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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선물, 인간의 욕망이 덫을 놓아 비극을 잉태한 발칸반도(3)/ 전 성훈
크로아티아, 끔직하고 처참한 유고 내전의 상처를 푸르른 ‘아드리아’에 묻고
4월 15일(토)
호텔 로브란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맑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오파티아(OPATIJA)를 떠나 ‘선물로 지어진 도시’라는 뜻의 ‘자다르’를 향하여 리무진 버스는 조용하게 달리기 시작하였다. 체격이 상당히 우람한 운전기사 ‘다니엘의 유연한 운전 솜씨에 편안한 승차감을 느꼈다.
물안개 자욱한 아드리아 해안, 그 바다를 건너 일직선으로 달려가면 바로 이탈리아 베네치아가 나온다. 그 옛날에는 로마제국의, 중세에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속국으로, 그리고 2차 대전 당시 무솔리니의 침략을 받았던 작고 힘없는 나라 크로아티아.
길거리 지붕들은 붉은색의 기와를 덮은 곳이 많고 간혹 마을 공동묘지가 보인다. 어쩌다 조금 높은 건물들도 보였는데 아드리아해를 끼고 있는 정겨운 마을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 자다르 (ZADAR) >
2016년 유럽 최고의 여행지로 소개되었던 자다르, 3,000년의 역사 유적과 뛰어난 건축물을 가지고 있는 아드리아해의 아름다운 도시다. 바다가 연주하는 세계 최초의 파이프 오르간, 물속에 묻은 파이프가 파도나 조류의 움직임에 따라 다른 소리를 내며 신비로운 멜로디를 연출한다. 파이프 오르간 지역 옆에는 길바닥에 태양계의 모습을 형상화해 놓아 많은 관광객들이 멋진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1960년대 영화 ‘새’의 영국인 감독 알프레드 히치콕이 사랑했던 자다르 해변, 히치콕은 석양과 해변의 여인 그리고 마라스카(MARASKA, 알코올 32도)를 이 곳의 삼대 명물로 꼽았다. 점심식사를 하였던 음식점 주인은 친절함이 몸에 밴 사람이다. 웃음을 지으며 커다란 제스처로 손님을 맞이하는 그의 표정은 친절한 시골 아저씨 같았다. 음식을 가리는 아내를 위해 가이드가 특별히 부탁한 토마토 스프를 맛본 아내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 시베닉 (SIBENIK) >
시베닉은 크로아티아의 대표적인 항구로 달마시안 해안에 있는 도시 중 유일하게 크로아티아인에 의해 건설된 항구다. 중세의 항구를 중심으로 언덕 위의 성벽과 구시가지가 만드는 풍경은 한 폭의 그림과 같다.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성야고보성당, 성당의 외벽을 장식한 84개의 머리 모양 조각은 어린이, 노인들, 젊은이들의 모습으로 각기 다른 표정을 짓고 있는데, 웃는 모습이 하나도 없다. 그 당시 고단한 백성들의 생활상을 상징적으로 표현 것 이라고 한다. 광장에는 성당 외벽을 장식한 조각가 ‘유라이 달마티아츠’의 동상이 있다. 성주간 토요일이라 미사에 참여하려는 신자들이 부활절 예물을 가지고 성당으로 부지런히 들어가는 모습이 우리나라와 달라 인상적이었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달마시안에서 기르던 강아지를 영국으로 가져가 종자 개량을 하여 우리가 아는 오늘날의 ‘달마시안’이 태어났다.
< 트로기르 (TROGIR) >
시베닉을 지나 ‘달마시안의 보석’이라 불리는 ‘트로기르’를 찾았다. 트로기르로 이동하는 해안도로는 환상적이다. 마치 우리나라 남해안 다도해 지역을 자동차로 드라이브하는 듯한 느낌이다. 해안도로 왼편은 석회암 바위산으로 야트막한 산에는 이름 모르는 봄꽃들이 지천으로 널려있다. 오른쪽 아드리아해는 맑고 맑아 바닷물에 얼굴을 대면 환하게 비칠 것 같았다. 자연의 선물을 듬뿍 받은 땅, 바위산 중간 중간 빨강색 지붕의 집이, 해안가에도 붉은색 지붕의 집들이 점.점.점 아름다운 수를 놓는다.
