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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의 4산비명 중의 하나입니다. 다른 것과 달리 신라 왕실 사찰이었던 대숭복사의 유래를 기록한 것입니다.
숭복사지의 위치는 경주시 외동읍 말방리 토함산 기슭입니다. 신라 선덕왕 이전에 파진찬(波珍飡) 김원량(金元良)이 창건한 ‘곡사(鵠寺)’란 절이 있었는데, 원성왕이 죽자 이곳에 능을 만들고 지금의 위치로 절을 옮겼다. 그 뒤 경문왕이 즉위하여 꿈에 원성왕을 보고 숭복사 절을 증축한 뒤 능원수호와 명복을 빌게 하였다. 헌강왕 때 절의 이름을 대숭복사로 하였다고 하며 절터에서 발견된 기와편으로 미루어 볼 때 조선시대까지 존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비문 내용은 일찍이 관심을 받아 온전하게 전하지만 비석은 깨어진 채 발견되어 그 파편이 현재 국립경주박물관과 동국대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숭복사비의 귀부는 경주박물관 야외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경주 초월산 대숭복사 비명 및 서
신이 듣자오니, “왕자(王者)의 기틀은 선조의 덕으로 후손의 도모함을 높이는 것이라.” 하니
정치는 인으로써 근본을 삼고 예법은 효도로써 으뜸을 삼는 것이며 그 인으로는 대중을 구제하는 정성을 다하고 효도로는 어버이 높이는 법도를 세우는 것입니다.
하범(夏範)에서 그 치우침이 없는 것을 본받지 않음이 없고 『시경(詩經)』에서 효자는 다함이 없다는 것을 따라야 하나니 스스로 닦아서 잘 익지 못하였다는 기롱(譏弄)을 없애며 제사함에는 마름따위의 제수 올림을 쳥결히 하여 윤택한 지혜로 백성들을 고루 적셔주고 덕의 향기가 높은 하늘에까지 멀리 사무치게 하였다.
그러나 마음을 수고롭게 하면서 더위 먹은 사람에게 부채질하고 죄인을 보고 우는 것이 어찌 뭇 중생을 크게 미혹한 데서 건져주는 것만 하겠으며 힘을 다하여 하늘에 짝하고 상제께 제사함이 어찌 높으신 혼령을 항상 즐거운 곳에 받드는 것만 하겠습니까.
구친(九親) 에게 잘 화목함이 진실로 삼보를 받들고 높이는데 있음을 알게 한다.
하물며 백호광명이 비추는 것과 불경의 게송이 흘러 전하는 것이 인도의 중생에만 한하지 않고서
동방 세계에 미쳐 왔으니 곧 우리의 태평 승지는 성품이 넉넉해서 유순하고 기백(氣魄)이 만물을 소생시키는 봄기운에 합하였다.
산림에는 참선하는 무리가 많아서 같은 무리들이 모여들고 강과 바다는 조종(朝宗)의 기세에 협력하고 선을 따르는 것이 흐르는 물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군자의 풍도를 드높이고 석가의 도를 훈습(薰習)하니 마치 진흙인 인주(印朱)가 옥새를 따르고 쇠가 용광로에 있는 것과 같이 임금님과 신하는 뜻을 삼귀에 비추고 사류(士類)와 서민들은 육바라밀에 정성을 다함을 얻었다.
나아가서는 국성까지도 아낌이 없어서 능히 탑묘를 많이 세우셨나니. 비록 남섬부주의 바닷가에 있으나 어찌 도솔타 천상에 부끄러우리요.
여러 가지 미묘함의 미묘함을 무슨 이름으로 다 말하겠는가?
금성의 남쪽 일관의 산기슭에는 절이 있는데 숭복이라 이름하였다.
이는 옛 임금께서 왕위를 계승하시던 첫해에 열조 원성대왕의 원능을 받들고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세워진 것입니다.
이에 옛 절의 유래를 상고하며 새 절의 만들어짐을 살펴 보건대
곧 옛적 파진손인 김원량은 소문왕후의 원구며 숙정왕후의 외조부였습니다.
몸은 비록 귀공자였으나 마음은 진실로 참 옛사람인지라 처음엔 사안이 동산에서 마음껏 즐기듯이 노래하는 집과 춤추는 관을 의젓하게 세우더니 종말엔 혜원이 서경에 뜻을 두듯이 그를 버리고 불전과 경대을 만드니 그 당시의 봉관 곤현이었던 것이 이 날에 금종과 옥경이였습니다.
