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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거룩, 성결)
성화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오해하고 착각을 하는 것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사실 시간과 노력을 들여가면서 이런 글을 아무리 올려도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1) 성화는 신과 인간의 협력으로 이루어진다 :
대부분 장로교회 교인들은 이것을 부정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장로교의 신학에서도 성화라는 과정은 인간의 협력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중생의 과정은 인간의 의지와 결단이 아닌 오직 성령의 주도로서만 이루어집니다.(딛3:5) 그러나 성화는 성령과 인간의 공동협력으로 이루어집니다.
- 성화는 신자들이 협력하는 하나님의 사역이다.(루이스벌콥, 조직신학 하권, 299쪽)
- 성화를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과 인간은 상호 협력한다.(웨인그루뎀, 조직신학 중권, 405쪽)
(2) 성화는 구원의 필수적인 조건이다.
이것도 잘못 오해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성화는 물론 구원의 한 서정 중에 한 중요한 과정이 맞습니다. 그러나 성화를 필수적인 구원의 조건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경우를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만약 거듭난 사람이 그 날에 죽으면 구원을 받지 못할까요?
미처 죄를 회개하지 못하고 사고가 났다면 그는 지옥에 갈까요?
또 성화가 구원의 필수조건이라면 성화를 이루지 못하는 성도들은 모두 구원이 취소되나요? 그렇다면 완전성화를 이루어야만 구원을 받습니까?
성화는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이 이루는 과정이지만 그에게는 아직 오염된 옛사람의 죄 성이 남아 있습니다.
인간은 거듭난 사람이라도 자력으로 스스로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성화라는 과정이 구원의 필수조건이라면, 아무도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우편 강도는 성화의 과정이 없었지만 그가 구원을 받았음.)
성화는 구원을 이루는 또 다른 조건적인 과정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성도, 성령이 내주하여 보증을 받은 성도가 이루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행위구원론자들이 주장하는 성화는, 성화라는 구원의 과정을 구원의 필수적인 조건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의지, 행함과 지속적인 회개, 도덕적인 변화가 없으면 구원을 잃을 수가 있다는 것이 곧 행위구원론이자 성화구원론인 것입니다. 즉 완전성화가 그들의 구원의 조건이 됩니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성화는 이미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성령의 인도를 따라 이루어가는 과정이며, 성화를 이루지 못하면 구원이 취소가 되는 구원의 또 다른 조건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하여 믿음으로 거듭난 성도들도 행함이 없으면 구원에 부족하다는 주장이 곧 행위구원론이며, 그것은 결국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십자가의 대속의 효과를 부정하는 주장이 됩니다.
정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어떤 죄를 지어도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도덕폐기론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물론 거듭난 사람도 죄를 짓지만, 그러나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사람이라면 습관적이고 반복적이며 고의적인 죄를 짓지 않아야만 합니다.
어떤 죄를 지어도 상관이 없으며, 죄를 지어도 좋다는 사람은 거듭난 사람이 아니며, 성령이 내주한 사람이 결코 아닙니다.
거듭난 성도는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죄와 싸우며 죄를 억제하는 사람을 말하며, 육체의 소욕을 따라 죄를 방치하는 사람을 말하지 않습니다,
롬6:14-15“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3) 완전성화가 가능한가?
장로교에서는 완전성화를 부정하지만, 웨슬레목사는 완전성화를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웨슬레가 완전성화를 이루지 못하면 구원이 없다고 말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또 그가 말한 완전성화는 100% 죄가 없는 하나님과 같은 완전한 의의 상태를 말하는 것도 아니며, 웨슬레가 말하는 “완전”이라는 개념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무지나 과오나 결점이나 시험받을 가능성등을 문제 삼지 않는다”(송흥국, 웨슬레신학 144쪽)는 것이었습니다.
즉 웨슬레가 말한 완전성화는 "죄로부터 완전함"을 의미하지 않으며 “인격적인 완전과 사랑”을 의미합니다.
웨슬레는 믿는 자의 소망과 목표가 완전성화라고 말한 것뿐이며, 죄로부터 완전은 불가능합니다.
-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는 순전, 중생함을 얻어 깨끗하게 되고 성화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완전히 새로워지고, 씻음을 받고 깨끗하게 된 것이 아니요 비록 극복은 되었다고 하나, 우리 속에는 악한 성품의 씨인 육이 그대로 남아있어 성령을 거슬려 싸운다.(웨슬레조직신학, 한영태, 195)
(4) 성화는 전인적인 영향이다 :
대개 이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성화는 “육체의 구원과정”을 뜻한다고 주장을 합니다.
특히 지방교회, 구원파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영혼과 육체를 분리시켜 육체에만 죄성이 남아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화는 전인적이며 총체적인 인간의 구원적 과정을 말합니다. 사람을 살아서 육체와 영혼으로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고후7:1“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살전5:23“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 성화의 의미가 무엇인가?
