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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내한 선교사들의 신앙과 신학
이 덕 주(광서교회 목사)
1. 머리글
"한국인의 심성은 중국인이나 일본인의 그것과 판이하게 다르다. 감성이 무디고 물질적인 중국인과도 다르고, 빈틈 없고 호전적인 일본인과도 다르다. 한국인은 일본이나 중국인보다 민감하고 믿을 만하다. 한국인은 외부 충격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종교적인 가르침에 쉽게 동화되며 믿음은 어린아이 같고, 영적인 환상도 의심치 않고 받아들인다. 자긍심 가득한 중국인이나 오만한 일본인과는 달리 한국인은 깊은 애통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인다."
1903년부터 1929년까지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부 총무를 역임하면서 극동 아시아 선교 실무를 주관하였던 브라운(A. J. Brown)은 중국과 일본 및 한국의 선교 상황을 평가하면서 민족성에 대한 비교로 시작하였다. 그는 특히 정치적으로 미묘한 관계를 맺고 있던 한국과 일본에서 진행된 선교사업과 성격을 비교하면서 두 나라의 기독교는 "마치 서양에서 장로교 신앙과 모라비안 신앙이 다른 것처럼 판이하게 다르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는 한국인의 기독교 신앙이 일본인과 다른 이유를 선교사와의 관계에서 풀이하였다.
"일본 기독교인은 선교사들의 가르침을 자기 기준에서 판단하여 받아들인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인은 의심없이 받아들인다. 그래서 일본 기독교인은 신학적으로 진보적이고 한국 기독교인은 보수적이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기적이나 영감(靈感)에 대해 전혀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 한국인은 선교사 선생들이 가르쳐 준 것이라면 무엇이든 무조건 받아들인다."
과장된 면이 없지 않으나 '제3자'의 입장에서 일본과 한국 기독교인들의 신앙적 특성을 지적한 것으로 시사하는 점은 많다.
굳이 브라운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한국 기독교, 특히 해방 이전의 기독교가 선교사들로부터 강력한 영향을 받으며 형성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1870∼80년대 초기 기독교 복음 수용과 전파과정에서 나타났던 한국인들의 주체적 역할이 1884년 '선교사시대'가 열리면서 급격히 줄어들고, 대신 선교사들이 주도하는 '교파교회' 선교시대가 전개되었다. 따라서 한국 기독교의 정체성 수립 과정에서 선교사들의 역할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으며, 거기에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함께 내포되어 있다. 한국 기독교를 이해하기 위한 작업의 하나로 선교사들의 신앙과 신학을 주목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글은 한국 기독교인들이 "의심없이 무조건 받아들인" 초기 선교사들의 신앙과 신학의 단면들을 살펴보는 데 목적이 있다. 글을 진행하면서 다음 세 가지 질문을 염두에 둘 것이다.
첫째, 내한 선교사들의 신앙과 신학적 배경은 어떠한가? 선교사들이 본국에서 받은 신학 교육의 성향과 내용을 밝히는 작업이다. 이 글에서는 한국 선교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미국교회의 19세기 신학 흐름을 살펴보고 선교사들의 신학적 위치를 살펴볼 것이다. 이를 위해 선교사들의 출신 신학교를 분석할 것이다.
둘째, 교파에 따른 선교사들의 신학에 차이가 있는가? 한국 교회는 초기부터 '교파교회' 형태로 정착하였다. 선교사들의 신학은 교파교회의 '교리'와 '신조'에 나타난 신앙 . 신학적 특징에다 선교사 개인의 성향에 따라 다양한 양태를 보이고 있다. 이 글에서는 선교사들의 신앙을 소속 교파교회 신조를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셋째, 선교사들의 신앙과 신학이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은 무엇인가? 초기 한국 기독교의 신학 및 신앙 형성에 선교사들의 영향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이 글에서는 선교사들의 신앙과 신학이 한국 기독교 신앙과 신학 형성에 끼친 영향을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으로 나누어 살펴볼 것이다.
2. 19세기 미국 신학의 흐름
미국의 종교 사학자 마티(M. E. Marty)는 19세기 미국 신학이 아직은 유럽 신학에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고 있었음을 지적하면서, 미국 신학의 흐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미국에는 유럽처럼 거물 신학자는 없었다. 따라서 미국 신학이라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고 읽을 만한 신학적 저술도 없었다. 그러나 미국의 신학자들은 미국이 필요로 하는 것을 외면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해석하는 일이었다. 정신없이 일만 하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제2차 각성운동 이후 반세기 동안 진행된 놀라운 변화를 묵과할 수만은 없었다. 그들은 미국 상황을 히브리식으로(성서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기독교인들은 자기 역사의 의미를 단일 '백성'의 역사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역사적 연원을 따져 들어가 논쟁을 벌이기보다는 함께 살아가면서 야기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골몰하였다."
유럽의 다민족(多民族)·다언어(多言語) 배경을 갖고 '식민지 아메리카'에 정착한 이주민들이 독립전쟁(1775∼1782)과 남북전쟁(1861∼1865)을 거치면서 '단일국가' 형성의 과제를 재확인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17세기이후 아메리카 이주와 정착의 주역이었던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종교적 통합 이념을 제공하였다. 이는 중세와 종교개혁을 거치면서도 단일 민족-단일 종교 체제, 즉 '국가 종교'(State-Religion) 체제를 유지한 유럽과는 다른 환경이었다. 그들에겐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일치를 추구할 수 있는 새로운 종교 체제가 필요했다.
이 과정에서 1730년대 일어난 제1차 종교각성운동(Religious Awakening Movement)이 종교뿐 아니라 아메리카 이주민들의 통합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부흥운동의 주역이었던 에드워즈(Jonathan Edwars)는 아메리카 이주민들의 역사를 '구속사'(救贖史)로 해석하였다. 그리고 그 바탕엔 '계약'(Covenant) 개념이 깔려 있었다. 다민족 . 다문화 배경의 유럽 이주민들을 단일 '계약 공동체'로 해석함으로 이스라엘 공동체가 지녔던 '선민'(選民) 의식까지도 적극 도입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선민의식'은 신대륙에서 형성된 새로운 계약 공동체를 '의로운 왕국'(righteous empire)으로 해석하는 원리로 작용하였고 이러한 의식은 20세기 미국의 해외 식민지 경영과 선교운동의 종교적 동기가 되었다. 미국 선교사들이 타민족에 대해 지녔던 문화 . 종교적 우월감의 근거도 여기에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계약' 개념은 17세기 청교도 이주민들에게서도 발견되는 개념이지만 종교각성운동을 겪으면서 그 의미와 성격에 큰 변화가 이루어졌다.