때를 따라 변하여 고쳐진 것은 출세의 인연이며 절이 생기게 된 것이었습니다.
바위에 따오기 모양이 있거늘 그로 인하여 현판을 만들어 앙려로 하여금 길이 값지게 하고 안전으로 하여금 더욱 빛나게 하였으니 곧 저 바라월의 표형과 굴린차의 기호라도 어찌 천리에 나는 것으로 견주어 말하며 쌍림의 변한 것으로 표제함과 같으리까!
다만 이 땅은 위력이 축두보다 낮으나 덕은 용이보다 높으며 금계를 마련할 만하고 옥전이 세워질 만합니다.
정원 무인년 겨울을 당하여 능 모시는 일을 칙명하시니 산으로 인하여 이에 명령하셨으나 땅을 선택하기가 더욱 어렵기에 이에 절에다 비전을 봉안하려 하였습니다.
그 때에 의아하는 이가 있어서 말하되 “옛적에 유씨의 사당과 공자의 집도 모두 차마 무너뜨리지 아니했기에 사람들이 지금까지 그를 칭송하거늘 지금 금지를 뺏으려고 하니 수달다의 크게 희사하는 마음을 저버림이 아니겠느냐. 이 절터에 장사지내는 것은 땅은 돕겠지만 하늘은 허물하는 바이니 서로 보완할 수 없습니다.” 라고 했다.
정사에 임하는 자가 기롱해서 말하기를, “절이란 거주하면 반드시 교화하여 어디에 가도 화합하지 않음이 없으니 그러므로 능히 재앙의 터를 변화시켜 복된 장소로 만들어서 백억 겁 동안 그 험난한 세속을 제도하는 것이오. 영이란 아래로는 땅의 맥을 짚어보고 위로는 하늘의 마음에 맞추어 반드시 사상을 장지(葬地)에 포괄하여 천만대 동안 그 끼친 복[음덕(陰德)]을 보전하는 것이다.
법은 머무르는 모양이 없고 장례예는 이루는 시기가 있나니 땅을 바꾸어 거주하는 것은 하늘의 이치에 순응함이라. 다만 청오 같은 풍수가를 만나 잘 보도록 할지니 어찌 사찰을 헐어 백마로 하여금 슬피 울게 하리요.
또 살펴 보건대 이 인사는 본래 철기에 예속 되었나니 진실로 낮음을 버리고 높은데에 나아가며
옛절을 버리고 새로운 왕능을 꾀하여 왕릉은 전국의 웅장한 데에 의거하게 하고 청정한 사찰은 산수의 아름다움을 드러나게 한즉 우리 왕실의 복산이 높아질 것이며 불문(佛門)의 덕의 바다가 잘 흐를 것이라” 하였으니 이야말로 “알면 못하는 것이 없고 각기 제 자리를 얻게 함이라” 하겠습니다.
어찌 정나라 자산이 자유(子遊)의 묘를 헐지 않은 조그만 은혜와 노나라 공자의 집을 헐려다 그만둔 것은 같은 날 시비하겠습니까?
으레 거북과 시초에 물어서 맞아 따르게 되면 용신팔부(龍神八部}의 기뻐함도 보게 되리라 하여
이에 정사를 옮기고 현궁을 창건하니 두 일이 진행되고 여러 기술진이 일을 추진하였다.
그 절을 옮겨 세울 적엔 인연 있는 사부대중이 서로 모여와서 옷소매를 펼쳐 놓아도 바람이 일지 않고 송곳 꽃을 땅이 없을 정도로서 오가는 사람들이 오리에 뻗쳤으며 설산이 한 때에 모여 이루어졌습니다.
그 기와를 걷고 서까래를 빼내며 경전을 받들고 불상을 모심에 번갈아 소로 주고 받들며 다투어 정성을 다하여 이루었나니 인부들의 분주하던 발걸음도 쉬게 되고 스님들의 요사채가 이미 마련되었습니다.