본래 성화라는 말은 "구별되다"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구약에서는 히브리어로는 "카도쉬"가 사용되었는데, 그 단어는 "잘라냄, 분리됨"을 의미하는데, 종교적으로 속세의 것과 구별되어지는 “거룩”을 뜻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일반 책과 다르게 구별되었으며, 성전은 다른 건물과 달리 구별되어 거룩한 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렸으며,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사람들은 성도라고 불리웠던 것이며,(고전1:2) 그리고 성가란 일반 노래와 구별되어집니다.
롬11:16“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
벧전3:5“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롬11:16“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고전16:20"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즉 신약에서도(구약에는 그 용례가 너무 많음으로 생략함) 떡덩이도, 입맞춤도, 부녀들도 모두 거룩하다고 불려집니다.
구약에서는 제사장의 옷(레16:4)과 십일조(신26:13)까지 거룩하다고 하였으며, 거룩한 시간(출20:8)도 있었던 것입니다..... 또 제사를 드리는 거룩하게 구별된 물건에 접촉하는 것도 거룩하다고 불리워졌습니다(출29:37).
어떻게 떡과 옷 같은 물질이 거룩할 수가 있었을까요?
즉 하나님께 속한 것은 모두 거룩이라고 불리워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은 "거룩한 땅"이라고 불려졌던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의식적인 거룩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성화라는 단어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서 구별되어지는 과정을 의미하는데 이것을 우리는 내면적인 거룩이라고 부릅니다.
◈ 그렇다면 우리에게 성화가 왜 필요할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룩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19:2. 참조 벧전1:15)
성화는 그 개념에 따라 세 가지로 분류됩니다.
1)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에 세상과 구별되는 즉각적인 변화
2)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이루어져 가는 변화
3) 천국에 들어갈 때의 완전히 이루어지는 변화
대부분의 신학적인 구원론의 용어로서 성화는 두 번째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성화란 넓은 뜻에서 보면 예수를 믿는 단계에서부터 천국에 들어가는 모든 과정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중생과 성화는 어떻게 다른가?
엄격히 이야기하자면 중생이 곧 성화의 시작일 것입니다.
두 과정은 시간적인 순서나 과정을 날카롭게 분리시켜 구별하지는 않지만, 의미적으로 구별하기 위하여 서로 다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편의상 좋습니다.
바울은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딛3:5)이라고 한 것은 성령의 거듭남의 단계가 곧 성화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에게“주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하심을 얻었다"(고전6:11)이라고 하였습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의식적인 성화가 “오염되지 않은 순수함, 세속과의 분리”, 혹은 인간과는 전적으로 분리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뜻한다면,
신약에서는 내면적인 성화는 성령을 통해 주어지는 “내적 변화”를 말합니다.
물론 신약의 성화적 개념도 구약의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바울은 성화를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신분상의 변화(고린도전서 1:2)이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 사람의 도덕적, 영적 변화의 과정이라고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닮아 거룩한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장로교의 대표적인 신학자 루이스벌콥은 성화를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성화란 성령께서 죄인을 죄의 부패에서 깨끗하게 하시며 그의 전 본성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갱신하시며, 그의 전 본성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갱신하여 죄인으로 하여금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로우시며 계속적인 사역이라 할 수 있다"(기독교 신학개론, 283쪽)
즉 이 성화가 도덕적인 무흠 혹은 완전한 윤리적 자세만으로 해석되어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루터의 핵심이 이신칭의, 측 믿음에 의한 칭의였다면, 캘빈의 핵심은 거듭남의 중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강조적인 관점에서 웨슬레의 핵심은 성결, 성화였습니다.
특히 웨슬레의 성화는 중생 거듭남의 과정까지를 포함한 넓은 의미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웨슬레는 성화, 즉 성결을 의식적 성결(외적 성결)과 윤리적 성결(내적 성결)으로 구분하였습니다.
의식적 성결은 주로 구약적인 외적 성결을 의미하며, 성별(consecration) 또는 구분(separation)을 의미를 갖습니다. 윤리적 성결은 내적 성결로서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에 의한 보다 높은 변화이며, 은총의 경험을 통한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믿기로 작정하여 세상과 구별되는 성도가, 내적인 성품의 변화로 말미암아 참된 성도로 변화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구약적인 의식적 개념은 신약의 내적인 개념으로 발전하면서 완전해진다고 봅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구별되어지고 거룩하다고 불리우는 성도들도, 이제는 실제로 죄를 회개하고 죄와 투쟁하며 변화되어 거룩한 사람으로 발전되어 나가게 되는 과정을 성화라고 봅니다.