"1730년대 종교각성운동을 겪은 후 계약 개념에 중대한 변화가 나타났다. 에드워즈와 그의 동료들은 인간의 결단과 개종, 그리고 갱신을 설교하였다. 인간의 잠재적 신실성을 말하면서 개인의 결정이 자신의 운명뿐 아니라 공동체의 성격 형성에도 중요한 요인이 됨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독립전쟁 어간에 이르러 계약 개념은 '미국식 계몽주의'(American Enlightenment)로까지 발전하는 변화를 보였다. 자연 이성과 자연법, 자연 질서가 계시와 대등한 위치를 차지(때로는 도전까지)하게 되었다. 기독교는 이성적인 종교로 변했고 그리스도는 구세주라기보다는 모범이 되었다. 종교각성과 계몽주의 신학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한결 명예로운 존재가 되었고, 인간은 자비와 은총이 넘치는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갈 수 있게 되었으니, 이는 칼빈이 묘사했던 초월적 전능자와는 분명 달랐다."
미국의 개신교, 특히 칼빈주의 신학의 원천으로 일컬어지는 '뉴잉글랜드 신학'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후 회중교회가 중심이 된 뉴잉글랜드신학은 계몽주의 이해를 수용하며 점차 '교조적' 칼빈주의 원리를 벗어나기 시작하여 19세기 초에 이르러 아르미니우스주의(Arminianism)를 수용한 웨어(H. Ware)의 '초자연적 합리주의'(Supernatural Rationalism), 인간에 대한 낙관적 이해에 근거하여 전통 삼위일체론까지 비판한 하지(F. Hodge)와 채닝(W. Channing)의 '유니테리안주의'(Uniterianism)에 이르는 좌파 신학이 나왔다. 이들 급진적 좌파신학은 회중교회 신학의 보루인 하버드대학을 중심으로 많은 지지자를 얻기 시작했다.
뉴잉글랜드 신학 흐름 속에는 이들보다는 덜 진보적이나 칼빈의 이중예정론과 인간의 전적 타락, 원죄의 유전성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역시 전통 칼빈주의 원리에서 벗어난 신학 흐름이 형성되었다. 주로 예일대학을 중심으로 형성된 이 신학은 에드워즈(J. Edwards Jr.)·벨라니(J. Bellany)·드와이트(T. Dwight)·홉킨스(S. Hopkins)·테일러(N. Taylor)·비처(L. Beecher)·핀니(C. Finney) 등으로 대표되는데 이들은 제2차 종교각성운동의 주역들이었다. 회개와 갱신을 촉구하는 부흥운동의 메시지는 "해야만 한다!"(You must)와 "할 수 있다!"(You can)였다. 이는 인간의 전적 타락과 이중예정론을 신앙 원리로 삼는 전통 칼빈주의와는 거리가 있었다. '신파'(新派, New School 혹은 New Divivity)로 불린 이들은 하나님의 심판보다는 은총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핀니의 부흥운동은 다시 무디(D. T. Moody)·생키(I. D. Sankey)·토리(R. A. Torrey)·채프먼(C. M. Chapman) 등으로 대표되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대학생 중심의 '선교자원운동'(Students Volunteer Movement)과 주일학교 운동, 기독청년회(YMCA) 운동으로 연결되는데 이 운동의 신학적 배경은 체험 중심의 '뉴잉글랜드 신학'을 반영하면서도 성경의 절대성,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 육적 부활 등을 강조하여 '보수화' 경향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이같은 부흥운동과 다른 측면의 신학 흐름은 19세기 말 유럽으로부터 다윈의 진화론과 쉴라이어마허 및 리츨의 합리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으며 20세기 '신신학'(新神學, New Theology)을 거쳐 미국적 자유주의 신학이라 할 수 있는 '사회복음'(Social Gospel) 신학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뉴잉글랜드 신학의 '계몽주의적 변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칼빈주의 근본 원리를 고수하려는 움직임이 개혁교회와 장로교회 안에서 일어났다. '복음주의자'(Evangelicals)로 불리기 시작한 이들 '보수적' 칼빈주의 신학은 16세기 칼빈의 종교개혁 신학과 원리를 고수하였다. 1808년 하버드 신학이 유니테리안주의로 흐르자 이에 반대한 보수적 회중교회 신학자들이 앤도버신학교(Andover Theological Seminary)를 설립하였고, 1801년 회중교회와 장로교회의 통합이 이루어지고 두 교회 연합으로 운영하는 뉴욕의 유니언신학교를 통해 테일러류의 '뉴잉글랜드 신학'이 장로교회 안에 유입되는 것을 우려한 보수적 장로교 신학자들이 1812년에 '총회 직영 신학교'로 프린스턴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를 설립했다.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와 찰스 하지(Charles Hodge)·알렉산더 하지(Alexander Hodge) 부자, 워필드(Benjamin B. Warfield) 등으로 상징되는 19세기 프린스턴 신학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요리문답에 근거한 16세기 칼빈주의 신학이었다.