그 구원을 성취함엔 비록 왕의 국토라고 하나 공전이 아니기에 그 봉분에 가까운 땅을 검토해 보고
값이 높은 땅을 구하여 구농 이백여 결을 더하고 곡식 이천 석을 주며 또 유사와 왕도의 군읍에 명령하여 함께 가시덤불의 길을 닦고 아울러 묘역에 소나무를 심었다.
그러므로 씁쓸히 슬픈 바람이 불 때는 춤추는 봉황과 노래하는 난조의 생각[先王의 덕을 사모하는 생각]을 자아내고 울울창창한 곳에서 해를 보니 서린 용과 걸터앉은 범의 위세를 더했다.
또 그 땅을 보건대 땅은 하구와 다르나 경계는 양곡에 연했습니다.
기수의 남은 행기가 없어지지 아니하고 곡림의 아름다운 기운이 더욱 무르녹으며
비단 같은 봉우리는 먼 사방에서 서로 조회하고 마전한 베와 같은 개는 한 가닥이 눈앞에 있었나니
실로 교산의 빼어남을 품고 필맥의 기이함을 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금의 가지[왕손]로 하여금 계림에서 더 무성하게 하고 옥의 줄기[외손]이 우리나라에]에 부리를 더욱 깊게 함이다.
처음 절이 옮김에 비록 보탑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으나 절 같지는 않았다.
가시덤불을 깎아내고 산의 언덕이 드러나게 되었다.
띠집과 섞인 채로 바람과 비를 피하면서 겨우 칠십팔년을 넘고 어언 아홉 조정을 지나 문득 전복 당했으되 미처 보수할 여가가 없었는데 세 가지 이로운 좋은 조건이 기다리고 있었으며 천년전 보배로운 국운이 이지러지지 않았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선대왕께서는 불가에서 무지개가 비추는 상서로움이 있어 금오산 기슭에서 태어나시어 이름을 한림원에 날리시고 따로 풍류를 떨쳤다.
조금 있다가 금초의 직을 받아 우리나라의 풍속을 말끔히 쇄신하니 신하로 있으면서 덕을 심었고
태자로 있으면서 마음을 윤택하게 하엿다.
말을 내면 어진 이로 사람을 편안케 함이오 정사를 꾀함엔 이에 도로써 인도하였다.
여덟 가지 권세의 무거운 권한을 모두 쥐고 인륜의 떨어진 도리를 이에 회복시키니 모든 난관을 다 겪었지만 가는 곳마다 이롭게 하였다.
곧바로 임금의 승하함을 만나니 왕위가 비어 산악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비록 사슴을 쫒아 잡는 언덕[왕위를 쟁탈하는 곳]은 아니었지만 역시 까마귀가 모이는 동산이 있었습니다.[임금의 지위가 누구에게 갈 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어질며 유순함으로 하였고 덕과 인으로 하셨기에 백성의 추대하는 바가 되었나니 우리를 버리고 어데로 가시겠습니까?
이에 몸을 대저에 두시고 뜻을 불문에 기우리시며 선조에게 부끄러움이 될까 하여 불사 일으키기를 발원하시고 분황사의 중 숭창을 청하여 절을 중수하여 받들 뜻으로써 부처님께 고하고 다시 김순행을 보내어 선조의 업적을 높이고 펼 정성으로써 사당에 고하셨으니
시전에서 이른바, “훌륭한 군자는 복을 구함이 삿되지 아니하다. ”한 것이오
서전에서 말한바, “상제께서 이에 흠향하시매 아랫 백성이 공경하며 복종하였다.”는 것이였습니다.
그러므로 능히 지극한 정성이면 귀신도 감응되며 잘하려는 욕심은 모두 성취하였다.
공경과 사대부가 占과 합치되니 동국을 빛내어 군림하셨습니다.
이에 대신을 보내어 헌안왕의 떠나심과 그 왕위 계승함을 아뢰었더니 드디어 함통 육년에 천자께서 어사 증승 호귀후와 우리 고을 사람 전 진사이었던 배광으로 하여금 허리에 금어를 차고 머리에 해태관을 씌어 부사를 삼아 왕인 전헌섬와 함께 와서 칙명을 전하여 말하기를, 빛나는 왕위를 승인 전달함에 천자의 명을 받들어서 잘 계승하였다.지극히 공정한 추천에 미더운 경의를 표했다.
이에 당신을 임명하여 신라의 왕을 삼는다.”고 하였다. 이에 검교태위겸지절통영해군사를 제수하였다.
