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을 내리는 헌정음악회1
지난 14일 오후 전주시 효자동에 있는 상산고등학교 체육관 강당에서는 아주 특별한 음악회가 열렸다. 정년 퇴임을 맞은 이 학교 음악 선생님인 박상만 선생님께 상산고등학교 제자들이 드리는 ‘헌정음악회’가 열린 것이다.
박상만 선생님은 1981년 이 학교 개교 이래 2008년까지 음악을 담당하여 제자들에게 음악을 통해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한국중등음악연구회 회장으로 이 땅의 학생들의 음악교육을 위해 노력하기도 한 선생님은 자칫 입시 위주의 메마른 교육으로 흐를 수 있는 한국 현실에서 서정성이 짙은 가곡과 세계 각국의 민요를 합창으로 부르게 했고 이 학교 찬가인 장순하 작시의 ‘거상이 간다’를 작곡하기도 하였다.
이 학교 1회 졸업생인 서주원(43. 방송작가)씨에 따르면 “선생님께서 음악을 통해 불어넣어준 감수성은 오늘까지도 그 영향력이 살아남아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선생님은 그 때 기초적인 작곡법까지 가르쳐 작곡을 하라는 숙제도 내주셨어요. 실제로 작곡을 했습니다. 그래서 음악 점수 ‘수’를 받기도 했습니다”
전주 성결교회 장로이기도 한 선생님은 전주성결교회 시온 찬양대 지휘자이기도 하며 전주 남성합창단 지휘자로 러시아 여러 도시를 순방하며 우리 가곡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박상만 선생님은 40년간 몸담아온 교직을 떠나는 것과 함께 합창단 지휘자 등 모든 자리를 후배에게 물려주겠다고 밝혔다. 이날 음악회에서 선생님은 자신이 작곡한 '아릿따운 손' '소국' 등을 제자들과 함께 4중창으로 부르기도 했으며 남성합창단을 지휘하여 ‘내 친구’ ‘그대 그리고 나’를 부르기도 하였다.
▲선생님이 지휘하는 전주 남성합창단
▲전주상산고등학교 체육관에서 열린 박상만 선생님 정년퇴임 기념 헌정음악회2
선생님의 40년 교직생활의 출발은 부안군 변산면(당시는 산내면) 마포초등학교였다. 김제 출신인 그는 1968년 전주교대를 졸업하자마자 마포초등학교에 부임하여 당시 5학년이었던 필자의 담임을 맡았다. 다음은 2005년 4월 37년만에 선생님을 만나뵙고 당시를 회상하며 쓴 글이다.
1960년대의 부안군 변산면(그 때는 산내면이었다)은 참으로 오지나 다름없었다. 들쭉날쭉한 갯가를 메워 드문드문 간사지 논이 있었고 대부분은 비탈진 산밭을 일구거나, 갯가에 나가 조개를 줍고 고기를 잡으며 살아갔다. 평생 기차구경 한번 못해보고 돌아가시는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부안읍에서 먼지 풀풀 나는 신작로길을 따라 버스로 1시간 30분 정도 오면 마포리가 있다. 이곳에 지금은 폐교가 되었지만 마포, 산기, 낡은터, 유동, 삼발리, 성천, 유유동 등의 마을에서 300여명 아이들이 다니던 마포국민학교가 있었다. 나는 이 학교에 다니며 소년 시절을 보냈다. 지금 생각하면 너나없이 가난에 찌든 아이들이었지만 우리들은 가난이란 말을 몰랐다. 다들 그렇게 사는 것인 줄 알았다.
