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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제 3 강 메시지(마가복음 2:1~17)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말씀 / 마가복음 2 : 1~17
요절 / 마가복음 2 : 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보는 관점도 있습니다. 개인의 삶에도 많은 투쟁이 있고 다툼이 있습니다. 싸움에도 목표가 있습니다.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 싸우는 경우도 있고 이익을 얻기 위하여 싸우는 경우도 많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의 갈등과 대립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부터 예수님께서는 본격적으로 유대교 종교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는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갈등과 대립을 시작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무엇을 위하여 갈등을 시작하셨는지 주목하여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싸우시는 목적과 내용을 잘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1~13)
1,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 계신 집 앞에 가득 모였습니다. 가버나움은 ‘위로의 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에서 지중해로 가는 길에 있었습니다. 가버나움에는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고, 로마 세관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많은 활동을 하셨습니다. 이곳에서 여러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이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왔습니다. 이 사람들은 병 낫기 원합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병 고쳐주시는 메시야로 인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올바로 알도록 도우십니다. 계속 말씀을 전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니” 병고침 받고자하는 일념을 가진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하여 이 세상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지 알려주십니다. 성경 말씀을 통하여 무엇으로부터 구원받아야 진정한 구원인지 말씀하십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이 때 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중풍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이 무리한 시도를 하였습니다. 중풍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이예수님께서 계신 집 지붕을 뜯었습니다. 중풍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말씀 전하고 있는 집 안으로 흙 먼지를 날린 후, 염치 없게 중풍병자를 달아서 내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화가 났습니다. 늦게 온 사람이 왜 앞으로 나가는가?
5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뜻밖의 말씀입니다. 중풍병자와 그를 메고 온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한 가지 중풍병을 고침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붕을 뜯어 남의 집에 큰 구멍을 내면서까지 예수님 앞에 온 사람에게 ‘죄 사함 받았다’고 하십니다. 예상외의 말씀입니다. 유대사회에서 죄사함은 무엇입니까? 유대에서 죄사함은 반드시 성전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죄를 사함 받으려면 성전으로 가야 합니다. 성전에 가서 죄사함 받을 때, 속죄제물을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성전에서 속죄받기 위하여 제물은 번제로 드립니다. 속죄제를 집행하는 일은 성전에서 제사장이 맡아서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이 아닌 곳에서 속죄제물도 없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죄 사함을 예수님께서 선포하여 주십니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유대사회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한다는 뜻으로 전달될 수 있습니다. 대단히 임팩트가 큰 말씀입니다.
6,7절을 보십시오. 과연 여기 있던 서기관들은 ‘신성모독’이라 판단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죄를 사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이심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서기관들은 마음으로 판단하고 생각만 그렇게 하였을 뿐 아직은 드러내어 비판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8~10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예수님께서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십니다. 적극적으로 서기관들을 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서기관들은 아직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생각을 아직 드러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먼저 그들의 생각을 지적하십니다.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의 관점을 지적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예수님께서 매우 파격적이고 놀라운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그동안 하늘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죄악된 땅으로부터 구별된 성막과 성전으로 나오게 하셔서 특별한 제사제도를 거쳐서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죄를 사하시는 주체는 하늘의 하나님이시고 죄 사함의 은혜를 입는 곳은 오직 성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사하는 것이 예수님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성전 아닌 곳에서 이루어진다 하십니다. 유대교에서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은 오직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고 믿어야만 납득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해할 수도 없으며 믿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하십니까? 그동안 사람들은 예수님을 착한 일 해주시는 능력있는 선지자가 오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나병환자가 깨끗해진 이후, 새로운 양상이 벌어졌습니다. 오시리라고 한 그 메시야이신가? 메시야가 아니고는 나병을 낫게 할 수는 없다 생각하였습니다. 사람들의 인기와 관심이 매우 높아졌습니다. 그렇지만, 올바른 메시아관 없이 메시아로 보는 것이 큰 문제였습니다. 그릇된 메시아관이 그 시대에는 강력하게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응하여 예수님께서 왜 오셨는지, 오셔서 무슨 일을 하시는지 밝히시고 본격적으로 올바른 메시야의 길과 메시야를 통하여 받는 은혜를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올바른 메시야관을 심는 전쟁, 올바른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전쟁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10절 후반절~12절을 보십시오.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나님의 아들께 죄 사함 받고 ‘일어나 걸어가라' 말씀을 듣고 순종하자 중풍병자가 일어나 걸어 갔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중풍병자가 즉시 일어나 걷는 일이 더 큰 일, 더 놀라운 일로 보입니다.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노라”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심으로써 불치병을 고치신 예수님께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입증하셨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많은 무리가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성경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가르치셔서 시대의 진정한 구원과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하나님 나라를 백성들에게 전하셨습니다.
