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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 거북님을 호출하다(1)
(1)명주실 날아갈세라 하늬바람결조차 숨을 멈춘다.
북처럼 팽팽하게 매어놓은 수틀 한마당에서, 예리한 빛살로만 형체 가늠할 바늘이 휙 치솟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곤두박질치며 해질녘 바다빛깔의 본견바닥을 사정없이 째고 숨고, 다시 날카롭게 번뜩이며 솟구친다. 마치 칼날 꼿꼿이 세워 하늘을 핑핑 날아다니는 협객의 춤사위처럼, 바늘귀에 꿰인 실은 그 몸이 가는 길 따라 외가닥 주름을 살랑살랑 잡으며 오르내리고 있다. 물밖엔 아무 것도 없어 보이는 물결에서 냉큼, 정어리 물고 흔드는 물수리의 날갯짓 같기도 하다. 바늘 잡은 손끝을 맴돌던 땀방울에 겨워, 찌를 때마다 빽빽 외마디 비명을 지르던 수틀 바닥은, 아픔을 초월하다 하다 드디어 하늘이 되고, 나는 그 하늘에다 학의 깃을 문신처럼 새긴다. 까마득한 내 전생이 옷깃 스치는 소리도 없이 다가와서
똑 똑 똑, 안부 챙기는 배꼽 밑에 점 하나.
(2)나는 수틀을 밀어놓고 얼굴이니 머리니 정성껏 매만졌다.
옷매무새도 단정히 하였다. 그리고 조신한 태도로 안채에 들어가서는 다소곳하게 절을 올린 다음 아버지께 여쭈었다.
“아버님 어떠한 일로 소녀를 부르셨는지요?”
(3)궁중에서 한 잔 하셨는지 얼굴이 불콰해진 아버지는 절을 하고 앉고 말을 하는 딸의 태를 요모조모 뜯어본 한참만에야 비로소 입을 여셨다.
“곱기도 고운 지고······,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온들 내 여식만 하겠느냐. 서라벌에 자자한 그 칭송, 헛말이 아닌 게야.”
그 말씀 왠지 부끄러워 머리를 숙였지만 아버지 마음속 풍경이 내 속에 들어옴은 막을 수가 없었다.
‘혼삿말 아닌 다른 얘기는 있을 수 없을 테죠.’
(4)“오늘 대왕마마와 황후마마가 나를 내전으로 부르시더니······ 황송하게도 친히 어주를 내리시더구나. 그리고는 대왕마마로선 한 분 뿐인 조카님을 부르신 게야. 너의 배필로 말이니라.”
가슴이 덜커덩거리며 수렁에 눕는 순간이었다.
“그 분의 학식은 왕가에서도 소문났단다.”
그러고 아버지 얼굴표정이 더욱 근엄해지셨다.
(5)“이 아비는 몸 둘 바 몰랐느니라. 황공, 황공하옵니다, 그 말밖엔 도무지 생각이 안 나더구나. 얘야, 들어보아라. 시조 박혁거세로부터 28대 진덕여왕 때까지는 순수 왕가혈통인 성골이 왕족이었으나 29대 태종 무열왕 시대부터는 진골이 임금이니라. 이 시대에 왕족인 진골 쪽에서 한 단계 낮은 골품의 우리 귀족을 배필로 삼으시겠다니 이런 이변이 어디에 있겠느냐, 얘야, 아니 그러하냐? ······넝쿨 채 호박 굴러든 격이 아니겠느냐?”
(6)아무리 진골이기로서니 내 배필감이 누구냐고, 이목구비는 어떠하며, 신체는 또 어느 정도며, 목소리는 과연 부드러운지 탁한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지 않으냐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래도 애써 참으며 조용조용 반항하였다.
“아버님······ 소녀 아직 어려서 남의 지어미감 못되옵니다.”
(7)그러자 아버지는 방바닥을 탁 치며 크게 웃으셨다.
“혼삿말을 꺼내니 네가 몹시 부끄러운 게야. 아암, 그럴 것이야.”
‘딸의 마음 움직이는 바를 당신 편리 할대로 알아맞히시는 아버님께 더 이상 무슨 말대답을 하겠습니까?’
“얘야 수로야, 들어보아라. 네 어미도 열여섯에 시집 왔더니라.”
‘열여섯에 시집 오셨거나 어쨌거나 나의 생모도 아니신데요?’
“네 나이 무에 그다지 어리다는 말이냐?······가문의 영광에다 별을 따는 일이니라. 새 울고 꽃이 필 무렵인 내년 사월로 날을 받았으니 그리 알고 있으려무나.”
‘아이구 세상에, 아무리 하늘의 별이라고 한들, 먼빛으로라도 구경 한 번 못한 별하고 혼례를 치르다니, 기가 차고 매가 차고 비렁뱅이가 쪽박을 걷어찰 노릇이군요.’
그래도 나는 공손한 얼굴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8)“아버님, 언제 그리 정하셨사옵니까?”