여기에 19세기 유럽, 특히 독일과 네덜란드에서 이민온 세대들의 신학도 보수적 칼빈주의 전통 수립에 합류하였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독일 개혁교회 이민자들에 의해 형성된 '머서스버그 신학'(Mercersburg Theology)이었다. 펜실베니아에 정착한 독일계 개혁교회 교인들이 설립한 프랭클린 마샬대학(Franklin Marshall College)의 신학교 형태로 1825년 펜실베니아 카알라일에 설립되어 1837년 머서스버그에 옮긴 이 신학교는 그리스도의 성육신론을 중심한 교회 전통을 강조한 샤프(Ph. Schaff)와 네빈(Wm. Nevin)으로 대표된다. 네빈과 샤프는 1840년대 핀니의 영향을 받아 독일 개혁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던 부흥운동을 '감리교 운동'으로 규정짓고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비롯한 교리 중심의 개혁교회 전통을 고수할 것을 촉구하였다. 신학적인 논쟁을 거쳐 프랭클린 마샬대학의 신학 학풍으로 자리잡게 된 초기 머서스버그신학은 '반 부흥운동'(anti-revivalism) '반 경건주의운동'(anti-pietism)의 성격이 강하였다. 이들은 독일의 관념론이나 뉴잉글랜드 신학의 계몽주의 경향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프린스턴 신학과 맥이 통하면서도 교회 역사, 특히 교부시대 자료와 성서 원어 분석을 통해 개혁교회 전통을 초대교회 이전까지 끌어올린다는 점에서는 칼빈주의 원리를 뛰어넘고 있었다. 그들은 심지어 '옥스퍼드운동'으로 불리는 성공회의 '가톨릭적 신학운동'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처럼 19세기 미국의 칼빈주의 전통 교회인 회중교회·개혁교회·장로교회는 다양한 신학적 분위기를 보이고 있었다. 요약하면, '근대적' 이성과 자연의 재발견을 바탕으로 개혁교회 전통을 재해석하려는 다수 '계몽주의' 경향에 16세기 칼빈주의 원리를 고수하려는 소수 '보수주의' 경향으로 나뉘어 갈등을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18세기에 미국 선교를 시작한 감리교회는 독립전쟁을 거치면서 애즈버리(F. Asbury)를 중심으로 영국 감리교회에서 독립된 '미국 감리교회' 전통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미국 감리교회의 신학은 1차 종교각성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웨슬리의 체험중심 부흥운동(revivalism)과 전도활동(evangelism) 중심의 '전도자 신학' 수준이었다. 이는 유럽의 경건주의(pietsm)와 아르미니우스주의(arminianism)와 연결되는 신학으로 인간의 전적 타락과 이중예정론을 강조하는 칼빈주의와는 궤를 달리하는 신학이었다. 그리고 전도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각 지역마다 설립하여 남북전쟁 어간에는 감리교 계통의 신학교와 대학교가 200여 개에 이르렀다. 그 중에 역사적 전통과 감리교 신학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학교로는 펜실베니아 알게니대학(1815년 설립)·버몬트 뉴버리대학(1833)·인디아나 드포우대학(1837)·버지니아 에모리헨리대학(1838)·조지아 웨슬리안대학(1838)·오하이오 웨슬리안대학(1844)·오하이오 마운트유니언대학(1846)·일리노이 웨슬리안대학(1850)·일리노이 개렛신학교(1853)·조지아 앤드루대학(1854)·아이오와 웨슬리안대학(1855)·테네시 웨슬리안대학(1857)·켄터키 웨슬리안대학(1866)·뉴저지 드루대학(1867)·남감리교대학(1870)·오하이오 유니언신학교(1871)·델라웨어 웨슬리안대학(1873)·스카릿대학(1892) 등을 꼽을 수 있다. 여기에 1840년대 뵘(H. Boehm)과 내스트(Wm. Nast)로 대표되는 '독일 감리교회'(German Methodism) 전통이 합류하였다. 특히 독일의 루터 개혁신학 바탕에서 웨슬리의 감성적 종교 체험의 신학을 해석하였던 내스트는 1865년 저먼 월리스신학교(German Wallace Theological Seminary 후의 Baldwin-Wallace College)를 설립하여 미국 감리교 신학의 깊이를 더하였다.
미국 감리교회는 장로교회나 침례교회와 마찬가지로 남북전쟁 어간에 교회가 남 . 북으로 분열되었으나 이는 신학적인 갈등의 결과라기보다는 정치·사회적인 환경의 갈등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19세기 미국 감리교회의 신학적 분위기는 웨슬리의 신학이 갖고 있는 경건주의 . 아르미니우스주의 요소에다 독일의 합리적 이성주의 요소를 접목하는 '진보적' 경향을 띠고 있었다. 이는 회중교회 중심의 '뉴잉글랜드 신학' 흐름과는 맥이 닿지만 프린스턴 중심의 보수적 장로교회 신학에는 거리가 있었다.
3. 초기 선교사들의 신학 배경
1) 장로교 선교사
이제 자료에 의해 밝혀지는 대로 한국에 들어 온 초기 선교사들을 출신 신학교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장로교 선교사들이다.
미국 장로교의 경우 가장 많은 선교사를 보낸 학교가 프린스턴신학교이고 그 다음이 매코믹과 파크대학, 리치몬드 유니언신학교 순서였다. 이미 살펴본 대로 프린스턴신학교는 19세기 미국의 보수적 칼빈주의 신학의 보루로 진보적 자유주의 신학의 흐름에 밀려 메첸을 비롯한 '전통' 칼빈주의 신학자들이 프린스턴을 떠나는 1929년 이후 졸업생들은 2세 선교사 클라크(A. D. Clark) 뿐이다. 따라서 초기 프린스턴 출신 선교사들은 보수적 전통을 고수하였던 '구 프린스턴' 출신들이라 할 수 있으며 평양 장로회신학교 교장을 오랫동안 역임한 로버츠(S. L. Roberts)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미국 장로교의 경우 가장 많은 선교사를 보낸 학교가 프린스턴신학교이고 그 다음이 매코믹과 파크대학, 리치몬드 유니언신학교 순서였다. 이미 살펴본 대로 프린스턴신학교는 19세기 미국의 보수적 칼빈주의 신학의 보루
로 진보적 자유주의 신학의 흐름에 밀려 메첸을 비롯한 '전통' 칼빈주의 신학자들이 프린스턴을 떠나는 1929년 이후 졸업생들은 2세 선교사 클라크(A. D. Clark) 뿐이다. 따라서 초기 프린스턴 출신 선교사들은 보수적 전통을 고수하였던 '구 프린스턴' 출신들이라 할 수 있으며 평양 장로회신학교 교장을 오랫동안 역임한 로버츠(S. L. Roberts)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고 초대교장을 역임한 마펫(S. A. Moffett)이나 오랫동안 이 학교 교수를 역임한 베어드(W. M. Baird)·리(G. Lee)·스왈른(W. Swallen)·아담스(J. E. Adams)·클라크(C. A. Clark) 등을 배출한 매코믹신학교의 영향은 오히려 프린스턴의 영향보다 컸다고 볼 수 있다. 19세기 인디애너주 개척민들이 설립한 하노버대학의 신학부로 출발한 매코믹대학의 분위기는 "매일같이 수업이 시작할 때마다 찬송가를 부르고, 성서를 읽고 기도로 시작하고, 또한 주일날 아침에는 주일학교에 교수들이 나가 가르치고, 오후 예배에는 학장이 인도하는" 전형적인 '기독교학교'였다. 목회자와 선교사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이 신학교는 "철저한 보수주의에다 청교도적인 엄격성, 그리고 불굴의 기상을 불어넣어주는 동시에 경건성을 위주하였다."
