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학
정 성 천
지난 1월 우리 집 앞 나무 난간(우드 데크)에서 우연히 얼어 죽은 사마귀 한 마리를 발견했다. 몸집이 크고 아직도 색깔이 여린 녹색인 걸 보니 의외의 죽음을 갑자기 맞이한 게 분명하다. 과거 여러 번 나무 탁자 상판 밑에 사마귀 알집이 붙어 있는 걸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언제 올라와서 알을 붙이는 것이며 알을 붙인 뒤에는 사마귀가 어떻게 되는지 여태껏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기에 푸른 사마귀 사체를 우리 집 나무 난간에서 그것도 한겨울에 목격한다는 일이 참으로 괴이하게 여겨졌다. 이놈도 알을 붙이려고 나무 난간에 올라왔던 놈일 것이다. 죽은 놈은 암놈이고 아직 배가 팽팽하며 탁자 상판 밑을 살펴봐도 붙여 놓은 알집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미루어 짐작해보니 지난해 초겨울 알을 붙이려다가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얼어 죽은 게 분명하다.
이 사마귀를 보니 지난해 10월 하순, 늦가을에 목격했던 또 다른 사마귀가 생각난다. 잔디밭 가장자리에 있는 꽃밭에서 아내와 손녀가 황급히 불러서 가보니 철모르고 늦게 피어난 다알리아꽃에서 철딱서니 없이 꿀을 빨던 나비 한 마리가 사마귀에 잡아 먹히고 있었다. 사마귀의 그 갈퀴 같은 앞발로 여리디 약한 나비의 날개를 움켜쥐고 나비의 몸체를 게걸스럽게 뜯어먹던 그 충격적인 현장을 손녀와 함께 말없이 바라보았던 일이 생각 난다.
그 당시에도 그 광경을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너무 늦게 활짝 핀 다알리아꽃도 흔하게 보는 일이 아니고 한해살이 나비가 늦은 가을날 꿀을 위해 꽃을 찾는 일 또한 흔한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영양 보충을 더 일찍 서두르고 짝짓기에 들어가야 할 시기에 나비를 잡아먹고 있는 사마귀도 좀 흔치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초겨울에 꽃밭을 정리하던 아내가 시들어 말라버린 다알리아꽃 아래 줄기에서 죽은 채로 붙어 있는 그 사마귀를 목격했다고 한다. 우리 집 정원의 곤충 세 마리는 모두가 자기 의도와 무관한 죽음을 맞이했다고 생각된다. 나비는 잡아 먹혔으니 두말할 나위도 없고 나무 난간의 사마귀나 다알리아꽃의 사마귀도 알을 붙이지 못하고 떠나갔으니 셋 모두가 이생의 마무리 준비가 너무 늦었던 건 아닐까?
나를 돌아본다. 칠십 중반을 넘어선 나이 즉 살아 온 시간보다 남아 있는 시간이 훨씬 짧은 나이인데 나는 이생의 마무리 준비는 잘하고 있는 걸까? 어떻게 하는 것이 잘된 마무리가 될 것인가? 마무리 준비를 잘하려면 먼저 죽음에 대해서 알아야만 하겠다는 생각으로 죽음이라는 단어를 인터넷 검색창에 쳐 보았다. 죽음학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죽음학, 참 생소한 단어이다.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쉽게 들을 수 없었던 단어가 아닌가? 죽음은 종교에서만 다루는 꺼림직하고도 신비스러운 영역으로 학문으로 다루기에는 난해하고 거북한 분야라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죽음을 일상에서 그냥 언급하는 일조차도 꺼렸던 것이 우리나라의 풍습이 아니던가? 이는 조선 500년 동안 삶의 기본 철학을 유교에 그 근본을 두고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유교의 시조인 공자님이 제자가 죽음에 관하여 물었을 때 “아직 삶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라고 대답하셨다. 고 한다. 이는 죽음을 논하기 전에 먼저 삶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이었지만 유교를 믿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죽음을 패배로 취급하며 일상에서 죽음을 언급하는 것조차 기분 나쁜 일로 여기는 것이 사회 통념으로 굳어 버렸다.
하지만 내가 어릴 적만 해도 일상에서는 죽음에 대한 언급을 좋지 않은 것으로 금지했으나 일단 마을의 누군가 죽는 일이 생기면 그 죽음은 마을 전체의 일이었다. 마을 공동체는 장례를 통하여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었을 뿐만 아니라 유가족들의 슬픔도 함께 나누며 자연스럽게 상실에 대한 치유의 역할까지 함께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요즈음은 태어나고 죽는 과정 모두가 병원에서 이루어지는 이른바 ‘죽음의 의료화 현상’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병원에서는 죽음을 의료행위의 실패로 여기며 무리한 연명 치료로 이어지고 그 결과 옛날과 달리 거의 모든 망자가 고독한 죽음을 병원 침대 위에서 맞게 된다. 가족 친지들의 애도 과정도 형식적으로 치루는 현대의 죽음에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남겨진 자는 슬픔을 표현하고 감정을 추스를 틈도 없이 일상으로 돌아오길 강요받는 현대의 바쁘고도 복잡한 사회구조 속에서 유가족들의 상실과 슬픔을 치유하는 과정도 생략되기 일쑤라서 죽음은 더욱 부정적인 형태로 남게 되어버렸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필리프 아리에스(Philippe Ariès)’는“죽음은 인간사회에서 추방되었다”라는 표현을 통해 현대 사회가 죽음을 더이상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고 패배로 여겨 병원과 제도 속에 감추어 버려졌음을 지적했다.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에 자연스럽게‘죽음학(Thanatology)’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던 것 같다.