우리는 점점 행동반경을 넓혀가며 산, 들, 바다를 쏘다니느라 매일이 새로웠다. 동네 정미소에는 소달구지가 늘 들락날락했는데 막걸리에 취한 주인이 달구지는 소에게 다 맡겨두고 끄덕끄덕 졸면서 가면 우리는 뒤로 몰래 올라타고 한참을 갔다. 주인에게 들키면 급히 뛰어내려 줄행랑을 쳤다. 포구에 매어 둔 빈 배를 끌고 나가다 혼쭐을 당하기도 했다. 이렇게 지내다 5학년 때 새로 담임 선생님이 부임해 오셨는데 선생님은 그 때까지의 선생님과는 달랐다. 선생님은 전주교대를 갓 졸업하시자 마자 첫 부임지로 우리 학교에 오신 것이다. 선생님은 교육에 대한 열정을 음악에 실어 우리에게 크나큰 영향을 주셨다.
▲첫 부임지인 마포초등학교 5학년 담임시절 제자들. 왼쪽부터 유영수, 김형순, 윤점섭, 김장원산기슭 웅덩이에서 도롱뇽알을 잡으며 노는 우리를 보신 선생님은 하얀 링게르병을 구해오셔서는 그 안에 넣으시고는 매일매일 돌아가며 관찰일기를 쓰라고 하셨다. 깐치밥(산자고의 구근)을 캐먹기 위해 야산을 쏘다니던 우리에겐 전혀 코드가 맞지 않는 일이었으나 이후 우리는 선생님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체험하기 시작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깡촌에서 하루는 선생님이 난생 처음 보는 희귀한 물건을 보자기에 곱게 싸들고 오셨다. 휴대용 전축이었던 것이다. 레코드판이 돌아가며 음악이 흘러나왔다.
“얌보 얌보 얌보얌보야~~~~~~~~쿠니쿠니쿠니쿨라~~”
정말 신기했다. 선생님은 노래를 아주 잘 부르셨다. 땟국이 졸졸 흐르는 촌놈들은 점점 선생님에게 빨려 들어갔다. 고음을 내는 건반 몇 개가 고장난 낡은 풍금을 치시면서 선생님은 우선 발성법부터 가르치셨다.
“아아아아아-” 한 음 올려서 “아아아아아-”
이렇게 해서 한 옥타브를 오르내리며 목을 가다듬은 연후에 노래를 가르치셨다. 처음에 40여명의 아이들이 두 패로 나누어 돌림노래를 불렀다.
“다같이 돌자 동네 한바퀴 / 다같이 돌자 동네 한바퀴.............바둑이도 같이 돌자 동네 한바퀴 / 바둑이도 같이 돌자 동네 한바퀴”
세 패로 나누어 부르기도 하였다. 맨 마지막 패가 잦아든 소리로 “바둑이도 같이 돌자 동네 한바퀴”하며 끝나면 노래가 훨씬 재미있었다. 돌림노래로 팀워크를 갖춘 우리는 2부합창을 불렀다.
▲박상만 선생님과 마포초등학교 제자들깊은 산 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새벽에 토끼가 눈 부비고 일어나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가지요
이어 3부합창, 혼성2부합창, 혼성3부합창, 시골 깡촌 마을의 쪼무래기들은 어느새 어엿한 합창단으로 탈바꿈했다.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노래들도 많이 불렀다.
내 고향 가고 싶다
그리운 언덕
동무들과 함께 올라
뛰놀던 언덕
오늘도 그 동무들
언덕에 올라
메아리 부르겠지
나를 찾겠지
아 목동들의 피리 소리들은
산골짝마다 흘러나오고
여름은 가고 꽃은 떨어지니
너도 가고 또 나도 가야지
저 목장에는 여름철이 오고
산골짝마다 눈이 덮여도
나 항상 오래 여기 살리라
아 목동아 아 목동아 내사랑아
먼 산에 진달래 울긋불긋 피었고
보리밭 종달새 우지우지 노래 하면
아득한 저 산너머 고향 집그리워라
버들피리 소리나는 고향집 그리워라
모두 이 시기에 배운 노래들이다. 따뜻한 봄날 선생님은 우리 모두를 끌고 학교 옆 산으로 올라가 야외수업을 하기도 했고 미술시간에는 바닷가로 데리고 나가 바다를 그리게 했다. 그 바닷가에서 우리는 또 노래를 배웠다.