전일에 제나라가 변하여 빼어나게 표수하고 노나라에 이르러 향기를 드날리게 한 것이 아니면
어찌 봉의 붓을 날려 먼 제후를 총애하며 용의 기장목을 내려 대사마와 같은 것을 주겠는가?
또한 이미 영광스럽게도 천자의 은택을 입었으니 반드시 몸소 선왕의 능에 참배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왕릉을 옮길 만반의 준비는 하였지만 어찌 많은 경비를 소모하겠는가
드디어 태제 상국을 명하여 청묘에 제사 드리고 릉에 대신 뵙게 하셨나니
아름답도다! 왕의 가계가 무성하니 형제는 뛰어났도다.
해가 오랠수록 길이 밭가는 코끼리의 단정한 행위를 사모하게 하고 시절이 평화로우니 소가 피곤하여 헐떡이는 것을 물을 필요가 없었다.
들판을 수놓고 시내를 채색하였으니 보는 자가 구름처럼 많았다.
이에 복어 등인 늙은이와 따오기 눈썹인 중이 있어 손벽을 치며 서로 경사로 여기고 크게 기뻐하며 치하하면서 말하였습니다.
“귀하신 개제의 행차여 성스러운 임금님의 은덕이 현저하시며 우리 임금님의 효심이 이룩되었도다” 라고 하였다.
예의와 향풍이 풍요하게 여유가 있었으며 드디어 물결이 고요하고 변방의 풍진이 맑아지며 천리가 고르고 지재가 불어나게 되어 이에 연우을 잇달아 중수하고 능을 잘 보호하시게 되었도다.
지금이 바로 그 시기이니 이 때를 버리고 어느 때를 기다리리오.
이에 효성이 크게 사무치고 생각과 꿈이 서로 부합하여 성조의 대왕을 뵙게 되었나니 대왕께서 어루만지시며 이르시되, “나는 너의 할아버지다. 네가 불상을 세우며 나의 능역을 꾸며 보호하려고 하니 조심하여 일 함에 빨리 하려 말라. 부처님의 덕과 나의 힘이 너를 도와 주리라. 진실로 그 중용을 잡아서 천록을 길이 마치라” 하셨습니다.
이미 정신이 동호에 반짝이고 몸이 옥침에서 열리어서는 십훈에 점쳐보지 않아도 구령을 얻음과 같았습니다.
문득 유사에게 명령하여 정성스레 법회를 베풀게 하시니 화엄대덕인 중 결언이 당사에서 교지를 받들어 경을 오일 동안 강설하였으니 그 효도의 생각을 펴고 명복을 비는 바이었습니다.
인하여 교지를 나리시되 그 어버이를 사랑하고 공경하지 않는 것을 경에서 경계하는 바며 너의 할아버지를 생각하지 않으랴 하는 시를 어이 잊으랴.
근념함이 울타리에 있었고 절을 수리하고자 하였는지라 송구함이 가슴과 마음에 가득 찬지라.
이미 삼년 날지 않음엔 부끄러우나 하루에 반드시 수리하기를 벌써 깊이 생각했도다.
백윤과 어사들은 이해가 어떻다고 하느냐.
비록 아이를 팔고 부인을 잡힌 비방이 없음은 보장하나 혹 귀신의 원망과 사람의 수고롭다는 말이 있을까 두렵나니 타당하면 실행하고 부당하면 폐지하여 부디 소홀이 하지 말라.
종신 계종과 훈영이하에서 이를 발표하여 협의하고 말을 올리되,
미묘하신 소원이 신명에게 감응되고 인자하신 신령이 꿈에 나타나심은 진실로 임금님의 뜻이 이미 정해지심이어늘 과연 뭇 공론이 모두 일치되었아오니 이절이 이룩되면 구족이 경사가 많을 것이옵니다.
다행이 농사철이 아닌 때를 당하여 목공들을 불러 드릴쎄 이에 인룡을 건례선문에서 뽑고 승상을 소현정서에서 천거하되 종실의 셋 어진 이에게 명령하였으니 말하자면 단원.민영.유영이명 석문의 두 호걸에게 맡겼으니 말하자면 현량과 신해였다.
그리고 그 일을 돕는 중 숭창들이 그 일을 맡았습니다.
