 것이다. 악습은 악한 생각을 고침으로서 가장 효과적으로 바로 잡을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예수께서 그들을 바로 잡아 주시려고 하시는 그 잘못은 우리가 피해를 입을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15절).
(1) 비록 사람이 손을 씻지 않고 식사를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먹는 음식이 우리를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니 이는 그것이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러나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악한 것에서부터 나오는 것이 더럽게 하는 것이다. 마음과 양심이 더러워지고 죄에 오염되어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우리는 추한 것이다. 이러한 부정한 데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악한 생각들과 정욕들, 그러한 언행들이 우리를 더럽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은 악으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씻는데 있어야 한다.
3. 예수께서 사적으로 제자들에게 당신이 사람들에게 가르치신 교훈을 설명하시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무리를 보내고 홀로 계실 때에 "그 비유를" 물었다(17절). 제자들에게는 그 말씀이 비유와 같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예수께서 그들의 물음에 대답을 하시게 된 것이다.
(1) 예수께서 그들의 우둔함을 책망하시었다.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너희도 역시 깨달음이 없는 백성들처럼 둔하냐. 그리고 깨달으려고도 하지 않는 바리새인들처럼 어리석으냐? 너희가 이렇게 우둔하냐?" 예수께서 그들이 모든 것을 깨달으리라고는 생각하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이런 것 정도도 이해하지 못할 만큼 무능 하느냐?"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2) 예수께서 그들이 이 진리를 파악하도록, 또 그들이 이것을 믿도록 하기 위하여 이 말씀을 그들에게 설명하여 주시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그 자체가 자기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있기 때문이다. 어떤 진리들은 만일 그것들에 대해서 바르게 설명을 하고 이해케 한다면 그 진리들 자체를 증거하는 것이다. 만일에 우리가 하나님의 영적인 본성과 그분의 율법을 이해한다면, 그리고 무엇이 하나님에게 대하여 잘못된 일이고 하나님과 우리가 교통하는데 적합치 못한 일인가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파악하게 될 것이다.
[1] 우리가 드는 음식이 어떤 종교적인 씻음이 필요할 만큼 우리를 더럽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이는 음식이 배에 들어가 여러 소화 작용과 분비 작용을 거쳐서 영양분은 체내에서 흡수되고 불결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체외로 배설돼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저것 다 폐하시리라"(고전 6:13).
[2] 그러나 부패한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우리를 더럽게 하는 것이다. 규례에 의하면 무엇이나 거의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다(레 15:2; 신 23:13).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그를 더럽게 하며, 종교적 씻음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21절). 그들이 선하다고 자만을 가지며 그들의 최선의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인간의 마음에서 더러운 것이 나오며, 모든 불행한 것이 나오는 것이다. 부패한 원천에서 부패한 내가 흐르는 것처럼, 부패한 마음에서 부패한 이론들과, 부패한 탐욕과 정욕들과, 모든 악한 언행들이 나오는 것이다. 마태복음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여기에도 마음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특수한 부정한 것들이 나와 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는 나와 있으나 여기에는 빠진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거짓 증거"이다. 그러나 마태복음에 나와 있는 죄목에다 일곱 가지가 여기에는 추가되어 있다. 그 일곱 가지 중에 첫째는 탐욕이다. 그 원어는 (pleonexi,ai)인데 이 말은 세상의 부를 더 많이 얻으려는 무절제한 욕망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서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벧후 2:14)이라는 말씀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둘째는 악독이다. 그 원어 (ponhi,ai)는 악, 증오, 악한 의지, 악을 행하려는 욕망, 행악을 즐겨한다는 의미이다. 셋째는 속임이다. 이 말은 숨기고 가장된 악이다. 이것은 더욱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악을 행하기 위한 것이다. 넷째는 음탕이다. 이것은 불결함과, 우매한 말과 사도가 책망한 음란이 가득한 눈과 모든 방자한 희롱이다. 다섯째는 흘기는 눈이다. 질투하는 눈과, 탐욕의 눈이며, 우리가 남에게 유익한 무엇을 주거나 유익하게 할 때에 남에게 인색한 생각을 갖는 것이며(잠 23:6), 그들이 유익하게 되거나 유익을 즐길 때에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이다. 여섯째는 교만이다. 원어는 (u`perhfani,a)이며 우리가 우리 자신을 남보다 높이는 동시에, 조롱과 경멸로써 남을 멸시하는 것이다. 일곱째는 광패이다. 원어(avfrosu,nh)는 뻔뻔스러움, 경솔을 의미한다. 어떤 분들은 이 말을 특별히 허영심에 찬 자랑을 의미한다고 보며, 사도 바울은 이것을 어리석음으로 표현하였다. 왜냐하면 이 말은 여기에서 교만과 함께 쓰여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보다도 이 말을 말이나 행동에서 많은 악의 원인이 되는 조급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악한 생각은 모든 범죄를 일어나게 하는 것으로 맨 처음에 나타내었으며, 우리를 태만케 하는 광패를 제일 마지막에 나타내었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지었다.