트로기르만 입구에 정박하고 있는 수많은 요트, ‘물 반, 고기 반’이 아니라 ‘요트 반, 바닷물 반’이다. 쏟아지는 강열한 햇볕에 바닷바람과 어우러진 한 폭의 수채화가 둥둥 떠돌아다닌다.
트로기르는 B.C 3세기에 건설된 도시로 중부 달마시아 지방의 중요한 관광, 문화, 역사의 중심지인 구시가지와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골목은 미로처럼 얽혀있지만 워낙 규모가 작아서 금방 목적지를 찾을 수 있다. 트로기르는 로마네스크, 고딕, 바로크,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들이 완벽하게 보존되어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8세기 훈족의 아틸라와 13세기 몽고 오고타이칸은 트로기르를 점령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다. 성벽이 너무나 견고하여 침략자들은 우회하여 헝가리까지 진격했다. 헝가리는 ‘훈족의 땅’이란 훈가리스에서 그 어원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4월 16일(일)
< 두브로브니크(DJBROVNIK) >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를 벗어나 다시 아드리아해의 보석이라는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로 들어섰다. 호텔에 짐을 풀고 저녁 식사를 마친 다음 두브르브니크 야경 투어에 나섰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옷을 껴입었다. 어떤 사람들은 속내의에 두툼한 겨울 잠바까지 잘 준비하였다. 두브르브니크는 야경과 낮 시간의 시내 투어 그리고 해상투어를 해야 제대로 이 곳의 절경과 아름다움을 관람할 수 있다고 한다. 가스등 빛이 조명을 비추면서 매혹적인 이국 분위기를 연출하는 밤이었다. 수많은 여행객들이 오고가는 두브르브니크성(城)대로, 대로에 맞닿은 좁디좁은 골목에서 여행객을 상대로 음식과 술을 팔거나 옷가지, 기념품 등을 판매하는 가게들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몇 십 개의 좁은 골목은 외적이 쳐들어 올 때 피난 통로로 이용하기 위하여 이렇게 조성하였다고 한다.
야경을 보면서 관심을 가진 곳이 검역소였다. 중세 유럽을 강타한 페스트, 흑사병은 쥐에 의해서 퍼졌다. 페스트 환자와 건강한 사람과의 접촉을 철저히 차단하는 것이 최선의 예방대책이었다. 당시 사제들은 하느님께 이 고난의 시련을 극복하고 없애달라고 기도를 드리면 해결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페스트 환자까지 포함한 백성들을 성당으로 모이도록 했는데 이것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켜는 도화선이 되었다고 한다. 두브르브니크에서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배를 항구에 정박시키지 않고 외항에 닷(ANCHOR)을 내려놓고 40일간을 기다리도록 했다. 40일이 지나면 배에 페스트 환자가 있는지 여부를 확인 할 수 있었고 만약 환자가 발생했을 경우 선박 입항을 금지시켰다. 40일이라는 이태리어 쿼란티나(QUARANTENA)에서 유래하여 오늘날 사람과 동식물의 검역을 하는 곳을 검역소(QUARANTINE)라고 한다. 직장생활을 해운회사에서 했기 때문에 해외에서 수입하는 동식물, 곡물의 검역을 알고 있어서 검역소의 유래에 관심이 가졌다.
4월 17일(월)
< 두브르브니크 >
유럽인과 일본인이 가장 가고 싶은 여행지 1순위로 뽑은 곳이 ‘두브로브리크’라고 한다. 7세기에 도시가 만들어져 라구사(RAGUSA)공화국이 되었으며, 이탈리아 베네치아와 유일하게 경쟁했던 해상무역도시국가였다. 197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구시가지는 온통 대리석으로 덮여있고 세련된 유럽거리의 축소판을 보는 듯하다. 코발트빛의 아름답고 따뜻한 해변에는 부호들의 요트가 가득할 만큼 유럽 관광객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매력적인 도시이다.