믿음에 의한 죄의 용서와 씻음, 의인이라고 불러줌(칭의)은 법적, 신분상의 변화이지만, 실제적인 변화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구약에서는 거룩하게 구별되어지는 의식적, 외적인 과정이지만, 신약에서는 실제적, 내면적인 변화, 즉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과정을 말하게 됩니다.
벧후1:4-7“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 완전성화
성도란 용어는 무슨 뜻일까요?
성도란 성경에 의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부르심을 받은 자들"을 말합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성도에 대해서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고전1:2“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그렇다면 성도란 이미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도 거룩하여진 자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고린도교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전3:1-3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고전3:1-3에서 사도바울은 이미 거룩하여진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육신에 속한 자라고 하였고, 어린아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그들은 의식적, 외적인 의미에서 성도(거룩한 무리)였지만, 아직 내적성결에 도달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6장11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고전6:11“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그들 중에서는 내적인 성결에 도달했던 자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씻음(중생)과 거룩함(성화)과 의롭다하심(칭의)을 얻었습니다.
물론 그들의 성결은 아직 완전한 것은 아니며,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 안에서 얻은 것입니다.
◈ 루터와 캘빈은 현 세상에서 온전한 성화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웨슬레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의 순간적인 경험과 같이 성화의 두 번째 경험이 가능함을 주장하였습니다. 웨슬레의 성화는 점진적인 요소와 순간적인 요소가 있는데, 웨슬레가 말하는 순간적 성화의 특징은 은혜의 체험을 말합니다. 이것을 웨슬레는 제2의 축복, 제2의 은혜, 온전한 구원, 기독자의 완전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웨슬레의 완전성화의 개념이 행위 구원론자들과 소위 영성운동을 하는 자들에게 잘못 이해되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최근의 행위 구원론자들은 완전성화와 제2의 은혜와 같은 용어를 웨슬레에게 빌려와서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적인 의미는 웨슬레가 주장한 것과 전혀 다릅니다.
웨슬레는 완전성화를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완전 성화되지 못한 성도는 지옥불에 떨어진다고 주장하였을까요?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 웨슬레가 주장하는 완전성화의 개념이란, 하나님이 부르시고 거듭나게 하시는 목적이 바로 성결이기 때문에, 성화는 신앙인의 신앙적인 목표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즉 웨슬레가 말한 성화는 궁극적으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상태나 조건의 완전한 성결의 개념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루터나 캘빈과 같은 개혁자들이 말하는 것은 완전한 성화는 생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웨슬레는 완전한 성화를 주장하였기 때문에, 이 두 견해는 서로 대립되어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웨슬레를 반대하고 비평하는 사람들의 시각에는, 인간이 피조물임으로 그의 성품과 인격이 "불완전"하다고 보았던 것이며, 웨슬레가 말하는 "완전"이라는 개념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무지나 과오나 결점이나 시험받을 가능성 등을 문제 삼지 않는다.(배제하지 않는다.)"(송흥국, 웨슬레신학 144쪽)는 것이었습니다. 즉 “완전”이라는 개념에 대하여 서로 시각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면 맞습니다.
웨슬레가 말하는 완전이란 "정지된 상태의 최종적인 완전"이 아니라, "완전을 향하여 가는 점진적인 인격적 완전"을 의미합니다.
살전4:3"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살전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히12:14)"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완전한 성결이란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그리스도인의 인격적 완성과 완전한 사랑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현세에서의 완전은 최종적인 성결이 아닙니다.
물론 최종적인 완전(Final Stage of Perfection)은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이 "완전"이라는 개념을 웨슬레는 소극적 완전과 적극적 완전으로 분류하였던 것입니다.
웨슬레는 사도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라고 기록한 것을 예로 들었습니다.
"내가 산 것이 아니요"는 나의 죄성의 소멸을 말하는 소극적 완전이며,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 것이라"는 내 속에 그리스도가 계심으로 이루어지는 적극적 완전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즉 웨슬레가 말하는 완전은 피조물로서의 완전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웨슬레는 인간이 피조물이기에 불완전하다는 것에는 분명히 동의했지만, 그러한 개념의 불완전은 그의 완전개념에서 무시되었던 것입니다. 즉 인간에게 과오, 무지, 결점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공로로서 완전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웨슬레가 말한 "완전"이란 "완전한 사랑과 성령의 증거"를 의미하며 "믿음으로 얻는 것"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 성화의 특징
(1) 성화는 소극적으로 인간의 죄악된 성향을 제거하는 것이고(갈 2:20; 갈5:24), 적극적으로는 거룩하여져서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을 말합니다(롬 6:11).
(2) 성화는 인간의 영혼과 육체, 그리고 지, 정, 의가 포함된 인간의 전인격에게 영향을 미칩니다(고전 6:20; 살전 5:23).
(3) 성화에 이르기 위해서 인간은 죄와의 싸움을 필요로 합니다.