또 나라임금님께서 단월이 되시고 나라 선비가 유사가 되었으니 힘도 남음이 있고 마음도 부지런했습니다.
장차 작은 것을 크게 만들려 함에 어찌 새것에다 옛것을 섞이는 것이 좋으리요마는 단계의 옛 소원을 저바릴까 두렵고 내원의 옛 공적을 손상하지 않으려 하여 옛 재목을 골라 추리고 높은 터에 나아가 옮긴 것입니다.
이에 점치고 택일하며 큰 규범을 널리 들어 흙을 조화하고 금을 지어붓으며 미묘한 솜씨를 다투어 보인지라
구름 사다리엔 수인 재목으로 험한 데에 얹어 놓았고 서리 바름엔 노의 백토에 향을 이겨 넣으며
바위 산발을 깎아 담을 돋우고 시내 흐름을 메워 창호를 높게 하며 황무한 섬돌을 금테로 장식한 섬돌로 바꾸고 낮은 행랑을 옥으로 조각한 행랑으로 만들었습니다.
겹겹인 전당엔 용이 서렸는데 복판에 비로자나를 주인으로 모시고 층층인 누각엔 봉황이 우뚝 섰는데 위에 수다라로써 이름하였다.
고래등 같은 집 마룻대를 높여 베풀고 난조 같은 난간을 마주 올렸다.
기정엔 꽃을 모아 포개어 수놓았고 주두는 서로 끼어 두 가지로 가새목 지은지라 날개를 솟구쳐 날아갈 듯 하니 보는 이마다 눈이 아찔하겠도다.
그밖에 더 높이고 고쳐 지은 것은 부처님 모신 법당과 스님들이 거처할 연방이며 공양하는 식당과 음식 만드는 공수간이었습니다.
더욱 공교로은 솜씨를 다하여 아로새기고 다듬었으며 정력을 기우려 채색하고 단청하였으니
암굴과 골짜기도 따라 맑으며 연기와 놀이 서로 찬란하도다.
옥의 찰간에 봉명의 달이 걸렸으니 두 송이 서리 같은 연꽃이며 금방울에 소나무 간수의 바람에 울리니 사시장철 하늘의 풍류로다.
또 절승한 경치를 보건대 이 먼 모퉁이에서 걸출하였나니 왼쪽의 산봉우리는 닭발이 구름을 찌를 듯 하고 오른쪽의 언덕은 용 비늘이 햇빛에 번쩍이도다.
앞에 임하면 메기 산이 검게 벌려 있고 뒤로 돌아보면 봉 묏부리가 갈구리처럼 연해 있도다.
그러므로 멀리서 바라보면 높고 기이하며 가까이서 보면 상쾌하고 수려하니
가히 낙랑의 선경이라 할만하며 참으로 낙방의 초월이었습니다.
명산이 문득 복된 땅으로 되었음이며 잘 건립하여 일이 두루 이룬 것이오 부지런히 닦았음에 복이 헛되지 않을 것이라, 반드시 인방을 크게 덮으며 위로 보수를 돕는다 하겠도다.
삼천 세계를 망라하여 넷 경계를 삼으며 오백 세로 한 봄을 삼을 것이온데 어이 기약하리? 번산에서 표범을 사냥하고는 바야흐로 꼬리 세운 것을 기뻐하시다가 형산에서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다가 문득 떨어진 수염을 잡고 울 줄이야.
헌강 대왕은 젊은 나이에 덕이 높으셨고 건강한 몸에 정신이 맑으시니 우러러 침문에서 환관에게 부왕의 안부를 묻는 것을 슬퍼하시고 머리 숙여 익실에서 거상(居喪)하는 것을 지켰다.
등문공의 예를 다하여 복 입음은 마침내 능히 자신을 극복하심이오, 초장왕이 때를 기다려 정사를 다스림은 그 실로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하물며 또 천성이 중국의 풍도를 답습하고 몸이 지혜의 감로[불교 교리]에 젖으시어 조상을 높이는 의리를 행하고 부처님께 귀의하는 정성을 격발(激發)시켰다.