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부패한 인간의 본성에서, 육 적인 마음에서, 악한 마음 그릇에서 나오는 것, 다시 말해서 인간의 내부에서 나오는 이런 모든 것이 악이라는 것이다.
2. 인간의 속에서 나오는 그런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그런 것이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하는데 합당하지 못하게 하며, 인간의 양심에 때묻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그런 것을 극복하고 근절시키지 않으면 "아무 것이나 속된 것은 들어가지 못하는" 새 예루살렘의 입성을 거절당하는 것이다.
수로보니게 여인 (마가복음 7:24-30)
Ⅰ.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겸손하게 당신 자신을 나타내시지 않으려고 하셨나를 볼 수 있다. 어느 누구도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얻은 바와 같은 인기를 얻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선을 행할 수 있는 어떤 기회를 거절하지는 않더라도 대중들의 인기의 박수를 기뻐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경으로 가시"었는데 이곳은 예수께서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예수는 회당이나 광장에 들어가시지 않으시고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하였다. 왜냐하면 예수에 관하여 예언되기를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마 12:19) 하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다른 곳에서와 같이 이곳에서도 복음을 전파하시고 병을 고쳐 주시려고 그런 것이 아니시고, 이렇게 하도록 당신을 찾도록 하기 위하심이다. 출현하는 때가 있으면 은퇴하는 때가 있음을 유의하라. 또는 예수께서 두로와 시돈의 변경에 계셨기 때문에, 이방인들 가운데 당신이 그 영광이 되실 이스라엘 족으로서 자신을 나타내 보이고 싶지 않으셨기 때문일 것이다.
Ⅱ. 그러함에도,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나타내게 되실 때에 얼마나 관대하게 기뻐하시었나를 보여 준다. 비록 예수께서 이 지방에서 병 고치는 기적을 많이 행하시지는 않으셨지만 예수께서 이곳에 들리신 것은 소수의 병을, 특히 여기에서 우리가 살펴보려는 이 한 사람을 찾아 구원하시려 오신 것처럼 보인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숨길 수 없었다." 그것은 비록 촛불은 말 아래에 숨길 수 있으나 태양은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어느 곳에서나 숨기시기에는 너무 잘 알려지신 것이다. 예수께서 기름부음 받은 희락의 기름은, 오른 손에 바른 연고와 같이 그 자체를 드러내게 되며 집안을 향기로 진동하게 하시는 것이다. 예수와 대화를 나눈 적이 없고 다만 그분의 명성을 듣기만 한 사람들도 곧 "이분이 틀림없이 예수님이시다"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다음을 살펴보기로 하자.
1. 고난과 근심 중에 있는 불쌍한 한 여인이 예수께 나와 간청하였다. 그 여자는 이방인인 헬라인으로서,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었다(엡 2:12). 그 여자는 수로보니게 족속으로서, 유대 종교에 개종이 어려운 자이었다. 그 여자는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이 있었다. 얼마나 많고 비참한 불행들을 어린 자녀들이 당하고 있나! 이 여자의 간구는 어떠하였나 보라.
(1)이 여자는 대단히 겸손하고도 끈기 있게 매어 달려 간구 하였다.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아래 엎드리니"(25절). 그리스도에게서 자비를 얻기를 원하는 자들은 그분의 발 앞에 엎드리지 않으면 안 되며, 그분에게 자신들을 맡기지 않으면 안 되며, 그 분 앞에 겸손하지 않으면 안 되며. 그분이 다스리도록 자신들을 그분에게 내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발 앞에 나와 엎드리는 자는 비록 그가 당신의 팔에 맡길 만큼 담대하지 못하고 확신이 없는 하나의 불쌍한 떨리는 영혼이 나와서 그러하더라도, 결코 당신에게서 돌려보내시지 않으신다.