‘죽음학’이라는 용어는 러시아 생물학자 ‘엘리 메치니코프(Élie Metchnikoff)’가 1903년 죽음을 생물학적 과정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의미로 처음 사용했으나 현대에서는 인간이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의미화하는지를 다루는 데서 죽음학의 성립 근거를 찾는다. 외국에서는 죽음학이 이미 학문적 연구에 더해 사회적 실천으로 자리 잡았고 교육·의료·문화 전반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죽음학은 초기 걸음마 상태로 서양 국가들은 말할 것도 없고 동양의 일본과 대만보다도 훨씬 후진성을 보인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이는 유교의 영향이 크다고 말할 수 있고 또한 왜 우리나라 청소년 및 청장년층의 자살 비율이 OECD 국가 중 1위라는 불명예를 우리에게 안겨 주는가? 에 대한 답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 현대 자동차 이름으로도 유명한 미국 애리조나주의 ‘투싼’이라는 도시에서 2015년 세계의 신경과학자, 심리학자, 의학자들이 모여 죽음과 임종 돌봄을 주제로 논의가 확장되었고, 그 결과가 “투싼 선언”으로 발표되었다. “투싼 선언”의 요점은 의식을 뇌의 부산물로만 보는 기존 과학적 관점에는 죽음과 의식의 본질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문제를 제기하고 의식이 단순히 뇌의 부산물이 아니라, 뇌를 넘어서는 성격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의식의 두뇌로부터의 독립선언문이라고도 부른다. 투싼 선언은 죽음을 인간다운 방식으로 이해하고, 교육과 제도를 통해 존엄한 임종을 보장하자는 국제적 합의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투싼 선언은 죽음학이 단순히 임종 준비 교육을 넘어, 의식의 본질과 사후 존속 가능성을 탐구하는 학문으로 발전하는 데 중요한 철학적·과학적 기반을 제공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작년 2025년 4월 19일 한국 죽음학회(회장:최준식)와 영국 옥스퍼드 휴먼즈 공동 주관으로 종교학자, 의사, 심리학자, 예술인 등 약 20여 명이 참여하여 서울 선언문을 발표했다. 서울 선언은 죽음 이후에도 인간 의식이 존속한다는 관점을 학문적·사회적 차원에서 공표하고, 이를 교육과 돌봄에 적용하자는 국제적 합의문이다.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곧 삶의 의미를 어떻게 구성하느냐와 직결된다. 죽음 이후 의식 존속 가능성은 단순히 학문적 논의가 아니라, 윤리·법·문화 전반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존엄사, 안락사, 장례 문화, 영적 돌봄 같은 주제가 사회적 공론장에서 더 활발히 논의되어야 한다. 죽음을 단순한 생물학적 사건이 아니라 의식의 전환으로 보는 관점은 호스피스 완화의료에 새로운 접근으로 환자의 영적·심리적 요구를 존중하는 돌봄 모델이 강화되어야 한다. 죽음을 성찰하는 교육은 삶의 의미를 재발견하게 하고 사회적 성숙을 촉진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청소년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죽음 교육이 확산되어 OECD 국가 중 자살율 1위라는 불명예를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죽음은 벽(壁)이 아니고 문(門)이다.”즉 “죽음은 소멸(消滅)이 아니고 옮겨감이다.”라는 문구에 대한 믿음이 생의 끝자락에 와 있는 노인들의 마음을 좀 더 평안하게 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첫댓글 죽음학, 참 별난 학문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도 벌써 학자들이 연구 과제로 삼아 깊이 있게 논의하고 있음으로 해서 활자화 되어 이론의 여지가 없이 깊이를 더하고는 있다. 하나, 너무 깊이 빠지면 이것도 사교처럼 되어 그것이 정통에서 벗어나 이단으로 여겨지는 것은 아닐지?
무엇이 정통이고 무엇이 이단인가?진리는 진정한 자유로 알아차린 것이어야하고 자유는 외부가 아닌 내면에서부터 시작된다네. 과거의 지식과 조건화된 사고를 내려 놓고 두려움, 욕망, 비교, 권위에서 벗어날 때 진정한 자유가 가능하지 않겠나? 명상과 깨어있는 의식을 통해 현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자유의 핵심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네. 미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