해당화가 곱게 핀 바닷가에서
나 혼자 걷노라면 수평선 멀리
갈매기 한두쌍이 가물거리네
물결마저 잔잔한 바닷가에서
선생님께서 직접 작사 작곡하신 노래도 가르쳐 주셨다.
흰물결 밀려오는 바닷가에서
수평선 저 너머로 돛단배 오고
시원한 바람 속에 여름이 가요
즐거운 여름바다 즐거운 바다
▲마포초등학교에서 작곡하여 가르친 ‘여름바다’마침내 선생님은 우리 학교의 교가를 작사작곡 하셨다. 당시 우리는 학교마다 교가라는 것이 있는 것인 줄도 몰랐다.
서해의 푸른 물결 에워싸인 곳
변산의 정기 받은 배움의 터전
지혜와 예의를 한 몸에 담아
우리는 자란다 씩씩하게 자란다
아아 그 이름 빛내리 마포의 학교
찬란하게 빛내리 마포 국민 학교
이미 폐교가 된 학교지만 망년회 때 동창들 만나면 꼭 이 노래를 부른다.
▲마포초등학교 교가선생님은 어느날 교무실의 캐비넷에 잠자고 있던 책을 한 아름 들고 교실에 들어오셨다. <빛나는 얼굴>이라는 한국 위인전과 <금성탐험대>라는 공상과학소설 등이었다. 이 때 처음으로 교과서 이 외의 책을 접해보았다. 아이들이 돌려가며 얼마나 재미있게 읽었는지 모른다. 이 책들은 이미 전부터 와있었던 것 같은데 아이들에게 대출을 안해주고 있던 것을 선생님께서 과감하게 꺼내 아이들에게 읽힌 것으로 보였다.
가을에 우리는 수학여행을 갔다. 해마다 십리를 걸어 봄 가을 채석강으로 소풍을 갔었는데 별도로 수학여행을 간다는 것이었다. 당시 소풍을 가면 평소 먹던 보리밥에 쌀을 조금 더 넣은 밥에 짠지나 무장아찌를 찬으로 도시락을 꾸려 갔었다.
멸치볶음이나 계란 같은 것 싸오는 아이들도 거의 없었고 도시락을 아예 못 싸오는 아이들도 있었다. 싱건지를 싸와 국물이 밥으로 다 스며들은 경우도 있었다. 이런 판국에 수학여행이라니. 학부모들에게도 수학여행이라는 개념이 서있지 않을 때였다.
교장 선생님도 반대하셨지만 우리는 수학여행을 가게 되었다. 코스는 내소사~직소폭포~월명암이었다. 참가금은 보리쌀 두 되였다. 이것도 내지 못해 불참한 친구들이 몇 있었다. 어떻게든 보리 두 되야 마련할 수 있었겠지만 이들 부모님들에게는 수학여행이란 불필요한 사치였을 것이다. 우리들이 못가는 친구들 집에 찾아가서 함께 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졸랐지만 야단만 맞고 왔다.
▲선생님 약력변산 국민학교 마포분교에서 마포 국민학교로 독립한지 처음으로 가는 수학여행에 교감선생님께서 동행해주셨다. 우리 학년만 조촐하게 버스를 타고 가는 수학여행이라니... 우리는 신바람이 났다. 말재를 넘어 구불구불 내소사로 가는 버스 차창으로 스며드는 바람이 상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내소사에 도착하자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추녀 밑에 매달린 곶감의 행렬이었다. 10개씩 꿴 곳감 50열이 한 판을 이루었다. 한 판이 500개인 셈이다. 500개짜리 곶감 판이 절집 주변에 끝간 데 모르게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당시 감은 우리에게 매우 소중한 먹거리였다. 5월 감꽃이 필 무렵부터 우리는 감꽃을 주워 먹기 시작했고 바람에 우수수 떨어진 땡감을 우려먹었다. 가을이면 빨갛게 맛이 들기도 했으나 아직은 떫은 맛이 그대로 남아있는 감을 따먹었다. 그 사이에 홍시라도 하나 발견하면 다람쥐처럼 나무 위로 조르르 올라가 기어코 손에 넣었다. 그러나 감나무는 아이들 맘대로 공략하는 대상이 아니었다. 다 주인이 있어서 아이들 손을 철저히 물리쳤다. 더구나 감나무에 올라가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내소사 뒤로 난 숲길을 조금 올라갔더니 임자도 없어 보이는 산감나무에 감이 수없이 매달려 있었다. 종안이가 이를 보고 나무에 올라갔다가 죽은 가지를 디뎌 떨어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천행으로 바위 사이의 흙 있는 곳으로 떨어져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종안이는 교감선생님이 데리고 후송되었다. 선생님은 얼마나 놀라셨을까.
