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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 원리 – 정신분석 vs. 진화심리학
이 글에서 쾌감(쾌락)과 불쾌감(불쾌)을 매우 폭넓게 정의할 것이다. 쾌감은 모든 좋은 느낌을 뜻하며 불쾌감은 모든 나쁜 느낌을 뜻한다.
흔히 쾌락 추구와 도덕성 추구를 대립시킨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도덕성 추구는 곧 쾌락 추구다. 곤경에 빠진 할머니를 도와주었을 때 사람들은 뿌듯함을 느낀다. 반면 그 할머니를 모른 체 하고 지나쳤을 때 사람들은 죄책감을 느낀다. 여기서의 뿌듯함은 쾌감에 포함되고, 죄책감을 불쾌감에 포함된다. 사람들은 뿌듯함을 느끼고 싶어하고 죄책감을 피하고 싶어한다.
충동과 도덕성을 대립시키는 것도 마찬가지로 잘못이다. 할머니가 곤경에 빠진 것을 보았을 때 사람들은 도와주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이런 이타적 충동도 충동이다. 악당이 악행을 했을 때 사람들은 그 악당을 혼내주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이런 도덕적 충동도 충동이다.
충동 메커니즘과 쾌-불쾌 메커니즘은 자연 선택이 동물에게 마련해준 요긴한 메커니즘들이다. 동물은 쾌감을 추구하고 불쾌함을 피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충동을 행하려는 경향이 있다.
어떤 사람이 “친구의 사과를 훔쳐 먹을 것인가 아니면 훔치지 않을 것인가” 사이에서 갈등할 때 대립하는 것은 본능적인 충동(자연)과 학습받은 도덕성(문화)이 아니다. 이것은 충동 메커니즘들 사이의 대립이며 쾌-불쾌 메커니즘들 사이의 대립이다. 한편에는 식욕이라는 충동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도덕적으로 행동하려는 충동(양심)이 있다. 한편에는 맛이라는 쾌감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죄책감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즉 본능과 본능이 대립하는 것이다.
충동 메커니즘과 쾌-불쾌 메커니즘은 아무렇게나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것들은 번식 경쟁에 유리하도록 설계되었다. 예컨대 우리는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을 때 쾌감을 느끼며 독이 있는 음식을 먹을 때 불쾌감을 느끼도록 설계되었다. 이 메커니즘이 항상 제대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인간이 쾌락을 추구하고 불쾌를 피하려고 한다는 것은 너무나 뻔한 사실이다. 프로이트는 이런 경향을 쾌락 원리라고 불렀다.
『아담과 이브에게는 배꼽이 있었을까』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종종 사용되는 구절을 반복하면, 프로이트는 옳은 곳에서 독창적이지 않고, 독창적인 곳에서 잘못을 범하고 있다. (140쪽)
프로이트는 뻔한 상식에 쾌락 원리라는 그럴 듯한 이름을 붙여 놓았을 뿐인 것 같다. 즉 맞는 말이긴 하지만 전혀 독창적이지 않아 보인다.
프로이트가 독창적이었던 곳에서 과연 옳은지를 따져보도록 하자.
프로이트는 반복 강박이 쾌락 원리에 들어맞지 않는다며 당혹스러워했다. 그는 반복 강박의 예로 여러 가지를 든다. 예컨대 프로이트는 정신분석 중에 환자들이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들을 의사와의 관계 속에서 되풀이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프로이트의 해석을 믿지 않으므로 그런 식의 데이터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가 든 반복 강박의 예 중에 현대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예컨대 큰 사고를 당해서 엄청나게 고통스러운 경험을 겪은 사람이 그 사고 경험을 계속해서 꿈에서 반복하는 경우가 있다.
인간을 쾌락의 노예라고 생각했던 프로이트에게 있어 이런 현상은 무척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프로이트는 『쾌락 원리를 넘어서』라는 글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프로이트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같은 것에 대해 당혹스러워하기 전에 고통을 포함한 불쾌감 자체가 존재한다는 것에 먼저 의문을 품었어야 했다. 만약 쾌락 원리가 프로이트가 생각하듯이 절대적인 원리라면 인간은 아예 고통 같은 것을 느끼지 말아야 한다. 예컨대 뜨거운 불에 손을 집어 넣고 있어도 고통을 느끼지 말아야 한다.