“하하핫! 머뭇거릴 까닭이 무에 있었겠느냐? 마마께서는 이런 언질까지 내리셨느니라. 들어보겠느냐? 내년 봄에 당신의 조카님을 우리 수로랑 맺어주고 나서 그 기념으로 새 관직을 내려주시겠노라 하셨던 게야.”
점점 풍선같이 부풀어가는 꿈이었다. 파바방, 부풀기도 전에 터질까 오마 조마 두근두근하였다.
“하하하, 기분 좋구나, 우리집안 불같이 일어날 게다.”
(9)“그 분이 그리도 훌륭하신 분인가요?”
“아암, 그 분은 낭도 따위하고는 비교거리도 안 되는 신분인즉, 대왕마마께는 둘도 없는 인물이란 것을 명심, 또 명심하고 각별히 모셔야 하느니라.”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시는 아버지의 속내가 환히 들여다보였다.
(10)외동딸 이름을 수로라고 지어주신 데에는 까닭이 있다. 저 가락국의 첫 대왕과 똑 같은 이름, 한자 풀이는 달라도 음으로는 똑 같은 수로라고 부른다는 것부터가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 요상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지아비 얼굴조차도 모르고 가례를 치르다니, 참을 수, 참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스스로도 당돌하다 싶게 여쭈었다.
“아버님, 그 분은 얼굴이 기름한가요, 동그스름한가요, 아니면 모가 났나요?”
“고이연!”
미간을 바짝 세우시고서 아버지는 중언부언하셨다.
(11)“무슨 말을 그토록 불경스레 하는고? 내 여식이 왕가의 훌륭한 배필 만날 때를 대비하여 우리는 이날 이때껏 온 정성 다하여 널 길렀거늘······”
이날 이때껏 온 정성 다하여 길렀다는 그 말씀엔 이 수로가 친딸이 아니라는 뜻이 담겨있다. 진작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막상 ‘우리는 이때껏 온 정성 다하여 널 길렀거늘······’이라는 말씀에는 서운하지 않을 수 없다. 하늘에서 떨어졌나, 땅에서 솟아났나, 도대체 생각수록 오리무중인 나의 정체 때문에 또 한참동안 멍하였다.
(12)“아씨, 아씨, 어르신이 무어라 그러셔요?”
어릴 때부터 동무처럼 자라온 막분이가 조심조심 눈치를 보며 다가왔다.
“아무것도 아니다.”
“에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고 씌어 있는데요? 아씨 얼굴에······”
“에그~ 글 한 자 모르는 것이 얼굴에 쓰인 글은 어찌 읽어?”
“아씨도 참, 이년이 글자 모른다고 타박을 하시는 거여요? 이년은 이래 뵈도, 산전수전 다 겪어 세상에 모를 일이 별로 없답니다.”
막분이 보름달모양 얼굴에 지난 늦봄 일이 스쳤다. 콧구멍 발름거리며 실눈이, 그 장면 떠올리면서 엉덩이를 씰룩, 씰룩거린다.
(13)그때 나는 외우기 만만찮은 십우(十牛) 이치를 한 단계 한 단계 외우며 별당 뒤뜰을 거닐고 있었다. 그런데, 매화나무 아래에 무성한 모란 숲 저쪽에서 괴이쩍은 신음이 들려오고, 자기 본성을 ‘소’로 형상화한 거라는 그 ‘소’를 떠올리다보니 소의 신음이 진짜로, 실제로, 어디선가 들려왔다. 꽃나무 가지를 살며시 비집고 들여다보려니, 아 글쎄, 모란꽃나무 뒤에서 바위가 턱, 앞을 가로막는 거였다.
(14)나는 몸을 일으키며 바위가 신음소릴 내질렀더란 말인가 하다가 바위 위편으로 목을 빼서 넘어다보았는데, ‘어머나, 이런······’ 하마터면 자빠질 뻔했다. 아랫도리만 훌렁 벗어 팽개친 웬 놈이 막분이에게 올라타서는 막분이를, 팍팍 죽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보니 정말 죽이는 건 아닌 모양, 막분이 년이 놈의 엉덩짝을 끌어당기며 마치 콧노래 같은 소리를 연달아······, 알고 보니 짐작 가는 사건이 너무 창피하였다. 아무튼 나는 치마를 밟아가며 엎어질듯 도망쳤다. 어떻게 방문을 열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놀란 가슴 가라앉히느라 한 동안 딸꾹질까지 하는 내 귀에, 콧노래, 메아리에 버무린 그 소리가 파고들었다. 곧이어 막분이 쿵쾅거리며 뛰어들어 내 앞에 엎어졌다.
(15)“아이고 큰일이다. 너를 어찌해야 하니?”
“아씨, 아씨, 용서하옵시오. 한번만, 이번 한번만······”
“한번이라니? 이번이 처음이라는 말이냐?”
“아이구 처음이고말고요. 한번만, 꼭 한번만 용서하시와요.”
(16)“다시는 몹쓸 그 짓을, 아니 하겠단 그 말이냐?”