내소사 설선당 요사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는데 세상에 이토록 넓은 방이 있다는 것도 처음 경험하였다. 이튿날 원암재를 넘어 직소폭포를 경유하여 월명암에 당도했다. 월명암에서 곶감이 내소사에서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월명암에서 또 하룻밤을 자고 남여치로 내려와 2박 3일의 수학여행을 마쳤다.
6학년이 되었다. 어느날 선생님은 푸석한 얼굴에 머리는 헝클어지고 두 눈은 충혈된 채 오셨다. 밤새껏 한 친구 아버지와 싸우셨다는 것이었다. 짐자전차를 타고 다니며 장사를 하시던 친구 아버지는 초등학교 5학년까지만 다니면 가감승제는 할 줄 아니 학교 더 다닐 필요 없다는 것이었고 선생님은 이를 말리느라 싸운 것이었다. 그 아버지는 끝내 6학년이 된 아들을 자전거 짐칸에 싣고 서울로 돈벌러 올라갔다. 이 사건 직후 선생님은 영장이 나와 군에 입대하게 되었고 우리는 선생님과 헤어졌다.
선생님과 헤어진지 37년의 세월이 흐른 2005년 4월 20일 선생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지금 종로 기독교100주년 기념관에 숙소를 정하고 오늘 밤 묵을 예정이니 영근이와 함께 오라는 것이었다.
앞마을 냇터에 빨래하는 순이
뒷마을 목동들 피리 소리
그리운 고향 그리운 친구
정든 내 고향집이 그리워지네
앞집에 김서방 뒷집에 이서방
새끼 꼬아 가마니 짜던 곳
그리운 고향 그리운 친구
정든 내 고향집이 그리워지네
드높은 하늘엔 흰구름 떠돌고
오곡백과가 넘실대던 곳
그리운 고향 그리운 친구
정든 내 고향집이 그리워지네
선생님이 가르치신 노래들은 지금 생각하면 서정성이 아주 짙은 노래들이다. 우리 노래인지 서양노래인지는 잘 몰랐으나 가사 자체가 하나의 서정시이다. 선생님한테 배운 노래를 떠올리며 전철을 탔다. 영근이를 만나보고 싶어 하셨으나 갑자기 연락이 안돼 혼자 종로 5가로 향했다. "영근이 그놈의 시적 토양은 필시 박상만 선생님이여."
37년 만에 선생님을 만났다. 우리는 얼싸안았다. 반백이 되신, 우리보다 11살 위이신 샘은 올해 60이시다. 그러나 그 테너 목소리만은 여전하시다. 선생님이 머물고 계신 숙소에서 이야기 보따리가 풀어졌다. (2005년 4월 22일)
▲계화초등학교 교가
▲계화초등학교 응원가3
군복무 3년을 마친 선생님은 계화초등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선생님의 아이들에게 합창을 가르쳤고 교회 찬양대에서 찬송가를 통해 마을 청년들에게 음악을 가르쳤다. 계화초등학교 교가도 작곡했으며 가을 운동회를 위하여 ‘계화의 건아’라는 응원가를 작곡하기도 하였다.