(2) 이 여자가 예수에게 나와서 무엇을 자기가 원하고 있음을 말씀드린 것은 특별한 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불쌍한 간청자들을 자유롭게 돌아가도록 해 주시는 것이다. 이 여자는 예수께나와서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였다(26절).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서 그리스도에게 구할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영혼들로부터 사탄의 세력을, 즉 죄의 세력을 깨뜨려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며, 특히 그들이 성령의 전들이 되도록,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 거하실 수 있도록 "더러운 귀신"을 추방케 해 주시도록 간구하는 일이다.
2. 이 여인의 간구에 대해서 예수께서 실망적인 말씀을 하시었다(27절).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27절). 이 말씀은 이런 의도에서 말씀하시었을 것이다. "먼저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기회를 얻는 대로, 모든 기적을 행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려고 의도한 것을 하나님의 가족이 아닌 자들에게, 즉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바도 없고 하나님에게 흥미도 못 가지므로, 유대인들에게 비하면 마치 개와 같이 부도덕하고 불경스러운 자들에게 줄 수 없다. 그들은 마치 개와 같이 유대인들에게 으르렁거리고, 그들에게 앙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에게 염려를 끼칠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때로는 간청자들의 신앙이 강한 것을 아실 적에는, 그 신앙을 시험하고 그 폭을 더 넓히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유의하라. 예수의 말씀하신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란 이방인들을 위해서 많은 은혜가 준비되어 있으며, 머지않아 나타나게 될 것을 암시하신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미 그리스도의 복음에 배가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예수에게 "그 지방에서 떠나기를" 구하였던 것이다. 자녀들은 그들의 음식을 즐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남긴 것과 싫어하는 것은 이방인들의 잔치에 쓰는 것이다. 사도들도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라"하신 이 규율에 따라 먼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의 영혼이 배불러 싫어하는 이 꿀이든 벌집을 이방으로 가지고 간 것이다.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행 13:46).
3. 그 여자는 자기에게 거스리게 말씀하신 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반기면서, 이 말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말하였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그리고 아마 이렇게 계속하였을 것이다. "제가 구하는 것은 떡 한 덩이나 한 조각이 아니고 다만 남는 부스러기입니다. 저에게 그것을 거절하지 말아 주소서." 그렇다고 해서 그 여자가 결코 예수의 자비를 과소평가 하거나 그것을 경하게 생각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고, 그 여자가 들은 풍성한 병고침의 기적을 유대인들이 받고 잇는 것에 비하면 자기에게 베푸는 이 하나의 병 고침은 마치 부스러기와 같음을 의미한 것이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처럼 무리에게 나오지를 않았다. 이 때에 이 여인 홀로 나온 것이다. 아마 이 여자는 예수께서 단번에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들었을 것이고 나머지를 거두어 들였을 때에 개가 주어 먹을 부스러기를 떨어뜨렸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4. 그렇게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그 여자의 요구를 허락해 주신 것이다. 도대체 이 여자가 이렇게 겸손하고 열심일 수가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신 예수께서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29절) 하시었다. 이 사실은 우리가 기도하고 약하지 말아야 함과, 최후로 승리할 것을 믿고 항상 기도를 꾸준히 계속하라는 용기를 북돋아 준다. 그 비죤(vision)은 결국 거짓이 아님을 말해 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말을 하였으니"라고 하신 말씀은 다른 경우에 "될지어다"란 말과 다름없이 효과적으로 역사를 이루어 주신 것이다(30절). 왜냐하면 말씀하신 대로 "여자가 집에 돌아와 본즉 그 딸이 나왔으며 귀신이 나갔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멀리 떨어져 계시면서도 사탄을 정복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귀가 예수를 보고 그 권세 앞에 굴복할 뿐만 아니라(막 3:11). 주의 성령은 매거나 메이지 않기 때문에 마귀가 예수를 보지 않아도 굴복하는 것이다. 그 여자는 자기 딸이 어떤 고통이나 동요 가운데 있지 않고 "침상에 누워" 자기 어머니가 돌아오면 자기 병이 깨끗이 나았으니 같이 기뻐하려고 기다리고 있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귀머거리를 고치심 (마가복음 7:31-37)
우리 주 예수께서는 한 곳에서 오래 머무르시지 않으셨다. 그것은 예수께서 당신의 하실 일이 어디에 있음을 잘 아시기 때문에, 당신의 일을 고르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예수께서 그 가나안 여인의 딸을 고치셨을 때에, 그곳에서 하시려고 하신 일은 다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곧 그곳을 떠나시어 당신께서 항상 거주하시던 "갈릴리 호수"에 돌아오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곳으로 곧장 오시지 않으시고, 거의 요단 강 맞은 편에 놓여 있는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하여" 오신 것이다. 예수께서 "선을 행하시러" 가실 때에 그렇게 먼길을 따라 오신 것이다. 지금 여기에 예수께서 행하신 병고침의 이야기가 나와 있는데, 이 기록은 다른 복음서 기자들이 기록하지 않은 기사이다. 이것은 "귀먹고 어눌한 자"를 예수께서 고치신 기사이다.
