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고시리즈.
마지막 때와 심판에 대한 경고,
성경본문 : 마 25:11-12
5) 문이 닫힌 후에 - 준비 없는 신앙이 맞이할 내가 너를 알지 못한다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그러나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마 25:11-12)
들어가며
열 처녀의 비유는 결혼식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모든 성도를 향한 준엄한 경고의 비유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볼 두 구절은, 그 비유의 가장 무서운 순간입니다.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이 부르짖음을 눈여겨보십시오.
미련한 다섯 처녀는 신랑을 몰랐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도 신랑을 기다렸고, 등을 들었고, "주여"라고 불렀습니다.
겉모습만 보면 슬기로운 처녀들과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이 닫힌 뒤, 그들이 들은 대답은 이것이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오늘 우리는 이 짧은 두 구절 앞에서 세 가지를 묻고자 합니다.
첫째, 이 처녀들의 진짜 차이는 무엇이었는가.
둘째, 왜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는가.
셋째,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1. 공통점 먼저 보기 — 열 처녀는 모두 잠들었다
본문을 오해하기 쉬운 지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슬기로운 자는 깨어 있었고 미련한 자는 잠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5절을 보십시오.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다'입니다.
슬기로운 다섯도, 미련한 다섯도 똑같이 졸았고 똑같이 잠들었습니다.
인간적 연약함 앞에서는 아무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사실을 말해 줍니다.
열 처녀를 가른 결정적 차이는 '얼마나 깨어 있었는가'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 중에 졸고, 넘어지고, 게을러질 때가 있습니다.
그것 자체가 우리를 미련한 처녀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다른 데 있었습니다.
4절이 그 차이를 정확히 짚습니다.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차이는 단 하나, 기름의 준비 여부였습니다.
겉모습이 아니라, 등불 안에 참으로 무엇을 담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2. 기름이란 무엇인가 — 스스로 준비할 수 없는 것
그렇다면 이 '기름'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이 비유를 "부지런히 준비하고 의지를 다지면 구원받는다"는 식의,
인간의 노력과 결단을 강조하는 이야기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가 증언하는 기름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기름은 거듭남을 주시는 성령님, 그리고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심겨진 참된 믿음과 생명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사람이 스스로 짜내거나 제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름은 오직 위로부터, 하나님의 은혜로만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반드시 물어야 합니다.
그 기름은 누가 공급하십니까.
미련한 처녀들의 진짜 비극은 등이 꺼진 것 자체가 아니라, 기름의 참된 근원이신 분을 붙들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이 비유의 신랑은 다른 분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심판하러 오시는 신랑이실 뿐 아니라, 십자가에서 자기 백성을 위해 성령의 기름을 값 주고 사신 신랑이십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부어진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결과였습니다.
우리가 오늘 성령의 기름을 조금이라도 소유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준비성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준비는 "내가 얼마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가"를 스스로 점검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준비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붙들어, 그분과 연합되어 그분이 주시는 성령을 이미 모시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미련한 처녀들에게 없었던 것은 노력이 아니라, 신랑 되신 그리스도와의 살아 있는 연합이었습니다.
3. 닫힌 문 — 되돌릴 수 없는 순간
"문은 닫힌지라"(10절).
그리고 뒤늦게 온 처녀들에게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습니다.
이 '닫혔다'는 표현은 원어로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누가 닫았습니까. 사람이 닫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닫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7장, 노아의 방주 문이 여호와의 손으로 닫혔던 그 장면과 같은 구조입니다.
방주의 문이 닫힌 후에는 아무리 방주 밖에서 물이 차오르는 것을 보며 후회하고 문을 두드려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은혜의 문이 열려 있는 동안 들어온 자만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지금, 오늘, 이 순간은 아직 문이 열려 있는 '은혜의 날'입니다.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열린 구원의 문은 지금도 활짝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재림과 함께 이 문은 영원히 닫힙니다.
그날 이후에는 아무리 "주여 주여" 부르짖어도 되돌릴 방법이 없습니다.
4. "내가 너를 알지 못하노라" — 인격적 관계의 부재
문이 닫힌 뒤 들려온 대답은 더욱 무섭습니다.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여기서 '안다'는 말은 단순한 지식적 인지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누군가를 '아신다'는 표현은 언약적이고 인격적인 친밀한 관계를 가리킵니다.
창세기 18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아셨다고 하실 때,
아모스 3장에서 이스라엘만을 아셨다고 하실 때,
그것은 정보의 소유가 아니라 언약 관계 안에서의 친밀한 사귐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신랑의 대답은 이런 뜻입니다.
"나는 너희와 인격적으로, 언약적으로 사귀어 본 적이 없다."
미련한 처녀들은 신랑의 이름을 알고, 신랑을 기다렸고, 신랑을 향해 소리쳤지만,
정작 신랑과의 살아 있는 사귐,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없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겉모습과 형식은 있었으나, 실제로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맺어진 관계가 없는 신앙이었습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7장 23절과 정확히 같은 울림입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종교적 열심과 활동이 아무리 많아도,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연합이 없다면 그날에 이 음성을 듣게 됩니다.
5. 복음으로 — 닫힌 문과 열린 문 사이에서
여기서 멈추면 이 말씀은 우리에게 두려움만 남깁니다.
그러나 복음은 더 깊은 곳을 가리킵니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문밖으로 내쫓기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그분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으시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부르짖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문밖의 어둠, 하나님께 버림받은 그 자리를 대신 짊어지셨기에, 우리를 위한 문이 열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준비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의 의로움을 쌓는 일이 아닙니다.
참된 준비는 문밖에 내쫓기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붙들고, 그분과 연합하여 그분이 주시는 성령의 기름을 이미 받은 자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등불이 흔들리고 우리가 연약하여 졸 때에도,
우리 안에 참으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생명이 있다면, 그 생명은 결코 꺼지지 않습니다.
나가며 — 오늘, 아직 문이 열려 있을 때
문이 닫힌 후에는 늦습니다.
"주여 주여"라는 부르짖음도, 뒤늦은 후회도 그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지금 이 순간, 문은 아직 열려 있습니다.
이 은혜의 날에 우리가 할 일은 단 하나입니다.
문밖으로 쫓겨나심으로 우리에게 문을 열어 주신 신랑, 그리스도를 오늘 다시 믿음으로 붙드는 것입니다.
그분과의 인격적이고 살아 있는 연합 안에 거하는 것, 그것이 바로 참된 기름을 예비한 슬기로운 자의 삶입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문이 닫히기 전, 오늘 그리스도께 나아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