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간.4] 포덕163년(2022) 857호
문화마당
“산 꼭대기 가도 살 사람”, 시집을 내다
《거북이 마침내 하늘을 날다》
지은이: 김성순
출판사: 시와 에세이
김천의 포도농사꾼이자 천도교인 항보恒步 김성순 선생이 첫 시집을 내셨다. 올해 만 93세. 항보 선생은 1929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다. 1960년 김천 직지천 하천부지에 포도 농사를 시작한 포도농사의 선구자다. 현재 대한민국 포도생산 1위가 김천시인 것은 항보 선생의 공이 크다.
지은이가 처음부터 농사꾼이 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교사였던 부친의 뒤를 이어 교사로서 순탄한 삶을 살아가려 했지만, 시대의 거센 풍파는 그의 행로를 교사에서 농사꾼으로 바꾸어 놓았다.
대구사범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20세의 청년 김성순은 1949년 김구 선생의 노선에 따라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통일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내용의 삐라를 돌리다가 검거되었다. 6.25를 대구형무소 미결감에서 맞이하였고, 미결수였기 때문에 요행히 목숨을 건진 그는 한약방을 하던 할아버지가 재산을 털어 구명운동을 한 결과 가까스로 생존, 1951년 출감하였다.
대구사범 은사의 주선으로 공군 기술하사관으로 근무하던 그는 얼마 후 특무대의 신원조회에서 국보법 전과자라는 사실이 드러나 불명예제대를 당한다. 그러다가 다시 육군에 징집되어 포항을 거쳐 제주도의 모슬포 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친 다음 전방에 배치되어 4년 3개월을 복무하고 1958년 제대한다.
20대의 청춘을 감옥과 군대에서 보낸 서른 살의 노총각은 뒤늦게 결혼하였으나 전과자라는 낙인 때문에 변변한 직장을 얻을 수 없었다. 고심 끝에 그는 부인을 설득하여 낯선 타향인 김천의 개천 가에 포도 묘목을 심기 시작한다. 이를 노래한 항보 선생의 시는 눈물겹다.
“무인도에 표류한 크루소처럼/ 한 5년 농사지어 봅시다”/ 입덧이 대단한 아내를 밤새 설득하여/ 결혼반지 팔아 리어카 사서/ 똥장군을 끌면서 나의 영농생활은 시작되었다/ 하천부지 모래땅 겨우내 구덩이 파서/ ‘켐벨’ 포도 묘목 400여 주 심은 것은/ 1960년 3월 12일, 하루 종일/ 몹시도 바람 불던 봄날이었다/ 닷새만 가물어도 시드는 땅/ 물지게로 수없이 냇물을 져나르고/ 별빛 아직도 차가운 이른 새벽/ 4킬로 시내까지 인분을 퍼날랐다/ 처음으로 똥통을 끌고 나서던 날/ 모든 사람이 쳐다보며 비웃는 듯/ 슬프고 부끄럽고…/ 죄인인 양 땅만 보고 걸었다/ 2년생 어린나무에 7~8송이/ 탐스런 검은 포도 익어갈 때/ 기쁘고 대견하고/ 그 모든 괴로움도 잊었다/ 4년생 수입이 쌀로 치면 100가마 될 때/ 마을 사람 하는 말 ‘산꼭대기 가도 살 사람’ ― ‘고난의 민족사 속에 걸어온 길. 백범 김구 선생을 생각하며’ 부분
항보 선생은 책을 통해 일본의 포도 재배 기술을 배우고 익혀 1970년에는 직지사 입구의 덕천리로 이사하여 덕천포도원을 세웠다. 포도 농사를 지으면서 유달영 선생과 함석헌 선생을 사숙하며 《씨ᄋᆞᆯ의 소리》를 열심히 읽고 농민운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선 항보 선생은 대부분의 농민들이 동토凍土 속의 개구리처럼 몸을 움츠리고 있던 유신시대에도 저항운동을 계속했다.
1976년 크리스천 아카데미 농촌9기를 수료하고, 가톨릭농민회에 참여 함평고구마사건, 오원춘사건 등 농민운동에 가담하였다. 1980년 한국포도회 창립, 한살림운동, 정농회에도 관여하였고,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시 김천지국장을 맡기도 하였다.
2005년 도법 스님과 만남 이후 지금까지 생명평화운동을 함께하고 있다. 2007년부터 동학을 만나 2010년 12월 용담수도원에서 천도교에 입교하였다. 일본의 사학자 나카즈카 아키라(中塚明)와 교류하며 동학기행을 함께 했다. 번역서로 《일본의 조선침략사연구의 선구자 야마베 겐타로와 현대》가 있다. 지금도 틈틈이 농사를 도우며, 밤늦게까지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