아침 일찍 셔틀버스 세 대에 나누어 탄 우리 일행은 두브로브니크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전망대로 올라갔다. 어찌나 바람이 세차게 부는지 모자를 꽉 붙들어 매고 점퍼의 지퍼를 끝까지 올렸지만 목으로 스며드는 찬바람은 도리가 없었다. 전망 좋은 곳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탄성을 질렀다. 영국 극작가, ‘버나드 쇼’가 “두브로브니크를 보지 않고 천국을 논하지 말라”고 이야기했다는 말이 허언이 아님을 두 눈으로 확인하였다. 벅찬 가슴을 안고서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지로 들어섰다. 어제 밤에 보았던 야경과는 전혀 다른 광경이 눈앞을 가로 막는다. 상당히 비싼 입장료를 지불하고 성곽을 걸으며 시내를 둘러보는 투어에 나섰다. 두 명이 함께 횡대로 지나가기 어려운 성곽의 비좁은 길은 수많은 여행객들로 그야말로 북새통이다. 왜 그런지 이유를 모르겠으나, 그 많은 관광객 중 흑인은 보이지 않았다. 서부 유럽에서는 흑인을 많이 보았는데 이곳 발칸반도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많은 고문서를 보관하고 있는 프란체스코 수도원, 매년 두브르브니크 여름 축제의 개막식이 열리는 스폰지궁, 대성당과 옛 항구 등을 구경하였다. 시내 투어를 마치고 바다로 나가 두브로브티크 전체를 멀리서 바라보는 보트투어에 나섰다. 바다에서 시가지 전체와 멀리 산 정상까지 바라보니 그 경치가 더할 나위 없었다. 우리나라 종편에 소개된 부자 카페(BUZA CAFE)는 성곽 뒤쪽 바닷가 바위에서 영업을 한다. 재미있는 것은 현지어 ‘부자’는 가난한 사람의 반대어가 아니라 구멍(뒷구멍)이라는 뜻이다.
유고 내전 당시 세르비아군은 이토록 아름다운 인류의 문화유산 고도(古都), 두브르브니크를 공격하여 철저하게 문화유적을 파괴하려고 하였다. 이런 소식을 접한 많은 의식 있는 사람들이 보트를 타고 바다에서 시위를 하며 이 소식을 전 세계로 전파하였다. 결국 세르비아가 전 세계 압력에 굴복하여 도시 파괴행위를 그만 두었고 지금의 두브로브니크가 보존되었다.
아름답고 매혹적인 인류 문화유산의 보고가 종교의 가르침을 잘못 알아듣고 타 종교를 믿는 사람을 원수로 여긴 비극의 역사 현장이라니 너무나 가슴 아프다. 그 슬픈 역사 현장에서 여행객은 그저 주마간산 격으로 지나가며 떠들고 사진 찍기에 바쁘고 바쁘다. 소매치기가 활보한다는 가이드의 설명에 둘러맨 가방에 온 신경을 쏟았다.
< 스톤(STON) >
두브르브니크에서 북쪽으로 35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스톤은 와인과 소금 산지로 유명하다. 스톤에는 ‘라구사’ 공화국 시절 소금을 생산하는 염전을 지키기 위해 마을 외곽에 총 5.5Km의 성벽을 쌓았는데 지금은 약 1Km 정도만 남아 있다. 중국 만리장성에 비하면 초라한 형태이지만 유럽에서 장성을 본 다는 것이 신기하였다. 스톤에서 가까운 곳에 쿠르출라(KORCULA)섬이 있다. “동방견문록”을 구술하였다고 알려진 ‘마르코 폴로’가 태어난 섬이다. 마르코 폴로는 해상무역 상인인 아버지와 숙부를 따라서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살았기에 이탈리아 사람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마르코 폴로가 중국 (원나라 북경)에 갔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고 의심하고 있다.