2. 나를 따르라(14~17)
1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가버나움은 다마스커스로 가는 교통 중심지였기 때문에 각지 상인들의 왕래가 많았습니다. 로마는 이곳에 세관을 설치하고 관세, 통행세를 징수하였습니다. 로마는 유대에서 직접 세금 징수 할 경우 조세거부 성향이 노골화 될 것을 피하고자 하였습니다. 로마는 유대인들을 세금징수원으로 세웠습니다. 유대인 세금징수원들은 정한 세금보다 더 많은 세금을 거두었으므로 백성들의 원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유대사회는 세리들을 죄인으로 정죄하였습니다. 세리가 죽었을 때, 곡해줄 수 없습니다. 세리의 증언은 법원에서 효력이 없습니다. 세리와 식사하는 것도 금지입니다. 레위는 그런 세리 중의 하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성경에서의 ‘죄’는 하나님을 떠나 피조물을 하나님 대신 섬기는 것입니다. 세리 레위의 문제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나라와 민족을 배신하고 동족을 착취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볼 때 근본 문제는 돈을 사랑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인생을 복 주시는 것을 믿지 않고 자기 힘으로 돈을 벌어서 자기가 자기를 행복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레위에게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그가 돈을 따르지 말고 진리를 따르게 하십니다. 마음의 이기심, 욕심을 따르는 대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레위가 돈 중심의 삶을 청산하고 예수님 중심으로 살도록 방향 주셨습니다. 세리 레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동안의 삶을 청산하였습니다. 예수님 중심, 예수님 말씀 중심으로 살기로 결단하고 순종하였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그를 받아 주셨습니다. 그러자 다른 많은 죄인들이 다 함께 와서 죄 사함의 잔치, 기쁨의 잔치, 천국 잔치가 이 땅위에 벌어졌습니다.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예수님께서는 세리 레위를 제자로 삼으신 은혜로 다른 많은 죄인들이 오는 것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이것은 또 다른 큰 파격입니다. 유대인들은 세리, 죄인들과 함께 식사교제를 나눈다는 것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는 일로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서기관들은 죄인과 세리들은 함께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서기관들 뿐 아니라 유대사회 전체가 이날의 식사자리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주의 깊게 보겠습니다.
17절을 다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아픈 사람이라 하십니다. 아픈 사람은 의사에게 데려가 치료합니다. 마찬가지로 죄인들도 영적 의사에게 치료 받으면 다시 나을 사람이라 하십니다. 유대사회는 죄인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인간그룹으로 단정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은 돌이킬 수 없는 존재가 아니며, 죄인들도 회개할 수 있음과 회개한 죄인들과는 얼마든지 교제하고 함께 할 수 있다고 보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죄인을 부르러 오신 분,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신 분이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에서 두 가지 이슈를 유대사회, 종교지도자들 앞에 내놓으셨습니다. 죄에 대하여 그리고 죄인에 대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성들 앞에 두 가지 교훈을 내놓으셨습니다. 병고침보다 죄 사함 받는 것이 더 근본문제인 것과 어떤 죄인이라도 예수님 앞에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에서 메시아의 일 두 가지를 알려주셨습니다. 메시아는 이 땅에서 죄 문제를 해결하며 메시아는 이 땅에서 죄인을 부르는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심으로써 종교지도자들과 본격적으로 갈등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이 교훈으로 인하여 유대사회에는 파격적인 임팩트가 강력하게 가해졌습니다.