Ⅰ. 그 환자의 경우는 가련하였다(32절). 귀먹은 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예수께 나왔다. 어떤 이들은 이가 나면서부터 귀먹은 자라고 생각하는데, 그러하다면 이는 벙어리도 되는 것이다. 다른 어떤 이들은 이가 어떤 병이나 재난으로 귀먹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어눌한 자"였다. 그가 어눌하다는 이 원어(mogila,loj)에 대하여 혹자들은 그가 완전히 벙어리였다고 생각하며, 또 다른 이들은 그가 다만 말하는데 큰 불편을 느끼며, 듣는 이들이 잘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말을 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혀가 맺혀있기 때문에 대화에 불능하였고 그로 인해 대화에 얻을 수 있는 즐거움과 유익을 상실하며 살아왔으며,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고 자기의 마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표현하는 일에 만족을 느끼지 모사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회를 갖도록 하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을 수 있는 청각을 보전해 주심에 대해서,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음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에게 말할 수 있는 기능을 주심에 대해,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말할 수 있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음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자. 그리고 귀먹은 자들이나 벙어리들에 대해서 동정을 베풀고 친절을 베풀도록 하자. 그 사람들은 이 불쌍한 사람을 예수께 데리고 나와서, 마치 선지자들이 자기들의 손을 얹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을 하는 것처럼, 예수께서 그에게 "안수하여주시기를 간구하"였다. 그들이 예수에게 나와 그를 고쳐 주시기를 간구하지 않고 그에게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한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그 경우를 살피셔서 뜻대로 그에게 능력을 나타내 주시기를 바람에서였다.
Ⅱ. 그 사람의 병나음은 엄숙하게 이루어졌다. 이 병나음의 경우는 독특한 점이 있다.
1.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났다"(33절). 보통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기적을 나타내시어 그들이 엄밀한 관찰과 조사를 하도 하시었다. 그러나 이 기적은 그리스도께서 은밀하게 행하시어 당신이 자신의 영광을 구하시지 않으심과 허식의 냄새를 풍기는 모든 것을 당신이 피하심을 보여 주시려고 하신 것이다. 겸손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배우자. 그리고 아무도 보는 자가 없었지만 그리스도께서 늘 보고 계시는 은밀한 가운데 선을 행하자.
2. 그리스도께서 이 사람의 병을 고치시는데 있어서, 다른 보통 때보다 더 의미심장한 행동을 보이셨다.
(1) 예수께서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마치 예수께서 그 양 귀에 주사를 놓으시는 것처럼 양손을 넣으시고 그 귀를 막고 있는 것을 꺼내려는 것처럼 하시었다.
(2) 예수께서 당신의 손가락에 침을 뱉아 "그의 혀에" 마치 그의 입을 적시고 그의 혀에 맺힌 것을 풀어 주려는 듯이 손을 대시었다. 이러한 일들은 그를 고치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은 전연 아니다. 다만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소유하신 능력으로 그를 고치시는데 나타내는 하나의 표적일 따름이다. 그것은 그 사람과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에게 믿음을 북돋아 주기 위한 것이다. 예수께서 이 사람을 고치는데 사용한 요소란 오직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뿐이다. 그의 양 귀에 넣은 것은 당신 자신의 손이었으며, 그의 혀에 바른 것도 당신의 침이었다. 오직 당신 홀로 그를 고치신 것이다.
3.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께서 하신 일에 찬송을 드리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중보자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였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고, 하나님 안에서 행하시고 하나님을 의지하시며 하나님께 시선을 두시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예수께서 주로서 하늘에서 받았고, 하늘로부터 가지고 오셨고 이 기적을 행하시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듣는 귀와 보는 눈은 다 여호와의 지으신 것이니라." 그리고 하나님은 이것들을 다시 지으실 수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또한 이렇게 하심으로 들을 수는 없으나 볼 수 있는 그 환자로 하여금 구원을 바라는 마음도 하늘을 바라보게 하신 것이다. 말이 둔한 모세도 이와 같이 경험을 한 것이 있다.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밖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출 4:11).