스톤에서 30분 정도 해변 도로를 달려 보스니아 헤르체코비아의 네움(NEUM)에 도착하였다. 아드리아의 낙조를 보면서 호텔에 여장을 풀고 쉬면서 주위 경관을 둘러보았다. 근처에 있는 슈퍼에서 흑맥주를 사서 아내와 한 잔씩 나누어 마시고 바닷물에 맞닿아가는 일몰에 취했다.
4월 18일(화)
< 스플릿(SPLIT) >
‘스프리토’라는 식물에서 지명이 유래되었다는 스플릿은 로마 황제 ‘디오클레시아누스’와 관련 있는 도시다. 스프릿은 아드리아해를 품고 있는 휴양도시로 쾌적한 지중해성 기후와 눈부시게 아름다운 해안 경치로 유명한 크로아티아 제2의 도시다.
서기 305년 로마황제 디오클레시아누스는 황제자리에서 물러나 고향과 가까운 스플릿에 궁전을 짓고 말년을 보냈다. 그는 그리스 대리석과 이집트 스핑크스를 가져와 장식할 정도로 많은 애정을 쏟아 도시를 만들었다. 스플릿 구시가지는 197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구시가지는 궁전을 중심으로 미로처럼 뻗어있으며 신하와 하인들이 생활하던 집터는 상점과 레스토랑, 카페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황제가 내방객을 맞이하던 접견실에서 마침 남성 6인조 ‘아카펠라’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둥근 ‘돔’형태의 크지 않은 응접실의 울림을 통해 들리는 남성들의 노랫소리에 여행객들은 숨을 죽였다. 어떤 사람은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으며 잠시나마 여행의 여독을 잊고 천상의 노래에 심취하였다. 아카펠라(a cappella)공연을 실제로 볼 수 있다니 정말로 운이 좋았다.
< 플리트비체(PLITVICE) >
스플릿에서 디나르(東)알프스를 경유하여 플리트비체로 넘어가는 고속도로는 세찬 바람으로 유명하다. 아드리아해에서 부는 바람(보어 BOAR)은 엄청난 기세로 내륙으로 찬바람을 밀어낸다. 여기서는 한풍(寒風)이라고 부르는데 우리말 삭풍(朔風)이 더 정감이 가는 어휘다. 고속도로를 시속 100Km로 달리는 리무진 버스가 좌우로 흔들릴 정도로 바람이 세차게 분다. 버스 앞 유리창에 부딪치는 빗방울은 세찬 바람 때문에 옆으로 휘날리고, 유리창도 희뿌옇고 반대차선을 달리는 자동차의 전조등 불빛도 흐릿하였다. 초록색의 키가 작은 나무와 풀들이 파릇파릇하다. 5.8Km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이 쏟아졌다. 눈 폭탄을 뒤집어 쓴 나무들이 아름다운 눈꽃을 피우는 장관을 연출하였다. 상고대를 보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세상은 넓고 광활한데 내 마음의 눈은 비좁고 흐릿하다.
4월 19일(수)
1979년 유네스크 자연유산에 등록된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은 각도에 따라 다른 색깔로 빛나는 16개의 신비한 호수와 하늘에서 떨어지는 듯한 90여개의 폭포가 있다. 가름막이 없는 보트를 타고 호수를 건너가는데 간간히 눈발이 휘날리고 날씨가 추워서 쩔쩔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어 멋진 경치를 사진기에 담기에 정신이 없었다. 호수 위에 떠 있는 나무다리에서 주변의 경치를 바라보면 마치 요정이 사는 마을 같은 착각이 들었다. 호수의 물빛은 투명한 파란색에서 초록색까지 물의 깊이에 따라 다양하게 변하여 공원은 동화 속의 나라처럼 환상적이었다.
< 라스토케(RASTOKE) >
플리트비체 공원을 벗어나 동화 속 세상 같은 물의 마을 라스토케를 찾았다. 라스토케는 슬루니자차 강이 폭포가 되어 코리나 강과 합쳐지는 지점에 위치한 물의 마을이다. 약 300년 전에 폭포를 이용해 물레방아를 돌렸다고 한다. 지금은 20여 채의 집 바닥 아래에 물레방아가 설치되어 있고 일부는 아직도 보리를 빻기 위해 돌아가고 있다. 너무나 아름다운 경관에 여행객들은 환호성을 지으며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플리트비체 및 라스토케는 환타지 영화 ‘아비타’가 촬영된 곳으로 유명하다.