정년퇴임을 맞아 선생님의 그동안 여러 곳에 기고한 글과 살아오신 이야기를 묶어 책으로 내셨는데 이 책에서 선생님을 계화도 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고 하였다.
“당시 계화도는 간척공사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으므로 농경지로 활용하기 전 허허벌판으로 방치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누구든지 먼저 들어가서 줄을 긋고 작물을 재배하여 소득을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도 되는 땅이었습니다. 당시 한창이던 새마을사업은 소득증대와 같은 개념으로 생각되던 때였으므로 이 땅에 유채를 파종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학교가 있는 마을과 간척지 갯벌 사이에는 바다 물길이 있어서 이를 건너기 위하여 조그만 전마선을 타고 노를 저어 건너야 했습니다. 방과 후 시간을 이용하여 학생들과 물을 건너가서 광활한 땅에 유채를 심었습니다. 그러나 배를 타고 건너는 위험 때문에 수확은 포기하고 다른 사람에게 경작권을 넘겨주는 값으로 학용품을 받아 학생들에게 나누어 준 일도 있었습니다. 밤에는 학생들을 위한 공부방을 마을마다 정하여 두고 찾아다니며 야간학습을 돕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찬양대를 조직하여 합창활동도 했습니다.<중략>
학교의 가을 운동회는 온 섬마을의 운동회가 되고 축제의 날이 되기도 합니다. 계화초등학교의 교가와 운동회의 응원가를 작곡하여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또 리듬밴드 합주단을 만들어 밴드 퍼레이드를 펼친 일은 당시 재학생이면 모두 기억하는 최고의 운동회 순서이었습니다. <중략>
그렇게 해서 다음날 운동회에 우리 반 학생들은 밴드부 복장에 몇 달간 연습한 실력을 자랑스럽게 발휘했습니다. “계화도의 역사를 새롭게 썼다”는 축사를 듣기도 했습니다.자랑스런 우리반 학생들을 데리고 역사상 처음으로 2박3일의 수학여행을 전주와 익산으로 다녀왔습니다. 학생들은 처음 기차를 타보았다고 가족과 동생에게 자랑을 했습니다.“<다시 저높은 곳을 향하여> 59~60쪽
선생님은 계화초등학교에서 열정을 다해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전주대학교 사범대학 야간과정에 편입하였다. 계화도에서 자전거를 타고 돈지, 하서로 우회하여 1시간여 달려 부안 차부에서 전주행 직행버스를 타고 학교에 갔다. 전주에서는 아침 첫차를 타고 부안으로 와서 다시 자전거를 타고 계화도로 들어와 아이들을 가르치는 힘겨운 일이었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참으로 죽을 맛이었습니다. 우의를 입고 있으면 빗물에 땀이 정말 비오듯 우의 안에 쏟아져 속옷을 완전히 적시고도 남아 흘러내렸습니다. 비내리는 논길과 밭둑길에서는 자전거를 타고 달려보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상상이 안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논밭의 점토가 자전거의 바퀴에 달라붙게 되면 그 흙이 바위보다도 크고 많아져서 자전거 페달을 아무리 밟아도 앞으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말을 알 수 있을까요? 여름 무더위에 빠르게 자전거 페달을 쉬지 않고 1시간 밟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더위와 땀으로 적셔진 속옷, 비 오는 날의 모습!
추운 겨울에는 또 어떨까요. 계화도는 유달리 바람이 많은 지역입니다. 어느 해 겨울에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 하교 시간에 집에 가는 학생들이 바람에 날려가지 않도록 줄로 묶어 하교시켰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바다를 막은 뚝길을 가다보면 자전거로 달리다 보면 추위도 추위지만 귀, 그리고 입이 얼고 시린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보다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에 자전거가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오히려 뒤로 밀리는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다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62쪽
선생님은 전주 문정초등학교 영생고, 영생여상 음악교사를 거쳐 1981년 상산고등학교가 개교하면서 상산고등학교 음악교사로 새로운 출발을 하였다. 상산고등학교는 정읍 태인 출신이며 서울문리대 수학과를 나와 <수학의 정석>으로 부를 쌓은 홍성대 박사가 설립한 학교이다. 그는 정읍 익산의 남성고등학교를 나왔는데 남성고등학교는 어떤 학교인가.