캐나다 출신 초기 한국 선교사들의 신학도 보수적이었다. 게일(J. S. Gale)·하디(R. A. Hardie)·펜윅(M. C. Fenwick)·에비슨(O. R. Avison) 등을 파송한 기독청년회(YMCA)와 이들의 선교 동기를 부여한 학생자원운동의 신학 입장은 1846년 런던에서 결성된 반(反) 퓨지주의(Puseyism) '복음주의 연맹'(Evangelical Alliance)에서 발표한〈교리적 근본〉(Doctrinal Basis)에 잘 나타나 있다. 게일을 비롯한 캐나다 출신 선교사들은 성경의 영감(靈感)과 절대성, 인간의 전적 타락, 신앙의인(信仰義認), 영혼의 불멸과 육신의 부활, 그리스도의 심판 등 보수적 '복음주의 원리'를 담고 있는 이 신앙고백을 공개적으로 밝혀야 했다. 그리고 1897년에 교회 단위로 그리어슨(R. Grierson)·맥레(D. M. McRae)·푸트(W. R. Foote) 등을 파송하여 한국 선교를 개척한 캐나다장로회의 메리타임 대회(Maritime Synod)는 전통적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충실한 스코틀랜드 교회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따라서 1925년 캐나다장로회가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던 캐나다 회중교회 및 캐나다 감리교회와 합동하여 '캐나다 연합교회'(United Church in Canada)를 조직하기까지는 칼빈주의 전통, 특히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 전통에 충실한 선교사들이 파송되었다.
리치몬드의 유니언신학교 출신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남장로회 선교사들이나 호주장로교회 출신 선교사들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충실한 장로교 전통을 갖고 들어왔다. 따라서 초기 장로교 선교사들은 16세기 칼빈주의 근본원리와 17세기 청교도신앙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바탕으로 한 보수적 신학을 호흡하였던 인물들이었고 유럽과 미국에서 일기 시작한 '계몽주의'와 '근대주의' 신학 흐름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2) 감리교 선교사
다음으로 감리교 선교사들의 출신 신학교를 살펴보자.
감리교의 경우, 한국 감리교회의 첫 선교사인 아펜젤러를 비롯하여 감리교 협성신학교 교장을 역임한 데밍(C. S. Deming), 신학교 교수로 활약한 노블(W. A. Noble)과 스웨어러(W. C. Swearer) 등을 배출한 드루신학교가 드러난다. 1916년 이후 미국 북감리회(미감리회) 동양 감독으로 한국 선교를 지휘하게 된 웰치(H. Welch)도 이곳 출신이었다. 드루신학교는 남북전쟁 직후에 북감리교회에서 설립한 신학교로 "감리교의 사관학교"(The West Point of Methodism)라 불릴 정도로 엄격한 신앙훈련으로 유명하였다.
"당시 드루에서는 학문적 훈련과 개인적 경건을 동시에 강조하였다. 일상 생활은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났다. 수업을 시작할 때나 끝날 때 기도하였으며 매 식사 전후에도 기도하였고, 심지어 '기숙사와 교실을 오갈 때에도' 기도하였다. 드루 졸업식의 절정은 애찬식이었는데, 그 시간에 졸업생들은 자신의 종교적 체험에 대해 공개 증언을 하였다.……학생들은 이유를 달지 않고 상황에 적응해야만 했다. 드루는 단지 종교를 배우는 곳이 아니었다. 그곳은 신앙 연구 못지않게 신앙을 체험하는 곳이었다. 그 곳에서는 '간구와 감사, 축복과 애찬식으로 이어지는 예배 모임과 기도회가 계속 이어졌다'. 학생들은 바로 이런 이유로 드루에 왔다. '드루의 근본 목적은 유능한 복음 전도자를 양성하는 것이었고 그런 목적에서 찾아 온 학생들을 만족시켰다. 그들은 학문적 신학 못지않게 신앙에 파고들기를 원했다."
드루신학교는 이성과 감성의 조화, 경건주의와 복음주의의 조화를 추구하였다. 본래 개혁교회 출신인 아펜젤러는 '머서스버그 신학'의 본거지였던
프랭클린 마샬 대학 재학 중 개인적인 중생의 체험을 한 후에 감리교회로 이적하고 '경건주의 신학과 신앙의 훈련장'인 드루신학교를 찾았던 것이다. 특히 아펜젤러가 재학했던 1880년대 드루신학교에는 '드루의 5대 신학자'(The Great Five of Drew)로 일컬어지는 버츠(H. A. Buttz) . 스트롱(J. Strong) . 마일리(J. Miley) . 크룩스(G. R. Crooks) . 어펌(S. F. Upham) 등이 성서학과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이들에 의해 추진된 드루의 신학 교육은 당시 북부 감리교회 신학교 분위기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이 다섯 신학자들은 미국과 해외에서 일할 사역자들을 훈련시킴에 있어 '유식한 목회자'(educated ministry)를 양성한다는 감리교회의 신학교육 원칙에 충실하였다. 이들은 박학다식한 신학자들을 양성하는 것으로 사명을 삼지는 않았다. 하지만 능력있게 말씀을 전하고 경건한 삶을 살면서도 합리주의 . 물질주의 . 회의론 . 진화론 . 고등비평 등 현대 사상의 도전에도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유식한 목회자'를 길러내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처럼 감리교 신학이 이성과 체험을 동시에 강조하였기에 '보수적' 칼빈주의 신학과는 달리 계몽주의와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발전된 20세기 '진보적'인 신학을 무리없이 수용할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00년대 초에 미국 감리교 지도자들이 진보적인 '사회복음'(Social Gospel) 신학을 적극 수용한 것이다. 그 결과 미감리회(북감리교)는 1908년에 미국의 다른 어떤 교파 교회보다 먼저〈사회신경〉(Social Creed)을 채택하여 '복음의 사회화'를 표방하였다. 이 신경 제정 작업의 실무를 맡았던 실행위원회 위원장이 드루신학교 출신으로 당시 오하이오 웨슬리안대학 총장으로 있던 웰치였다. 그는 1930년 한국의 남·북 감리교 합동 작업에도 위원장으로 깊이 간여하였다. 합동과 함께 이루어진 '기독교조선감리회'의 신조로 채택된〈감리교 교리적 선언〉의 내용이 진보적인 색채를 띤 것이나 미국의 사회신경과 비슷한 내용의〈사회신경〉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그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같은 맥락에서 감리교 신학자들은 성서 비평학은 물론이고 칼빈주의 계열의 신정통주의 신학도 무리없이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구세군과 동양선교회 선교사
다음으로 같은 감리교회와 웨슬리주의 신학에 뿌리를 두면서도 19세기 말 영국과 미국에서 독자적인 교회를 형성한 구세군과 동양선교회 선교사들이다.