UBF에 와서 사람과 관계를 잘 맺는 사람을 하나 보았습니다. 잘 웃고 친절하고 착한 모습을 보이고 성실한 사람인데, 특히 목자와 관계를 잘 맺습니다. 그런 그가 30년 지나 지금까지 아무런 열매가 없고 심지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는 저주 같은 원망을 듣습니다. 사람이 성실하게 자기 일을 하고 사람들과 사이가 좋으면 더할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그가 소홀히 한 것이 있어서입니다. 자신의 죄 문제입니다. 그가 나쁜 짓을 하고 고약한 행실을 가졌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 장래, 자기 행복을 자기 성실과 노력으로 개선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 열망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복을 주시는 하나님, 자기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일에는 소홀히 하였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지 않았으며, 하나님께 잘 드리는 것 같았지만, 결정적일 때 자기 일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믿음을 드리는 것, 하나님께 중심을 드리는 것은 하지 않았습니다. 인생 방향을 바꾸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것을 두고 회개하지 않았다 하는 것입니다. 그의 삶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삶은 아닌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다른 여러 문제에 대해서는 해법을 구하였으나, 자기 인생의 죄 문제, 인생의 중심과 방향은 심각하게 다루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 문제를 지적하는 것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중심과 방향의 문제를 해결해보지 않았으므로 당연히 다른 사람이 예수님께 나와서 무엇을 하도록 도와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죄인을 예수님의 제자로 돕는 일에서 열매 맺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회개가 무엇인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바도 없고 경험한 바도 없는 것입니다. 회개를 모르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모르니 회개한 자의 기쁨과 행복, 예수님을 따르는 인생의 은혜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에 주목하여야 합니다. 나 중심에서 예수님 중심으로 삶을 바꾸는 회개, 나 중심의 생활에서 예수님 중심의 생활로 변화하는 근본적인 회개가 매우 중요합니다.
또한,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도 올바른 메시야의 모습을 보이시자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대립하시고 결국에 가서는 유대사회 전체로부터 대립과 갈등을 겪으신 것을 배워야 합니다. 이익 중심으로 사는 세상에서 세상 풍조를 따라 살아야 튀지 않습니다. 가까운 사람들은 열심히 돈 중심으로 살고 이익 중심으로 사는 것을 잘 산다고 평가해 줍니다. 죄를 회개하여 자기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이 되고 이익과 소유와 욕심을 따르지 않고 예수님을 따를 때, 비난이 있고 가치관의 대립이 뒤따릅니다. 저의 아버지는 제가 군 제대하면서 앞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겠다고 하자, ‘집을 나가라’ 하셨습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콩을 심었는데, 팥이 나왔다’며 한탄하셨습니다. 우리는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 살면, 비난이 따른다는 것을 영접하여야 합니다. 예수님 믿고도 그릇된 행실, 나쁜 습관을 버리지 못하여 받는 비판은 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따라 살고 예수님 중심으로 사는 것에 대하여 비난하는 것은 잘 참고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길이고, 예수님 제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인기와 환호를 따라 섬기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환호하고 예수님께 몰려온다고 하여도 그것을 덮어 놓고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가진 그릇된 메시아관에 도전하시고 그릇된 메시아관을 고치고자 하셨습니다. 로마를 몰아내는 메시아가 아니라 죄와 사망을 몰아내는 메시아이심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 권세를 보여주셨습니다. 사람을 정죄하며 죄인을 고쳐서 쓸 수 없는 폐품으로 여기는 시대 풍조에 도전하셨으며, 세리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많은 죄인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이로 인하여 항의 받으셨고, 죄인들을 부르러 오셨다고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사람들이 비난할 때, 어떤 비난은 마음을 아주 아프게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니 예수님께서도 올바른 메시아로써 하시는 일을 나타내자 ‘신성모독이다’ ‘어찌하여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비난 받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참 진리를 따르는 가운데 겪어야 하는 아픔은 잘 감당하는 제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잘못된 메시아관에 도전하셨습니다. 메시아 예수님은 죄를 사하시는 메시아 이십니다. 메시야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우리가 다른 문제 보다도 죄 문제 해결을 중요하게 영접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 일생 주를 따르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죄를 사함 받은 자의 기쁨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풍성한 열매를 경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아산 U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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