<자그레브(ZAGREB) >
크로아티아의 수도인 자그레브는 13세기 오스만투르크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 성벽에 둘러싸인 그라테츠와 16세기 요새화된 성직자 마을 카프톨, 이 두 마을이 결합하여 세워졌다. 1093년 가톨릭 주교관구가 되면서 유럽지도상에 등장했으며, 오랫동안 오스트리아 헝거리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1991년-1996년 종교와 인종 갈등으로 비극적인 유고 내전을 겪었다. 자그레브 성 슈테판 성당에는 밀랍으로 만든 슈테판 성인의 유해가 모셔져있다. 바람도 불고 날씨가 추워 자그레브 구시가지를 돌아다니는 것도 힘들 지경이었다.
자그레브 신공항에서 출국 티케팅을 하는데 창구의 터키항공사 직원은 견습사원(?)인지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여 맨 처음 사람에게 티켓을 발급해주는데 거의 20분이 걸렸다. 옆줄의 창구 담당자는 신속하게 티켓을 끊어주고 있었다. 대기 줄이 길지도 않은데 한 시간을 기다린 끝에 가까스로 티켓을 받았다. 어렵게 얻은 티켓을 쥐고 자그레브 공항 대기실에서 이스탄불로 떠나는 비행기를 기다렸다.
이스탄불 공항에 도착해 보니 공항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어디로 순례를 가거나 다녀오는 듯 패찰을 가슴에 달고 있는 무슬림이 무척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공항을 빠져나가자 조금 한산해졌다. 대합실 빈자리를 찾아 앉은 후 인천으로 떠날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느긋한 마음으로 잠시 동안 눈을 감았다.
후기
유럽에는 머리가 벗겨진 남자들이 많고 장애인 복지제도가 활발하다. 여기에 웃지 못 할 사연이 있다고 가이드가 말했다. 로마시대 황제와 귀족들이 근친결혼을 하였고 근친결혼의 부작용으로 열성인자가 유전되었다. 그 탓에 장애인이 태어나는 수가 허다했고 출신성분이 귀족이거나 왕족인 이들을 보호하고 지원할 제도가 필요하였다. 게다가 중세에는 고아가 많아 수도원 부근에 고아원이 생겨났는데 이것은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관련이 있다. 중세 가톨릭의 잘못된 현상을 익히 알고 있기에 천주교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지적을 당연하게 받아드린다.
발칸반도 음식은 상당히 짜다. 음식을 가리는 편인 아내는 거의 먹지 못하였다. 아무 음식이나 잘 먹는 나 역시 그다지 입맛에 맞지 않았다. 빵도 짜고 스프도 짜고 소시지와 햄도 짜다. 게다가 과일도 별로 맛이 없고 아침 식사에 야채가 없다.
사람 사는 동네마다 먹는 음식과 풍습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음식을 짜게 먹는 습관은 얼른 이해가 안 된다. 이 곳 사람들도 음식을 짜게 먹으면 몸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당연히 알 텐데 아마도 기후나 유전적인 요인이 있는 것 같다.
여행이 주는 선물 중에 다른 나라 음식을 맛보는 기쁨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여행은 무엇보다도 내가 사는 곳과 다른 자연 환경과 문화를 가진 사람을 만나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서로 다른 이질적인 생활 모습에서 인간의 보편적인 삶을 배울 수 있는 귀중한 기회가 여행이다. 여행은 힘든 여정도 있고 함께하는 일행들의 꼴불견으로 기분을 망치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앞으로도 기회가 되면 가 보지 못한 많은 지역의 땅을 밟고 공기를 들어 마시고 사람과 자연을 만나고 싶다. (2017년 5월)
첫댓글 즐겁게 감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