중화 을사년 가을에 교지를 나리시되. 그 뜻을 잘 계승하고 그 일을 잘 서술하며 길이 선왕의 유지를 계승발전시키는 것이 나에게 있을 뿐이다. 먼저 왕의 세웠던바 곡사는 마땅히 사액(寺額)을 바꾸어 대숭복으로 하라. 그 경을 수지독송(手持讀誦)하는 보살과 사찰의 기강을 세우는 정리(淨吏)들이 남쪽에 있는 밭으로써 공양과 보시에 충당하게 하여 한결같이 봉은사의 고사에 의지하도록 하라. 그 옛날 파진손 김원량이 희사한 땅의 산물로 얻은 이익은 운반하는 것이 중요하니 마땅히 정법사에 위임하도록 하라. 따로 두 숙덕을 선출하여 적에 편입하여 상주(常住)하게 하여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빈다면 윗 자리에 있는 내가 유명(幽明)까지 살피지 아니함이 없을 것이니 큰 인연을 맺은 이로 감응이 있어 반드시 통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종소리가 공중에 울려 퍼졌고 바루에는 음식이 가득하도다.
창도함에 육시로[하루 종일] 옥경(玉磬) 소리 떨치고 수지함엔 만겁동안 구슬이 이어짐이라.
위대하도다!
공자의 이른바 “근심이 없는 이는 그 오직 문왕이신저!
아비가 일으키니 아들이 서술한다.“는 것이 아닌가?
경력 병오년 봄에 돌아보며 하신에게 이르시되,
예기에서 말하지 아니했더냐. 명(銘)이란 스스로 이름하는 것이니 그 선조의 덕을 칭송하여
후세에까지 밝게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이 효자 효손의 마음이다.” 라고 하였다.
선조가 절을 이룩할 처음에 큰 서원을 발하셨는데 김순행이 그대의 아버지 견일과 함께 일찍이 이 일에 종사하였다. 명이 한번 일컬어지면 위 아래가 모두 이름을 얻게 되니 그대는 마땅히 명을 지으라.” 하였다.
신은 배를 타고 중국에 가서 월계의 향기로움을 도둑질하였으나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우구에서의 영원한 비통이오며 [부모가 돌아가실 때 임종을 못한 것이 영원한 슬픔이니] 계로의 헛된 영화일 뿐이었다.[비록 벼슬을 했다 하나 헛된 영화입니다.]
왕의 명령을 받자옵고 깜짝 놀라 몸을 어루만지면서 슬피 오열하였다.
그윽히 생각해 보니 중국에 가서 벼슬할 적에 일찍이 유자규의 동국의 일을 기록한 글을 보니
그 서술한 바가 바르고 조리가 있어 왕도 아님이 없었다.
지금에 향사를 읽어 보니 완연히 성조대왕[元聖王] 조정의 사적이었습니다.
또 전해진 말을 듣자오니 한의 사신 호귀후가 복명하였는데 우리의 풍속과 가요를 넉넉히 채취하고서 당시의 그 승상에게 아뢰었다.
“내가 갔다온 후로 산서에서 출생한 자는 마당히 해동에 사신을 보내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계림에는 아름다운 산수가 많아서 동왕이 시를 지어 나에게 주었는데 저는 일찍이 좀 배워서 운어를 엮을 줄 알아 억지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화합하였습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못했다면 틀림없이 해외에 웃음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니 군자들은 이를 옳은 말이라 여겼다고 한다.
또 공손히 생각하옵건데
열조께서 사술로써 터전을 마련하시고 먼저 임금님께서도 육경으로써 풍속을 교화하시니 어찌 그가 끼친 힘이 아니리오. 능히 그 문채(文彩)를 환히 얻으니 명(銘)에 부끄러운 말이 없었고 붓을 잡아도 남은 용기가 있었다.
드디어 감히 하늘을 엿보고 바닷물을 잔질하는 심정으로 비로소 속된 말을 엮어본다.
누가 알았으리오? 달이 떨어지고 산이 무너지매 이윽고 영원한 한이 일어나더니 곧바로 정강대왕이 즉위하셨다.
남은 것을 이어서 공을 이루니 형제가 화목하였다.
이미 큰 왕업을 이어 왕위를 지켰으니 장차 남긴 일을 계승하여 이루시려고 그 지위에서 편안한 날이 없었다.
그 비문을 마치지 못하였는데 멀리 해와 같은 형님을 좇다가 문득 형님의 죽음을 만났다.