쾌-불쾌 메커니즘이 어떤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쾌감과 불쾌감을 만들어내는 모듈이 있어야 한다. 이 모듈 역시 인간의 정신 안에 있다.
반면 프로이트는 쾌감과 불쾌감을 주어진 어떤 것으로 생각했다. 마치 맹수가 주어진 어떤 것이고 인간이 맹수를 피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맹수와 고통(불쾌감)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맹수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지만 고통은 인간의 정신적 메커니즘이 만들어낸 것이다.
뜨거운 불에 손을 넣었을 때 인간의 정신 중 어떤 메커니즘이 고통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 사람의 정신 중 어떤 메커니즘이 고통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당황할 필요가 없다.
위안을 주기 때문에 종교를 믿는다고 사람들은 흔히들 생각한다. 정신분석가들뿐 아니라 수많은 학자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이런 생각은 종교를 아편에 비유한 마르크스의 생각과도 일맥 상통한다.
마약을 쾌감을 준다. 그리고 사람들이 마약을 하는 이유는 쾌감을 주기 때문이다.
종교는 위안(일종의 쾌감)을 준다. 신을 믿으면 내세에 천국에서 호강하며 산다고 믿는 것은 분명히 위안을 준다. 또한 신이라는 든든한 동맹자가 뒤에서 자신을 보호해주고 있다는 생각도 위안을 준다. 그렇다면 위안을 주기 때문에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그럴 듯한 설명이 아닐까? 이것이 종교 현상을 모두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마약과 종교적 믿음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마약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의식적으로 선택할 수 있지만 믿음은 의식적으로 선택할 수 없다.
마약 중독자는 “오늘은 마약을 하자”고 결심하고 마약을 할 수 있다. 또는 “오늘은 마약을 하지 말고 내일 하자”고 결심해서 마약 복용을 하루 미룰 수 있다. 그가 그 결심을 100% 지킬 수 없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반면 “오늘은 야훼라는 신을 한 번 믿어볼까”라고 말하며 신을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믿음은 의식적 통제를 벗어나 있다. 우리는 그냥 믿게 되거나 못 믿게 된다.
이제 무의식이 등장할 차례가 되었다. 프로이트는 위안을 얻기 위해서 종교를 믿도록 만드는 것은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이라고 말할 것이다. 쾌락 원리가 인간의 사고에 영향을 끼쳐서 사고를 왜곡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인간의 여러 동기가 지각 또는 사고를 왜곡시킨다는 증거가 많이 있다.
흔히들 “사람들은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라고 한다. 이런 것을 소망적 사고(wishful thinking)한다. http://en.wikipedia.org/wiki/Wishful_thinking에서는 소망적 사고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소망적 사고란 증거나 합리성에 호소하는 대신 기쁨(쾌감)을 주느냐에 따라 믿음을 형성하거나 결정을 하는 것을 말한다(Wishful thinking is the formation of beliefs and making decisions according to what might be pleasing to imagine instead of by appealing to evidence or rationality).
이 정의에서 소망적 사고는 쾌감(pleasure)과 연결된다. 프로이트 역시 쾌감 또는 만족감과 연결시킨다. 우리가 소원을 성취했을 때 쾌감을 느끼므로 이것은 당연한 연결로 보인다.
하지만 쾌-불쾌 메커니즘이 번식 경쟁에 유리하도록 설계되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혼란에 빠질 수 있다. 쾌-불쾌 메커니즘은 인간 정신 안에 있는 수많은 메커니즘들 또는 모듈들 중에 하나일 뿐이다. 그것을 절대화하면 안된다.
공리주의는 프로이트와는 다른 방식으로 쾌-불쾌 메커니즘을 절대화한다. 공리주의는 “불필요한 고통을 주는 것은 도덕적으로 나쁘다”라고 주장한다. 너무 뻔한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을 절대화하면 문제가 생긴다.
인간은 오직 쾌락을 추구하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인간이 추구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번식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쾌-불쾌 메커니즘은 번식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수많은 메커니즘들 중에 하나일 뿐이다.
스타크래프트에서 승리의 절대적인 기준은 “상대의 건물을 몽땅 파괴하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는 자원을 많이 캐고, 아군의 병사들을 많이 만들어내고, 상대의 병사들을 많이 죽이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최종 목적은 자원을 캐는 것도 상대의 병사를 죽이는 것도 아니다. 상대의 건물을 몽땅 파괴하는 자가 결국은 이긴다.