전주에는 고종황제의 신임을 얻었던 백남신(白南信) 부자가 있섰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익산에서 농장을 운영하며 숨어 살았고, 그 며느리가 시아버지의 재산으로 해방 후인 1946년에 남성고등학교를 세웠다. 남쪽에서 큰 별이 되라는 뜻에서 학교 이름도 지었다. 초대 교장으로 부안 계화도에서 한학을 가르치던 간재 전우 선생의 제자인 윤제술을 모셨다. 김제 출신의 윤제술은 훗날 선비정치가로 국회의장을 지냈으며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선생에 대한 인사권을 교장인 자신이 전적으로 맡는다는 조건으로 교장직을 수락했다고 한다. 남성고등학교가 짧은 기간 동안에 전국적인 명문사학으로 발돋움 한 것은 초대 윤제술 교장이 닦은 기초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세인들의 평가다.
그런데 홍성대 이사장의 스승은 윤제술이고 윤제술은 계화도에서 간재 전우 선생에게서 한학을 배웠는데 홍성대 이사장이 발탁한 박상만 선생님은 계화초등학교의 선생님이기도 하셨으니 상산고등학교와 계화도는 묘한 인연이 있는 것 같다.
공자(孔子)는 춘추전국시대의 어지러운 세상에서 “도(道)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 들어가겠다.(道不行 乘도浮于於海:<논어>, 공야장편)” 라고 말하였다. 한말의 격동기에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을 상실하는 참담한 좌절 속에서 공자의 이러한 말을 좇아 서해 절해의 고도 왕등도로 들어갔다가 부안의 계화도에서 일생을 마친 도학자가 바로 한말의 거유(巨儒), 간재(艮齋) 전우(田愚)이다. 간재 전우는 “부왜 역적 박영효를 처단하라”며 고종황제에게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는 계화도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는데 초대법무장관인 김병로, 서예의 대가 강암 송성용, 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백관수 등이 그의 제자들이다.
학문의 내용은 달랐지만 박상만 선생님은 계화도에서 교육의 열정을 불태웠다는 점에서 간재 선생과 공통점이 있다.
▲박상만 선생님에게 공로패를 수여하고 감사의 인사말을 하는 홍성대 상산학원 이사장4
상산학원 홍성대 이사장이 박상만 선생님에게 공로패를 드렸다.
“언젠가 교정에서 만난 선생님의 머리에 하얗게 서리가 내린 것을 보고 시간의 무상함을 실감했습니다. 그런데 박사학위를 취득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그 학구열에 진정으로 격려의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동안 선생님께서 상산학원을 위해 헌신하신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의 음악회가 그것을 입증하고도 남습니다. 때문에 오늘 선생님의 정년을 기념하여 제자들이 베푼 이 음악회는 그 어느 음악회보다도 뜻깊고 아름다운 자리입니다. 교단에서 가르치는 일을 모두 마치고 떠나시는 은사님께 보은의 자리로 제자들이 마련한 것이니 이보다 더 멋있는 자리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2부 출판기념회. 홍성대 이사장의 제의로 건배하고 있다.헌정음악회 2부 순서로 선생님이 내신 <다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이 책에는 그의 가난했던 유년시절과 학창시절, 항상 삶의 등불이 돼 준 신앙심, 성악가가 되기 위한 꿈과 좌절, 음악교육에 대한 열정, 음악평론, 그리고 작곡한 노래들의 악보집 등이 담겨있다.
이날 헌정음악회에는 부안 마포초등학교와 계화초등학교의 제자들이 참석하여 선생님과 함께 40년 전으로 시간 여행을 하며 선생님이 가르쳐준 노래를 가슴 속으로 불렀다.
/허정균(풀꽃세상을위한모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