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흑룡강성 쌍성보의 동문(東門)인 승욱문. 쌍성보는 여진족의 주요 근거지 가운데 하나였고 금나라 시대엔 거란족의 요나라와 전투를 벌인 지역이었다. 승욱문은 청나라 동치제 때 세워졌다. 사진가 권태균 |
태종과 세종은 외형상 명나라에 사대(事大)했다. 두 임금은 사대라는 형식적 관계를 통해 대국인 명과의 분쟁을 방지하면서 강역 문제에 대해선 실리를 꾀했다. 태종과 세종은 조선이 명과 전쟁을 회피하면서 확보할 수 있는 북방 최대 강역이 두만강 북쪽 700리 지점의 공험진(公<5DAE>鎭)이라고 보았다. 고려 예종 3년(1108)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윤관(尹瓘)이 17만 군사를 이끌고 북진해 성을 쌓은 곳이 공험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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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강역에는 여진족이 살고 있었는데 세종이 비로소 이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세종은 강역을 공험진까지 확장하기 위해 철저하게 준비했다. 먼저 이론적 토대를 구축한 세종은 신하들에게도 이를 숙지하게 했다. 세종은 재위 15년(1433) 1월 최윤덕을 평안도절제사로 보낸 후 그해 3월 여러 신하에게 공험진에 대한 숙제를 준다.
“윤관이 주(州)를 설치할 때 길주(吉州)가 있었는데, 지금 길주가 예전 길주와 같은가. 고황제(高皇帝:명 고조)가 조선 지도를 보고 조서(詔書)하기를, ‘공험진 이남은 조선 경계라’라고 하였으니, 경들이 참고해서 아뢰라.(
지명이 사람들의 이동에 따라 변천하는 사례가 많다는 점에서 330여 년 전 고려에서 설치한 길주가 만주에 있었다는 세종의 견해는 타당한 것이었다. 공험진에 대한 이런 화두를 던진 세종은 재위 14년(1432) 12월 좌대언(左代言:좌승지) 김종서(金宗瑞)를 함길도 감사로 삼아 두만강 북쪽 강역을 확장하게 했다. 김종서를 함길도 감사로 삼기 10개월 전인 그해 2월 활과 화살을 내려주면서“항상 차고 있다가 짐승을 쏴라”고 말했다. 문신에게 활을 내려주며 항상 차고 있으라고 당부한 것은 그에게 북방 강역 확장의 임무를 맡기겠다는 포석이었다. 무신이 아닌 문신을 쓴 이유는 단순하게 군사력으로 여진족을 밀어내는 것만으로 강역이 확장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가능하면 여진족을 회유해야 하고 무엇보다 조선 백성들을 이주시켜야 하기 때문이었다.
김종서는 토관직(土官職:지역인들에게 주는 관직)을 대거 신설하고 일반 백성도 벼슬길에 나갈 수 있게 허용하는 특혜를 주면서 함길도 이주를 권했으나 먼 북관(北關)으로 이주하려는 백성은 많지 않았다. 세종 19년(1437) 경상도 개령읍(開寧邑)의 아전 임무(林茂)가 자신의 팔뚝을 자르고, 세종 21년(1439)에는 전라도 옥과현의 호장(戶長) 조두언(趙豆彦)이 자살해 함길도 이주를 피하려는 사건까지 발생했을 정도로 육진 이주는 꺼리는 일이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김종서는 벼슬을 주고 양식을 지급하는 등의 정책으로 육진 거주 백성을 늘렸다.
드디어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세종은 재위 21년(1439) 3월 공조 참판 최치운(崔致雲)을 명나라에 보내 ‘공험진이 조선 경계’라고 선언했다. 세종은 태종이 이미 사신 김첨(金瞻)을 보내 공험진 남쪽이 조선 영토라고 말했음을 상기시켰다.
“신의 부친께서는 홍무 21년 태조 고황제의 성지(聖旨)에 따라 ‘공험진 이북은 요동으로 환속하고 공험진 이남 철령까지는 그대로 본국에 소속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김첨을 사신으로 보내 주달(奏達)했습니다.(
명의 시조 주원장이 공험진 이남을 고려(조선) 영토로 인정했다는 논리에 명나라는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웠다. 개국 시조의 유지를 어길 명분이 없었던 것이다. 공험진이 국경임을 못 박은 그해 8월 세종은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에게 전지를 내려 “동북 강역은 공험진이 경계라는 말이 전해진 지는 오래다. 그러나 정확하게 어느 곳인지는 알지 못한다. 공험진이 장백산(長白山:백두산) 북쪽 산기슭에 있다 하나 역시 그 허실(虛實)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며 윤관이 세운 비석을 언급했다.
“
세종은 윤관이 ‘고려지경(高麗之境)’이라는 비를 세운 공험진 선춘점을 찾으면 조선의 국경이 명확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함길도는 본래 고구려의 고지(故地)다…고려 예종 2년에 윤관을 원수(元帥)로 삼고,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로 삼아 군사 17만을 거느리고 동여진을 쳐서 몰아내고, 함주에서 공험진에 이르기까지 9성을 쌓아 경계를 정하고, 비석(碑石)을 공험진의 선춘령(先春嶺)에 세웠다.(
고려의 윤관 장군이 함주에서 공험진까지 9성을 쌓고 ‘고려지경’이란 비석을 공험진 선춘령에 세웠다는 내용이다.
“(함길도의) 동쪽은 큰 바다에 임하고, 남쪽 경계는 철령(鐵嶺)이며, 서쪽은 황해도와 평안도에 접(接)했는데, 높은 봉우리가 백두산에서부터 기복(起伏)해 남쪽으로 철령까지 1000여 리에 걸쳐 뻗쳐 있다. 북쪽은 야인(野人:여진족)의 땅에 연하였는데, 남쪽 철령으로부터 북쪽 공험진에 이르기까지 1700여 리다.(
철령에서 공험진까지 1700리가 함길도의 남북 길이라는 것이다. 같은 책 경원 도호부(慶源都護府)조는 공험진의 위치를 정확하게 말해준다. 두만강과 접해 있는 경원에서 “북쪽으로 공험진까지 700여 리, 동북쪽으로 선춘현(先春峴)까지 700여 리”라는 것이다. 세조 때 정척(鄭陟)·양성지(梁誠之) 등이 작성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