구세군(Salvation Army)은 1865년 영국에서 시작된 '비국교도'(nonconfirm!istic) 교회였다. '새연합 감리교회'(Methodist New Connexion) 소속 목회자였던 윌리엄 부드(William Booth)는 개인적 성화 체험과 복음전도를 통한 사회구원이라는 웨슬리의 기본 신학을 '군대'를 모방한 훈련 조직을 통해 구현한 교회로 남·녀 평등과 형무소 및 공장 노동자, 도시 극빈자 선교 등 다양한 사회 구제사업을 실천하였다. 그러나 구세군의 기본 교리는 보편적 개신교 원리에 충실하였으며 오히려 진보적 계몽주의 사상을 거부하는 '보수적인' 측면이 강했다.
1878년 영국 구세군에서 채택한 11개조〈구세군 교리〉의 제1조는 성경의 영감설과 절대성을 강조한 것이다.
"우리는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령감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며 또한 그 셩서 외에는 그리스도 종교에 대한 밋음과 실행에 대하야 하나님의 무삼 다른 법규(法規)가 업난줄로 밋나이다."
성경을 절대 진리의 유일한 규범으로 삼는 것은 '비타협주의자'들의 공통 인식이었다. 이외에 웨슬리가 말하는 중생 이후 과정인 성화(聖化)를 말하면서도 인간의 전적 타락에 대한 교리도 담고 있어 구세군 교리가 청교도적 회중주의 원리와 감리교의 아르미니우스 원리를 혼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구세군 사관 양성기관에서는 계급에 의한 교회 조직을 강조하여 상급자에 대한 수도원적인 '절대 복종'을 교육받았다. 따라서 구세군의 신앙적 분위기는 목회자 개인이나 개체 교회의 자율성에 바탕을 둔 회중교회나 장로교회와 달리 수직적(hierarchic) 교계제도를 강조하는 감리교회나 성공회의 주교(혹은 감독)제도(episcopalism)에 가까왔다. 부드의 지시로 1908년 한국 선교를 개척한 호가드(H. Hoggard)를 비롯한 초기 구세군 선교사들은 이러한 보수적 신앙과 '군사적' 훈련을 받은 전형적인 구세군 사관들이었다.
오늘의 성결교회의 전신인 동양선교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를 창설하고 한국 선교를 주도한 카우만(C. E. Cowman)과 킬보른(E. A. Kilbourne)은 모두 시카고의 감리교 평신도들로 전신 기술자들이었으나 개인적인 중생의 체험을 한 후 평신도 선교 단체로 1894년 '동양선교회'를 조직하였다. 처음엔 미국에 유학온 일본 감리교인 나카다 쥬지(中田長治)를 지원하기 위한 모금운동으로 시작하였으나 1901년에 이르러 카우만과 킬보른 자신이 일본을 향해 출발함으로 본격적인 선교 단체로 바뀌었다. 이 두 선교사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다닌 신학교가 무디성경학원(Moody Bible Institute)이었다. 2차 종교각성운동의 후반부를 주도했던 무디가 설립한 이 학교는 평신도 성경 교육기관으로 출발하였다가 전문 선교사 양성기관으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무디성경학원에서는 체험 중심의 '뉴잉글랜드 신학' 분위기를 바탕으로 '자기 희생적' 전도활동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카우만이 선교사로 헌신하게 된 것이다.
"한 세기가 바뀌는 임박한 시기에(1899년 말) 무디성경교회에서 대규모 선교대회가 열렸다. 각 대륙에서 내노라하는 선교사들이 참여한 이 대회에서 카우만은 젊은 선교사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 대회의 주강사는 기독교선교동맹(The 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 창설자인 심프슨(A.B. Simpson) 박사였다. 심프슨은 오직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실 것이란 믿음을 갖고 아프리카 심장부로 들어간 젊은 선교사 가족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메시지는 감동적이었다. 원칙주의자였던 카우만은 무슨 일이든 하다가 중단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헌금 시간이 되자 그는 한 달치 봉급이 되는 돈 다발을 꺼내 바쳤고 자기 금시계도 풀어 바쳤다. 그러나 헌금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헌금 후에 심프슨은, '여기 참석한 청년 중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자신을 선교사업에 헌신할 자 없습니까? 있다면 그 자리에서 일어서시요.' 라고 호소하였다. 그 순간 카우만은 자기 아내를 돌아보았다. 그는 '당신과 나를 보고 하는 말인 것 같소' 하였다. 카우만 부부는 동시에 일어섰다."
카우만 부부의 선교사 지원 동기를 만들었던 심프슨은 캐나다 녹스대학 출신의 장로교 신학자로 "자유적이라기보다는 보수적인 의미의 복음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학생선교자원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그가 제시한 기독교 신앙의 4대 요소, ① 중생 ② 성결 ③ 신유 ④ 재림은 '4중 복음'(Foursquare gospel)으로 정착되어 미국의 '사중복음교회' 창설의 기본 교리가 되었을 뿐 아니라 카우만과 킬보른에 의해 동양선교회의 기본 교리로 채택되었다. 따라서 한국성결교회의 신학적 기반이 되는 '4중 복음'에는 칼빈주의 . 웨슬리주의 신학 요소에다 체험 중심의 오순절주의 요소까지 가미된 복합적인 신학 분위기가 담겨 있다.
4) 성공회 선교사
다음으로 성공회 선교사들의 출신 학교를 살펴보자.
한국성공회는 철저히 영국성공회 출신들에 의해 유지되었는데 출신학교로 보면 다른 어떤 교파 선교사보다 성공회 선교사들의 교육 수준이 월등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초대 한국 교구장을 역임한 코르프를 비롯하여 2대, 3대 교구장을 역임한 터너와 트롤로프는 모두 옥스퍼드 출신이고 일제시대 마지막 교구장을 역임한 쿠퍼는 케임브릿지 출신이다. 이들의 출신학교는 영국성공회의 '고교회'(High Church) 전통을 지켜온 대표적인 학교였다. 특히 옥스퍼드대학은 1833년 케블(J. Keble)에 의해 시작된 '옥스퍼드운동'(Oxford Movement)의 중심지였고 초기 선교사들은 이 운동이 절정에 달해 있을 때 옥스퍼드에서 공부하였다. 옥스퍼드운동은 고교회 전통을 대중적 갱신과 전도운동으로 발전시킨 것으로 교회의 재일치와 전례 갱신에 초점을 맞추고 전개되었다. 라투렛트는 이 운동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그들(옥스퍼드운동가들)은 자신을 '가톨릭'(Catholics)으로 보았다. 그들은 교회가 교리나 지역 문제로 갈라지기 이전의 초대 교회 전통과 신앙을 되살리려 하였다. 그들은 갈라진 교회들의 재일치(reunion)를 추구했다."
