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시편 23편 1-6절
[서론] 인간 실존의 여정
존 번연(John Bunyan)은『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을 베드포드 감옥 안에서 썼습니다. 창문 하나 없는 좁은 감방, 언제 풀려날지 모르는 불확실함 속에서 그는 역설적으로 인간 영혼이 걸어가는 순례의 길을 그려냈습니다. 그 여정에서 가장 어두운 대목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the Valley of the Shadow of Death)입니다. 크리스천은 그 골짜기에서 좌우로 늪과 깊은 구덩이를 만나고, 어둠 속에서 악한 자의 속삭임을 듣습니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고 걸어갑니다. 번연이 이 장면을 쓸 때 붙들었던 본문이 바로 시편 23편입니다.
본문은 다윗이 쓴 짧은 시이지만, 그 속에 담긴 단어 하나하나는 인간 실존의 가장 깊은 질문들인 결핍, 죽음, 그리고 존재의 의미를 관통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시의 단어들을 따라가며, 그것이 신약에서 어떻게 완성되는지, 그리고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첫째, 결핍 없는 존재의 근거 '나의 목자'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에서 핵심 단어는 로이(רֹעִי, 나의 목자)와 하세르(חָסֵר, 부족하다/결핍되다)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다윗이 "여호와가 나를 인도하신다"가 아니라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존재의 정체성으로 고백한다는 점입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는 기능적 관계가 아니라 존재론적 관계입니다.
철학적으로 보면, 인간의 불안은 대개 "결핍"(결여, lack)에서 옵니다. 플라톤의 에로스(eros) 개념도,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불안(Angst)도 결국 인간이 스스로 채울 수 없는 근원적 결핍을 안고 살아간다는 통찰에서 출발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결핍의 문제를 자기 노력이 아니라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의 문제로 풀어냅니다. 하세르(부족함)가 없는 것은 내가 가진 것이 많아서가 아니라, 나의 목자가 여호와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약에서 완전히 성취됩니다. 요한복음 10장 11절에서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에고 에이미 호 포이멘 호 칼로스, ἐγώ εἰμι ὁ ποιμὴν ὁ καλός) 고 선포하십니다. 본문의 '여호와'가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구약의 로이가 신약에서 얼굴을 갖게 된 것입니다.
번연의 순례자 크리스천도 여정을 시작할 때 이미 '멸망의 도시'를 벗어나지만, 그가 그 여정을 계속할 수 있었던 힘은 자기 용기가 아니라 좁은 문 저편의 인도자, 곧 목자 되신 이의 인도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결핍은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온 것 자체가 "나는 목자 없는 양이 아니라 로이, 즉 나의 목자가 계신 사람이다"라는 고백입니다.
둘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두려움 없이 걷는 존재의 용기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의 핵심 단어는 찰마베트(צַלְמָוֶת)입니다. 이 단어는 '그림자'(첼렘/찰)와 '죽음'(마베트)의 합성어로,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음의 그림자를 뜻합니다. 그림자는 실체가 아니라 실체가 드리운 흔적입니다. 다윗은 죽음이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죽음의 그림자 속을 "다닐지라도"(할라크, הָלַךְ — 걸어가다, 계속 살아가다)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 대목이 번연의『천로역정』에서 가장 극적으로 재현됩니다. 크리스천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그는 괴물을 보지 못하지만 그 존재를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신성모독적인 생각들이 마음에 떠오르는 것에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번연은 이렇게 씁니다. 크리스천이 그 어둠 속에서 붙든 것은 눈에 보이는 확신이 아니라, 전에 들었던 말씀에 대한 기억이었습니다. 그는 앞서 걷는 자의 발소리를 어둠 속에서 듣고서야 비로소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깨닫습니다.
철학적으로, 실존주의자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절망이라 불렀습니다. 인간을 무너뜨리는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음 앞에서 홀로라는 절망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답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4절)는 임마누엘의 선언입니다. 이것이 신약에서 마태복음 1장 23절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로, 그리고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친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가심으로 성취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보다 먼저 그 골짜기를 걸으셨습니다.
우리가 통과하는 질병, 상실, 관계의 무너짐이라는 골짜기는 실체가 아니라 그림자입니다. 그 그림자를 이기는 것은 강한 담력이 아니라, 앞서가신 이, 예수 그리스도의 발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셋째: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영원히 거하는 존재의 목적지
6절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의 핵심 단어는 헤세드(חֶסֶד)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한 '자비'가 아니라, 계약 관계 안에서 끝까지 신실하게 지켜지는 언약적 사랑을 뜻합니다. 그리고 동사 라다프(רָדַף, 따르다/쫓다)는 원래 사냥꾼이 짐승을 '추격하다'라는 뜻으로 쓰이는 강렬한 단어입니다. 즉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을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헤세드가 자신을 끝까지 추격해온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는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야샤브, יָשַׁב — 거하다, 정착하다)로 끝납니다.
번연의『천로역정』도 크리스천이 마침내 "하늘의 도성"(Celestial City)에 이르렀을 때, 그를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온 것은 그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은혜였습니다. 그는 죽음의 강을 건너면서도 발이 닿는 것을 깨닫고 안도합니다. 그 강조차 그를 추격해온 은혜의 끝자락이었던 것입니다.
신약에서 이 헤세드는 요한복음 14장 2-3절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로 완성됩니다. 구약의 공간적 성전(여호와의 집)이 신약에서는 종말론적 처소, 곧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원한 거함으로 확장됩니다.
교회는 헤세드가 우리를 추격해와서 마침내 머무르게 하는 처소입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오늘도 우리를 쫓아왔다는 증거입니다.
[결론] 나의 목자와 함께 걷는 여정
다윗의 시는 결핍(로이)에서 시작해 죽음의 그림자(찰마베트)를 지나 영원한 거함(헤세드)에 이르는 하나의 여정이었고, 번연이 감옥 안에서 그려낸 순례자의 길도 정확히 이 서사를 따라갑니다. 좁은 문에서 시작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 마침내 하늘의 도성(Celestial City)에 이르는 그 걸음은, 오늘 우리가 걷는 신앙의 여정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랑히는 성도 여러분,
ㆍ나의 목자(로이 רֹעִי)께 존재 하십시오. 우리의 결핍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앉은 것 자체가 "나는 목자 없는 양이 아니다"라는 고백이 되게 하십시오.
ㆍ죽음의 그림자(찰마베트(צַלְמָוֶת) 속을 두려움 없이 걸으십시오. 질병과 상실과 관계의 무너짐은 실체가 아니라 그림자입니다. 앞서 걸으신 그리스도의 발소리를 들으며 걸어가십시오.
ㆍ나를 추격해온(라다프(רָדַף) 그 은혜(헤세드,חֶסֶד)를 붙드십시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오늘도 우리를 쫓아왔다는 증거임을 잊지 마십시오.
번연은 감옥 안에서도 자유를 그렸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서 있는 자리가 물이 결핍된 와디(시내)든, 사망의 음침한 그림자가 드리운 골짜기든, 혹은 그 끝의 쉴 만한 물가의 푸른 풀밭의 소망의 자리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이 고백이, 교회 밖, 세상으로 향하는 모든 성도의 걸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