즉 저절로 성화가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4) 성화는 현세에 완성되지 않지만(요한일서1:8),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범위까지 완전에 이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화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하여야 할 것은, “나는 이미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가 되었다"라고 생각하며 "이제는 어떤 죄를 지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스스로 의지와 행함의 능력으로서 죄를 완전히 극복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전자는 도덕폐기론이 되며, 후자는 행위구원론이 될 것입니다.
전자는 스스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지만, 성령이 내주하지 못한 사람의 경우일 것이며, 후자는 성령의 인도가 필요하지 않는 인본주의적인 경우가 될 것입니다
롬6:11,14“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 또한 성화는 살아 생전에 현세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의 목표는 완전성화를 바라보고 나아가야만 하지만, 그가 육체로 있는 한,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최종적인 성화는 살아생전에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성화는 신인협력사항으로서, 성화가 성령의 인도와 도우심으로 이루어지지만, 인간의 전혀 피동적인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행함과 의지로는 절대로 성화를 이룰 수는 없습니다.
◈ 거듭난 자는 죄를 짓지 않는가?
요일3:9“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성경본문은 거듭난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해석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석을 하면, 아래 사도요한이 요일1:8에서 말한 것과 곧 모순이 됩니다.“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사도바울은 우리가 죄없다하면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며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않다고 말하였습니다. 더욱이 우리가 범죄 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1:8-10)
성경은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도, 육신의 소욕을 따르지 말라고 도처에서 경고하며 권면하고 있습니다. 만일 거듭난 자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된다면 우리는 성령의 인도가 필요하지 않게 됩니다.
성경을 보면, 사도바울 같은 사람도 자신에게 육신의 법, 즉 죄의 법이 있음을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25)
실제로 거듭난 자도 알게 모르게 죄를 짓습니다.
그런데 왜 요일3:9은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한다고 말하고 있을까요? 과연 거듭난 자는 죄를 짓지 않을까요?
[공동번역] 누구든지 하느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자기 안에 하느님의 본성을 지녔으므로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는 하느님께로부터 난 사람이기 때문에 도대체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표준새번역]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씨가 그 사람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났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의성경] 하나님의 자녀들은 계속해서 죄를 짓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씨가 그 사람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에게서 태어났으므로 계속 죄를 지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KJV] Whosoever is born of God doth not commit sin; for his seed remaineth in him: and he cannot sin, because he is born of God.
[NIV] No one who is born of God will continue to sin, because God's seed remains in him; he cannot go on sinning, because he has been born of God.
이러한 번역본에서 우리는 NIV 영어성경과 현대인의 성경의 번역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즉 “계속하여 죄를 짓지 않는다”(continue to sin)는 해석인데, 헬라어 전문가들에 의하면 “포이에오”라는 단어의 문법은 “준수하다, 수행하다, 생산하다”(to do to practice)라는 뜻으로 “지속적이며 반복적인 행동”을 가르킨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여 성경본문은 “거듭난 자는 같은 죄를 습관적으로 반복하지 않는다”라고 해석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사도요한이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자녀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는 것이며,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에게 속한 자녀라는 것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씨(성령 혹은 하나님의 말씀)가 거하는 자는 죄를 짓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일3:7-8“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요한일서 본문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죄를 저지르는 것 - 마귀의 일
* 의를 행하는 것 - 하나님의 일
다시 말하면, 사도요한은 한번 죄를 지었다고 하여 그를 마귀에게 속한 자로 분류를 시키는 것이 아니라, 죄를 저지르게 하는 원인이 마귀의 씨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의로움의 근원은 하나님의 씨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동일한 죄를 반복하여 저지르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에 속한 사람이 아니며, 마귀에게 속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동일한 죄를 반복적으로 짓는 사람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지 못하였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한번이라도 죄를 지으면 그는 마귀에 속한 자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께서 그 사람 안에 거하신다면, 그는 동일한 죄를 지속적으로 지을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마귀의 일(죄를 짓게 하는 일)을 멸하려고 오셨으며, 이미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승리하셨으며, 성도들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는 세상의 마귀보다 크시기 때문입니다.
요일4:4“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사람이 성화에 이른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닮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엡 4:13).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은 사람의 어느 한 부분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전 인격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람을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엡 4:24), 또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골 3:10)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새 사람으로서의 성화과정은 육체의 욕심대로 구습을 따르는 정욕과 욕심으로 가득했던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갈5:24, 엡4:22) 부정적인 부분과(소극적), 하나님을 향하여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사는(갈2:19, 엡4:24) 긍정적(적극적)인 부분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 두 부분에는 일정한 순서가 있습니다.
긍정적인 부분보다는 항상 부정적인 부분이 우선 하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새 옷을 입기 위해서는 먼저 낡은 옷을 벗어버려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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