이러한 교회의 재일치운동은 성공회 특유의 '중도 신학'(via media theology)을 더욱 심화시켰다.
"그들은 비타협주의자(Nonconfirm!ists)는 진리의 일부만 가르쳤으며 로마 교회는 진리 밖의 것을 가르쳤다고 비판하였다. 그들은 개혁교회로서의 영국교회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그리고 중도(via media)적 입장에서 청교도들의 오류와 로마 교회의 오류를 극복하려 하였다. 그들은 39개조 종교강령이 기독교 진리의 모든 것을 담고 있지 못할 뿐 아니라 어떤 면에서 로마 교회의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들은 예식서에는 나와 있으나 당시 시행하지 않고 있던 종교의식, 예를 들어 교회에서 드려지는 매일 기도 같은 의식을 지켰다. 그들은 사도신경과 니케아신경, 아타나시우스신경과 같은 고대 신경을 중요시하였다."
이같은 전례 중심의 고교회 전통과 옥스퍼드운동의 영향을 받은 선교사들은 역시 고교회 전통을 지지하는 평신도들의 선교단체인 해외복음전도회(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 in Foreign Parts)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아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폈다. 따라서 한국에 나온 성공회 선교사들의 신학과 신앙은 '고교회' 전통에 충실한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트롤로프 주교가 교회일치운동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 것에서도 옥스퍼드운동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그는 한국에서 성공회의 위치가 "힘이 센"(powerful) 로마가톨릭교회와 "원기 왕성한"(vigorous) 장로교와 감리교 등 프로테스탄트교회 사이에 있음을 지적하면서 두 교회가 보이고 있는 갈등과 마찰을 완화시키는 역할의 중요성을 지적하였다.
"이방인들이 기독교 선교사들이 가르쳐 준 심오한 진리에 동의한다 하더라도 이 선교사들이 연합해서 일을 못할망정 서로 미워하고 불신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한 가르침의 효과는 반감될 수밖에 없다. 필자 생각으로는 현재 상황에서 분열된 기독교 구조를 호도하기 위해 조잡한 접착제를 사용해서 풀칠하기 보다는 각자 받은 바대로 기독교 선교사들이 진리에 대한 확고한 증인이 되어 일하되, 모두가 궁극적인 목표인 하나된 교회(a united Church)에 대한 꿈을 갖고 성령께서 계획하신 대로 각자 자기 원칙을 어기지 않으면서도 같은 목적을 위해 솔직하고 희생적인 봉사를 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성령을 믿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에 나온 성공회 선교사들이 '로마 가톨릭'(천주교회)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중도'(via media)를 추구하며 교회일치운동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 것은 이러한 '고교회' 전통의 영국 성공회 신학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4. 내한 선교사들의 신앙 양태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초기 한국 선교사들은 교파에 따라 다양한 신학적 배경을 갖고 있었다. 여기에다 개인적 신앙적 특징까지 감안한다면 선교사들의 '일치된' 신앙 양태를 정리해 내기란 불가능하다. 백낙준은 초기 선교사들의 신앙 양태에 대해, "미국 선교사들은 청교도적 열심(Puritanic zeal)과 웨슬리적 열성(Weselyan fever)을 지닌 자들이었다." 장로교 선교사들의 청교도적 신앙과 감리교 선교사들의 경건주의적 신앙을 지적한 것이라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선교사들의 신앙 양태를 청교도신앙·경건주의 신앙·복음주의 신앙 등 세 범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1) 청교도 신앙
청교도 신앙(Puritanism)은 내한 선교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장로교 계통 선교사들의 신학 배경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브라운의 지적이다.
"나라(한국)의 문이 열리고 첫 4반세기를 이끈 선교사 유형은 전형적인 청교도 유형(puritan type)이었다. 그들은 한 세기 전 우리 뉴 잉글랜드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안식일을 엄수했으며 춤과 담배, 카드놀이 같은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빠져들어서는 안될 죄로 보았다. 신학이나 성서비평학에 대해서는 완고한 보수적 입장을 취했으며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는 전천년설을 고수하였다. 고등비평학이나 자유주의 신학은 위험한 이단으로 보았다. 미국이나 영국 같은 나라에서는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가 같은 복음주의(evangelical) 교회로 공존하며 함께 일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근대적 시각'(modern view)을 지닌 사람의 행로는 거칠기 그지없다. 이런 현상은 장로교 선교사들 사이에 더욱 그러하다."
이는 19세기 계몽적 근대 진보주의 신학 도전에 대해 16세기 칼빈주의 원리를 고수하려는 '보수 우파' 장로교 신학의 보루였던 프린스턴신학과 매코믹신학 출신 선교사들이 주도권을 행사한 때문이기도 했다. 이같은 선교사들의 청교도 신앙이 갖고 있는 폐쇄적 방어 기능으로 인해 한국 장로교 신학은 교파 교리 중심의 신학 구조를 갖게 되었다. 이는 한편으로는 진보적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단절과 방어로 나타났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리 중심 신학으로 정착하여 교회의 사회 개혁적 기능이 약화되었다. 브라운은 이 점도 지적하였다.
"한국 기독교의 또다른 특징은 복음의 사회적 적용에 대해 상대적으로 무관심하다는 점이다. 한국 교회의 관심은 내세에만 고정되어 있다. 현세는 완전히 타락하여 다가올 세대에 구원받지 못할 것으로 간주한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변경될 수 없다고 믿는다.……어떤 선교사에게, '사회 개혁을 위해 하고 있는 일이 있는가?' 라고 물었더니, 그는 '없다'고 하면서 '우리는 지금 복음을 전하기도 바쁘다'고 하였다."
《천로역정》으로 대변되는 청교도 신앙은 개인의 신앙과 생활개혁에는 놀라운 힘을 발휘하였지만, 염세적 내세신앙으로 현실 도피적 신앙 양태를 만들었고, 그 결과 교회의 사회 개혁적 기능을 포기함으로 "사회적이기보다는 개인주의적인 교회"로 전락하였다.
