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생활 개선을 위한 '햄버거 식당'
"햄버거란 고기로 앙꼬 넣은 빵조각"
한때 '식생활 개선용 영양식' 취급
1973년 3월 서울시가 시민의 식생활 개선을 위해 백화점·수영장 등 사람 많은 곳마다 새로운 식당을 운영토록 한다고 발표했다. 다름 아닌 '햄버거 식당'이었다. 식생활 개선을 위해 햄버거라니? 고개가 갸우뚱해질지 모르지만 1970년대라면 사정은 달랐다. 당시 국민 하루 평균 섭취 열량은 2105㎉로, 권장량(2400㎉)에 한참 못 미쳤다. 1인당 한 해 쇠고기 섭취량은 겨우 1.17kg. 오늘날 국민 평균 섭취량(10.8 kg)의 10분의 1 정도였다. 부실한 반찬에 밥 한 그릇 먹는 것보다 햄버거 쪽이 낫다고 여길 만했다. 서양 음식에 대한 막연한 환상도 햄버거를 영양식으로 평가하게 하는 데 한몫했다.
1975년 일간지 1면에 크게 실린 국산 햄버거 광고. 햄버거가‘ 동물성 단백질, 비타민 등 영양가가 풍부’하다며
‘식생활 개선’을 위해 먹자고 권하고 있다(경향신문 1975년 5월 20일자).
1970년대에 대중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햄버거는 처음엔 모두 국내 제품이었다. 혼·분식 정책을 거국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던 제3공화국 정부는 햄버거 보급에 힘을 실었다. 영양학 교수마다 집집마다 새로운 식생활을 하자며 햄버거 만들어 먹는 법을 소개했다. 1979년 '세계아동의 해'를 맞아 한국 식생활개발연구회가 내놓은 '어린이 영양식' 6가지 중 첫째도 햄버거였다. 1975년 어느 국산 햄버거 광고의 카피는 '지금은 식생활을 개선할 때'였다. 햄버거의 특징으로 간편하다는 점보다 '동물성 단백질, 비타민 등 영양이 풍부하다'는 점을 먼저 내세워 광고했다.
이 무렵 햄버거가 영양가 높고 간편한 대용 식품이란 평가를 받은 건 분명했다. 하지만 한국인 대다수의 입맛까지 사로잡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1986년 조사 결과 패스트 푸드점 고객이 선호하는 메뉴 1위는 아이스크림이었고, 프라이드 치킨, 김밥이 2, 3위를 차지했다. 햄버거의 인기 순위는 떡볶이, 군만두보다 뒤진 6위에 그쳤다. 1988년 서울 시내 중·고생 1228명 상대의 조사에서도 햄버거는 식사용(17.8%)보다는 간식용(82%)으로 소비되고 있었다. 따끈한 국물 곁들여 쌀밥 한 그릇 먹어야 제대로 식사한 것으로 여기던 우리에게 햄버거란 한 끼 식사라기보다는 '괴기(고기)로 앙꼬 넣은 빵 쪼가리'(1986년 박범신 소설 '불의 나라')로 여겨진 듯했다.
이 땅에서 외국 브랜드 햄버거의 본격적 전쟁이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전개된 것도 우리 식성과 무관하지 않다. 리바이스 청바지, 코카콜라와 함께 3대 미국 상품으로 꼽힌 맥도널드 햄버거는 미국 메이저 햄버거 중 가장 늦게 1988년 3월 국내 상륙했다. 시장 진출 움직임을 시작한 때로부터 서울에 1호점을 열 때까지 5년이나 걸렸다. 한국인 입맛에 대한 염려 때문에 망설인 것이다. 1960년대 후반 맥도널드가 한국 시장 조사를 벌인 뒤 '진출 보류' 결론을 내리게 된 첫째 이유는 "한국인들은 물기 없이 못 먹는 식성을 가져서 건성인 햄버거와 맞지 않는다"는 점이었다고 알려져 있다(조선일보 1988년 4월 10일자). 미국 최대 햄버거는 한국인 입맛이 바뀔 때까지 20년을 기다린 셈이다.
그렇게 신중하게 진입했던 외국 햄버거 프랜차이즈들은 국내 시장을 휩쓸고 있다. 지난 7월 22일 국내 상륙한 뉴욕 수제 햄버거 '쉐이크쉑' 매장엔 폭염 속에서도 매일 수백명이 2시간씩 줄을 선다. 40년 전엔 맛보다 영양 생각해서 먹자던 햄버거가 이젠 정크 푸드라는 손가락질도 아랑곳없이 '맛있어서 찾는 음식'이 됐다. 우리 입맛의 변화가 초래한 햄버거 지위의 반전이라고나 할까.
Tip.... 정크푸드란?
정크는 쓰레기·넝마를 의미하며 불필요한 것에 대한 총칭이다. 따라서 정크 푸드란 고칼로리에 영양가가 없는 식품을 뜻하며, 햄버거·피자 같은 즉석식품이 이에 속한다. 속어로 정크 푸드는 헤로인(heroin)과 같은 마약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잡동사니 식품을 과다 섭취하여 생긴 비만이나 각기병, 영양실조와 같은 질병을 가리켜 정크 푸드 증후군이라고 한다.