높이 달의 자매[진성여왕]에 의하여 길이 동해에 비추는 빛을 전하셨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진성여왕 전하는 형제자매의 덕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왕가의 계보가 심히 밝고 좋았으며 빼어난 곤덕을 본받아 아름다운 천륜을 계승하셨다.
진실로 이른바 신비로운 구슬을 품고 채색돌을 연마하여
이지러짐이 잇으면 모두 보수하고 모든 선을 닦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므로 보우경(寶雨經)의 부처님 말씀으로
분명히 수기함과 대운경의 옥게송이 완연히 부합함을 얻게 된 것이다.
또 경문왕께서 절을 이룩하시고 헌강왕께서 스님들의 공양을 보살피시어
이미 유리의 세계[불교계]를 높이셨으나 비석의 글을 새기지 못해서
거듭 재주없는 신에게 글을 짓도록 명하시니
신은 비록 왕희지가 벼루를 씻어 못의 물이 먹물로 변하고 장순이 꿈에 서까래만한 붓을 받은 데 비하면 부끄러우나 장융이 두 왕씨[왕희지, 王坦之]의 필법 없음을 한탄하지 아니함에 그윽히 비교될 것이며 거의 조조가 여덟 글자의 찬사를 풀이함에 가까울 것이다.
설령 재가 곤명지를 채우고 먼지가 날아서 바다에 창일할지라도
본 가지[왕의 후예]는 울창할 것이라 약목과 가지런히 길이 번영할 것이며
큰 돌이 높고 견고하여 남해의 옥초처럼 높이 서 있을 것입니다
정성을 가지런히 하여 합장하고 눈물을 씻으며 붓을 잡았다.
빛나는 발자취를 좇아 다음과 같이 명(銘)을 바친다.
가위라의 자비하신 왕은 우이의 거룩한 태양처럼
서토에 나타나시어 동방에서 돋았구나.
먼 데를 비추지 않음 없고 인연 있는 데는 모두 빛나시니
공이 청정한 절에 높았으며 복이 명장에까지 덮었도다.
열열하신 영조께서는 덕이 명우에 부함 하신지라
큰 산에 들어가심 무난하시고 하토를 문득 두시어
우리의 자손을 보호하시며 백성의 부모 되옵시니
그 뿌리 도야에 깊었고 줄기는 멀리 상포에 뻗으셨습니다.
신불과 용순으로 산원에서 진체를 보호하시며 유당에 묘 길을 만드시고
용탑을 가까운 곳에 옮기시니 만세동안 애모하는 예도와 천생의 청정한 터전은
금밭의 두터운 이익이며 옥 잎사귀의 영원한 봄이옵니다.
효손이 많고 아름다우시여 빛나게 천지를 감동하셨네
봉이 날으고 용이 뜀이여 금규가 옥신부에 합했도다.
신령께 빌으심 흐리지 않아 복을 맞아들이매 이 이르렀나니
그 덕 갚으시려고 하여 법사를 높이 받드셨네.
나라의 인걸을 잘 선출하시며 전국의 장인들을 불러 들이고
농사철 아닌 때를 틈타시어 부처님 궁전 이룩하시니
채색 난간엔 봉황이 모이고 아로새긴 들보엔 무지개 섰으며
두른 담엔 구름이 솟아 오르고 그림 벽에는 노을이 어리었도다.
둘레의 터전은 양명하며 조강하고 보이는 풍경마다 소쇄하며
푸른 묏부리는 다투어 솟았고 향기로운 샘물은 솔솔 흐르도다.
꽃이 아름답게 핀 봄산이며 달이 높이 뜬 가을밤이니
비록 바다 밖에 있음이나 홀로 천하에서 아름답도다.
진에서는 보덕이라 칭하였고 수에서는 흥국이라 이름했으니
어찌 집안의 복이라만 하랴 이 나라의 힘을 높이심이로다
법당엔 미묘한 소리 요란하고 주방엔 청정한 음식 풍족하니
임금님의 끼치신 덕화 이어받아 만겁동안 무궁하오리
아! 빛나신 여와 임금님이시여 효도와 우애의 정 두터우시어
안항의 아름다움 이루시고 용수(龍首)의 정성을 기우르셨네
문장 꾸밈은 썩은 붓임이 죄스러우며 글씨 솜씨는 팔목 당김이 부끄럽습니다.
고래 구렁은 비록 다할지라도 거북 옥돌은 썩지 않으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