4. 예수께서 탄식하시었다 이 기적을 행하시는데 어떤 어려움이 있어서 그러거나 이 기적을 행하시는데 아버지로부터 능력을 얻으시기에 그러하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의 연약함에 대해서 친히 감동된 자로서 인간의 생명의 비참함에 대해서 당신의 동정심을 나타내고, 그들의 고통에 대해서 아픔을 느끼는 동정심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이 사람에 대하여 탄식하는 것은 그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 싫어서나, 마지못해 이 일을 행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고침을 받은 후에 그가 당하게 될 시험들과 그가 범한 위험성이 있는 죄, 말로 짓는 죄 때문이었다. 이런 일은 그가 고침을 받기 전에는 구애를 받지 않으신 것이다. 그가 만일 그의 "입에 재갈을 먹이지" 않는 한, 그대로 "혀 맺힌" 대로 있는 게 나을 것이다(시 39:1).
5. 예수께서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이 말씀은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들이 하는 주문이나 마력을 거는 것이 아니다(사 8:19). 예수께서는 권세 있는 자답게 말씀하신 것이며, 그 말씀에 능력이 나타난 것이다. 이 "열리라"는 말씀은 귀나 입에 다 타당한 것이다. 이 말은 곧 "귀가 열리라, 입술이 열리라, 그로 듣게 하라, 자유로이 말할 수 있게 하라. 그를 억압하는 것은 떠나가라." 그리고 예수의 이 말씀은 효과적이었다.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35절). 이렇게 해서 모든 것이 잘 회복된 것이다. 그리고, 듣게 되고 모릅ㄹ k는 게 되자마자 가까이 계시는,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수와 더불어 대화를 나눌 수 있게 이 사람이 얼마나 복된가 말이다. 이 병고침은 어떠한 사실을 말해 주고 있나 보자.
(1) 그리스도께서 메시야임을 증거해 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해서 예언되기를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사 35:5, 6)라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2) 이 사실은 인간들의 마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복음의 작용에 대한 예를 보여 준다. 불쌍한 죄인들에 대한 복음의 큰 사명과 그리스도의 은혜는 "에바다" 곧 "열리라"는 것이다. 그로티우스(Grotius)는 이 말씀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신체의 장해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제거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성령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 듯이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시며, 그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귀를 열러 주시며, 기도와 찬미를 드리도록 입을 열어 주시는 것이다.
6. 예수께서 이 일을 비밀로 하고 소문을 내지 못하게 하였으나 이 일이 널리 전파되어 소문이 난 것이다.
(1) "예수께서 저희에게 경계하사 아무에게라도 이르지 말라"하신 것은 그분의 겸손을 의미하신 것이다(36절).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선을 전파하기를 원하며, 적어도 다른 사람이 전파해 주기를 원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자신이 교만하게 될 위험이 없으시지만, 우리는 그런 위험성이 있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다른 경우에서처럼, 우리에게 자기 부인의 모범을 보여 주시기를 원하신 것이다. 특히 칭찬이나 박수 갈채를 받을 때 그러하도록 말이다. 우리는 선을 행하는 일에 기쁨을 가져야 하고 우리가 알려지는 것을 기뻐하지 말아야 한다.
(2) 비록 예수께서 그들에게 아무 말도 소문내지 말라고 당부하시었지만 그들은 열심을 내어,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기를 원하기 전에 이 소문을 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솔직한 것을 이미 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그런 행위는 무분별하였다고 보는 것보다 불순종하였다고 보는 것이다(36절). 그러나 이 말을 전한 자들이나 이 소문을 들은 자들이 다 "심히 놀라"게 된 것이다. 이 말의 원어 u`perperissw/j는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라는 의미이다. 그들은 그 일로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받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가 잘하였도다"(37절)라고 말하는데 이 말은 대중의 평이었다. 거기에는 예수를 미워하고 핍박하던 자들이 있었으나, 예수께서 아무런 악을 행하지 않았을 뿐더러 많은 선을 행하시며, 그것들을 예의 바르게, 겸손하게, 열심히 잘하셨으며, "돈 없이 값없이" 무상으로 잘하셨음을 증거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가 잘하였도다. 귀머거리도 듣게 하고 벙어리도 말하게 한다" 하였을 것이다. 그들이나 그들의 친척들이나 거리끼면서도 예수를 욕하던 모든 자들에게 잘하였던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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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한해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코로나로 힘든 연말
회원님께 주님의 크신 은혜가 충만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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