2) 경건주의 신앙
경건주의(pietism) 신앙은 웨슬리를 통해 경건주의에 맥이 닿아 있는 감리교 선교사들뿐 아니라 장로교 선교사들에게서도 발견되는 현상이었다. 초기 한국 개신교 선교사들은 교파를 초월하여 경건주의 색채가 강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한 중생의 체험과 기도와 성경공부를 중심한 신앙훈련, 그리고 선교와 사회구제로 연결되는 윤리적 실천 등으로 정리될 수 있는 경건주의 신앙 요소는 선교사들에 의해 촉발된 초기 부흥운동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18세기 '뉴잉글랜드 신학'이 감리교 운동과 연결된 종교각성운동이란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었듯 한국의 초기 부흥운동도 종교각성운동의 성격이 강했던 것이다. 초기 부흥운동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1903년의 원산 부흥운동이 하디(R. A. Hardie) 선교사의 개인적 회개와 중생의 체험에서 시작되어 집단적인 회개운동으로 발전된 것이 대표적인 경우다. 이때부터 시작된 부흥운동은 하나님의 임재와 윤리적 갱신이라는 경건주의 신앙 분위기 속에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1907년 평양 부흥운동의 계기가 된 선교사들의 기도 모임도 그런 성격을 띠고 있었다.
"1906년 8월에 평양에 있는 선교사들이 각자 자기 삶 속에서 보다 깊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를 갈구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위해 8일간 모여 성경을 읽으며 기도하였다. 이 기도회의 결과 그들은 말할 수 없는 은총을 경험하였으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기로 예비하신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시어 장차 그들에게 보여주실 일에 대해 의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선교사들의 1차적 관심은 한국 교회에 있었다. 감리교와 장로교 선교사들은 한국 교회로 하여금 깨끗케 하시고 활력을 주시는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히게 만들어 한국 기독교인들도 그 값진 체험을 할 수 있게 만들고 싶었다. 선교사들의 초청을 받은 한국 교인 수백 명이 매일 한 시간씩 모여 성령이 임하시기를 간구하며 기도하였다. 그 기도 모임은 1907년 1월까지 계속되었고, 마침내 평양 장로교회에서 성령의 불이 모인 회중 위에 내렸고 그 불은 감리교와 장로교 학교를 거쳐 평양 전체와 인근지방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초기 부흥운동 과정에서 나타난 기도 열기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이 운동은 한국 교회의 경건주의적 성격을 더욱 강화시켰다. 이 점은 부흥운동의 결과에 대한 존스(G. H. Jones)의 보고에서도 확인된다.
"부흥운동은 기독교인들의 기도생활을 더욱 심화시켰다. 부흥운동의 시발점이 기도에 있었음은 이미 밝힌 바이다. 부흥운동이 전개되는 동안 많은 기독교인들은 기도생활의 비밀을 경험하였다. 이 점에 대해서는 한 선교사의 증언을 듣는 것이 확실할 것이다. 이 선교사는 전에도 믿음과 기도의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다른 어떤 동료 선교사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진지하게 뚜렷한 목적을 갖고 기도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중보기도를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남을 위해 기도하는데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느라 자신을 잊을 정도였으며 그 때마다 전에는 맛보지 못했던 새로운 능력에 사로잡힘을 체험하였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기도생활에 붉은 피를 쏟았다."
이같은 기도 모임과 성경공부를 위한 사경회(査經會)는 한국 초기 부흥운동을 촉발시킨 요인이었으며 이후 한국 교회의 경건주의 성격 형성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같은 경건주의 신앙운동이 한국 기독교인들의 내적 신앙 체험과 윤리적 갱신에 기여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면이 있지만 이 운동이 점차 감정적이고 주관적인 체험 중심의 반이성적(反理性的) 경험주의로 흘러 신학의 자리를 더욱 좁혔다는 점에서는 부정적인 면도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3) 복음주의 신앙
복음주의(evangelicalism / evangelism)란 개념이 교파 교회에 따라 약간씩 다른 내용으로 사용되기는 하였지만 개신교 초기 선교사들은 성경의 절대 권위, 그리스도의 구속과 신앙의인론(信仰義認論),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삼위일체 등 보편적 '프로테스탄트' 신앙 원리라는 개념의 복음주의 원리를 공유하고 있었다.
내한 선교사들이 초교파적으로 발행하던 The Korea Mission Field가 1915년 선교문제 특집을 다루면서 "영적 무장"(spiritual gymnasia)이란 제목으로 선교사들이 갖추어야 할 선교의식과 공유할 신앙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 바 있다.
"예수는 메시야였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인간으로 보내신 유일하신 분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셨으며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도 메시아 혹은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되었다. 예수가 자기 아버지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셨으니,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 그리스도인들도 메시야직에 충실해야 한다. 주님의 위대한 명령에 복종하고 모든 피조물에 주님을 증거해야 하며, 그들로 하여금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우리는 이 일의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고 말함으로 주님을 영광스럽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꾸준하고도 진실되게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생명의 진리가 나타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는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선교사직의 근거를 그리스도의 메시아직 수여로부터 그리스도의 심판에 이르는 그리스도 중심 신앙고백에서 찾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고백은 성경의 전거(典據)들을 갖고 있다. 이같은 성경 중심의 그리스도론이야말로 '복음주의' 신학과 신앙의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복음주의적 신앙과 신학 내용은 선교사들을 통해 번역 유입된 초기 한국 교파교회의 신조들에서도 잘 드러난다. 다음은 성경과 그리스도에 대한 장로교 . 감리교 . 성결교 . 구세군의 교리와 신조를 비교한 것이다.
성화론이나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이해의 차이를 제외한다면 칼빈주의 장로교회나 웨슬리주의 감리교회와 구세군, 성결교회의 교리 가운데 '복음주의 신앙원리'의 핵심인 성경과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는 대동소이함을 알 수 있다. 이는〈사도신경〉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가톨릭교회를 제외한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의 연합 가능성을 여기서 발견할 수 있다. 즉 1903년 원산 부흥운동을 체험한 선교사들은 초교파 연합운동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장로교의 미국 북장로회와 남장로회, 캐나다장로회와 호주장로회 등 4개 선교부, 감리교의 미감리회와 남감리회 등 2개 선교부가 1905년에 '한국복음주의 연합선교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를 조직하여 초교파 선교 협력을 모색하였는데, 그 신학적 연합 배경이 '복음주의'였던 것이다. 그들은 '복음주의' 이름으로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 간격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초기의 '복음주의'에 대한 보편적 이해가 1920년대 이후에 접어들면서 교파교회에 따라 달라지기 시작했다. 즉, '보수적' 장로교회에서는 '근본주의 신학' 원리로 점점 폐쇄적이고 방어적인 개념으로 이해한 반면에 감리교회에서는 사회복음주의까지 수용하는 적극적인 개방 개념으로 해석하여 궤를 달리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개신교회들이 공유하였던 '복음주의' 개념은 '보수 방어적' 장로교회의 전유물이 되었다. 1934년 장로교 선교 50주년을 맞아 장로교회의 '복음주의 '신앙 전통이 무너질 것을 우려한 1세 선교사 마펫의 호소에서 이러한 '방어적' 복음주의 신앙을 읽을 수 있다.