바둑에서 승리의 절대적인 기준은 “집을 상대보다 많이 차지하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상대의 대마를 공격하고 자신의 대마를 살리려고 한다. 하지만 최종 목적은 집을 많이 차지하는 것이다. 대마를 잡고도 전체적으로 집이 작으면 질 수 있다.
“상대의 건물을 몽땅 파괴하는 것” 또는 “집을 상대보다 많이 차지하는 것”을 번식 경쟁이라고 한다면, “자원을 많이 캐는 것” 또는 “대마를 공격하는 것”을 쾌-불쾌 메커니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번식 경쟁을 위해 쾌-불쾌 메커니즘이 있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인간의 도덕성은 고통을 기준으로 설계된 것이 아니라 번식 경쟁을 기준으로 설계되었다. 물론 번식 경쟁의 기준과 고통의 기준은 상당히 부합한다. 우리는 번식 경쟁에 불리한 방향으로 사태가 전개될 때(예컨대 상처를 입었을 때) 고통을 느낀다. 하지만 두 기준은 엄연히 구분될 수 있다. 두 기준 중 어떤 것이 더 본질적인 기준인지를 가리기 위해서는 두 기준이 충돌할 때를 살펴보아야 한다.
스타크래프트에는 치즈 러쉬라는 것이 있다. 테란이 저그와 대결할 때 초반에 흔히 쓰는 전술로 자원을 캐는 일꾼(SCV)을 대규모로 데리고 가서 전투를 벌이는 것을 말한다. “자원을 얼마나 캐는가”를 기준으로 볼 때 이 전술을 어리석어 보인다. 하지만 스타크래프트에서 최종 목적은 자원을 캐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건물을 모두 부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전술은 유력한 전술일 수 있으며 프로 게이머들도 가끔 써먹는다.
바둑에는 사석 전법이라는 것이 있다. 자신의 말을 일부러 죽이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돌을 살리고 상대의 돌을 잡는 것”을 기준으로 볼 때 이 전술은 어리석어 보인다. 하지만 바둑의 최종 목적은 돌을 잡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집을 차지하는 것이다. 고수일수록 사석 전법을 더 잘 사용한다.
강간은 왜 나쁜가? 공리주의자는 고통을 주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반면 진화심리학은 더 근본적인 이유를 댈 것이다. 즉 강간이 나쁜 이유는 강간당한 사람의 번식 경쟁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강간을 당할 때에 전신마취를 시켜 놓았으며 그 기억이 전혀 없었다고 하더라도 강간은 나쁘다. 고통이 전혀 없다 하더라도 말이다.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하도록 살인을 하더라도, 그리고 살인 당한 사람의 가족이 없고 친구도 없어서 슬퍼할 사람이 없더라도 살인은 나쁘다. 왜냐하면 살인당한 사람이 번식(자식을 낳거나 친족을 돌보는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심리학 교과서에 나오는 유명한 사례를 보자. 어떤 사람이 다른 아홉 명과 함께 어떤 과제를 수행한다. 두 선 중 어느 선이 더 긴 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하나의 선이 다른 선보다 상당히 더 길어서 육안으로도 충분히 판단할 수 있는 상태다. 그런데 그 사람은 마지막에 말하도록 되어 있으며 먼저 말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틀린 대답을 내놓는다. 물론 모두 짜고 한 것이다. 그럼 마지막 사람(이 사람만 진짜 피험자다)이 틀린 대답을 내놓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혼자만 했을 때는 거의 없는 일이다. 사고 왜곡이 일어난 것이다.
진화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왕따 당하지 않으려는 욕망으로 설명한다. 왕따 당하는 것은 생존과 번식에 해가 된다. 피험자는 진실을 말하고 왕따를 당할 것인가, 아니면 거짓을 말하고 왕따당하지 않을 것인가라는 선택에 직면하며 많은 경우에 (무의식적으로) 진실을 포기한다. 번식 경쟁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에는 아주 합리적인 선택이다. 자연선택은 인간에게 기본적으로 진리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생존과 번식에 대한 욕망을 심어준다.
물론 왕따 당하는 것은 불쾌한 경험이다. 따라서 프로이트식의 쾌락 원리로 이 실험을 설명할 수도 있다. 왕따 당하는 불쾌한 경험을 피하기 위해 무의식적인 사고 왜곡이 일어났다고 말이다.