“얘, 아씨, 이년은 축생보다 천한 년입니다.”
말이야 청산유수다.
“하오나 이년, 뚫린 이 입으로 맹세한 일은, 설사 몸이 두 쪽 나는 한이 있더라도 지키겠어요. 천지신명께 맹세하겠어요. 맹세하고말고요.”
“그럼 네 죄를 네 스스로 알렷다?”
“아다마다요, 하지만 아씨,”
좀 풀어주니 한 수 더 뜨는 조년 조 조동뺑이,
“아씨만 눈감아주신다면 이년, 평생 아씨께 입에 혀처럼 몸 바치겠사옵니다.”
“진심이렷다?”
“두고 보옵소서.”
“헌데 그놈은 누구더냐?”
“무돌이옵니다.”
범인은 무돌이라는 마당쇠, 다시금 생각해도 낯 뜨거워 구체적으로는 묻지 못하고서 닦달만 하였다.
(17)“어쩌다, 어쩌다 그리 흉측한 죄를 저질렀더란 말이냐?”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옵니다만, 이년의 몸속엔 도깨비가 잠을 자고 있었사와요. 하온데 하루는 무돌이가 오더니, 그만 그 도깨비를 깨우고야 말았네요.”
그러고 아주 당당해진 막분이의 말본새
“이제는 그 도깨비를 당해낼 재간이 없사옵니다.······ 모두가, 이 모두가 그 도깨비 탓이와요.”
“도깨비라?”
“예, 도깨빕죠. 그놈 참, 요망하기 이를 데 없다고요. 아 글쎄, 고놈의 도깨비가 나타날 때마다 무돌이가 단단히 혼 구멍을 내어주어야만 슬며시 수그러든다니까요.”
“그래서 그토록 윽박질렀구나? 그럴 때에······ 얘, 막분아, 그럴 때에 말이야, 아프더냐?”
(18)“모르겠사와요. 이 미천한 것은 그저, 도깨비가 미쳐 날뛸 때마다 그저, 천지가 아득할 뿐인걸요.”
혼백이 뺑소니쳐버리는, 요상한 기분이니 뭐니 하면서 사람 참 궁금증 나게 하는 못된 아이 아닌가.
이 궁리 저 궁리 하던 끝에 드디어 결정 내렸다.
“여차저차하거나 말거나, 막분아, 네 일이 발설되었다 하는 날이면, 필경 우리 집안은 온 서라벌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게야.”
막분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니 아무도 몰래 무돌이 녀석을 멀리 떠나보내어라. 종놈 하나 도망친 것쯤이야 뭐, 예삿일에 속하겠지?”
그 후에 홑바지 방귀 새듯 사라져버린 무돌이놈.
여전히 집 주변을 돌며 막분이와 정을 통했는지 어쨌는지는 모를 일이었으나, 어쨌든 두 번 다시는 그런 일이 없었다.
(19)막분이 말고는 도무지 말상대가 없는 나는 그녀에게 하소연하였다.
“막분아, 아버님께서 나를 왕가에 시집보내려고 하시는구나.”
“아이고 아씨, 감축, 또 감축하옵니다. 왕가로 시집을 가시다니, 세상에 둘도 없이 기쁜 일이 아니오니까? 아씨도 참, 근심하실 일이 그다지도 없었사와요?”
막분이가 그렇게 지껄이면서 덩실덩실 어깨춤까지 추는 거였다.
“아가씨, 이년도 대궐로 데려가시는 겁죠?”
“이 무지한 것아! 왕가로 시집만 가면 장땡이라더냐?”
나는 혀를 끌끌 찼다.
“그게 대궐로 들어가는 거냐? 그냥, 대왕마마의 조카님이라 그것이지······아이고, 동무다 하고 말상대한 내 입이 원망스럽구나.”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막분이는 숨이 깔딱 넘어가기라도 할 듯이 좋아하였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뒷문제치고 얼굴조차 알길 없는 제 어미를 만난 것 마냥 떠들어댔다.
“아이고, 이제야 우리 아씨도 진정한 여인이 되시는가 보옵니다.”
(20)평생토록 입에 혀처럼 아씨를 모시겠다는 둥 헛공약 펑펑 해대며 “감축, 또 감축······”을 중복 반복해가며 축하작전에 여념이 없는 막분이를 나는 어이없이 바라보았다. 보다 못하여 “그래, 무돌이는 대체 어디로 갔다더냐?” 그리 묻고 난 뒤에야 “쪽박이라도 차고 비럭질을 다닐 거야요.” 하며 그제야 싹 앵돌아지는 얼굴로 입이 조용해지는 거였다.
첫댓글 난정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바쁘신 와중에
새로운 소설 (수로. 거북님을 호출 하다)감사 드립니다.
날씨가 춥네요.
건강 조심 하세요.
난정님
이런 새벽에 장편 읽고 가네요.
건강 하세요.............
오랜만에 소설 잘 읽고 갑니다..........^^
잘 읽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