"조선 모든 선교사가 다 죽고 다 가고 모든 것을 축소한다 할지라도 형제여! 조선교회 형제여! 四十년전에 전한 그 복음을 그대로 전파합시다. 나와 한석진 목사가 十三도에 전한 그것이오 길선주 목사가 평양에 전한 그 복음 량전백 씨가 선천에 전한 그 복음은 자기들의 지혜로 전한 것이 아니오 그들이 성신에 감동을 받아 전한 복음이니 변경치 말고 그대로 전파하십시요. 바울이 청년 목사 듸모데에게 부탁함과 같이 나도 조선에 있는 원로 선교사와 로인 목사를 대표하야 조선 청년 교역자에게 말합니다. 원로 선교사와 원로 목사의 전한 그대로 전하시요. 이 복음은 우리가 내인 것이 아니요 옛적부터 전한 복음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신성하고 권능있는 교회를 세우고 모든 백성에게 십자가에 도로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기 바랍니다. 형제여! 원로 선교사 원로 목사들이 四十년동안 힘쓴 것인대는 우리의 지혜 아니오 바울에게 받았고 하느님의 말슴을 전한 것인대는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오 말할 기회 많지 안는대는 딴 복음을 전하지 말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같은 선교사들의 성경과 그리스도 중심의 '복음' 이해가 한국 기독교를 '성경적 기독교', '그리스도 중심의 기독교' 전통 위에 서게 만들었다. 그러나 성경과 그리스도를 강조하다보니 자연 계시의 가능성 및 타종교와의 대화마저 단절하는 폐쇄적인 신학 풍토가 조성된 것도 사실이다. 그 결과 한국 교회와 신학은 '그리스도 중심'에서 '신 중심'으로 폭을 넓혀 가는 세계 신학의 흐름에 뒤질 수밖에 없었다. 이는 '복음주의'란 용어가 갖고 있는 '폐쇄성'의 한계이기도 하다.
6. 맺음글
지금까지 초기 내한선교사들의 신학적 배경과 신앙에 대해 살펴보았다. 자료의 한계로 충분한 분석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초기 선교사들의 신학과 신앙에 대한 개괄적 이해는 가능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초기 선교사들을 배출한 19세기 서구 교회, 특히 미국 교회는 마티의 표현대로 "근대적 발견을 통해 그리스도의 명령이 재해석되면서 교회 안에서 새로운 방향으로 일을 시작하는" 시대적 전환점을 맞고 있었다. 이같이 '변화하는 시대 흐름 속에서 교회의 전통을 재해석하려는' 실험적 시대를 맞아 종교각성운동에 연원을 둔 '뉴잉글랜드 신학'은 적극적으로 계몽주의와 근대주의로 표현되는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여 칼빈주의 신학 원리를 재해석하려 시도하였다. 그러나 프린스턴을 중심한 '보수적' 저항운동도 만만치 않아 16세기 칼빈주의 원리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나타난 청교도 신앙원리를 고수하려 노력하였다. 여기에 유럽의 경건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 영향을 받은 체험 중심의 감리교 신학이 유입되면서 미국 신학은 다양한 양상을 보였다.
한국에 들어온 초기 선교사들은 이같은 다양한 신학 사조에다 교파교회 교리와 신조까지 접합되어 역시 다양한 양태를 보였다. 다만 프린스턴과 매코믹 출신 선교사들이 주도하는 장로교 선교는 '보수적'인 경향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장로교선교사들의 신학은 '정통 칼빈주의 원리'를 고수하려는 방어적이고 폐쇄적인 경향을 띠게 되었다. 반면 감리교 선교사들의 경우엔 경건주의와 복음주의, 개인의 종교적 체험과 교회의 사회적 기능의 조화를 추구하는 '타협적' 자세를 보였으며 20세기 진보적인 신학까지도 수용할 수 있는 '개방적' 입장을 추구하였다. 같은 웨슬리주의를 출발점으로 하고 있으나 '복음주의 원리'에 보다 충실하려 하였던 구세군과 성결교회(동양선교회) 선교사들의 신학은 '보수적'인 경향을 띨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중도'(via media) 입장에서 교회일치운동에 지속적인 관심을 표명하였던 성공회 선교사들의 신학은 교파교회가 난립한 한국 상황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전례 중심의 '고(高)교회' 전통에다 고(古) 가톨릭 교회를 지향하는 '옥스퍼드 운동'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프로테스탄트'라기보다는 '가톨릭'으로 인식되었다.
이같은 신학배경을 지닌 초기 선교사들의 신앙 양태는 청교도 신앙·경건주의 신앙·복음주의 신앙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청교도 신앙은 금욕적 생활 실천으로 새로운 기독교적 윤리를 형성하였으나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염세주의적 신앙으로 흘러 한국 교회의 사회적 기능을 약화시키는 한계를 드러냈다. 부흥운동으로 특징지어지는 경건주의 신앙도 집단적 종교 체험을 통한 기독교적 사회윤리 형성에 기여한 바가 크지만, 지나친 반이성적 감정주의는 건전한 신학 형성의 저해 요인이 되었다. 모든 '프로테스탄트' 교파 교회들이 동의할 수 있었던 '복음주의'는 성경과 그리스도 중심의 고백 신앙이었다. 이는 16세기 종교 개혁 신앙을 고수하려는 신앙적 열정을 담고 있다.
이같은 '복음주의' 신앙이 개혁교회의 정체성과 전통을 계승한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 측면이 있으나 폐쇄적 방어기능이 강화되면 될수록 시대 변화가 요구하는 교회의 신학적 기능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 이는 또한 한국인들의 주체적 신학기능을 저하시킴으로 한국 신학의 선교사 '종속'을 피할 수 없다.
결국 초기 선교사들은 복음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헌신적인 선교활동으로 한국 기독교를 '복음적' 전통에 세움으로 한국 기독교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한국 교회의 청교도적이고 경건주의적이며 복음주의적인 전통은 이러한 선교사들의 신학에 영향받은 바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신학과 신앙이 갖고 있는 한계를 극복하여, 개인의 종교적 체험이 교회의 사회개혁으로 연결되는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의 조화, 주관적 체험의 한계를 넘은 공동체적 신학 형성, 복음의 전통을 지키면서도 다른 전통과 열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개방적 자세를 통해 이루어지는 '한국교회 신학'을 수립하는 것은 선교사들이 아닌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