이 예에서는 두 설명이 다 가능하므로 어떤 것이 더 근본적인가를 가리기가 힘들다. 왜냐하면 위안이라는 측면과 번식 경쟁이라는 측면이 서로 부합하기 때문이다.
치즈 러쉬, 사석 전법, 고통 없는 강간 등에서는 두 기준이 충돌한다. 이 때에 누가 더 근본적인 기준인지가 드러난다.
한 방에 뱀과 같이 갖히게 되었다고 치자. 그 뱀에 독이 없다고 믿는다면 위안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믿고 뱀과 친하게 지내려는 사람과 그 뱀에 독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뱀을 피하는 사람 중에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
자식이 심하게 다쳤을 때 다치지 않았다고 믿는다면 위안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믿는 사람과 자식이 심하게 다쳤다는 고통스러운 사실을 인정하고 치료해주는 사람 중에 누가 번식 경쟁에서 성공할 것인가?
어떤 사람과 시비가 붙어서 싸움을 하기 직전까지 가게 되었다. 상대를 보니 나보다 덩치가 크다. 이 때 내가 상대를 때려눕힐 수 있다고 믿는다면 위안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믿고 싸움을 하는 사람과 자신의 처지를 알아차리고 싸움을 피하는 사람 중에 누가 더 오래 살 것인가?
사고 왜곡이 번식 경쟁에 유리하면서 위안을 줄 때가 있다. 반면 사고 왜곡이 번식 경쟁에 불리하면서 위안을 줄 때도 있다. 진화심리학에서는 전자의 경우에만 사고 왜곡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한다. 반면 프로이트는 전자와 후자 모두에서 사고 왜곡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한다. 프로이트의 인간은 쾌락 원리의 절대적 명령을 따르기 때문이다.
“사람은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는 “사람은 (번식 경쟁에) 유리한 것만 믿는다”로 바뀌어야 한다.
프로이트는 불쾌한 인상들은 쉽게 잊혀지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불쾌한 인상들은 쉽게 잊혀진다고 하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여러 심리학자들은 그 사실에 주목했고 저 위대한 다윈C. Darwin도 이 사실에서 커다란 인상을 받은 나머지 자신의 이론과 배치되는 듯한 관찰 사례들을 아주 세심하게 기록해 놓는 것을 <황금률>로 삼기까지 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러한 관찰 결과들이야말로 그의 기억 속에 머물러 있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망각을 수단으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을 방어한다는 원칙에 대해서 처음 듣게 되는 것은 사람은 거의 예외 없이, 자신은
오히려 고통스러운 기억이야말로 얼마나 잊기 어려운 것인지 절실하게 체험한 적이 있노라고 말하면서, 이의를
제기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상처를 받은 기억이나 굴욕을 느꼈던 기억은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끊임없이 회상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도 맞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정신분석 강의, 프로이트 전집,
1권』,
프로이트는 기억을 불쾌한 것과 불쾌하지 않은 것으로 나누고 불쾌한 것이 더 쉽게 잊혀진다고 주장한다. 편의상 쾌감의 정도를 수치화해 보자. 숫자가 클수록 쾌감이 크다. 0일 때에는 쾌감도 불쾌감도 없다. 음수일 때에는 불쾌한 경험이다.
A(-100), B(-50), C(-20), D(-5), E(0), F(5), G(20), H(50), I(100)
프로이트의 생각대로라면 I가 가장 잘 기억될 것이고 그 다음은 H, 그 다음은 G일 것이다. 가장 불쾌한 경험인 A가 가장 기억이 나지 않을 것이다.
진화심리학은 전혀 다르게 예측한다. 양쪽 극단(A, B, H, I)이 가장 잘 기억될 것이며 가운데로 갈수록 기억이 안 날 것이다. 그리하여 D, E, F가 가장 기억이 나지 않을 것이다. 쾌감을 주는 사건이든 불쾌감을 주는 사건이든 그 느낌이 강렬할수록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수에게 당한 경험은 극히 불쾌함에도 불구하고 잘 기억된다. 왜냐하면 복수를 하는 것이 번식 경쟁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다윈은 자신의 이론과 배치되는 것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것들은 불쾌하기도 하지만 자신에게 불리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쾌락 원리로도 설명이 되지만 이기적 유전자(번식 경쟁)로도 설명이 된다.
첫댓글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죄책감 메커니즘은 분노 메커니즘만큼이나 타고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